델리의 자이나교 조류 병원은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돌봄과 비폭력에 대한 자이나교의 진심을 보여줍니다. 2,500년이 넘는 자이나교 전통은 마하비라(Mahavira, ‘위대한 영웅’)에서 시작하는데, 마하비라는 승리자를 의미하는 “지나”라는 존칭을 얻었습니다.
델리 구도심에서 제일 번잡한 지역의 레드 포트(Red Fort)로부터 교통이 꽉 막힌 길 건너편에는 자이나 조류 병원이 있습니다. 병원에 있는 대다수의 환자들은 그 지역에 무수히 많은 비둘기들로, 다리나 날개가 부러져 병원으로 왔습니다. 이 병원에는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새들을 위한 특별 병동들도 있고 1층과 2층에는 평범한 폐쇄 병동들이 있습니다. 3층은 천정이 없이 하늘로 열려있는데, 새들이 회복을 하고 나면 날아가 버립니다. 이 병원은 모든 생명에 대한 윤리적 입장으로서 비폭력을 강조하는 자이나교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동물보호센터나 죽어가는 가축들을 위한 호스피스도 후원합니다. 물론, 자이나교에서 사람들을 위해 지은 병원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자이나교도의 수는 인도 9억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지만 자이나교는 오래되고 영향력있는 전통이며 인도 문명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비폭력을 강조하는 자이나교는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한다스 간디는 비스누 숭배(Vaishnava) 힌두교도로 인도 서부의 구자랃(Gujarat) 주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자이나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고 일찍부터 자이나와 힌두 간의 교류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인도 바깥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자이나교 공동체들은 그들의 존재감을 계속 증가시켜 왔습니다. 케냐와 네덜란드에는 자이나교 사업가들이 있고, 휴스턴과 신시내티에는 자이나교 기술자들과 컴퓨터 분석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자이나교는 미국의 종교들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이나교는 2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자이나교의 가장 최근 영적 선구자인 마하비라(Mahavira)의 삶에서 시작합니다. 아주 긴 스승들의 계보를 가지고 있는 자이나교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인간의 기록된 역사보다도 더 오래전에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원과 신도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현재의 형태는 마하비라가 생존했던 당시에 만들어졌습니다. 마하비라는 그보다 앞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나(Jina, “승리자”)라는 존칭으로 불렸는데, “지나”는 무지를 정복하고 영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빛나며 완벽한 영혼을 깨달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나들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이나”(Jain)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하비라는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났습니다. 호화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서른살에 고행자가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나 42세에 이 세상에서 홀로 최고의 깨달음인 케발라즈냐나를 얻었습니다. 그 후 활발한 가르침을 펼친 마하비라는 “목샤”(해방)라 불리는 상태를 얻어 72세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599년에 인도 북부의 도시 바이샬리(Vaishali)에서 태어났고 바르다마나(Vardhamana, “번영을 키우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하얀 코끼리, 락쉬미 여신, 보름달, 떠오르는 태양, 연꽃 연못, 활활 타는 불과 같이 영적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꿈들을 꾸고 환영들을 보았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마하비라는 즐거움과 사치에 익숙한 생활을 하며 자라기는 했지만, 서른 살에 영적 정화와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물질적 소유와 가족이 있는 삶을 버리고 고행자가 되었고, 그 후 12년 동안 명상에만 전념했습니다. 제일 오래된 자이나교 경전인 『아차랑가 쑤트라(Acharanga Sutra)』의 한 구절에는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못되게 대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몸의 움직임이 없이 명상에 들어 앉아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의 살을 자르고, 그의 머리카락을 뜯어내고 그에게 흙을 뿌렸다. 그들은 그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떨어뜨리며 그의 명상 자세를 흩트렸다. 자신의 몸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경받는 그 분은 자신을 겸허히 낮추고 고통을 견뎠다. 전장에서 맨 앞에 선 영웅이 적에게 둘러싸이듯이, 마하비라도 그곳에서 그러했다. 동요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며 존경받는 그 분은 해방의 길을 따라 나아갔다.”
42살이 되었을 때, 마하비라는 남아있는 가티(ghati), 즉, 지나간 행위들의 잔여물이며 영혼 자체의 속성을 가리는 카르마(karma)들을 모두 태워 없애버렸습니다. 그는 “케발라즈냐나”(kevalajnana) 또는 “카이발랴”(kaivalya)라 불리는 무한한 깨달음의 상태를 얻었습니다. 그 후 30년 동안, 그가 죽기 전까지 그는 이 자아인식의 빛나는 지혜를 근거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카르마가 영혼을 무지와 고통 안에 묶어 둔다는 것을, 그리고 카르마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불살생, 즉 아힘사(ahimsa)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72세인 기원전 527년에에 육신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마하비라가 얻었다고 말해지는 윤회로부터의 해방은 “목샤”(moksha) 또는 “니르바나”(nirvana)라 불립니다.
마하비라는 인류에게 자이나교의 진리를 밝혀 준 종교적 선구자들, 24명의 티르탕카라 (여울을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명입니다. 마하비라는 이들 중 스물네 번째 티르탕카라로, 우리가 사는 시대의 마지막 티르카라입니다.
마하비라는 현세의 삶이라는 끝없는 물결을 건널 수 있게 여울을 만든 영적 선구자, 티르탕카라(Tirthankara, “여울을 만드는 사람”)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자나 창조의 순간에 대한 개념들을 믿지 않습니다. 자이나교의 관점에서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시간은 상승과 하강의 영원한 순환인데, 이것은 자이나교도들에게 우주를 구성하는 여섯 형이상학적 원칙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시대는 하강하고 있는 주기로, 물질주의와 무지에 심각하게 덮여 있어서 빛나는 자아인식을 얻는 것이 매우 힘든 때입니다.
시간이 순환하는 각각의 주기마다 24명의 티르탕카라들이 있는데, 이들은 나머지 인류를 위해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티르탕카라들의 영혼이 여타의 모든 영혼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해방시켜 지나(Jina, “승리자”)가 된 티르탕카라들은 스승이 되어 자신의 앎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첫 번째 티르탕카라는 아디나트(Adinath)인데, “리샤바 데바”(Rishabha Deva)라고도 불립니다. 스물세 번째 띠르탕까라는 파르쉬바나트(Parshvanath)으로 기원전 1000년경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물네 번째이자 현재 주기의 띠르탕까라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마하비라로 붓다와 대략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었던 인물입니다. 티르탕카라들은 각각이 살았던 시대에 영원한 진리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같은 인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24명의 티르탕카라 상(像)들은 대부분의 자이나교 사원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첫 번째 티르탕카라와 현재와 제일 가까운 마지막 두 티르탕카라들이 가장 존숭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형상들은 각기 다른 동물들과 자연의 요소를 나타내는 상징들에 의해 구분됩니다. 사람들은 힌두교 사원에서 그러한 것처럼 꽃, 물, 향과 같은 공양물들을 영적 개척자들의 형상에 바치며 그들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자이나교 사원에서 하는 경배의 행동들은 상징적인 것이지 경배에 대한 주고받는 대가로 무엇을 기대하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띠르탕까라들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하거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우주의 창조주라는 의미로의 신이 아닙니다. 오직 개인만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띠르탕까라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영혼(지바)을 가지고 있으며, 각 영혼은 거의 끝이 없는 환생의 순환에 갇혀있다고 가르칩니다. 자이나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이 환생의 순환에서 해방시켜 해방(목샤)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티르탕카라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인간에서부터 풀잎까지, 영혼, 즉 ‘지바’(jiva, 문자 그대로 “생명” 또는 “생명력”)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에는 “성스러움”이 있지만, 이것은 만물에 침투되어 있는 단일한 영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개별적이고 소중한 영혼들이 무한히 많이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각각의 영혼, 즉 각 지바는 생명의 진행되는 생명의 순환에 갇혀서, 마치 어제 입던 옷을 버리는 것처럼, 몸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벗어 던집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이 자신의 진실되고 완벽한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환생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해방된 영혼은 “싯다”(siddha)라 불리며,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초월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순수한 에너지의 상태로 “목샤”(moksha), 즉 “자유”에 머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만약 자이나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다면, 그것은 완벽한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싯다가 세계에 대해 관계 맺는 방식은 능동적 지도자나 의사결정자의 관계가 아니라 빛나는 에너지의 끝없는 원천으로서입니다. 개별 영혼이 제일 순수한 형태로 있는 것이 싯다이므로, 자이나교의 실천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자이나교들에게 있어서 모든 존재들은 지바, 즉 영혼에 의해 생명을 얻습니다. 현대의 자이나교 스승인 구루뎁 치트라바누(Gurudev Chitrabhanu)는 “우주는 인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주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한 진화의 장이다. 생명은 성스러운 것으로 이는 카스트나 피부색, 종교, 국적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개미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의 생명체에 똑같이 적용이 된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흙, 물, 불, 공기, 나무들 같은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들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단 한 가지의 감각, 즉 촉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벌레들은 두 가지 감각(촉각과 미각)을 가지고 있고, 개미는 세 가지(촉각, 미각, 후각), 꿀벌은 네 가지(촉각, 미각, 후각, 시각)을, 그리고 동물과 인간은 다섯 가지의 감각(촉각, 미각, 후각, 시각, 청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카르마”(karma)는 기본적으로 “행위”를 뜻하지만, 자이나교에서 까르마는 영혼의 순수성을 덮는 물리적 물질을 의미합니다. 자유로 가는 길은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지 않고 전생에서 쌓은 카르마를 불태워 없애기 위한 실천을 요구합니다.
“카르마”는 문자 그대로 “행위”와 그리고 “행위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자이나교의 관점에서는 생각, 말, 행동의 행위들은 영혼에 카르마로 기록되고 카르마는 빛을 발하는 영혼에 물리적 얼룩을 남기는 물질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쌓인 카르마의 유입은 빛을 발하는 영혼을 덮고 색을 바래게 하기 시작합니다. 각 개인이 만든 카르마가 두꺼워지고 어두워지면 영혼의 순수성과 영혼이 가진 앎의 힘과 통찰(vision)과 환희는 흐려지게 됩니다.
자유로 가는 길은 새로운 카르마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여러 생에 걸쳐 쌓인 카르마를 없애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든 카르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상, 자기성찰, 그리고 서약에 대한 엄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많은 생에 걸쳐 행해져야 할 수도 있지만, 출가자가 된 사람들은 아주 엄격하게 종교적 규율을 지킴으로써 이 과정을 빠르게 진전시킬 수 있습니다. 아힘사(ahimsa), 즉 해치지 않음을 지키는 출가자의 삶은 새로운 카르마가 유입되는 것을 막을 것이고, 아마도 이미 유입된 카르마들을 닦아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영혼을 덮는 것에는 나쁜 행위뿐만 아니라 애착을 가지고 행한 선한 행위들의 결과들도 해당됩니다. 궁극의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 모두 다 고갈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들(인간, 동물, 식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자이나 전통의 핵심은 아힘사(비폭력)에 있습니다. “아힘사”는 자이나교도들의 실천과 행동과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이나교도들은 채식을 하고, 자이나교 출가자들과 여성 출가자들은 벌레를 밟거나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자이나교의 윤리적 실천과 행동에 아주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아힘사”(ahimsa), 즉 말 그대로 “불살생”의 윤리가 자이나교 전통과 결부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이 엄격한 채식주의자이며, 심지어 그들은 감자와 같이 식물의 열매가 아니라 온전한 유기체인 채소들을 먹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합니다.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종종 다양한 형태의 총채를 들고 다니며 그들이 앉거나 걸어갈때 부주의하게 아주 작은 벌레들을 죽이지 않도록 신경씁니다. 몇몇은 심지어 흰색 천으로 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 이는 숨을 쉴 때 아주 작은 생명체들을 흡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전통적으로 농사와 같이 자신도 모르게 생명체를 죽일 수도 있는 직업들을 기피해 왔습니다.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대한 경외는 인간이 다른 창조물들과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을 공유한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대 자이나교 경전인 『웃타라댜야나』(Uttaradhyayana)에는 한 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자는 궁전의 창문에서 고행자를 보고 갑자기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되었고, 세속적인 재산을 버리고 해방을 찾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영양이었을 때,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가죽이 벗겨지고 잡히고 묶이고 덫에 걸려들었고, 그리고 자주 죽임을 당했다.
내가 물고기였을 때,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낚시바늘과 통발에 걸려 잡혔다. 거기에서 나는 무수히 많이 비늘이 긁혀지고 길게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내가 새였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이 매들에 의해 잡히고 그물에 걸려들고 끈끈이 덫에 잡히고 죽임을 당했다.
내가 나무였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이 쓰러뜨려지고 잘려지고 톱질해서 판자로 만들어지고 목수들의 도끼와 칼로 껍질이 벗겨졌다.
내가 쇠였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이 망치로 맞고 잘려지고 대장장이들에 의해 쪼개지고 갈려졌다....”
자이나교도들은 좋은 삶의 기준이 되어야하는 “세 개의 보석”을 이야기합니다. 올바른 관점, 올바른 인식, 올바른 행동이 그것입니다. 올바른 행동은 보통 불살생, 참됨, 훔치지 않기, 정조, 집착하지 않기라는 다섯 개의 기본 서약을 통해 표현됩니다.
자이나교 전통은 최상의 염원을 담은 “세 개의 보석”을 말합니다. 세 개의 보석이란 올바른 믿음 또는 올바른 관점을 의미하는 쌈약 다르샤나(Samyak Darshana), 올바른 인식 또는 이해를 의미하는 삼약 즈냐나(Samyak Jnana), 그리고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삼약 차리트라(Samyak Charitra)가 그것이다. 어떻게 믿음과 지식과 행위가 일상 생활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자이나교도들은 다섯 가지 기본 서약을 맺음으로서 비로소 자이나교도가 됩니다. 다섯 가지 서약이란 아힘사(ahimsa), 불살생; 사띠야(satya), 참됨; 아스테야(asteya), 누군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라면 취하지 않기; 브라흐마차리야(brahmacharya), 정조;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집착하지 않기 혹은 무소유를 말합니다. 이 서약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삼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즉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생각, 행동, 말에; 어떤 일을 직접 행하거나, 남에게 시키거나, 혹은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한 번의 충동적인 행동보다 훨씬 나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다섯 개의 서약은 자이나교 출가자의 “위대한 서약”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의 도덕적 삶의 근간을 이룹니다.
아힘사를 실천하는 것은 우주에 폭력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최소화하는 일입니다. 자이나교도들에게 이 원칙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채식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 신도들에게는 식물처럼 한 개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에 해를 가하는 것이 허락되어있는 반면, 출가자들은 식생활에서 이것조차도 피하려도 노력합니다.
사티야, 즉 진실을 실천한다는 것은 말의 중요성을 인정해서 말이 중대한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행할 수 있는 하나의 “행동”이라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아스테야, 즉 훔치지 않기 역시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는데, 상대방이 기꺼이 내주는 것이 아니면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자이나교도들에게 이 서약은 부자와 빈자 간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브라흐마차리야, 즉 정조는 자유를 추구하는 영혼이 즐거움을 찾는 일 때문에 끊임없이 산만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인식과 연관된 것입니다. 일반 신도들에게 이것은 결혼관계에 충실하고 절제하는 것을, 출가자에게는 완전한 금욕을 의미합니다.
아파리그라하는 무엇인가를 갖겠다고 엉겨붙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대상들이나 심지어 사람에 대하여도 집착하는 일은 영혼을 다시 태어나고 또 죽는 순환고리에 묶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갖지 않기/무소유의 원칙입니다. 디감바라(Digambara), “하늘을 입은” 출가자들은 모든 것을, 심지어는 옷조차도 버립니다. 자이나교 재가 신도들도 소유하려는 의지가 인간을 탐욕, 질투, 이기심, 폭력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잘못 여겨지는 소유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균형잡히고 지속적인 것이어야 하며, 삶을 과도함의 연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불안정한 힘이 아닙니다. 이 도덕적 실천들을 함께 행하는 것은 영혼이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동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인도의 여러 고전에는 자이나교도들과 불교도들, 힌두교도들이 실재(reality)의 본성에 벌였던 뜨거운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이나교는 “아네칸타바다”(하나의 관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 불리는 폭넓은 관점을 주장하며 철학적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다양한 관점들이 지니는 장점들을 인정했습니다.
실재(reality)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논쟁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인도의 현자들과 철학자들은 다양한 형이상학적 관점들을 주장했고 서로서로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자이나교도들도 이 논쟁에 능동적인 참여자였는데, 그들의 중심적 교리에는 “아네칸타바다”(anekantavada)로 지칭되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이 관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관점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이나교는 다양한 전통의 참가자들이 논쟁에서 내세우는 논변들에 모두 어느 정도의 유효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이나교의 입장은 다른 관점들 간의 명백한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하나의 진실, 사티야(satya)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것이 됩니다.
자이나교는 불교를 “단멸론”(nihilism)으로, 힌두교를 “영속론”(eternalism)으로 간주하고 모두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불완전한 것으로 봅니다. 그 대신에 자이나교는 영혼의 영속성과 내재적인 순결성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영혼이 카르마와 연결되면서 이에 따라 고통이 일어나는 현실 둘 다를 주장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 자이나교도들은 전통적인 서구 논리학을 특징짓는 절대적인 “...이거나 아니면 ...”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모든 질문에는 각기 다른 접근법에서 하나의 진실, 사티야를 각기 다른 정도로 반영하는 “여러 개의 참된 답” 이 있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합니다.
자이나교에서 전해지는 장님과 코끼리의 설화는 아네깐따바다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줍니다. 다섯 명의 맹인은 코끼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로 코끼리가 들어오자, 그 다섯 명은 다가가서 코끼리를 만지고 그것을 묘사했습니다. 코끼리의 코 옆에 서있던 한 명은 코끼리가 두꺼운 나뭇가지라고 묘사했습니다. 꼬리를 만진 사람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밧줄같다고 말했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사실은 커다란 벽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기둥 같다고 말했고, 귀를 잡아본 사람은 커다란 부채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섯 번째의 현명한 사람이 그 논쟁을 중재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모든 사람이 맞지만 오직 부분적으로만 맞다고 단언했습니다. 코끼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다양한 부분적 판단들을 결합하는 데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들을 고려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자이나교도들에게 강한 신념, 특히 불살생이나 채식주의같은 윤리적 기본 규율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 반면에, 철학적 교조주의에 대한 저항도 있습니다. 서구에 사는 많은 자이나교도들은 아네칸타바다 방식의 접근법이 종교적 관용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관점들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그러니까 아마도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 미국 자이나교도는 “만약에 자이나교도가 이슬람교도와 앉아있다면, 진실되게 이슬람교도의 신앙을 경청하고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그의 의무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관점의 상대성을 인정함으로써 자이나교는 아주 개인화된 종교가 되었습니다. 중심이 되는 신조나 교리 체계는 없습니다. 마치 여러 강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아주 많습니다. 교리에 중심을 둔 종교들과는 달리 자이나교는 삶에 대한 답들 보다는 질문들을 더 강조합니다. 자이나교 전통은 특정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그보다는 영혼이 해방으로 가는 자신의 길을 찾을 때 필요한 윤리적 틀을 제공합니다.
자이나교 출가 교단의 주요 두 분파는 기원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디감바라(Digambara, “하늘을 입은” 공의파) 출가자들은 모든 것을, 심지어 옷도 포기합니다. 쉬베탐바라(Shvetambara, “흰옷을 입은” 백의파) 전통의 출가자들 역시 모든 것을 버리지만, 이들은 흰색 천 두 조각을 걸칩니다. 이 두 전통은 각각 고유의 경전들과 전통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부터 현재까지 자이나교 사두(sadhu)와 사드비(sadhvi), 즉 남성 출가자와 여성 출가자들은 고행주의와 놓아버림(renunciation)의 길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들은 “무니”(muni)라 불리기도 하는데, “침묵하는” 성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들 중 몇몇은 “우파댜야” (upadhyaya)라 불리는 스승들이며, 몇몇은 “아차리야”(acharya)라 불리는 소단위 집단의 수장입니다. 이들은 띠르탕까라들이 성취한 빛나는 자아인식(luminous self-realization)의 이상을 나타내며, 그 이상을 향하여 노력합니다. 딕샤(diksha, 출가 생활에의 입문)를 할 때, 자이나교 남성과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뽑고, 소유물을 나누어 주고 가족을 포함한 세상의 존재들을 버리고 떠나 자아성찰과 봉사와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수행자의 삶을 시작하니다.
자이나교 출가 전통(monaticism)에서 중요한 두 개의 오래된 분파는 기원전 4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몇 세기 후에는 두 분파가 완전히 나누어졌습니다. 더 보수적인 디감바라(Digambara) “하늘을 입은” 전통은 옷조차도 입지 않는데, 그들은 오직 주어진 자연 환경, 즉 네 개의 방향만을 옷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쉬베탐바라(Shvetambara) “흰옷을 입은” 출가자들은 흰색 천 두 조각을 걸칩니다. 디감바라 출가자들은 마하비라(Mahavira)가 위대한 금욕적 생활을 하던 당시에 옷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들을 버렸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쉬베탐바라 출가자들은 마하비라에게 흰색 천으로 된 신들의 옷이 주어졌고 그는 그 옷이 가시덤불에 걸려 땅으로 떨어질 때까지 입었지만 다시 주워서 입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부파는 또한 서로 다른 마하비라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각기 고유한 전승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성이 해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릅니다. 쉬베탐바라 전통은 19번째 티르탕카라인 말리(Malli)가 여성이었으며 여성도 완전한 깨달음(enlightment)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디감바라 전통은 여성은 먼저 남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부파에는 여러 하위 분파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쉬베탐바라 부파에는 지나의 무르티(murti, 신의 이미지) 앞에서 푸자(puja)를 행하는 무르티푸자크(Murtipujak)파가 있고, 무르티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실은 무르티의 사용을 거부하는 스타낙바시(Sthanakvasi)와 테라판트(Terapanth)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이나교에 많은 수의 하위 분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자이나교 전통 내에서의 교리적 통일성은 상당히 강합니다.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음식과 생필품을 신도들에게 의탁합니다.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도보로 걸으면서 유행하며 신도들에게 자이나교의 전통과 경전을 가르칩니다. 출가자의 삶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이지만, 우기에는 한 장소에서 넉 달을 지냅니다.
자이나교 탁발승들은 출가자가 되기 위해 매우 엄숙한 다섯 개의 서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거처가 없고, 음식을 만들지 않고, 돈을 지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출가자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다니며, 가르침을 전하고 공부를 하며 그들이 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시하는 음식만을 받습니다. 남성 출가자(sadhus)들과 여성 출가자(sadhvis)들은 재가자들에게 크게 의존하지만, 재가자들에게 있어 출가자들은 마하비라 및 여타 티르탕카라들이 얻은 깨달음(self-realization)이라는 이상의 살아있는 모습들입니다. 누군가는 출가자들이 신도들에게 음식을 구걸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자이나교 신도들은 거꾸로 자신들이 출가자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받는 영광을 베풀라 부탁할 것입니다.
고행자인 출가 승려들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소유물을 모으지도 않고, 한 장소에는 단 몇 일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전통적으로 계속 이동하는, 유행하면서 가르치는 삶입니다. 그들은 맨발로 걷는데, 탈것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주 많은 작은 생명체들에게 훨씬 더 큰 해를 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도의 우기 몇 달 동안에는 강물이 불어나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게다가 비가 오면 나타나는 수많은 생명체들에게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걷는 사람에게 밟혀서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이 훨씬 크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우기가 계속되는 넉 달 동안에는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한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출가자들은 전통을 가르치는 스승들이어서 자이나교 신도들이 경전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우기는 가르침을 펴는 데에 특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자이나교 성직자(sadhu)들과 자이나교 공동체들은 이 넉 달 동안에 이루어지는 방문을 신경써서 준비합니다. 이 기간에 자이나교도들의 제일 중요한 연례 종교행사가 행해집니다. 쉬베땀바라들의 8일 동안 행해지는 파류샤나(Paryushana)와 디감바라들의 10일 동안 행해지는 다스 락샨(Das Lakshan)이 그것입니다. 이 시기 동안 공동체 전체는 금식과 가르침, 그리고 프라티크라만(pratikraman) 의식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프라티크라만 의식에서 사람들은 지난 해에 잘못한 행동들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자이나교 사원은 출가 승려들과 재가 신도들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사원에서 기도하고, 명상하고, 설법을 듣고, 종교적인 노래들을 부르며 티르탕카라들의 형상 앞에서 의식을 행합니다.
자이나 전통은 출가자들이 걷는 고행의 길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의 삶과 안녕을 강조합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사원을 지어 티르탕카라들의 형상을 모십니다.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 활동으로 활기넘치는 장소인 사원에서 명상과 경배를 하기 위해, 또 축제를 벌이기 위해 모입니다. 환경이 된다면 자이나교도들은 대리석으로 사원을 지어서 뜨거운 인도의 태양과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원하고 고요한 오아시스를 만듭니다. 구자라트에 있는 팔리타나(Palitana) 사원과 라자쓰탄에 있는 마운트 아부(Mount Abu) 사원과 같은 유명한 순례 사원들은 종종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은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고, 의례를 치르고, 종교적인 노래를 같이 부르고, 출가자의 설법을 들으러 사원에 갑니다. 자이나교 사원에는 항상 종이 울리고, 노래가 들리며, 순수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은은하게 드러냅니다. 자이나교의 어린이들은 수도원이나 유치원에서 종교 수업인 파트샬라(pathshala)에 참석힙니다. 미국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큰 자이나 사원들이 점점 더 많이 건설되고 있습니다.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띠르탕까라 상(像)의 문제에 대하여 자이나교의 입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르티푸자(murtipuja)는 문자 그대로 “형상 숭배”를 의미합니다. 쉬베탐바라에 속`하는 두 그룹인 스타낙바시(Sthanakvasi)와 테라판트(Therapanth)는 형상 숭배를 거부하는 반면, 디감바라와 쉬베탐바라 전통에 속하는 각각의 무르티푸자크 전통은 푸자 의식과 함께 티르탕카라 상을 경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이나교도는 모두 사람들이 바치는 공양물을 티르탕카라가 어떤 방식으로도 “받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힌두교에서처럼 바쳐진 선물이 나중에 “돌아온다”는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무르티푸자크 자이나교도들의 관점에서 경배의 행위란 그것을 하는 사람 자신들을 정화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지나를 찬양하고 경배함으로써, 사람들은 지나가 구현하고 있는 특성들을 따르고자 하며 마음을 해방으로 이끄는 것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배를 통해 자기 정화를 한다는 무르띠푸자크의 관점에 덧붙여, 꽃과 물과 음식을 지나나 티르탕카라 상들에 바치는 것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에게 이롭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자이나교 신도가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면서 느끼는 종교적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문앞에 있는 탁발승들은 돌이나 쇠로 된 티르탕카라 상들이 상징하는 것과 똑같은 이상(ideal), 즉 까르마에서 벗어난 순수한 영혼의 이상이 살아있는 형태로 구현된 것을 의미합니다. 신도들은 성직자나 여성 성직자들에게 음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주면서, 그들이 사원의 유지나 푸자를 후원하는 것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덕을 받는 것입니다.
자이나 공동체를 나타내는 심볼은 1975년에 마하비라의 열반 2,50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선정되었습니다. 손은 축복을 내리는 형태로 되어 있고, 손바닥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이나교 윤리적 가르침의 정수라 생각되는 “아힘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상징 아래에는 “모든 생명은 상호간의 도움과 의존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자이나 공동체를 나타내는 심볼은 1975년에 마하비라의 열반 2,50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정해졌습니다. 이 심볼은 자이나교 많은 가르침을 축약하고 있습니다. 심볼의 테두리는 고대 텍스트에서 묘사된 우주의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손은 축복을 내리는 형태로 되어있고, 손바닥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이나교 윤리적 가르침의 정수라 생각되는 “아힘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심볼 아래에는 “모든 생명은 상호간의 도움과 의존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손 바로 위에는 전형적인 스와스티카(swastika, 卍)가 있는데, 이것은 자이나교에서 몸을 가진 영혼이 해방에 이르기까지 겪을 수 있는 네 가지 종류의 탄생―천상의 몸, 인간의 몸, 동물의 몸, 지옥의 몸―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자이나교도들은 스와스티카가 나치즘과 연결되는 것을 꺼려하며, 이 상징을 “옴”(om)이라는 단어나 북미 자이나교 연합회(Federation of Jain Associations in North America, JAINA)의 상징으로 대체합니다. 기호의 윗부분에 점과 함께 있는 반달모양은 싯다(sidda), 즉 해방된 영혼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이나교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반달 아래의 점들은 해방을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길을 상징합니다. 이 세가지 길은 올바른 믿음(Samyak Darshan), 올바른 지혜(Samyak Jnana), 올바른 행동(Samyak Charitra)입니다.
자이나교의 신도들 중에는 상인이 많았고, 이들은 인도 밖으로도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출가 승려들은 걸어서만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인도 안에 머물렀습니다. 신도들은 인도 밖의 지역에서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혁신을 요구했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자이나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이나교의 신자들은 예전부터 인도 바깥으로 무역활동을 떠나는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동부 아프리카로, 유럽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미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탈것으로 이동하지 않고 일반신도의 집에서 먹거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자이나교 종교 지도자들이 인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심지어 20세기 후반에도 해외로 나간 승려들은 극소수였고, 정통을 주장하는 자이나교도들은 이처럼 해외로 나간 승려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완전하고 최종적인 출가자 서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만에게만 해외로 나가는 것이 허용됩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자이나교 전통의 견고한 근간인 출가자와 재가신도의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쉬베땀바라 테라빤트 안에서 “사만”(saman)과 “사마니”(samani)라 불리는 특별한 남녀 출가자의 지위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외국에 사는 자이나교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을 임무로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 외 지역의 자이나교 공동체에서 새로운 방식의 자이나교 생활방식과 종교 지도자가 만들어지면서, 고대의 가르침들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자이나교의 정신인 '비폭력'이 현대사회의 정치적 갈등 및 환경 파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자이나교도들은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온 세계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자이나교가 현대 생활의 많은 문제들에 적용될 수 있는 매우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인도 자이나교 공동체가 지닌 몇몇 고유한 특성들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모든 생명의 성스러움과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담은 자이나 교리의 보편성은 재발견되고 재확인되고 있습다. 자이나교도들은 오늘날 그들의 철학이 자이나교, 인간, 사회 공동체, 더 나아가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더 큰 공동체를 지탱하고 윤택하게 만든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델리의 자이나교 조류 병원은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돌봄과 비폭력에 대한 자이나교의 진심을 보여줍니다. 2,500년이 넘는 자이나교 전통은 마하비라(Mahavira, ‘위대한 영웅’)에서 시작하는데, 마하비라는 승리자를 의미하는 “지나”라는 존칭을 얻었습니다.
델리 구도심에서 제일 번잡한 지역의 레드 포트(Red Fort)로부터 교통이 꽉 막힌 길 건너편에는 자이나 조류 병원이 있습니다. 병원에 있는 대다수의 환자들은 그 지역에 무수히 많은 비둘기들로, 다리나 날개가 부러져 병원으로 왔습니다. 이 병원에는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새들을 위한 특별 병동들도 있고 1층과 2층에는 평범한 폐쇄 병동들이 있습니다. 3층은 천정이 없이 하늘로 열려있는데, 새들이 회복을 하고 나면 날아가 버립니다. 이 병원은 모든 생명에 대한 윤리적 입장으로서 비폭력을 강조하는 자이나교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동물보호센터나 죽어가는 가축들을 위한 호스피스도 후원합니다. 물론, 자이나교에서 사람들을 위해 지은 병원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자이나교도의 수는 인도 9억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지만 자이나교는 오래되고 영향력있는 전통이며 인도 문명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비폭력을 강조하는 자이나교는 모한다스 간디(Mohandas Gandhi)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한다스 간디는 비스누 숭배(Vaishnava) 힌두교도로 인도 서부의 구자랃(Gujarat) 주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자이나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고 일찍부터 자이나와 힌두 간의 교류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인도 바깥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자이나교 공동체들은 그들의 존재감을 계속 증가시켜 왔습니다. 케냐와 네덜란드에는 자이나교 사업가들이 있고, 휴스턴과 신시내티에는 자이나교 기술자들과 컴퓨터 분석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자이나교는 미국의 종교들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이나교는 2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자이나교의 가장 최근 영적 선구자인 마하비라(Mahavira)의 삶에서 시작합니다. 아주 긴 스승들의 계보를 가지고 있는 자이나교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인간의 기록된 역사보다도 더 오래전에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원과 신도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현재의 형태는 마하비라가 생존했던 당시에 만들어졌습니다. 마하비라는 그보다 앞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나(Jina, “승리자”)라는 존칭으로 불렸는데, “지나”는 무지를 정복하고 영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빛나며 완벽한 영혼을 깨달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나들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이나”(Jain)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하비라는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났습니다. 호화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서른살에 고행자가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나 42세에 이 세상에서 홀로 최고의 깨달음인 케발라즈냐나를 얻었습니다. 그 후 활발한 가르침을 펼친 마하비라는 “목샤”(해방)라 불리는 상태를 얻어 72세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기원전 599년에 인도 북부의 도시 바이샬리(Vaishali)에서 태어났고 바르다마나(Vardhamana, “번영을 키우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하얀 코끼리, 락쉬미 여신, 보름달, 떠오르는 태양, 연꽃 연못, 활활 타는 불과 같이 영적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꿈들을 꾸고 환영들을 보았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마하비라는 즐거움과 사치에 익숙한 생활을 하며 자라기는 했지만, 서른 살에 영적 정화와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물질적 소유와 가족이 있는 삶을 버리고 고행자가 되었고, 그 후 12년 동안 명상에만 전념했습니다. 제일 오래된 자이나교 경전인 『아차랑가 쑤트라(Acharanga Sutra)』의 한 구절에는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못되게 대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2살이 되었을 때, 마하비라는 남아있는 가티(ghati), 즉, 지나간 행위들의 잔여물이며 영혼 자체의 속성을 가리는 카르마(karma)들을 모두 태워 없애버렸습니다. 그는 “케발라즈냐나”(kevalajnana) 또는 “카이발랴”(kaivalya)라 불리는 무한한 깨달음의 상태를 얻었습니다. 그 후 30년 동안, 그가 죽기 전까지 그는 이 자아인식의 빛나는 지혜를 근거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카르마가 영혼을 무지와 고통 안에 묶어 둔다는 것을, 그리고 카르마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불살생, 즉 아힘사(ahimsa)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72세인 기원전 527년에에 육신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마하비라가 얻었다고 말해지는 윤회로부터의 해방은 “목샤”(moksha) 또는 “니르바나”(nirvana)라 불립니다.
마하비라는 인류에게 자이나교의 진리를 밝혀 준 종교적 선구자들, 24명의 티르탕카라 (여울을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명입니다. 마하비라는 이들 중 스물네 번째 티르탕카라로, 우리가 사는 시대의 마지막 티르카라입니다.
마하비라는 현세의 삶이라는 끝없는 물결을 건널 수 있게 여울을 만든 영적 선구자, 티르탕카라(Tirthankara, “여울을 만드는 사람”)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자나 창조의 순간에 대한 개념들을 믿지 않습니다. 자이나교의 관점에서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시간은 상승과 하강의 영원한 순환인데, 이것은 자이나교도들에게 우주를 구성하는 여섯 형이상학적 원칙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시대는 하강하고 있는 주기로, 물질주의와 무지에 심각하게 덮여 있어서 빛나는 자아인식을 얻는 것이 매우 힘든 때입니다.
시간이 순환하는 각각의 주기마다 24명의 티르탕카라들이 있는데, 이들은 나머지 인류를 위해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티르탕카라들의 영혼이 여타의 모든 영혼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해방시켜 지나(Jina, “승리자”)가 된 티르탕카라들은 스승이 되어 자신의 앎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첫 번째 티르탕카라는 아디나트(Adinath)인데, “리샤바 데바”(Rishabha Deva)라고도 불립니다. 스물세 번째 띠르탕까라는 파르쉬바나트(Parshvanath)으로 기원전 1000년경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물네 번째이자 현재 주기의 띠르탕까라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마하비라로 붓다와 대략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었던 인물입니다. 티르탕카라들은 각각이 살았던 시대에 영원한 진리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같은 인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24명의 티르탕카라 상(像)들은 대부분의 자이나교 사원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첫 번째 티르탕카라와 현재와 제일 가까운 마지막 두 티르탕카라들이 가장 존숭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형상들은 각기 다른 동물들과 자연의 요소를 나타내는 상징들에 의해 구분됩니다. 사람들은 힌두교 사원에서 그러한 것처럼 꽃, 물, 향과 같은 공양물들을 영적 개척자들의 형상에 바치며 그들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자이나교 사원에서 하는 경배의 행동들은 상징적인 것이지 경배에 대한 주고받는 대가로 무엇을 기대하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띠르탕까라들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하거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우주의 창조주라는 의미로의 신이 아닙니다. 오직 개인만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띠르탕까라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영혼(지바)을 가지고 있으며, 각 영혼은 거의 끝이 없는 환생의 순환에 갇혀있다고 가르칩니다. 자이나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이 환생의 순환에서 해방시켜 해방(목샤)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티르탕카라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인간에서부터 풀잎까지, 영혼, 즉 ‘지바’(jiva, 문자 그대로 “생명” 또는 “생명력”)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에는 “성스러움”이 있지만, 이것은 만물에 침투되어 있는 단일한 영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개별적이고 소중한 영혼들이 무한히 많이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각각의 영혼, 즉 각 지바는 생명의 진행되는 생명의 순환에 갇혀서, 마치 어제 입던 옷을 버리는 것처럼, 몸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벗어 던집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이 자신의 진실되고 완벽한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환생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해방된 영혼은 “싯다”(siddha)라 불리며,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초월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순수한 에너지의 상태로 “목샤”(moksha), 즉 “자유”에 머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만약 자이나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다면, 그것은 완벽한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싯다가 세계에 대해 관계 맺는 방식은 능동적 지도자나 의사결정자의 관계가 아니라 빛나는 에너지의 끝없는 원천으로서입니다. 개별 영혼이 제일 순수한 형태로 있는 것이 싯다이므로, 자이나교의 실천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자이나교들에게 있어서 모든 존재들은 지바, 즉 영혼에 의해 생명을 얻습니다. 현대의 자이나교 스승인 구루뎁 치트라바누(Gurudev Chitrabhanu)는 “우주는 인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주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한 진화의 장이다. 생명은 성스러운 것으로 이는 카스트나 피부색, 종교, 국적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개미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의 생명체에 똑같이 적용이 된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흙, 물, 불, 공기, 나무들 같은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들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단 한 가지의 감각, 즉 촉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벌레들은 두 가지 감각(촉각과 미각)을 가지고 있고, 개미는 세 가지(촉각, 미각, 후각), 꿀벌은 네 가지(촉각, 미각, 후각, 시각)을, 그리고 동물과 인간은 다섯 가지의 감각(촉각, 미각, 후각, 시각, 청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카르마”(karma)는 기본적으로 “행위”를 뜻하지만, 자이나교에서 까르마는 영혼의 순수성을 덮는 물리적 물질을 의미합니다. 자유로 가는 길은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지 않고 전생에서 쌓은 카르마를 불태워 없애기 위한 실천을 요구합니다.
“카르마”는 문자 그대로 “행위”와 그리고 “행위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자이나교의 관점에서는 생각, 말, 행동의 행위들은 영혼에 카르마로 기록되고 카르마는 빛을 발하는 영혼에 물리적 얼룩을 남기는 물질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쌓인 카르마의 유입은 빛을 발하는 영혼을 덮고 색을 바래게 하기 시작합니다. 각 개인이 만든 카르마가 두꺼워지고 어두워지면 영혼의 순수성과 영혼이 가진 앎의 힘과 통찰(vision)과 환희는 흐려지게 됩니다.
자유로 가는 길은 새로운 카르마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여러 생에 걸쳐 쌓인 카르마를 없애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든 카르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상, 자기성찰, 그리고 서약에 대한 엄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많은 생에 걸쳐 행해져야 할 수도 있지만, 출가자가 된 사람들은 아주 엄격하게 종교적 규율을 지킴으로써 이 과정을 빠르게 진전시킬 수 있습니다. 아힘사(ahimsa), 즉 해치지 않음을 지키는 출가자의 삶은 새로운 카르마가 유입되는 것을 막을 것이고, 아마도 이미 유입된 카르마들을 닦아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영혼을 덮는 것에는 나쁜 행위뿐만 아니라 애착을 가지고 행한 선한 행위들의 결과들도 해당됩니다. 궁극의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 모두 다 고갈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들(인간, 동물, 식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자이나 전통의 핵심은 아힘사(비폭력)에 있습니다. “아힘사”는 자이나교도들의 실천과 행동과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이나교도들은 채식을 하고, 자이나교 출가자들과 여성 출가자들은 벌레를 밟거나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자이나교의 윤리적 실천과 행동에 아주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아힘사”(ahimsa), 즉 말 그대로 “불살생”의 윤리가 자이나교 전통과 결부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이 엄격한 채식주의자이며, 심지어 그들은 감자와 같이 식물의 열매가 아니라 온전한 유기체인 채소들을 먹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합니다.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종종 다양한 형태의 총채를 들고 다니며 그들이 앉거나 걸어갈때 부주의하게 아주 작은 벌레들을 죽이지 않도록 신경씁니다. 몇몇은 심지어 흰색 천으로 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 이는 숨을 쉴 때 아주 작은 생명체들을 흡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전통적으로 농사와 같이 자신도 모르게 생명체를 죽일 수도 있는 직업들을 기피해 왔습니다.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대한 경외는 인간이 다른 창조물들과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을 공유한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대 자이나교 경전인 『웃타라댜야나』(Uttaradhyayana)에는 한 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자는 궁전의 창문에서 고행자를 보고 갑자기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되었고, 세속적인 재산을 버리고 해방을 찾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영양이었을 때,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가죽이 벗겨지고 잡히고 묶이고 덫에 걸려들었고, 그리고 자주 죽임을 당했다.
내가 물고기였을 때,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낚시바늘과 통발에 걸려 잡혔다. 거기에서 나는 무수히 많이 비늘이 긁혀지고 길게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내가 새였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이 매들에 의해 잡히고 그물에 걸려들고 끈끈이 덫에 잡히고 죽임을 당했다.
내가 나무였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이 쓰러뜨려지고 잘려지고 톱질해서 판자로 만들어지고 목수들의 도끼와 칼로 껍질이 벗겨졌다.
내가 쇠였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이 망치로 맞고 잘려지고 대장장이들에 의해 쪼개지고 갈려졌다....”
자이나교도들은 좋은 삶의 기준이 되어야하는 “세 개의 보석”을 이야기합니다. 올바른 관점, 올바른 인식, 올바른 행동이 그것입니다. 올바른 행동은 보통 불살생, 참됨, 훔치지 않기, 정조, 집착하지 않기라는 다섯 개의 기본 서약을 통해 표현됩니다.
자이나교 전통은 최상의 염원을 담은 “세 개의 보석”을 말합니다. 세 개의 보석이란 올바른 믿음 또는 올바른 관점을 의미하는 쌈약 다르샤나(Samyak Darshana), 올바른 인식 또는 이해를 의미하는 삼약 즈냐나(Samyak Jnana), 그리고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삼약 차리트라(Samyak Charitra)가 그것이다. 어떻게 믿음과 지식과 행위가 일상 생활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자이나교도들은 다섯 가지 기본 서약을 맺음으로서 비로소 자이나교도가 됩니다. 다섯 가지 서약이란 아힘사(ahimsa), 불살생; 사띠야(satya), 참됨; 아스테야(asteya), 누군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라면 취하지 않기; 브라흐마차리야(brahmacharya), 정조;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집착하지 않기 혹은 무소유를 말합니다. 이 서약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삼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즉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생각, 행동, 말에; 어떤 일을 직접 행하거나, 남에게 시키거나, 혹은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한 번의 충동적인 행동보다 훨씬 나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다섯 개의 서약은 자이나교 출가자의 “위대한 서약”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의 도덕적 삶의 근간을 이룹니다.
아힘사를 실천하는 것은 우주에 폭력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최소화하는 일입니다. 자이나교도들에게 이 원칙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채식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 신도들에게는 식물처럼 한 개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에 해를 가하는 것이 허락되어있는 반면, 출가자들은 식생활에서 이것조차도 피하려도 노력합니다.
사티야, 즉 진실을 실천한다는 것은 말의 중요성을 인정해서 말이 중대한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행할 수 있는 하나의 “행동”이라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아스테야, 즉 훔치지 않기 역시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는데, 상대방이 기꺼이 내주는 것이 아니면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자이나교도들에게 이 서약은 부자와 빈자 간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브라흐마차리야, 즉 정조는 자유를 추구하는 영혼이 즐거움을 찾는 일 때문에 끊임없이 산만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인식과 연관된 것입니다. 일반 신도들에게 이것은 결혼관계에 충실하고 절제하는 것을, 출가자에게는 완전한 금욕을 의미합니다.
아파리그라하는 무엇인가를 갖겠다고 엉겨붙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대상들이나 심지어 사람에 대하여도 집착하는 일은 영혼을 다시 태어나고 또 죽는 순환고리에 묶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갖지 않기/무소유의 원칙입니다. 디감바라(Digambara), “하늘을 입은” 출가자들은 모든 것을, 심지어는 옷조차도 버립니다. 자이나교 재가 신도들도 소유하려는 의지가 인간을 탐욕, 질투, 이기심, 폭력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잘못 여겨지는 소유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균형잡히고 지속적인 것이어야 하며, 삶을 과도함의 연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불안정한 힘이 아닙니다. 이 도덕적 실천들을 함께 행하는 것은 영혼이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동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인도의 여러 고전에는 자이나교도들과 불교도들, 힌두교도들이 실재(reality)의 본성에 벌였던 뜨거운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이나교는 “아네칸타바다”(하나의 관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 불리는 폭넓은 관점을 주장하며 철학적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다양한 관점들이 지니는 장점들을 인정했습니다.
실재(reality)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논쟁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인도의 현자들과 철학자들은 다양한 형이상학적 관점들을 주장했고 서로서로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자이나교도들도 이 논쟁에 능동적인 참여자였는데, 그들의 중심적 교리에는 “아네칸타바다”(anekantavada)로 지칭되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이 관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관점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이나교는 다양한 전통의 참가자들이 논쟁에서 내세우는 논변들에 모두 어느 정도의 유효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이나교의 입장은 다른 관점들 간의 명백한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하나의 진실, 사티야(satya)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것이 됩니다.
자이나교는 불교를 “단멸론”(nihilism)으로, 힌두교를 “영속론”(eternalism)으로 간주하고 모두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불완전한 것으로 봅니다. 그 대신에 자이나교는 영혼의 영속성과 내재적인 순결성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영혼이 카르마와 연결되면서 이에 따라 고통이 일어나는 현실 둘 다를 주장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 자이나교도들은 전통적인 서구 논리학을 특징짓는 절대적인 “...이거나 아니면 ...”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모든 질문에는 각기 다른 접근법에서 하나의 진실, 사티야를 각기 다른 정도로 반영하는 “여러 개의 참된 답” 이 있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합니다.
자이나교에서 전해지는 장님과 코끼리의 설화는 아네깐따바다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줍니다. 다섯 명의 맹인은 코끼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로 코끼리가 들어오자, 그 다섯 명은 다가가서 코끼리를 만지고 그것을 묘사했습니다. 코끼리의 코 옆에 서있던 한 명은 코끼리가 두꺼운 나뭇가지라고 묘사했습니다. 꼬리를 만진 사람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밧줄같다고 말했습니다. 옆구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사실은 커다란 벽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기둥 같다고 말했고, 귀를 잡아본 사람은 커다란 부채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섯 번째의 현명한 사람이 그 논쟁을 중재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모든 사람이 맞지만 오직 부분적으로만 맞다고 단언했습니다. 코끼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다양한 부분적 판단들을 결합하는 데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들을 고려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자이나교도들에게 강한 신념, 특히 불살생이나 채식주의같은 윤리적 기본 규율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 반면에, 철학적 교조주의에 대한 저항도 있습니다. 서구에 사는 많은 자이나교도들은 아네칸타바다 방식의 접근법이 종교적 관용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관점들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그러니까 아마도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 미국 자이나교도는 “만약에 자이나교도가 이슬람교도와 앉아있다면, 진실되게 이슬람교도의 신앙을 경청하고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그의 의무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관점의 상대성을 인정함으로써 자이나교는 아주 개인화된 종교가 되었습니다. 중심이 되는 신조나 교리 체계는 없습니다. 마치 여러 강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아주 많습니다. 교리에 중심을 둔 종교들과는 달리 자이나교는 삶에 대한 답들 보다는 질문들을 더 강조합니다. 자이나교 전통은 특정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그보다는 영혼이 해방으로 가는 자신의 길을 찾을 때 필요한 윤리적 틀을 제공합니다.
자이나교 출가 교단의 주요 두 분파는 기원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디감바라(Digambara, “하늘을 입은” 공의파) 출가자들은 모든 것을, 심지어 옷도 포기합니다. 쉬베탐바라(Shvetambara, “흰옷을 입은” 백의파) 전통의 출가자들 역시 모든 것을 버리지만, 이들은 흰색 천 두 조각을 걸칩니다. 이 두 전통은 각각 고유의 경전들과 전통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부터 현재까지 자이나교 사두(sadhu)와 사드비(sadhvi), 즉 남성 출가자와 여성 출가자들은 고행주의와 놓아버림(renunciation)의 길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들은 “무니”(muni)라 불리기도 하는데, “침묵하는” 성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들 중 몇몇은 “우파댜야” (upadhyaya)라 불리는 스승들이며, 몇몇은 “아차리야”(acharya)라 불리는 소단위 집단의 수장입니다. 이들은 띠르탕까라들이 성취한 빛나는 자아인식(luminous self-realization)의 이상을 나타내며, 그 이상을 향하여 노력합니다. 딕샤(diksha, 출가 생활에의 입문)를 할 때, 자이나교 남성과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뽑고, 소유물을 나누어 주고 가족을 포함한 세상의 존재들을 버리고 떠나 자아성찰과 봉사와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수행자의 삶을 시작하니다.
자이나교 출가 전통(monaticism)에서 중요한 두 개의 오래된 분파는 기원전 4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몇 세기 후에는 두 분파가 완전히 나누어졌습니다. 더 보수적인 디감바라(Digambara) “하늘을 입은” 전통은 옷조차도 입지 않는데, 그들은 오직 주어진 자연 환경, 즉 네 개의 방향만을 옷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쉬베탐바라(Shvetambara) “흰옷을 입은” 출가자들은 흰색 천 두 조각을 걸칩니다. 디감바라 출가자들은 마하비라(Mahavira)가 위대한 금욕적 생활을 하던 당시에 옷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들을 버렸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쉬베탐바라 출가자들은 마하비라에게 흰색 천으로 된 신들의 옷이 주어졌고 그는 그 옷이 가시덤불에 걸려 땅으로 떨어질 때까지 입었지만 다시 주워서 입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부파는 또한 서로 다른 마하비라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각기 고유한 전승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성이 해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릅니다. 쉬베탐바라 전통은 19번째 티르탕카라인 말리(Malli)가 여성이었으며 여성도 완전한 깨달음(enlightment)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디감바라 전통은 여성은 먼저 남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부파에는 여러 하위 분파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쉬베탐바라 부파에는 지나의 무르티(murti, 신의 이미지) 앞에서 푸자(puja)를 행하는 무르티푸자크(Murtipujak)파가 있고, 무르티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실은 무르티의 사용을 거부하는 스타낙바시(Sthanakvasi)와 테라판트(Terapanth)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이나교에 많은 수의 하위 분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자이나교 전통 내에서의 교리적 통일성은 상당히 강합니다.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음식과 생필품을 신도들에게 의탁합니다.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도보로 걸으면서 유행하며 신도들에게 자이나교의 전통과 경전을 가르칩니다. 출가자의 삶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이지만, 우기에는 한 장소에서 넉 달을 지냅니다.
자이나교 탁발승들은 출가자가 되기 위해 매우 엄숙한 다섯 개의 서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거처가 없고, 음식을 만들지 않고, 돈을 지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출가자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다니며, 가르침을 전하고 공부를 하며 그들이 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시하는 음식만을 받습니다. 남성 출가자(sadhus)들과 여성 출가자(sadhvis)들은 재가자들에게 크게 의존하지만, 재가자들에게 있어 출가자들은 마하비라 및 여타 티르탕카라들이 얻은 깨달음(self-realization)이라는 이상의 살아있는 모습들입니다. 누군가는 출가자들이 신도들에게 음식을 구걸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자이나교 신도들은 거꾸로 자신들이 출가자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받는 영광을 베풀라 부탁할 것입니다.
고행자인 출가 승려들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소유물을 모으지도 않고, 한 장소에는 단 몇 일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전통적으로 계속 이동하는, 유행하면서 가르치는 삶입니다. 그들은 맨발로 걷는데, 탈것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주 많은 작은 생명체들에게 훨씬 더 큰 해를 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도의 우기 몇 달 동안에는 강물이 불어나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게다가 비가 오면 나타나는 수많은 생명체들에게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걷는 사람에게 밟혀서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이 훨씬 크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우기가 계속되는 넉 달 동안에는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한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출가자들은 전통을 가르치는 스승들이어서 자이나교 신도들이 경전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우기는 가르침을 펴는 데에 특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자이나교 성직자(sadhu)들과 자이나교 공동체들은 이 넉 달 동안에 이루어지는 방문을 신경써서 준비합니다. 이 기간에 자이나교도들의 제일 중요한 연례 종교행사가 행해집니다. 쉬베땀바라들의 8일 동안 행해지는 파류샤나(Paryushana)와 디감바라들의 10일 동안 행해지는 다스 락샨(Das Lakshan)이 그것입니다. 이 시기 동안 공동체 전체는 금식과 가르침, 그리고 프라티크라만(pratikraman) 의식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프라티크라만 의식에서 사람들은 지난 해에 잘못한 행동들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자이나교 사원은 출가 승려들과 재가 신도들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사원에서 기도하고, 명상하고, 설법을 듣고, 종교적인 노래들을 부르며 티르탕카라들의 형상 앞에서 의식을 행합니다.
자이나 전통은 출가자들이 걷는 고행의 길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의 삶과 안녕을 강조합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사원을 지어 티르탕카라들의 형상을 모십니다.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 활동으로 활기넘치는 장소인 사원에서 명상과 경배를 하기 위해, 또 축제를 벌이기 위해 모입니다. 환경이 된다면 자이나교도들은 대리석으로 사원을 지어서 뜨거운 인도의 태양과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원하고 고요한 오아시스를 만듭니다. 구자라트에 있는 팔리타나(Palitana) 사원과 라자쓰탄에 있는 마운트 아부(Mount Abu) 사원과 같은 유명한 순례 사원들은 종종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은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고, 의례를 치르고, 종교적인 노래를 같이 부르고, 출가자의 설법을 들으러 사원에 갑니다. 자이나교 사원에는 항상 종이 울리고, 노래가 들리며, 순수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은은하게 드러냅니다. 자이나교의 어린이들은 수도원이나 유치원에서 종교 수업인 파트샬라(pathshala)에 참석힙니다. 미국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큰 자이나 사원들이 점점 더 많이 건설되고 있습니다.
돌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띠르탕까라 상(像)의 문제에 대하여 자이나교의 입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르티푸자(murtipuja)는 문자 그대로 “형상 숭배”를 의미합니다. 쉬베탐바라에 속`하는 두 그룹인 스타낙바시(Sthanakvasi)와 테라판트(Therapanth)는 형상 숭배를 거부하는 반면, 디감바라와 쉬베탐바라 전통에 속하는 각각의 무르티푸자크 전통은 푸자 의식과 함께 티르탕카라 상을 경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이나교도는 모두 사람들이 바치는 공양물을 티르탕카라가 어떤 방식으로도 “받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힌두교에서처럼 바쳐진 선물이 나중에 “돌아온다”는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무르티푸자크 자이나교도들의 관점에서 경배의 행위란 그것을 하는 사람 자신들을 정화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지나를 찬양하고 경배함으로써, 사람들은 지나가 구현하고 있는 특성들을 따르고자 하며 마음을 해방으로 이끄는 것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경배를 통해 자기 정화를 한다는 무르띠푸자크의 관점에 덧붙여, 꽃과 물과 음식을 지나나 티르탕카라 상들에 바치는 것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에게 이롭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자이나교 신도가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면서 느끼는 종교적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문앞에 있는 탁발승들은 돌이나 쇠로 된 티르탕카라 상들이 상징하는 것과 똑같은 이상(ideal), 즉 까르마에서 벗어난 순수한 영혼의 이상이 살아있는 형태로 구현된 것을 의미합니다. 신도들은 성직자나 여성 성직자들에게 음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주면서, 그들이 사원의 유지나 푸자를 후원하는 것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덕을 받는 것입니다.
자이나 공동체를 나타내는 심볼은 1975년에 마하비라의 열반 2,50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선정되었습니다. 손은 축복을 내리는 형태로 되어 있고, 손바닥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이나교 윤리적 가르침의 정수라 생각되는 “아힘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상징 아래에는 “모든 생명은 상호간의 도움과 의존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자이나 공동체를 나타내는 심볼은 1975년에 마하비라의 열반 2,50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정해졌습니다. 이 심볼은 자이나교 많은 가르침을 축약하고 있습니다. 심볼의 테두리는 고대 텍스트에서 묘사된 우주의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손은 축복을 내리는 형태로 되어있고, 손바닥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이나교 윤리적 가르침의 정수라 생각되는 “아힘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심볼 아래에는 “모든 생명은 상호간의 도움과 의존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손 바로 위에는 전형적인 스와스티카(swastika, 卍)가 있는데, 이것은 자이나교에서 몸을 가진 영혼이 해방에 이르기까지 겪을 수 있는 네 가지 종류의 탄생―천상의 몸, 인간의 몸, 동물의 몸, 지옥의 몸―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자이나교도들은 스와스티카가 나치즘과 연결되는 것을 꺼려하며, 이 상징을 “옴”(om)이라는 단어나 북미 자이나교 연합회(Federation of Jain Associations in North America, JAINA)의 상징으로 대체합니다. 기호의 윗부분에 점과 함께 있는 반달모양은 싯다(sidda), 즉 해방된 영혼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이나교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반달 아래의 점들은 해방을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길을 상징합니다. 이 세가지 길은 올바른 믿음(Samyak Darshan), 올바른 지혜(Samyak Jnana), 올바른 행동(Samyak Charitra)입니다.
자이나교의 신도들 중에는 상인이 많았고, 이들은 인도 밖으로도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출가 승려들은 걸어서만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인도 안에 머물렀습니다. 신도들은 인도 밖의 지역에서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혁신을 요구했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자이나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이나교의 신자들은 예전부터 인도 바깥으로 무역활동을 떠나는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동부 아프리카로, 유럽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미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 자이나교 출가자들은 탈것으로 이동하지 않고 일반신도의 집에서 먹거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자이나교 종교 지도자들이 인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심지어 20세기 후반에도 해외로 나간 승려들은 극소수였고, 정통을 주장하는 자이나교도들은 이처럼 해외로 나간 승려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완전하고 최종적인 출가자 서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만에게만 해외로 나가는 것이 허용됩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자이나교 전통의 견고한 근간인 출가자와 재가신도의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쉬베땀바라 테라빤트 안에서 “사만”(saman)과 “사마니”(samani)라 불리는 특별한 남녀 출가자의 지위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외국에 사는 자이나교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을 임무로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 외 지역의 자이나교 공동체에서 새로운 방식의 자이나교 생활방식과 종교 지도자가 만들어지면서, 고대의 가르침들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자이나교의 정신인 '비폭력'이 현대사회의 정치적 갈등 및 환경 파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자이나교도들은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온 세계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은 자이나교가 현대 생활의 많은 문제들에 적용될 수 있는 매우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인도 자이나교 공동체가 지닌 몇몇 고유한 특성들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모든 생명의 성스러움과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담은 자이나 교리의 보편성은 재발견되고 재확인되고 있습다. 자이나교도들은 오늘날 그들의 철학이 자이나교, 인간, 사회 공동체, 더 나아가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더 큰 공동체를 지탱하고 윤택하게 만든다고 힘주어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