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코투스의 윤리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예정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존재증명의 일부를 공부했다. 앞의 두 가지만 정리한다.
(1) 행복과 정의에 관한 스코투스의 견해(410쪽 이하)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행복(최고선)을 정점으로 한 도덕이론을 전개한 것과 달리 스코투스는 신이 규정한 법을 중심으로 한 도덕이론을 구성하였다. 그는 아퀴나스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복을 위한 것이며 덕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성적 경향을 지닌 것은 맞지만, 인간에게는 정의를 추구하려는 또 다른 자연적 경향이 있다고 본다. 도덕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과 무관하게 도덕법칙을 지키려는 성향에 의해 성립된다.
스코투스의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퀴나스에 이르는 소위 행복주의(eudaimonism) 윤리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칸트적 관점의 싹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행복 개념의 변화다. 행복 개념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행복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복을 지향하며, 행복은 궁극목적으로서 최고선이다. 용기의 덕을 발휘하며 목숨을 거는 것도 결국은 행복을 위한 것이다.(물론 사람들이 지향하는 행복이 모두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행복이라고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행복이 아닐 수 있다. 행복(최고선)이 과연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한 윤리적 입장이 생겨난다.)
반면에 스코투스의 관점에서, 행복은 최고선이 아니며 도덕과 갈등할 수도 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다. 행복은 선택 가능한 목적 중 하나가 된다. 행복 개념에 대한 이러한 두 입장은 오늘날의 행복 개념에도 혼재되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된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예정설(424이하)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이 천국에 갈 지 여부는 오직 신의 은총에 달려 있다. 또한 신의 은총은 단지 천국에 이르는 문제뿐 아니라 현세에 어떤 삶을 사는냐는 문제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의지가 나약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올바르게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길게 가지 않는다. 결국 현세에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 또한 신의 은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구에게 은총이 주어지느냐이다. 은총은 인간들의 공적에 따라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은총이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은총은 오로지 신에게 달려있다.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다. 불합리한가?
이런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 당시부터 이미 논쟁의 대상이었다.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상반된 주장을 한다. 아담의 죄는 사악한 행위의 사례를 보여주었을 뿐이지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아담의 죄에 의해 약화되지 않는다.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며, 이교도도 유덕한 삶을 산다면 내세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기독교도들은 이보다 더 나은 천상에서의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이러한 특별한 은총도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자들을 예견한 신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으나, 다른 수도사들의 불평은 여전하였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옳다면 수도원의 규율과 책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말이다. 은총을 받도록 예정된 자라면 내버려두어도 될 것이고, 은총을 받지 못할 자라면 아무리 책망을 해도 여전히 비행을 저지를 것이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예정설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오직 신의 은총에 따를 뿐이다. 인간은 은총을 거부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다. 처음 기독교의 부름을 받는 것도, 책망을 통해 더 나은 생활로 이끄는 것도 모두 신의 은총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던 초기의 입장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니 말이다.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누어질 뿐이다.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신의 뜻에 따를 뿐이다. 이러한 후기의 입장은 이후 기독교의 역사에, 특히 개신교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은총예정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신의 은총이 인간의 공적에 따라 달라진다면, 인간의 노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일을 잘하는 자에게 성과급을 주는 식이라면 그것은 회사를 경영하는 식의 생각일 뿐이다.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은총은 선물과 같은 것이지 보상이 아니다. 보상과 같은 식으로 은총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지닐 것이다. 내가 잘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말이다. 모든 영광과 감사는 오직 신에게만 돌려져야 한다.
그렇다면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이 그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은총을 내리지 않았다고 나쁜 걸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뿐이다. 그들은 원죄에 따른 마땅한 결과대로 살아갈 뿐이다.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모두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은 그 일부를 구원하기 위해 은총을 내린 것이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도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범사에, 늘, 감사할지어다.
고대 희랍의 윤리학은 모두 최고선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최고선은 삶의 궁극목적이며, ‘잘 사는 것’이고 행복이다. 문제는 이 최고선, 즉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중세의 도덕철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코투스 등 소수의 철학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최고선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도덕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세에 신과 만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현세에서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오직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준다.
그러면 현세에서의 도덕적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세의 삶은 내세의 희망을 위한 수단의 가치를 지닌다. 그 수단을 통해 내세의 진정한 행복을 준비할 수 있다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한 행복 정도는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여행의 즐거움은 그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준비를 아무리 잘 하여도 그것만으로 천국이, 신의 나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은총이 없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2) 아벨라르의 의도의 윤리
아벨라르에게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의도(intention)다. 의도가 선하다면 금지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인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살인하라는 명령은 나쁜 행위를 하라는 명령이지만, 그 명령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선한 의도는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고 해도 훌륭하다. 그가 든 예를 보자. 어떤 두 사람이 모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수용시설을 짓기로 했다. 한 사람은 성공적으로 시설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은 돈을 도둑맞아 짓지 못하였다. 결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모두 칭찬받을 만하다. 의도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의도대로 행위하였느냐의 문제는, 단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한 차이일 뿐이다.
선한 의도와 선한 행위가 동일하게 평가되어야 하듯이, 악한 의도는 악한 행위와 동일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현생의 법질서와는 어긋난다. 우리는 의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해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죄의 의도만으로 처벌하지는 않는다. 또한 의도 없이 과실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도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완전히 면책을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리는 의도보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아벨라르는 인간의 한계로 설명한다. 인간은 행위로 드러난 명백한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숨어있는 나쁜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최후의 심판은 그렇지 않다.
의도가 중요하다면,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신앙에서 기도교도를 박해하는 일은, 선한 종교적 의도에서 저지른 일이므로 칭찬할 만한가? 이에 대해 아벨라르는 그들의 잘못은 사냥하다가 동료를 짐승으로 잘못 알고 죽인 경우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종교적 의도는 선한 의도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선한 의도를 갖기 위해서는 무지에서 벗어나 참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교도들은 진실을 보기 못하기 때문에 선한 의도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가 의도를 의지와 구별하여, 의지는 욕구에 가까우며 의도는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그의 의도 이론이 지닌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가 지닌 의지적 요소, 즉 목적 지향적 요소와, 인식적 요소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선한 의도까지는 아니어도 선한 믿음만으로 기독교도를 죽인 자들의 죄를 가볍게 보는 그의 가르침, 그리고 행동으로 인해 선해지거나 악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이론은 상스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3) 아퀴나스의 윤리학
(1) 아퀴나스는 선한 의도를 강조하는 아벨라르에게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덕스러운 의도 또는 선한 의지에 의한 행위만이 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위의 선함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잘못된 판단에 따른 잘못된 양심의 경우, 그 잘못의 인식적 오류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죄의 면죄 여부가 달라진다. 그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구별에 의존한다. 개별적 사실에 대한 판단의 오류인 경우에는 죄를 면할 수 있다. 몰라서 그랬다는, 비자발적이었다는 점이 면책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보편에 대한 무지의 경우, 예컨대 간음이 나쁜지 몰랐다는 무지는 면책의 사유가 되지 않는다.
선한 의지는 이처럼 이성의 올바른 판단과 함께 할 경우에만 행위의 선함을 낳을 수 있으며, 또한 그 행위가 적절한 기회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과 마찬가지로 마땅한 상황에 대한 판단의 올바름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프로네시스 없이는 덕이 있을 수 없다는(그 역도 마찬가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이론을 잘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퀴나스의 경우 현명함(prudentia, 희랍어 phronesis의 라틴 번역어)이 없이는 덕스러운 행위가 성립하지 않는다.
(2) 사실적 판단의 오류가 윤리학에 미치는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아퀴나스의 성윤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성윤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남성의 정자가 인간의 씨앗(희랍어 sperma는 동물의 정자(정액)와 식물의 씨앗을 모두 포괄한다.)이며 여성은 양분을 제공할 뿐이다. 여성은 불완전한 남성에 불과하며 이것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을 정당화한다. 이것이 가부장적 질서의 생물학적 근거로서 작동됨은 물론이다.
피임과 자위행위를 동등하게 여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탄생은 수정란에서 시작된다는 오늘날의 과학적 상식과는 다르게, 인간은 정자의 성장에서부터 시작된다(정자가 아직은 영혼을 가진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정액(현미경이 나오기 이전에는 정자와 정액은 구별되지 않는다.)의 무분별한 방출인 자위행위나 정자의 성장을 방해하는 피임은 모두 인간의 가능태를 파괴한, 자연에 어긋나는 행위에 속한다.
정자는 여성의 몸에서 성장을 시작하는데, 임신 후 상당한 시간을 거쳐 먼저 식물적 영혼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동물적 영혼을 지니며, 다시 한참 후에 신이 이성적 영혼을 불어넣으면서 비로소 인간의 영혼을 지닌 인간이 된다. 그래서 낙태의 경우에도 두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을 지닌 태아를 낙태하는 경우에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태아를 낙태하는 경우는 피임이나 자위행위가 저지르는 죄와 동일한 수준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만일 아퀴나스가(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물학적 오류를 깨닫고 수정할 기회를 갖는다면 이에 근거한 자신의 윤리 이론을 수정할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인간의 태아는 수정란에서 시작하며, 수정란은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가 동등한 비율로 섞인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남성 우위의 생각도 바뀔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남성 중심의 질서를 옹호하려고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성차별의 생물학적 근거를 더 이상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편견이 종교적 교리로 성립되면 사정은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피임과 낙태를 동등한 죄악으로 보는 현대 가톨릭의 입장과 이에 반대하여 피임과 낙태 모두 여성의 기본권으로 보는 입장은 둘다 동일한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피임과 낙태는 생물학적으로 동등하게 여길 근거가 없는, 잘못된 과학적 견해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3) 아퀴나스의 경제 이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학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런 점에서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불변의 신성한 체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아퀴나스와의 비교를 통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되, 재산의 획득과 유지에 관하여 매우 엄격한 제한을 한다. 그는 외적 재화의 본성에 입각하여 돈과 재산의 본래적 목적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계승한다.
재산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한에서만 그 정당성이 유지된다. 필요 이상의 재산을 모으는 일은 죄악에 속한다. 외적 재화는 본성상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획득은 필요에 따른 타인의 획득을 방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재화를 둘러싼 게임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이다.
저축할 돈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할 의무를 지닌다. 이는 자선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적 정의의 차원에서, 즉 재화의 본성에 따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경제적으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을 위해 부유한 자들의 재산을 취하여도 그것은 정당하다. 로빈 후드나 임꺽정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정의의 견해는 매우 보수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이자놀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는 구약성서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돈은 물건과의 교환을 위해서 생겨났으며, 교환의 편리성이 돈의 가치이며 본래적 한계다. 돈은 오직 물건과의 교환을 위한 사용가치만을 갖지 그것이 재산 증식의 기능을 가져서는 안 된다.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 원금만을 받아야 하지, 이자를 쳐서 받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 밭은 곡식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지만 돈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 이론은 돈이 돈을 낳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는 너무 먼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오늘날 경제는 나름의 독자적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고중세에는, 경제는 행복(잘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인간의 행복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경제는 더 이상 경제일 수가 없다.(영어 economic은 희랍어 oikonomikos에서 왔으며, 이는 가정을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경제는 우리말 ‘살림’에 가깝고, 그렇게 번역하자는 제안도 있다.) 인간의 행복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경제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자본주의도, 즉 시장이라는 시스템도 인간의 잘 삶에 기여하는 한계 안에서 작동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물음을 아퀴나스는 우리에게 던진다.
< 예고 >
다음 시간이 이번 학기 마지막 시간이다.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과 <신>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검토하고, 그동안 참았던 질문들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제8장 <윤리학> 후반부와 제9장 <신> 일부를 정리해본다. 오늘로 고대철학을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 2회밖에 남지 않았지만 중세철학을 공부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
어떤 학자(D. Frede)는, 만약 철학에도 노벨상이 있다면, 맨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에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장이 아니다. 이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점이 아쉽지만, 몇 가지 핵심을 정리하자.
1) 쾌락은 활동이 방해없이 이루어질 때 수반되는 것이다.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쾌락은 결여의 충족에서 온다고 말한다. 배고플 때 식사의 쾌락과 같은 모델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반대한다. 쾌락은 자연적 활동이 방해없이 완성될 때 수반되는 것이다.
2) 쾌락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쾌락이 활동에 수반되는 무엇이라면, 그 활동의 가치에 따라 쾌락의 가치도 결정된다. 선한(좋은) 활동에 수반되는 쾌락은 좋은 것이고, 악한(나쁜) 활동에 수반되는 쾌락은 나쁜 활동이다. 쾌락은 좋은 것이라는 쾌락주의와 그 반대로 쾌락은 나쁜 것이므로 억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는 둘다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데, 이는 쾌락을 모두 묶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3) 덕인은 덕의 발휘에서 쾌락을 느낀다.
행복은 덕에 따른 활동이다. 간단히 덕행이라고 하자. 덕행은 즐거운가? 즐겁지 않다면 어떻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행복을 쾌락이라고 보는 쾌락주의자가 흔히 제기하는 반론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행은 즐겁다고 말한다. 바둑애호가에게 바둑두는 일은 즐겁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노래부르기는 즐겁다. 마찬가지로 덕인은 덕행이 즐겁다. 만일 즐겁지 않다면 그는 덕인이 아니고 그의 행위는 덕행도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4) 덕(aretē)과 자제력 있음(enkrateia)은 다르다.
덕인의 행위와 자제력 있는 사람의 행위는 겉으로는 동일하게 보인다. 하지만 행위자의 내적 상태는 다르다. 전자는 즐겁게 행위하지만, 후자는 즐겁지 않다. 그래서 덕인은 덕행을 하면서 즐겁기 때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제력 있는 자와 달리 억제할 무엇이 없다. 자신의 욕구가 덕의 발휘와 갈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마땅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이성적 욕구와 다른 욕구가 충돌하여 괴롭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 때문에 마땅한 행위를 하고서도 아쉽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다. 칸트의 경우 인간의 기본적인 경향성에서 나오는 욕구는 제거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런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 의무에 따른 도덕적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칸트에게 도덕적 행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에서 보면,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다. 도덕과 행복은 일치할 수 없다. 양자는 갈등의 관계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덕인에게 도덕과 행복은 일치하지만, 칸트가 보기에는 행복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없다. 다음에 칸트를 공부할 때 양자의 차이를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스토아학파의 adiaphora
1) 스토아학파에게 좋은 것은 오직 덕(지혜, 용기, 절제 등등)이며, 나쁜 것은 오직 악덕(무지, 비겁, 방탕 등등)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이른바 아디아포라다. diaphora는 차이를 의미하며, 접두사 a는 부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디아포라는 차이가 없는 것(indifferents)을 의미한다. 즉 가치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건강, 부, 아름다움 등이나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질병, 가난, 추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아디아포라는 가치에 있어서 차이가 없지만, 즉 가치와 무관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자연적으로 선호하거나 기피하는 것들이라는 점은 인정된다. 다만 이런 것들에 의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오직 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부유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부유함에도 불행한 사람은 어찌된 것인가? 건강은? 건강함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악당의 건강함은 악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아디아포라는 우리의 행복을 결정해주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에픽테토스의 용어를 쓰자면,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린 것은 오직 나의 마음이 행하는 것, 즉 믿음(판단), 충동, 욕구, 혐오 등일 뿐이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등이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에 의존하면 나의 삶은 그것들에 종속되며 결국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나의 삶이 돈에 의존한다면 나는 돈의 노예일 뿐이지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아디아포라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챙겨가면서 살아야 한다. 다만 그런 것들에게 결정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도 덕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고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덕은 변하지 않는 나의 내적 상태이므로 덕인은 항상 행복하다.
3) 여기서 스토아의 운명론을 적용하면 더 분명해진다. 나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외적인 상태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될 수밖에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 안 받아들이면? 그래도 사태의 진행은 변함없다. 수레에 묶여있는 두 마리 개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된다. 수레와 같은 방향을 욕구하는 개는 자발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지만, 거부하는 개는 억지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아디아포라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주어진 조건일 뿐이다.
(3) 스토아학파의 감정론
1) 현대 감정철학의 분류에 따르자면, 스토아학파의 감정론은 인지주의(cognitivism)에 속한다. 인지(cognition)와 감정(emotion)을 대립된 관계로 이해하는 근대 이후의 상식에서 보자면 감정을 인지(지적 판단)로 본다는 것은 양자의 대립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셈이다. 근대적 틀에서 보면 감정은 배고플 때 느끼는 허기와 같이 나의 이성과 무관한 육체적 현상이고 어쩔 수 없는 것에 속한다. 그러나 인지주의에서는 감정도 이성적 판단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면 바꾼다. 이제 감정도 마찬가지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과 이성의 대립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국 서로 다른 판단의 대립이 되고 만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감정이 판단이라고 해서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이론적 판단과 같은 유형의 판단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감정을 구성하는 판단은 가치가 개입된 가치판단이다. 감정이란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 내지는 평가판단이라는 말이다.
누가 나에게 바보라고 놀리면 나는 화가 난다. 즉 내가 평가절하되었다는 판단이 화라는 감정의 핵심요소인 것이다. 나의 화는 나의 판단인 셈이다. 누가 아인슈타인에게 바보라고 놀리면 그는 화를 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놀림으로 자신의 지성이 평가절하된다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2) 케니는 여기서 Nussbaum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453쪽 주10) 누스바움은 Upheavals of Thoughts(우리말 번역은 감정의 격동)라는 책에서 감정은 책의 제목처럼 생각의 격동이라고 본다. 감정은 나의 뿌리깊은 생각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생각 즉 판단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감정이다. 그녀는 스토아철학의 감정론을 따라 강한 인지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다. 다만 그녀는 스토아철학의 완고한 성격을 다소 완화시킨 신스토아주의(Neostoicism)로 바꾼다. 흥미로운 책으로 현대의 감정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필독서에 속한다.(읽으시겠다면 참고용 원서 파일을 보내드릴 수 있다.)
3) 간략한 용어 정리.
감정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pathos(복수는 pathē)인데 그 기본적인 의미는 겪음(suffering), 당함, 겪은 상태 등이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passio로 번역하는데 파토스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역시 suffering, event, passion, affection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영어 passion의 어원이다. 그리고 우리말로는 흔히 정념으로 옮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패션은 감정과 욕구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철학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다가 emotion이 감정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인 것은 200년 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감정과 욕구는 분리된다. 이모션에는 욕구가 포함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감정과 욕구를 완전히 다른 범주로 보는 게 대세다. 그러므로 고중세 및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파토스, 파시오, 패션은 모두 감정과 욕구를 포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중세철학 중에서 <윤리학>과 <신>을 살펴볼 것이다. 번역본이 없는 분들을 위해 원서 pdf를 올릴 예정이니, AI를 시켜 번역해서 보셔도 좋겠다. 혹시 그렇게 번역된 파일이 만들어지면 단톡방에 올려 함께 보면 어떨까 싶다.
제7장 <영혼과 정신> 중에서 의지 및 자발성, 욕구 개념에 관하여, 그리고 제8장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관한 논의 중 기예(테크네)과 덕(아레테)의 차이에 관해 정리해본다.
(1) 의지와 자발성(402)
의지 개념을 분명하게 도입한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철학에는 의지(will, volition) 개념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의지 개념의 결여가 행위 설명에 관한 철학적 빈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 및 책임에 관한 논의는 현대의 설명에도 뒤지지 않는다. 현대에 들어와 의지 개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특히 라일(Gilbert Ryre, The Concept of Mind)의 비판 이후에 의지는 인간 정신의 독립된 요소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더욱 중요하게 참조할 만하다.
그럼에도 ‘의지’는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그 단적인 사례의 하나가 아크라시아(akrasia, 자제력 없음)를 의지의 허약함(weakness of will)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 아크라시아 현상을 현대에는 의지 개념을 빌어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아크라시아를 의지가 박약해서 생긴 현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의지의 허약함이라고 번역한다.(어떻게 번역하든 간에 아크라시아 문제는 소트라테스 이래로 오늘날까지 중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참고 문헌이 단톡방에 올라올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에 관해 정리하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서 그는 자발적 행위와 비자발적 행위, 그리고 자발적도 비자발적도 아닌 또다른 유형의 행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발성의 조건만 살펴본다. 자발적 행위는 강제나 무지(오류)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행위다. 저항할 수 없는 강제(힘)이나 착각 등의 무지로 인한 행위는 자발적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하면 곤란한 것은 어떤 종류의 무지냐는 것이다. 무지는 보편에 대한 무지와 개별에 대한 무지로 나뉜다. 보편적 규범 등에 관한 무지를 보편무지라고, 개별적 상황에 대한 무지를 개별무지라고 하자. 자발적 행위가 아니어서 면책 가능한 경우의 무지는 개별무지다. 예컨대 내 아내와 생긴 게 너무 똑같아 덥석 안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이런 무지나 오류가 개별무지다. 사람을 안아주는 게 뭐가 나쁘냐며 아무나 안는 사람의 무지는 보편무지다. 후자는 자발적 행위를 한 것이고 따라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전자라고 해서 모든 게 면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 행위가 아니어도, 즉 고의가 아닌 비자발적 행위도 그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 자발적 행위만큼은 아니지만.
(2) 욕구(408)
케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욕구와 자발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욕구에 대한 현대적인 틀을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케니가 가져다 쓴 1차욕구와 2차욕구에 관해 정리해본다. 1차욕구는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욕구다. 내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나는 술마심에 대한 1차욕구를 지닌 것이다. 2차욕구는 1차욕구에 대한 욕구다. 나는 술마심이라는 1차욕구를 욕구할 수도 있고 욕구하지 않을 수도 있는 2차욕구를 갖는다. 이처럼 욕구의 차원을 구별할 필요성은 우리가 원해서 한다는 행위와 그런 원함에 대한 원함(욕구)이 어긋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 충분히 이해하고 그러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사람이 좋은 술자리에서 술마시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 그의 1차욕구와 2차욕구는 충돌한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즉 1차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마시지 않겠다는 2차욕구를 지닐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금주하겠다는 2차욕구가 반드시 금주를 실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차욕구는 자신의 욕구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욕구에 대한 욕구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갖는 욕구다. 욕구의 차원을 이렇게 나누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 인간의 자유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알콜중독자는 아무런 강제나 오류 없이 술을 마시기 때문에, 즉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위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그가 음주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증오하며 치료해야 할 욕구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음주행위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알콜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중독의 경우가 아니어도,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많은 행위들은, 2차욕구가 1차욕구를 승인하지 않는 행위들은,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유로운 행위는 그냥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승인한 욕구에 따라, 즉 2차욕구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이에 관한 보다 세밀한 논의는 Harry Frankfurt를 참고.)
(3) 기예와 덕(432)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예(technē)와 덕(aretē, 여기서는 성품의 덕)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행위 동기와의 연관성이다. 기예는 그것을 발휘하는 동기와 무관하게 발휘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가 돈을 목적으로 의술을 펼치든 재미로 하든 의무감으로 하든 인간애의 동기로 하든 상관없이 의술을 발휘할 수 있고, 그의 의술에 대한 평가는 환자의 치료 여부에 의존한다. 반면에 덕의 경우, 그 행위 자체를 위해서 발휘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덕행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과만으로 그 행위가 덕이 있는 행위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용기의 덕을 발휘하는 행위는, 즉 용기있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아름답기(kalon, 고귀한) 때문에 한 것이지, 다른 속셈이 있어서(진급을 위해서, 애인에게 잘 보이려고, 포상을 바라고 등등) 했다면 그것은 결과와 무관하게 더 이상 덕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둘째로 기예는 의도적으로 기예를 잘못 발휘할 수도 있지만 덕은 그럴 수 없다. 의사가 환자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자신의 의술을 엉터리로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의술이 엉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격과 관련한 문제로 비난받을 수 있지만 의술이 형편없다고 비난받지는 않는다. 덕은 사정이 다르다. 용기의 덕을 지닌 자가, 용기의 덕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 이상 용기의 덕을 지닌 자라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왔다. 기예가 동기와 무관하게 결과에 의해 평가된다면, 일부러 기예를 잘못 발휘한 경우에는 결과가 형편없으니 그런 경우는 기예가 없는 것이 아닌가? 기예는 일종의 탁월함이니 나쁜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 결과를 초래한 솜씨가 기예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결과를 초래한 솜씨가 기예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의 기예(능력)가 형편없다거나, 그가 기예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가진 기예를 발휘하지 않았을 뿐이다. 의사의 예를 보면, 그는 의술을 발휘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으니 인격적으로 비난받을 수는 있지만, 그가 가진 의술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질문은, 덕의 경우도 의도적으로 덕을 발휘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말해 그런 경우는 없다. 덕의 발휘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부러 덕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덕을 발휘하지 않는 게 더 좋은, 더 필요한 상황이라면? 여기서는 질문이 전제하고 있는 덕에 대한 이해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덕을 어떤 상황에서도 실천되어야 하는 율법과 같은 것으로, 무조건적인 명령과 같은 의무조항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덕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했듯이, 마땅한 상황에서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만큼의 감정을 갖고 행위를 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도 더 많은 살인을 막기 위한 상황에서는 어길 수 있다. 음식에 대한 절제도 마찬가지다. 굶어야 마땅한 상황에서는 굶는 게 절제다. 덕을 발휘하지 않는 게 더 좋은, 더 마땅한 상황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이상하다. 그 상황에서 마땅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게 바로 덕이다.
오늘은 7장 <영혼과 정신> 중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차례로 정리해 본다.
(1)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
플라톤의 <파이돈>은 감옥에서 맞는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린 글이다. 그날 심미아스와 케베스는 소크라테스를 찾아 영혼불멸에 관한 논의를 벌인다. 철학자의 최후에 어울리는 주제다. 여기서 플라톤은 자신의 영혼관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소크라테스를 통해 영혼불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증명한다.
1) 순환 논증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상대로부터 생겨난다. 잠드는 것은 깨어있음으로부터, 깨어있음은 잠든 상태로부터 생겨난다. 삶과 죽음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삶은 죽음으로부터 죽음은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삶이 죽음으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엔가 있어야만(희랍인들의 경우 하데스에) 하며, 이것은 죽음 뒤에도 영혼은 다른 삶을 위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죽는다고 해서 영혼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2) 상기 논증
플라톤에게 앎은 곧 상기(anamnēsis)다. 망각했던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게 앎이다. 상기설은 <메논>과 <파이돈> 두 대화편에 나오는데, 전자에서는 앎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후자에서는 영혼불멸의 한 증거로서 상기설이 등장한다. 우리가 살면서 감각으로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는 서로 크기가 같은 것들을 보게 되지만 완벽하게 동일한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같음 자체, 완벽한 동일성 등을 알게 된다. 그런 앎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으니 전생에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망각했던 지식을 상기하여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기는 전생에서의 영혼을 전제한다. 같음 자체(같음의 이데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데아에 대한 앎도 마찬가지로 전생에서 알았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3) 유사성 논증
위의 상기 논증은 인간의 전생을 입증해 줄 수 있지만, 죽음 이후의 내세를 증명하는 논증은 아니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유사성 논증을 펼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가시(可視)적인(물질적인) 것들과 가지(可知)적인(비물질적인) 것들로 구분되며, 가시적인 것들은 서로 결합할 수 있고 다시 해체될 수도 있는 복합적인 것들이지만 가지적인 것들은 불변하는 것들이다. 영혼은 비가시적인 이데아와 같은 종류의 존재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영혼은 신적이며 불사적이고 가지적인 것과 유사하며, 육체는 사멸하고 비가지적이며 변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영혼은 같은 종류인 신적이고 불변하는 이데아와 같은 영역에 존재한다.
유사성 논증에 이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영혼과 그렇지 못한 자의 영혼을 비교한다. 철학자는 살면서 불변하는 가지적 대상(이데아)를 탐구하며 지식(에피스테메)을 추구하는데, 이를 통해 그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자신에게 친숙한 불변의 세계로 떠나지만, 비철학자의 영혼은 평생 육체에 속한 것들을 추구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육체적인 것에 불들려 방황하게 된다. 결국 철학을 한다는 것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며,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4)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
심미아스는 영혼에 대한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뤼라가 잘 조율되었을 때 생기는 현들의 조화를 영혼에 비유한다. 현이 끊어지면 현들의 조화가 깨지듯이 육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영혼 또한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의 육체가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축축함의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 즉 조화가 곧 영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육체의 소멸은 곧 영혼의 소멸을 불러오게 된다.
케베스는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은 거부한다. 마치 옷을 만드는 직공이 여러 벌의 옷을 만들어 입어 옷이 헤어지는 것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해도 결국에는 죽는 것처럼, 영혼이 여러 육체를 통해 윤회한다고 해도 영원히 윤회하지 못하고 소멸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윤회한다고 해서 영혼이 불멸한다는 보장은 못 한다는 말이다.
5) 소크라테스의 응답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미아스의 반론에 답하지만, 그 중 하나만 보자. 뤼라의 경우 현의 팽팽함이 (소리의) 조화의 원인이지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그것과 달리 영혼이 육체의 조화를 유지시키는 원인이다. 뤼라의 현과 조화의 관계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와는 정반대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비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반론이다.
영혼도 소멸할 수 있다는 케베스의 반론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응답한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우연적 성질과 필연적 성질의 구별을 통해 응답한 셈이다. 인간의 키가 크고 작음은 인간에게 우연적 성질이다. 하지만 삼이라는 숫자에 홀수라는 성질은 필연적이다. 눈에게 차가운 성질 또한 필연적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에게 삶은 필연적 성질이며 따라서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응답이 결정적인 논변이 될 수는 없다.
(2) 영혼의 부분들(플라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justice)의 문제를 다루면서 국가의 3 계급과 함께 영혼의 3부분을 논의한다. 그는 영혼의 세 부분이 서로 다른 부분들일 수밖에 없음을 논증한다. 먼저 이성과 욕구의 구별이다. 우리는 갈증을 느낄 때 욕구가 발동하여 물을 마시려 한다. 반면에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이성은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수술 후의 갈증에도 특정 신호가 있기 전에는 물을 마셔서는 안 되는 상황처럼) 동일한 것(물)에 대해 이성과 욕구는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이는 이성과 욕구가 동일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성은 밀어내고 욕구는 끌어당기는데 이 양자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나의 것이 동시에 밀어내면서 끌어당긴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이성과 기개가 같은 부분일 수 없음을, 그리고 기개와 욕구도 같은 부분일 수 없음을 입증하면서 기개는 이성과도 욕구와도 다른 부분임을 보인다.(기개가 이성 및 욕구와 어떻게 분리되는지에 관한 부분은 <국가> 4권을 검토하여 스스로 정리하고 궁금한 것은 질문을 통해 해결하면 좋겠다.)
<참고> 선분의 비유
수업 중 간략히 설명한 <국가> 6권의 선분의 비유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범위를 설명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아래와 같다.
1) 우리의 인식주관의 상태는 크게 의견(독사)와 지식(에픽스테메, 노에시스)로 구분되며 그 구분은 인식주관이 상대하는 대상의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 의견은 가시적인 것들(可視界, the visible, 감각대상)을 상대하여 생기는 것이며, 지식은 가지적인 것들(可知界, the intelligible, 사유대상)을 대상으로 한다. 이 구분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과 동굴 밖의 비유에 해당한다.
2) 의견은 다시 상상과 믿음으로 구분되며 이것들 또한 각기 다른 대상을 상대한다. 전자는 그림자와 같은 상(이미지), 후자는 눈에 보이는 생명체나 물질들이다.
3) 지식은 다시 추론적 사고와 이데아에 대한 앎으로 구분되며, 이 구분 또한 서로 다른 대상을 상대하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는 수학적 대상을 후자는 이데아를 대상으로 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1) 영혼과 육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육체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영혼은 육체의 제1현실태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영혼은 육체의 가능태가 실현된 능력이다. 만일 도끼가 생명체라면 도끼의 절단능력이 도끼의 영혼이다. 눈이 독립된 생명체라면 눈의 시각능력이 바로 눈의 영혼이다. 도끼라는 질료는 가능태이고, 그것의 능력인 절단능력은 제1현실태, 그 절단능력을 발휘하여 장작을 패는 활동은 제2현실태이다. 결국, 육체는 제1가능태, 육체의 능력인 영혼은 제1현실태(제2가능태), 그 능력을 발휘하는 활동은 제2현실태이다. 이처럼 영혼은 육체와 독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2) 영혼과 대상의 일치
영혼의 활동은 크게 감각작용과 사유작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감각능력의 현실태와 감각대상의 현실태가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즉 주체와 대상이 현실태에서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이다. 이를 청각의 예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귀(감각기관) - 청각능력 – 소리를 들음/소리가 남 – 소리를 내는 능력 – 종(감각대상)
(가능태) (제1현실태) (제2현실태/제2현실태) (제1현실태) (가능태)
능동자인 감각대상의 제2현실태와 수동자인 감각기관(인간)의 제2현실태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 “종소리가 들린다(난다)”는 사태와 “나는 종소리를 듣는다”는 사태는 동일한 사태를 두 측면(능동자의 측면, 수동자의 측면)에서 본 것일 뿐이다. 양자는 동일한 하나의 사태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의지 개념에 관해(402쪽),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욕구 개념에 관해(408쪽) 검토하고, 8장 윤리학으로 넘어간다.
스토아학파는 공동원인과 보조원인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두 마리 황소가 쟁기를 끄는데 순전히 한 마리가 끌지 않고 두 마리가 함께 끈다면 두 황소는 공동원인이다. 그리고 혼자서도 들 수 있는 짐을 드는데 내가 돕는다면 나는 보조원인이 된다. 어떤 사건이나 상태의 원인을 하나로 지정하면 자주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연쇄가 아니라 관계망이다.
원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불교의 인연(因緣)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 원인 내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참나무가 생겨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도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도토리는 인이다. 그러나 도토리만으로 참나무가 생겨날 수 없다. 도토리가 싹이 트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토양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이 연이다. 토양이 수분을 갖추기 위해서는 비가 와야 하고, 비가 오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연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면 인연의 그물망, 이른바 인드라망이 된다. 삼라만상이 그물과 같이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 앞에 한 그릇의 밥이 오기까지 온 우주의 공덕이 있음을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인연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2) 인과적 결정론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 없이 어떤 사태가 발생할 수는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에 적용하면 결정론에 도달한다. 유물론의 경우, 이러한 결정론을 피하기 어렵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싹이 보이나 그 문제의식이 명료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을 계승한 에피쿠르스나 스토아학파에 이르러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의 인과법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로 보는, 다시 말해 물질세계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도 물질적 존재로 보는 유물론의 경우, 인간의 정신이 갖는다고 여겨지는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를 마련하기 어렵게 된다. 뇌신경의 물리적 변화가 곧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대과학의 기본적인 관점 또한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모든 물리적 변화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게으름의 논증(Lazy Argument)
이러한 결정론을 서양 고대에는 운명론이라고 부른다. 운명론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스토아의 대응에 대해 잘 정리된 키케로의 <운명에 관하여>를 보면, 운명론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게으름의 논증이 등장한다. 만일 나의 삶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미 정해진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면 나는 어떤 일도 할 이유가 없게 된다. 케니의 예를 바꿔 우리의 고등학생 사례를 들어보자. 원인 없는 일은 없다는 보편적 결정론을 받아들인 고등학생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만일 대학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대학에 갈 것이다. 대학에 못 갈 운명이라면 아무리 공부해도 못 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공부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사례는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 오래 살 운명이라면 내가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나는 살 것이다. 아파도 치료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내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걸어가도 우승하게 될 것이다. 등등.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게으름 논증이다. 학교에서 운명론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반론이다.
게으름 논증은 결정론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반응이다. 결정론은 기본적으로 인과의 법칙을 충실하게 존중한다. 공부 안하고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다른 요행의 원인이 없다면 인과율에 어긋난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다는 사실은 내가 그럴 만큼의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내가 대학에 합격할 운명이라는 말은 내가 그만큼 공부를 할 운명이라는 것을 포함한 말이다. 스토아철학의 대표적 이론가인 크리시포스는 이런 사태를 복합적 사실이라고 부른다. 복합적 사실은 복합적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으름 논증은 결정론의 핵심인 인과율을 무시하고 있다는 오류를 범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결정론의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과의 사슬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위의 고등학생의 반응은 자신이 인과의 사슬에서 빠져나온 듯이 말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가 대학 합격의 선행 원인이라는 사실은 뺀 것이다. 대학 합격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사실인데 말이다. 너는 대학에 합격할 운명이야, 라는 말은 너는 열심히 공부할 운명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합격을 위해서는 다른 원인들의 작용도 필요하지만.
(4) 결정론과 자유
결정론이 일으키는 윤리적인 가장 심각한 문제는 행위자의 자유의 여지가 사라지며,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팽이의 비유를 더 살펴본다. 팽이가 돌아가는 외적 원인은 아이가 팽이를 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 원인만으로 팽이가 돌지는 않는다. 팽이는 잘 돌아가는 내적 성질을 갖기 때문에 돈다. 팽이의 내적 본성은 팽이가 돌아가는 공동원인이 된다. 팽이의 내적 본성에 해당하는 인간 행위의 내적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적 자극에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동의(assent)는 외적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강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자발적 동의라는 것이다. 이것이 행위자의 자유와 책임의 여지를 마련해주는가?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자유 개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1) 무차별의 자유(liberty of indifference)
행위자에게 행위의 책임을 물으려면 행위의 순간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 행위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자유를 무차별의 자유라고 부른다. 행위자의 선택 이전에는 무차별의 상태에 있다는 의미인 듯하다. 자유가 오직 이런 의미만을 갖는다면 스토아학파는 자유의 여지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사태는 이미 결정된 대로 진행될 뿐이기 때문이다.
2) 자발성의 자유(liberty of spontaneity)
행위자가 그 행위를 원해서 자발적으로 행한다면 그는 자발성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토아학파의 결정론은 자유의 여지를 확보한다. 덕을 갖춘 인간은 자신의 성품에서 비롯한 동의에 의해 행위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원인이 행위를 촉발하지만 그것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자발성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율적 행위를 한다.
이러한 자발성의 자유를 잘 보여주는 비유가 수레에 묶인 개의 비유다. 수레에 묶인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할 수도 있고, 자발적으로 따라갈 수도 있다. 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으로 따라가느냐 억지로 끌려가느냐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수레가 가는 방향을 따라가게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개는 자발성의 자유를 누린다. 자유는 사건의 바꾸는 게 아니라 사건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운명의 수레를 기꺼이 따라가는 자는 자유롭지만, 저항하는 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발성의 자유에 대한 현대적 옹호는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를 참고하면 좋겠다.)
(5) 반론
결정론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입장을 흔히 양립론(compatibilism)이라고 부르는데 스토아학파 또한 여기에 속한다. 양립론에 대해 강한 결정론에서는 반론을 제기한다. 성품에 따른 동의 여부 역시 이미 결정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수레와 개의 비유를 보자면,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개와 억지로 끌려가는 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니 자발적 동의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현대에는 자유와 결정론에 대해 철학적 논의에 아니라 과학자들도 참여한다. 인과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뇌의 신호와 정신적 선택(의도)의 시간적 순서를 실험한 리벳(Libet, 1983)을 참고하면 좋겠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해 케니는 뒤의 7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검토하고 있는데(406쪽) 이 논의 또한 현대에도 이어지고 흥미로운 이론이다. 예습하면 좋겠다.
오늘은 스토아학파의 인식론과 이것을 비판하는 회의주의에 대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일부를 검토했다. 수정한 오역은 생략하고 내용만 간략히 정리한다.
(1) 지식(앎), 의견(믿음), 그리고 그 사이의 인지(파악, 포착, katalepsis)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이래 전통적인 구별이 된 지식(에피스테메)과 의견(독사) 사이에 인지(카탈렙시스)라는 중간 단계를 넣는다.
1) 지식(앎)은 절대 틀린 것일 수 없다는 확신을 동반한다. 물론 이 표현은 주관적 관점에서의 마음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한 주관적 확신은 증거와 검증 등의 검토를 통해 뒷받침되기에 생겨난 확신이다. 그래서 내가 P를 안다는 것과 P가 거짓이라는 것은 함께 할 수 없다. 인식의 최고 단계인 진리에 대한 파악이라고 할 수 있다.
2) 의견(믿음, 독사)은 앎과 같은 확신이 결여되었지만 내가 인정하는 인식의 수준이다. 내가 P를 믿는다(의견을 갖는다)는 것과 P가 거짓이라는 사실이 공존할 수 있다.
3) 인지(카탈렙시스)는 지식만큼의 확고한 판단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단지 의견이 아니라 거짓일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닌 인식의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 보다 확실한 는증과 검토를 거치면 지식에 이르게 된다. 인지는 인지적 현상(phantasia kataleptike)에 대한 동의인데, 인지적 현상은 나(인식주관)의 감각이나 이성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상이며,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인상에만 동의를 하며, 그 동의가 바로 인지이다.
(2) 인상과 동의
여기서 잠시 전 시간에도 언급한 스토아학파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우리(인식주관)에게 인상으로 다가온다. 인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왜곡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참된 인상에 동의하고, 거짓 인상을 거부하여야 한다. 이성에 의한 동의 여부에서 인간의 자유가 발생한다. 나에게 드러나는 인상 자체는 어쩔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어떤 판단을 하는지는 나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 인상이나 수용(동의)하는 게 아니라 인지적 인상만을 수용해야 한다. 물에 반이 잠긴 막대기의 인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 막대기는 꺽여있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그런 인상에 동의하면 곤란하다. 이는 감정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욕적인 언사에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사태 자체(엄밀히 말하면 사태가 드러낸 인상)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내가 그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분노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불교의 12연기와 유사한 구도를 갖는다. 대상과 나의 만남(촉,觸)은 나에게 수(受, 느낌)를 일으킨다. 이 수(미세한 느낌)가 바로 스토아의 인상과 유사하다. 이 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여기까지는 아직 감정이라고 할 수 없다. 감정의 싹이라고난 할까? 이 수의 미세한 느낌에 반응하는 것이 애(愛, 갈애渴愛)다. 좋은 느낌은 갖고 싶고 싫은 느낌은 거부하고 싶은 상태가 바로 애인데, 여기서부터 감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놓지 않고 집착하는 상태가 취(取)다. 이 감정의 불길은 그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로 변하여 새로운 나를, 나의 업(karma)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유(有)다. 오랜 명상 수행을 하면 수의 단계에서 그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리게 된다.
스토아철학에서 자유는 주어진 인상에 동의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단계에서 나타난다. 나의 몸을 비롯한 외부 세계는 인과의 법칙, 로고스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성)은 그런 세계에 대한 나의 판단과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3) 회의주의와 스토아의 대응
회의주의자는 스토아의 인지적 인상 또는 참된 인상이 거짓된 인상과 과연 구별가능한지를 문제삼는다. 마치 내가 쌍둥이 형제를 보고 착각할 수 있듯이, 거짓된 인상을 보고 참된 인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회의주의자는 스토아가 주장하는 모든 인지적 인상이 사실은 거짓된 인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스토아의 응답이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identity of indiscernibles)’ 주장이다. 완전히 식별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같은 것, 즉 하나라는 말이다. 회의주의자가 말한 쌍둥이의 예를 보면, 우리가 잠시 착각할 수는 있지만, 쌍둥이 형제가 완전히 동일하여 식별불가능하지는 않다. 쌍둥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상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동일할 수 없다. 아무리 같아 보여도 반드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공간적 좌표라도 다르다. 지금 내가 구별하기 어려워도 원리적으로 식별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일 완전히 식별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같은 것, 하나의 것이다.
(4) 현상을 대하는 두 입장
현상(인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어떤 현상도 그것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참임을 보증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앎(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회의주의자들이 취하는 인식론적 비관론이다.
그러나 모든 인상이 우리를 속이는가? 물에 반이 잠겨 꺾인 나무의 인상도 있지만 모든 인상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성을 통해 인상들을 분류할 수 있고 참된(인지적) 인상에 동의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스토아철학의 인식론적 낙관론이다.
(5) 장소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시간 절대공간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다.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빈 공간은 없다. 공간은 무엇이 있는 자리(place)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간 공간 개념은 뉴턴 역학이 전제한 유클리드적인 수학적 공간과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현대 물리학에 가깝게 보인다. 그렇다고 그의 시간 공간 개념을 과학적 선구라고 평가할 일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간(장소나 자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만)은 질적으로 무차별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두 특정한 물질이 자리하는 장소다. 아래는 무거운 것들의 자리고 위는 가벼운 것들의 자리다. 무거운 돌이나 흙이 아래를 향하고 공기나 불이 위로 향하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방해가 없다면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물질의 본성 중 하나다.
(1) 202. 로크가 말하였듯이, ‘신은 인간을 단지 두 발로 걷는 수준으로 창조하지 않았으며, 인간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임무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맡겼다.’
이렇게 바꾸자. ‘신은 인간을 단지 두 발로 걷는 수준으로 만들고 이성적으로 만드는 임무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맡긴 것은 아니다.’
희랍어
라틴어
영어
한국어
ousia
substantia
substance
실체(무엇)
poson
quantitas
quantity
양(얼마만큼)
poion
qualitas
quality
질(어떠함)
pros ti
relatio
rerative/relation
관계(어떤 것에 얽힘)
pou
ubi
where
장소(어디에)
pote
quando
when
시간(언제)
keisthai
situs/positio
to be in a position
위치, 상태(어떻게 놓여있음)
echein
habitus
to have
소유(가짐, 지님)
poiein
actio
to do/to make
능동(입힘)
paschein
passio
to be affected
수동(입음)
(2) 214 – 215. <범주론>
(3) 253. 겸손
영어 modesty를 보고 겸손이라고 번역한 듯. 4주덕(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하나인 절제(sōphrosynē)를 의미한다.
(4) 267. 하지만 이상적인 정의가 무엇인지를....또한 어떻게 그것이 이데아의 체계에서.... 변증술의 임무에 속한다.
이렇게 바꾸자. ‘..... 또한 그것이(이상적인 정의가) 최고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가 주재하는 이데아들의 체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갖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변증술의 임무에 속한다.’
(5) 272. 기억은 경험으로 구성되며
기억은 경험을 구성하며
(6) 273. 철학적 지혜
sophia에 대한 번역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 한국어 번역본을 참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구에서도 이것을 wisdom으로 번역하는 게 오랜 관행이고 여전히 대세다. 케니는 이런 관행을 이제는 고치자며, understanding으로 바꾼다. 소피아는 이론적 탐구의 영역에서 지적인 덕(탁월함)을 잘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자가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지혜롭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나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를 가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론지(이론적 앎), 또는 완전지(에피스테메와 누스가 결합된 완전한 이론적 앎의 상태)라고 옮기는 게 좋겠다.
<참고>
반즈(Jonathan Barnes)가 1984년에 아리스토텔레스 영어 번역 전집을 개정하여(여러 권위 있는 번역자들이 참여) 옥스퍼드에서 출판하였다. 케니와 반즈는 2014년에 그 전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관련 책들만 모아서 많은 부분을 수정하여 출판하였다.(단톡방에 책 파일을 올릴 예정) 두 사람은 책 서문에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였는지 밝히고 있는데, 그 일부(p.20)를 발췌하여 아래에 번역과 함께 소개한다. 나는 학위논문(1999년)을 쓸 때부터 지혜(wisdom)라는 말은 소피아의 번역어로 쓸 수 없고, 지혜는 프로네시스에만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기존의 영어 번역과 다르게 프로네시스는 실천적 지혜(실천지)로, 소피아는 이론지(완전지)로 옮겼는데, 지금 보면 케니와 반즈가 수정한 것과 그 의도가 일치한다, 나는 두 사람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내 논문을 보았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다. 아레테, 에우다이모니아, 에피스테메, 로고스 등 다른 용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정리하여 소개할 것이다. 마음이 급한 사람은 내가 논문에서 설명하고 있으니 요청하면 제공할 것이다.
A few examples may indicate where we have replaced the
earlier versions of technical terms. For ‘arete’ we have reverted
to the traditional ‘virtue’ in place of the ‘excellence’ introduced
by Barnes in the Revised Oxford Translation. We
have preferred ‘correct reasoning’ to ‘right reason’ for ‘orthos
logos’. As for ‘phronesis’ and ‘sophia’, for centuries the standard
translations were ‘prudence’ and ‘wisdom’. But ‘prudence’
now means something like ‘caution’, and the expert knowledge
of scientists and philologists is no longer called ‘wisdom’,
which has acquired an overwhelmingly practical sense.
So we have opted for ‘wisdom’ for ‘phronesis’ and ‘understanding’
for ‘sophia’. It goes without saying that neither of
those two translations is an exact fit—not even for the most
part or in the majority of cases. The same is true of ‘virtue’
and ‘arete’, of ‘happiness’ and ‘eudaimonia’, and of any number
of other pairings.
(ChatGPT 번역)
몇 가지 예를 들어, 우리가 전문 용어들의 이전 번역을 어디에서 수정했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arete’에 대해서는, Barnes가 Revised Oxford Translation에서 도입한 ‘excellence(탁월성)’ 대신, 전통적인 번역어인 ‘virtue(덕)’로 다시 돌아갔다. ‘orthos logos’에 대해서는 ‘right reason’보다 ‘correct reasoning(올바른 추론/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택했다.
또한 ‘phronesis’와 ‘sophia’의 경우, 수세기 동안 표준 번역은 각각 ‘prudence’와 ‘wisdom’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prudence’는 대체로 ‘신중함’ 정도의 뜻을 가지게 되었고, 과학자나 문헌학자의 전문적 지식을 더 이상 ‘wisdom’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이 말은 압도적으로 실천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phronesis’에는 ‘wisdom(지혜)’을, ‘sophia’에는 ‘understanding(이해)’을 택했다. 물론 이 두 번역어 가운데 어느 것도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대체로, 혹은 대부분의 경우에도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이는 ‘virtue’와 ‘arete’, ‘happiness’와 ‘eudaimonia’,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대응 번역어 쌍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7) 281. katalepsis를 ‘인상’이라고 번역하였으나 고쳐야 한다. 파악, 포착, 이해, 인지 등의 용어가 좋겠다. 영어 번역에서는 grasp, apprehension, comprehension 등을 사용하며, 케니는 조금 오래된 번역어인 cognition을 투덜거리며 선택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 스토아 인식론과 회의주의 사이의 논쟁을 살펴볼 때 다시 검토하겠지만, 여기서는 스토아 인식론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만 소개한다.
외부대상(물체나 사태)은 우리에게 인상(phantasma, 영 impression, appearance)을 남긴다. 우리는 이 인상에 동의하여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인상은 외부세계를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잘 선택(동의 또는 거부)해야 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확실한 인상을 선택하여 강하게 동의하는 것이 바로 카탈렙시스(파악, 이해, 인지)다. 이것을 다시 검토하여 온전한 지식에 이르게 되면, 즉 더 강하게 확신하여 동의할 때 비로소 에피스테메(지식, 앎, knowledge, knowing)라고 한다. 플라톤이 의견(doxa, opinion, belief, 믿음)과 지식(에피스테메)을 구별한 것에 스토아는 카탈렙시스(파악, 이해)라는 중간 단계를 넣었다.
좋은 정체와 나쁜 정체를 구별하는 기준은 국가의 통치가 공동선(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느냐 통치자의 이익을 위하느냐에 따른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좋은 정체는 통치자의 수에 따라 왕정, 귀족정(최선자정체), 혼합정(중간정)이고, 이것이 변질된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이 나쁜 정체다. 과두정과 민주정이 당시의 가장 흔한 정치형태이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정체의 분석과 평가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두 정체의 외면적 차이는 통치자가 소수냐 다수냐이지만, 실제로는 부자의 통치와 빈자의 통치로 구별된다. 즉 경제적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다.
정체의 차이는 그 정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도 구별된다. 과두정은 부유함을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부자들이 국가에 기여하는 자이고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므로 정치적인 권리를 가지며 빈자들은 정치에 참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반면에 민주정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자유로운 시민이면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민주정에도 여러 여러 종류가 있어 재산의 정도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이 달라진다.
민주정은 왜 나쁜 정체인가? 시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오직 다수인 빈자들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며, 시민의 자유를 최고의 원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유는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면, 인간의 나쁜 습성이나 욕구까지 인정하는 셈인데,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옳지 못한 욕구까지 요구하는 민주정은 좋은 정체일 수가 없다.
(2) 도구들이 자동기계처럼 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이론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히 노예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그가 모든 노예를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예컨대 전쟁 포로로 노예가 된 사람까지 노예로 마땅하다고 본 것은 아니지만, 본성적으로 이성적 능력이 부족한 자들은 노예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다는 이른바, 본성적 노예에 관한 이론은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다. 그는 노예를 살아있는 도구라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는 만일 도구들이 자동기계처럼 스스로 알아서 일을 한다면 하인이나 노예가 필요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가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많은 일을 하는 자동기계들이 인간의 일을 대신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일을 안 하는가? 고대 희랍의 노동자나 노예보다 일을 적게 할까? 그 높은 생산력으로 이제 우리는 모두 희랍의 시민들처럼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적 활동에 힘을 기울이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강조하는 여가의 삶을 누리고 있는가? 왜 그렇지 못할까?
(3) 영혼과 정신도 물질이다
스토아학파는 유물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도 모두 물질적이다. 주목할 부분은 그들이 왜 정신을 물질이라고 보았냐는 점이다. 그들은 만일 정신이나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면 물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과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후에 데카르트 이원론의 가장 큰 난점을 예견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감정에 대한 세네카의 분석
우리는 외적인 사태(내 몸의 상태까지 포함하여)가 곧바로 나의 감정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컨대 상대가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면 나의 몸은 바로 반응하여 심장이 뛰고 혈압이 상승하면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세네카는 사물이나 사태가 나에게 일으킨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상(impression, phantasia)이라고 본다. 이 인상을 나의 마음(정신)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발생한다. 상대의 말에 따른 인상을 나의 정신이 수용하면, 즉 인정하면 예컨대 분노의 감정이 발생한다. 수용하지 않으면 분노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 감정은 사태가 일으킨 인상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존한다. 그래서 감정은 판단이다.
감정이 판단이라면 다른 판단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판단인지 잘못된 판단인지 평가의 대상이 된다. 지구가 네모나다는 판단처럼 잘못된 판단이라면 고쳐야 한다. 잘못된 판단에 따른 감정 역시 고쳐야 한다. 대부분의 감정은 그릇된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게 스토아의 평가다.
<오역 바로잡기>
(1) 151. (아테네의) 헌법 → 정체. 영어 constitution을 보고 헌법이라고 번역했으나, 이 경우에는 헌법이 아니라 정체(정치체제)다.
(2) 160.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끌어당기는... →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끌어당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12권에서 신이 만물을 움직이는 방식을, 사랑의 대상(사랑받는 자)이 사랑하는 이를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나의 애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를 자신을 향하도록 이끈다. 물론 이런 운동이 모두 자각적인 것은, 즉 나는 신을 사랑한다고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충동이 번식을 통해 신(영원함)에 다가가려는 의식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충동 자체가 신을 지향하는 활동이라는 말이다.
(3) 188.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정념이라고 할 수 없다. → 사물이 스스로 드러낸 인상에 영향받은 것은 정념이 아니다. 이렇게 고쳐야 뜻이 명확해지고 ‘인상’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살아난다. 빼먹으면 안 되는 용어다. 그리고 정념(passion)은 오늘날의 감정(emotion)과 욕구(desire)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나중에 다시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 보충 >
지난 시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질문들
(1) 195. “클레멘스는 플라톤을 이원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이단설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자로 여겼으며...” 질문은 플라톤도 이원론자인데 어떻게 이원론적 주장에 대항하는 동맹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클레멘스가 이원론적 이단이라고 지목한 교파는 영지주의(gnosticism)인데, 영지주의는 세계를 선한 영적 세계와 악한 물질 세계로 나누는 이원론이다. 이 두 세계는 원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실재이며, 인간의 경우에도 영혼과 육체는 선과 악으로 분리되며, 악한 물질(육체)의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영지주의의 이원론과는 다르다. 이데아의 세계와 물질적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만, 물질적 세계는 악이 아니라 단지 이데아의 순수성을 결여한, 부족한 세계일 뿐이다. 이데아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악이란 선의 결여나 부족일 뿐이지 그 자체로 실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물질세계가 선한 신의 창조의 결과인 것과 통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기독교 철학으로 가져다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선과 악을 독립된 것으로 보는 원리적인 이원론이 아니다. 선의 이데아라는 하나의 근원적인 원리에 따라 세계가 구성된 것처럼, 기독교에서도 신의 선한 의지에 의해 세상이 창조된 것이다. 이원론과 일원론을 도식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점을 잘 일깨워준 좋은 질문이었다.
(2) 왜 민주정은 나쁜 정체들 중 제일 괜찮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정체가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주정이 과두정이나 참주정보다 항상 더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어떤 민주정이고 어떤 과두정이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그는 민주정과 과두정을 여러 형태로 분류하는데, 최악의(극단적) 민주정은 온건한 과두정보다 훨씬 나쁘다. 최악의 민주정은 법보다도 민중의 결정에 따라 통치하는 정체다. 법이 지배하는 민주정에서는 시민들 중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법이 최고권력을 갖지 못하면 민중선동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민중들은 선동에 빠져 독재하는 집단이 되어버린다. 그런 민주정은 참주정과 닮았다. 참주에게는 아첨꾼이, 민중에게는 선동가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런 정체는 법에 의해 통치하는 과두정보다 더 나쁜다. 과두정에서도 법이 아니라 족벌들이 통치하는 경우에는 최악의 민주정과 마찬가지로 참주정에 가깝다.
민주정과 과두정이 좋은 정체에 근접하는, 그리하여 안정을 꾀하는 방법은 중간정(혼합정-민주정과 과두정의 혼합)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민주정이 부자들의 권리를 상당 부분 인정하여 함께 통치하거나, 과두정이 가난한 시민들이 가능한 정치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드는 방법이다. 중간정에 얼마나 수렴하는가에 따라 과두정이나 민주정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근접할수록 좋아진다. 중간정이 되면 좋은 정체가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매우 드물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정이 대체로 과두정보다 괜찮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과두정이 민주정보다 더 쉽게 분열되고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 과두정은 부를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놓는 정체인데, 부의 속성상 권력을 함께 나누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자는 빈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뿐만아니라 부자들끼리도 다투기 쉽다. 반면에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정의 빈자들은 단지 부자들과만 갈등한다. 그래서 과두정보다는 민주정이 안정적이다.
민주정이 과두정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능력은 부족해도 다중의 모임이 서로를 채울 수 있다. 마치 부자 한 사람이 마련한 잔치보다 여러 사람이 하나씩 음식을 준비하면 더 푸짐한 잔치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럴만한 수준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야 하지 무조건 많이 모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또한 전문적인 안목이 반드시 훌륭한 평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판단이 중요할 수 있다. 음악을 연주하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은 연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잘 평가할 수 있고, 음식의 맛이나 건축가가 지은 집도 전문가보다 직접 먹어보고 살아본 사람이 더 잘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모든 대중들의 의견이 존중할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만한 수준이 되는 대중들이어야만 한다. 그는 이것도 매우 드문 경우라고 본다. 대중들은 대체로 공동선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특히 장인(기술자)들은 자신들의 관점과 이익에만 충실한 습관이 형성되어 공동선을 무시하기 쉬우니, 시민의 자격을 주지 않는 게 더 좋다고 그는 말한다. 여러 직종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이익에만 충실한지는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다.
오늘은 저녁에 직장에서 일이 생기거나 이동 시간이 부족한 샘들이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반장샘도 출장을 갔다. 김채수 샘, 김예슬 샘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코로나 시절 풍경이 될 뻔했다.
< 오역 바로잡기 >
(1) 131쪽 두 번째 문단, ‘더욱이 형상은 인식, 즉 다른 것들의....’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다른 것들, 즉 감각적 실체들의 인식에도 존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바꾸자. ‘그것들(영원불변하는 형상들)은 다른 것들에 대한 인식에도, 존재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부연설명하자면, 모든 이론(여기서는 이데아론)은 현상(감각적 대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데아가 개별적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 어떻게 인식 가능한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2) 같은 문단, ‘마치 어떤 문제를 회의함으로써....’
역자가 doubling을 doubting으로 잘못 보았다. ‘그것을 두 배로 만들어...’로 고치자. 이데아론은 설명되어야 할 것들에 해당하는 만큼의 이데아들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두 배인가? 설명되어야 할 대상들(감각대상)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강독시간에 설명했으니 모두 잘 기억하리라 믿는다. 다음 시간에 복습 겸 확인할 확률이 높다.
(3) 139쪽, ‘이론적인 학문은 .... 그 자체로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분야이다.’
‘지식과 이해 그 자체를 위해’라고 고치자. 사소하지만 이론적 지식을 왜 추구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하려면 고치는 게 좋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다는 점은 널이 알려져 있다.’라는 말은 원문에 없으니 지우자. 그냥 ‘특히 윤리학과 정치학이 이에 속한다.’
제작학, 실천철학, 이론철학의 구별은 어떤 기준으로 분류되는가? 그 목적에 따라 나뉜다는 점이 중요하다.
(4) 141쪽, 첫 문단, ‘사람의 특성, 청중들의 태도’
특성은 성품이라고, 태도는 마음상태라고 옮기는 게 좋다. 영어 원문에서는 character와 mood, 말하는 사람의 성품과 청중들의 기분이다. 희랍어 원문은 ēthos와 diatheinai인데, 전자는 성품이나 성격(영어의 ethics이 여기서 나왔다)을, 후자는 청중들의 마음이 놓여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간단히 청중들의 마음상태다.
(5) 141쪽, 두 번째 문단, ‘예를 들어 그는 분노를.... 감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장이 길어서 역자가 두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렇게 바꾸자. ‘예를 들면 그는 분노를, 우리 자신이나 친구에 대한 부당한 모욕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복수를 하려는, 고통을 동반한 욕구라고 정의한다.’ 어떤 욕구인지를, 즉 복수를 하려는 욕구인지를 잘 드러낸 번역이어야 한다.
(6) 141쪽, 아래 인용문,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하여 화를 내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를 지우자. 그냥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지적하기 때문에 더 모욕감을 느끼고 화를 낸다는 의미다.
< 주목할 내용 >
(1) 141쪽 설득의 3요소 ;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1) 화자의 성품(에토스) ; 같은 말을 해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설득의 힘이 다르다. 진실성이 없는 성품의 사람이 말하면 믿기 어렵다. 정직한 사람의 말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습관에 의해 형성된 성품의 힘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마음상태라고 하고 뒤이어 이것을 감정(pathos)이라고 친절하게 바꿔 말한다. 듣는 사람의 현재 감정이 어떤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같은 말을 들어도 괴로울 때, 슬플 때, 사랑할 때, 미워할 때, 같은 판단을 내리지 않기 쉽다.
3) 말이 지닌 합리성, 즉 로고스다.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2) 141쪽, 감정이란 무엇인가
20세기 후반부터 풍성하게 논의되는 현대의 감정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정의 지향성(intentionality, aboutness)이다. 우리의 다른 의식과 마찬가지로 감정 또한 ‘무엇에 대한’ 것이며, 그 무엇(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분노의 예를 들어보자. 분노는 상대가 나(또는 나와 가까운 사람, 내가 일정 부분 동일시하는 사람)를 부당하게 모욕했다는 판단을 함축한다. 그래서 나와 판단을 달리 하는, 즉 부당하지 않거나 모욕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는다. ‘부당한’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분노의 대상이 다른 사람들은 정의관이 다르기 쉽다.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지에 대한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정의관을 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분노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가 하는 말보다도 그의 감정을 엿보는 게 정확하다. 말보다는 감정이 그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르로의 감정을 돌아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나의 생각이나 말보다 나의 감정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다. 감정 철학은 뒤에서 스토아철학을 공부하면서 더 세밀히 검토할 부분이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12주차(2026. 06. 04)
오늘은 스코투스의 윤리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예정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존재증명의 일부를 공부했다. 앞의 두 가지만 정리한다.
(1) 행복과 정의에 관한 스코투스의 견해(410쪽 이하)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행복(최고선)을 정점으로 한 도덕이론을 전개한 것과 달리 스코투스는 신이 규정한 법을 중심으로 한 도덕이론을 구성하였다. 그는 아퀴나스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복을 위한 것이며 덕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성적 경향을 지닌 것은 맞지만, 인간에게는 정의를 추구하려는 또 다른 자연적 경향이 있다고 본다. 도덕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과 무관하게 도덕법칙을 지키려는 성향에 의해 성립된다.
스코투스의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퀴나스에 이르는 소위 행복주의(eudaimonism) 윤리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칸트적 관점의 싹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행복 개념의 변화다. 행복 개념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행복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복을 지향하며, 행복은 궁극목적으로서 최고선이다. 용기의 덕을 발휘하며 목숨을 거는 것도 결국은 행복을 위한 것이다.(물론 사람들이 지향하는 행복이 모두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행복이라고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행복이 아닐 수 있다. 행복(최고선)이 과연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한 윤리적 입장이 생겨난다.)
반면에 스코투스의 관점에서, 행복은 최고선이 아니며 도덕과 갈등할 수도 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다. 행복은 선택 가능한 목적 중 하나가 된다. 행복 개념에 대한 이러한 두 입장은 오늘날의 행복 개념에도 혼재되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된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예정설(424이하)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이 천국에 갈 지 여부는 오직 신의 은총에 달려 있다. 또한 신의 은총은 단지 천국에 이르는 문제뿐 아니라 현세에 어떤 삶을 사는냐는 문제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의지가 나약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올바르게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길게 가지 않는다. 결국 현세에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 또한 신의 은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구에게 은총이 주어지느냐이다. 은총은 인간들의 공적에 따라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은총이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은총은 오로지 신에게 달려있다.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다. 불합리한가?
이런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 당시부터 이미 논쟁의 대상이었다.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상반된 주장을 한다. 아담의 죄는 사악한 행위의 사례를 보여주었을 뿐이지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아담의 죄에 의해 약화되지 않는다.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며, 이교도도 유덕한 삶을 산다면 내세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기독교도들은 이보다 더 나은 천상에서의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이러한 특별한 은총도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자들을 예견한 신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으나, 다른 수도사들의 불평은 여전하였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옳다면 수도원의 규율과 책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말이다. 은총을 받도록 예정된 자라면 내버려두어도 될 것이고, 은총을 받지 못할 자라면 아무리 책망을 해도 여전히 비행을 저지를 것이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예정설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오직 신의 은총에 따를 뿐이다. 인간은 은총을 거부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다. 처음 기독교의 부름을 받는 것도, 책망을 통해 더 나은 생활로 이끄는 것도 모두 신의 은총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던 초기의 입장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니 말이다.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누어질 뿐이다.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신의 뜻에 따를 뿐이다. 이러한 후기의 입장은 이후 기독교의 역사에, 특히 개신교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은총예정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신의 은총이 인간의 공적에 따라 달라진다면, 인간의 노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일을 잘하는 자에게 성과급을 주는 식이라면 그것은 회사를 경영하는 식의 생각일 뿐이다.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은총은 선물과 같은 것이지 보상이 아니다. 보상과 같은 식으로 은총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지닐 것이다. 내가 잘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말이다. 모든 영광과 감사는 오직 신에게만 돌려져야 한다.
그렇다면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이 그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은총을 내리지 않았다고 나쁜 걸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뿐이다. 그들은 원죄에 따른 마땅한 결과대로 살아갈 뿐이다.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모두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은 그 일부를 구원하기 위해 은총을 내린 것이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도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범사에, 늘, 감사할지어다.
<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은 생략합니다. >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11주차(2026. 05. 28)
오늘은 중세철학 제8장 <윤리학> 중에서 아퀴나스의 도덕철학까지 공부했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
고대 희랍의 윤리학은 모두 최고선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최고선은 삶의 궁극목적이며, ‘잘 사는 것’이고 행복이다. 문제는 이 최고선, 즉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중세의 도덕철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코투스 등 소수의 철학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최고선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도덕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세에 신과 만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현세에서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오직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준다.
그러면 현세에서의 도덕적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세의 삶은 내세의 희망을 위한 수단의 가치를 지닌다. 그 수단을 통해 내세의 진정한 행복을 준비할 수 있다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한 행복 정도는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여행의 즐거움은 그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준비를 아무리 잘 하여도 그것만으로 천국이, 신의 나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은총이 없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2) 아벨라르의 의도의 윤리
아벨라르에게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의도(intention)다. 의도가 선하다면 금지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인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살인하라는 명령은 나쁜 행위를 하라는 명령이지만, 그 명령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선한 의도는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고 해도 훌륭하다. 그가 든 예를 보자. 어떤 두 사람이 모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수용시설을 짓기로 했다. 한 사람은 성공적으로 시설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은 돈을 도둑맞아 짓지 못하였다. 결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모두 칭찬받을 만하다. 의도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의도대로 행위하였느냐의 문제는, 단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한 차이일 뿐이다.
선한 의도와 선한 행위가 동일하게 평가되어야 하듯이, 악한 의도는 악한 행위와 동일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현생의 법질서와는 어긋난다. 우리는 의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해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범죄의 의도만으로 처벌하지는 않는다. 또한 의도 없이 과실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도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완전히 면책을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리는 의도보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아벨라르는 인간의 한계로 설명한다. 인간은 행위로 드러난 명백한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숨어있는 나쁜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최후의 심판은 그렇지 않다.
의도가 중요하다면,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신앙에서 기도교도를 박해하는 일은, 선한 종교적 의도에서 저지른 일이므로 칭찬할 만한가? 이에 대해 아벨라르는 그들의 잘못은 사냥하다가 동료를 짐승으로 잘못 알고 죽인 경우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종교적 의도는 선한 의도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선한 의도를 갖기 위해서는 무지에서 벗어나 참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교도들은 진실을 보기 못하기 때문에 선한 의도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가 의도를 의지와 구별하여, 의지는 욕구에 가까우며 의도는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그의 의도 이론이 지닌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가 지닌 의지적 요소, 즉 목적 지향적 요소와, 인식적 요소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선한 의도까지는 아니어도 선한 믿음만으로 기독교도를 죽인 자들의 죄를 가볍게 보는 그의 가르침, 그리고 행동으로 인해 선해지거나 악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이론은 상스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3) 아퀴나스의 윤리학
(1) 아퀴나스는 선한 의도를 강조하는 아벨라르에게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덕스러운 의도 또는 선한 의지에 의한 행위만이 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위의 선함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잘못된 판단에 따른 잘못된 양심의 경우, 그 잘못의 인식적 오류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죄의 면죄 여부가 달라진다. 그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구별에 의존한다. 개별적 사실에 대한 판단의 오류인 경우에는 죄를 면할 수 있다. 몰라서 그랬다는, 비자발적이었다는 점이 면책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보편에 대한 무지의 경우, 예컨대 간음이 나쁜지 몰랐다는 무지는 면책의 사유가 되지 않는다.
선한 의지는 이처럼 이성의 올바른 판단과 함께 할 경우에만 행위의 선함을 낳을 수 있으며, 또한 그 행위가 적절한 기회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과 마찬가지로 마땅한 상황에 대한 판단의 올바름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프로네시스 없이는 덕이 있을 수 없다는(그 역도 마찬가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이론을 잘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퀴나스의 경우 현명함(prudentia, 희랍어 phronesis의 라틴 번역어)이 없이는 덕스러운 행위가 성립하지 않는다.
(2) 사실적 판단의 오류가 윤리학에 미치는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아퀴나스의 성윤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성윤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남성의 정자가 인간의 씨앗(희랍어 sperma는 동물의 정자(정액)와 식물의 씨앗을 모두 포괄한다.)이며 여성은 양분을 제공할 뿐이다. 여성은 불완전한 남성에 불과하며 이것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을 정당화한다. 이것이 가부장적 질서의 생물학적 근거로서 작동됨은 물론이다.
피임과 자위행위를 동등하게 여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탄생은 수정란에서 시작된다는 오늘날의 과학적 상식과는 다르게, 인간은 정자의 성장에서부터 시작된다(정자가 아직은 영혼을 가진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정액(현미경이 나오기 이전에는 정자와 정액은 구별되지 않는다.)의 무분별한 방출인 자위행위나 정자의 성장을 방해하는 피임은 모두 인간의 가능태를 파괴한, 자연에 어긋나는 행위에 속한다.
정자는 여성의 몸에서 성장을 시작하는데, 임신 후 상당한 시간을 거쳐 먼저 식물적 영혼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동물적 영혼을 지니며, 다시 한참 후에 신이 이성적 영혼을 불어넣으면서 비로소 인간의 영혼을 지닌 인간이 된다. 그래서 낙태의 경우에도 두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을 지닌 태아를 낙태하는 경우에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태아를 낙태하는 경우는 피임이나 자위행위가 저지르는 죄와 동일한 수준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만일 아퀴나스가(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물학적 오류를 깨닫고 수정할 기회를 갖는다면 이에 근거한 자신의 윤리 이론을 수정할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인간의 태아는 수정란에서 시작하며, 수정란은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가 동등한 비율로 섞인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남성 우위의 생각도 바뀔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남성 중심의 질서를 옹호하려고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성차별의 생물학적 근거를 더 이상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편견이 종교적 교리로 성립되면 사정은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피임과 낙태를 동등한 죄악으로 보는 현대 가톨릭의 입장과 이에 반대하여 피임과 낙태 모두 여성의 기본권으로 보는 입장은 둘다 동일한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피임과 낙태는 생물학적으로 동등하게 여길 근거가 없는, 잘못된 과학적 견해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3) 아퀴나스의 경제 이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학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런 점에서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불변의 신성한 체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아퀴나스와의 비교를 통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되, 재산의 획득과 유지에 관하여 매우 엄격한 제한을 한다. 그는 외적 재화의 본성에 입각하여 돈과 재산의 본래적 목적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계승한다.
재산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한에서만 그 정당성이 유지된다. 필요 이상의 재산을 모으는 일은 죄악에 속한다. 외적 재화는 본성상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획득은 필요에 따른 타인의 획득을 방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재화를 둘러싼 게임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이다.
저축할 돈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할 의무를 지닌다. 이는 자선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적 정의의 차원에서, 즉 재화의 본성에 따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경제적으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을 위해 부유한 자들의 재산을 취하여도 그것은 정당하다. 로빈 후드나 임꺽정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정의의 견해는 매우 보수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이자놀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는 구약성서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돈은 물건과의 교환을 위해서 생겨났으며, 교환의 편리성이 돈의 가치이며 본래적 한계다. 돈은 오직 물건과의 교환을 위한 사용가치만을 갖지 그것이 재산 증식의 기능을 가져서는 안 된다.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 원금만을 받아야 하지, 이자를 쳐서 받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 밭은 곡식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지만 돈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 이론은 돈이 돈을 낳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는 너무 먼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오늘날 경제는 나름의 독자적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고중세에는, 경제는 행복(잘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인간의 행복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경제는 더 이상 경제일 수가 없다.(영어 economic은 희랍어 oikonomikos에서 왔으며, 이는 가정을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경제는 우리말 ‘살림’에 가깝고, 그렇게 번역하자는 제안도 있다.) 인간의 행복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경제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자본주의도, 즉 시장이라는 시스템도 인간의 잘 삶에 기여하는 한계 안에서 작동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물음을 아퀴나스는 우리에게 던진다.
< 예고 >
다음 시간이 이번 학기 마지막 시간이다.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과 <신>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검토하고, 그동안 참았던 질문들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10주차(2026. 05. 21)
제8장 <윤리학> 후반부와 제9장 <신> 일부를 정리해본다. 오늘로 고대철학을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 2회밖에 남지 않았지만 중세철학을 공부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
어떤 학자(D. Frede)는, 만약 철학에도 노벨상이 있다면, 맨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에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장이 아니다. 이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점이 아쉽지만, 몇 가지 핵심을 정리하자.
1) 쾌락은 활동이 방해없이 이루어질 때 수반되는 것이다.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쾌락은 결여의 충족에서 온다고 말한다. 배고플 때 식사의 쾌락과 같은 모델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반대한다. 쾌락은 자연적 활동이 방해없이 완성될 때 수반되는 것이다.
2) 쾌락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쾌락이 활동에 수반되는 무엇이라면, 그 활동의 가치에 따라 쾌락의 가치도 결정된다. 선한(좋은) 활동에 수반되는 쾌락은 좋은 것이고, 악한(나쁜) 활동에 수반되는 쾌락은 나쁜 활동이다. 쾌락은 좋은 것이라는 쾌락주의와 그 반대로 쾌락은 나쁜 것이므로 억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는 둘다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데, 이는 쾌락을 모두 묶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3) 덕인은 덕의 발휘에서 쾌락을 느낀다.
행복은 덕에 따른 활동이다. 간단히 덕행이라고 하자. 덕행은 즐거운가? 즐겁지 않다면 어떻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행복을 쾌락이라고 보는 쾌락주의자가 흔히 제기하는 반론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행은 즐겁다고 말한다. 바둑애호가에게 바둑두는 일은 즐겁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노래부르기는 즐겁다. 마찬가지로 덕인은 덕행이 즐겁다. 만일 즐겁지 않다면 그는 덕인이 아니고 그의 행위는 덕행도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4) 덕(aretē)과 자제력 있음(enkrateia)은 다르다.
덕인의 행위와 자제력 있는 사람의 행위는 겉으로는 동일하게 보인다. 하지만 행위자의 내적 상태는 다르다. 전자는 즐겁게 행위하지만, 후자는 즐겁지 않다. 그래서 덕인은 덕행을 하면서 즐겁기 때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제력 있는 자와 달리 억제할 무엇이 없다. 자신의 욕구가 덕의 발휘와 갈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마땅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이성적 욕구와 다른 욕구가 충돌하여 괴롭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 때문에 마땅한 행위를 하고서도 아쉽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다. 칸트의 경우 인간의 기본적인 경향성에서 나오는 욕구는 제거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런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 의무에 따른 도덕적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칸트에게 도덕적 행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에서 보면,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다. 도덕과 행복은 일치할 수 없다. 양자는 갈등의 관계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덕인에게 도덕과 행복은 일치하지만, 칸트가 보기에는 행복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없다. 다음에 칸트를 공부할 때 양자의 차이를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스토아학파의 adiaphora
1) 스토아학파에게 좋은 것은 오직 덕(지혜, 용기, 절제 등등)이며, 나쁜 것은 오직 악덕(무지, 비겁, 방탕 등등)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이른바 아디아포라다. diaphora는 차이를 의미하며, 접두사 a는 부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디아포라는 차이가 없는 것(indifferents)을 의미한다. 즉 가치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건강, 부, 아름다움 등이나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질병, 가난, 추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아디아포라는 가치에 있어서 차이가 없지만, 즉 가치와 무관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자연적으로 선호하거나 기피하는 것들이라는 점은 인정된다. 다만 이런 것들에 의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오직 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부유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부유함에도 불행한 사람은 어찌된 것인가? 건강은? 건강함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악당의 건강함은 악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아디아포라는 우리의 행복을 결정해주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에픽테토스의 용어를 쓰자면,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린 것은 오직 나의 마음이 행하는 것, 즉 믿음(판단), 충동, 욕구, 혐오 등일 뿐이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등이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에 의존하면 나의 삶은 그것들에 종속되며 결국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나의 삶이 돈에 의존한다면 나는 돈의 노예일 뿐이지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아디아포라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챙겨가면서 살아야 한다. 다만 그런 것들에게 결정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도 덕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고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덕은 변하지 않는 나의 내적 상태이므로 덕인은 항상 행복하다.
3) 여기서 스토아의 운명론을 적용하면 더 분명해진다. 나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외적인 상태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될 수밖에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 안 받아들이면? 그래도 사태의 진행은 변함없다. 수레에 묶여있는 두 마리 개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된다. 수레와 같은 방향을 욕구하는 개는 자발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지만, 거부하는 개는 억지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아디아포라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주어진 조건일 뿐이다.
(3) 스토아학파의 감정론
1) 현대 감정철학의 분류에 따르자면, 스토아학파의 감정론은 인지주의(cognitivism)에 속한다. 인지(cognition)와 감정(emotion)을 대립된 관계로 이해하는 근대 이후의 상식에서 보자면 감정을 인지(지적 판단)로 본다는 것은 양자의 대립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셈이다. 근대적 틀에서 보면 감정은 배고플 때 느끼는 허기와 같이 나의 이성과 무관한 육체적 현상이고 어쩔 수 없는 것에 속한다. 그러나 인지주의에서는 감정도 이성적 판단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면 바꾼다. 이제 감정도 마찬가지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과 이성의 대립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국 서로 다른 판단의 대립이 되고 만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감정이 판단이라고 해서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이론적 판단과 같은 유형의 판단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감정을 구성하는 판단은 가치가 개입된 가치판단이다. 감정이란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 내지는 평가판단이라는 말이다.
누가 나에게 바보라고 놀리면 나는 화가 난다. 즉 내가 평가절하되었다는 판단이 화라는 감정의 핵심요소인 것이다. 나의 화는 나의 판단인 셈이다. 누가 아인슈타인에게 바보라고 놀리면 그는 화를 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놀림으로 자신의 지성이 평가절하된다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2) 케니는 여기서 Nussbaum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453쪽 주10) 누스바움은 Upheavals of Thoughts(우리말 번역은 감정의 격동)라는 책에서 감정은 책의 제목처럼 생각의 격동이라고 본다. 감정은 나의 뿌리깊은 생각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생각 즉 판단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감정이다. 그녀는 스토아철학의 감정론을 따라 강한 인지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다. 다만 그녀는 스토아철학의 완고한 성격을 다소 완화시킨 신스토아주의(Neostoicism)로 바꾼다. 흥미로운 책으로 현대의 감정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필독서에 속한다.(읽으시겠다면 참고용 원서 파일을 보내드릴 수 있다.)
3) 간략한 용어 정리.
감정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pathos(복수는 pathē)인데 그 기본적인 의미는 겪음(suffering), 당함, 겪은 상태 등이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passio로 번역하는데 파토스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역시 suffering, event, passion, affection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영어 passion의 어원이다. 그리고 우리말로는 흔히 정념으로 옮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패션은 감정과 욕구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철학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다가 emotion이 감정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인 것은 200년 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감정과 욕구는 분리된다. 이모션에는 욕구가 포함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감정과 욕구를 완전히 다른 범주로 보는 게 대세다. 그러므로 고중세 및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파토스, 파시오, 패션은 모두 감정과 욕구를 포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중세철학 중에서 <윤리학>과 <신>을 살펴볼 것이다. 번역본이 없는 분들을 위해 원서 pdf를 올릴 예정이니, AI를 시켜 번역해서 보셔도 좋겠다. 혹시 그렇게 번역된 파일이 만들어지면 단톡방에 올려 함께 보면 어떨까 싶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9주차(2026. 05. 14)
제7장 <영혼과 정신> 중에서 의지 및 자발성, 욕구 개념에 관하여, 그리고 제8장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관한 논의 중 기예(테크네)과 덕(아레테)의 차이에 관해 정리해본다.
(1) 의지와 자발성(402)
의지 개념을 분명하게 도입한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철학에는 의지(will, volition) 개념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의지 개념의 결여가 행위 설명에 관한 철학적 빈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 및 책임에 관한 논의는 현대의 설명에도 뒤지지 않는다. 현대에 들어와 의지 개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특히 라일(Gilbert Ryre, The Concept of Mind)의 비판 이후에 의지는 인간 정신의 독립된 요소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더욱 중요하게 참조할 만하다.
그럼에도 ‘의지’는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그 단적인 사례의 하나가 아크라시아(akrasia, 자제력 없음)를 의지의 허약함(weakness of will)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 아크라시아 현상을 현대에는 의지 개념을 빌어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아크라시아를 의지가 박약해서 생긴 현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의지의 허약함이라고 번역한다.(어떻게 번역하든 간에 아크라시아 문제는 소트라테스 이래로 오늘날까지 중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참고 문헌이 단톡방에 올라올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에 관해 정리하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서 그는 자발적 행위와 비자발적 행위, 그리고 자발적도 비자발적도 아닌 또다른 유형의 행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발성의 조건만 살펴본다. 자발적 행위는 강제나 무지(오류)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행위다. 저항할 수 없는 강제(힘)이나 착각 등의 무지로 인한 행위는 자발적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하면 곤란한 것은 어떤 종류의 무지냐는 것이다. 무지는 보편에 대한 무지와 개별에 대한 무지로 나뉜다. 보편적 규범 등에 관한 무지를 보편무지라고, 개별적 상황에 대한 무지를 개별무지라고 하자. 자발적 행위가 아니어서 면책 가능한 경우의 무지는 개별무지다. 예컨대 내 아내와 생긴 게 너무 똑같아 덥석 안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이런 무지나 오류가 개별무지다. 사람을 안아주는 게 뭐가 나쁘냐며 아무나 안는 사람의 무지는 보편무지다. 후자는 자발적 행위를 한 것이고 따라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전자라고 해서 모든 게 면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 행위가 아니어도, 즉 고의가 아닌 비자발적 행위도 그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 자발적 행위만큼은 아니지만.
(2) 욕구(408)
케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욕구와 자발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욕구에 대한 현대적인 틀을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케니가 가져다 쓴 1차욕구와 2차욕구에 관해 정리해본다. 1차욕구는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욕구다. 내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나는 술마심에 대한 1차욕구를 지닌 것이다. 2차욕구는 1차욕구에 대한 욕구다. 나는 술마심이라는 1차욕구를 욕구할 수도 있고 욕구하지 않을 수도 있는 2차욕구를 갖는다. 이처럼 욕구의 차원을 구별할 필요성은 우리가 원해서 한다는 행위와 그런 원함에 대한 원함(욕구)이 어긋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 충분히 이해하고 그러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사람이 좋은 술자리에서 술마시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 그의 1차욕구와 2차욕구는 충돌한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즉 1차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마시지 않겠다는 2차욕구를 지닐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금주하겠다는 2차욕구가 반드시 금주를 실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차욕구는 자신의 욕구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욕구에 대한 욕구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갖는 욕구다. 욕구의 차원을 이렇게 나누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 인간의 자유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알콜중독자는 아무런 강제나 오류 없이 술을 마시기 때문에, 즉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위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그가 음주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증오하며 치료해야 할 욕구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음주행위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알콜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중독의 경우가 아니어도,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많은 행위들은, 2차욕구가 1차욕구를 승인하지 않는 행위들은,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유로운 행위는 그냥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승인한 욕구에 따라, 즉 2차욕구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이에 관한 보다 세밀한 논의는 Harry Frankfurt를 참고.)
(3) 기예와 덕(432)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예(technē)와 덕(aretē, 여기서는 성품의 덕)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행위 동기와의 연관성이다. 기예는 그것을 발휘하는 동기와 무관하게 발휘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가 돈을 목적으로 의술을 펼치든 재미로 하든 의무감으로 하든 인간애의 동기로 하든 상관없이 의술을 발휘할 수 있고, 그의 의술에 대한 평가는 환자의 치료 여부에 의존한다. 반면에 덕의 경우, 그 행위 자체를 위해서 발휘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덕행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과만으로 그 행위가 덕이 있는 행위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용기의 덕을 발휘하는 행위는, 즉 용기있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아름답기(kalon, 고귀한) 때문에 한 것이지, 다른 속셈이 있어서(진급을 위해서, 애인에게 잘 보이려고, 포상을 바라고 등등) 했다면 그것은 결과와 무관하게 더 이상 덕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둘째로 기예는 의도적으로 기예를 잘못 발휘할 수도 있지만 덕은 그럴 수 없다. 의사가 환자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자신의 의술을 엉터리로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의술이 엉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격과 관련한 문제로 비난받을 수 있지만 의술이 형편없다고 비난받지는 않는다. 덕은 사정이 다르다. 용기의 덕을 지닌 자가, 용기의 덕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 이상 용기의 덕을 지닌 자라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왔다. 기예가 동기와 무관하게 결과에 의해 평가된다면, 일부러 기예를 잘못 발휘한 경우에는 결과가 형편없으니 그런 경우는 기예가 없는 것이 아닌가? 기예는 일종의 탁월함이니 나쁜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 결과를 초래한 솜씨가 기예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결과를 초래한 솜씨가 기예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의 기예(능력)가 형편없다거나, 그가 기예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가진 기예를 발휘하지 않았을 뿐이다. 의사의 예를 보면, 그는 의술을 발휘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으니 인격적으로 비난받을 수는 있지만, 그가 가진 의술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질문은, 덕의 경우도 의도적으로 덕을 발휘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말해 그런 경우는 없다. 덕의 발휘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부러 덕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덕을 발휘하지 않는 게 더 좋은, 더 필요한 상황이라면? 여기서는 질문이 전제하고 있는 덕에 대한 이해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덕을 어떤 상황에서도 실천되어야 하는 율법과 같은 것으로, 무조건적인 명령과 같은 의무조항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덕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했듯이, 마땅한 상황에서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만큼의 감정을 갖고 행위를 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도 더 많은 살인을 막기 위한 상황에서는 어길 수 있다. 음식에 대한 절제도 마찬가지다. 굶어야 마땅한 상황에서는 굶는 게 절제다. 덕을 발휘하지 않는 게 더 좋은, 더 마땅한 상황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이상하다. 그 상황에서 마땅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게 바로 덕이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윤리학> 나머지와 <신>을 살펴볼 것이다. 질문을 중심으로.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8주차(2026. 05. 07)
오늘은 7장 <영혼과 정신> 중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차례로 정리해 본다.
(1)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
플라톤의 <파이돈>은 감옥에서 맞는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린 글이다. 그날 심미아스와 케베스는 소크라테스를 찾아 영혼불멸에 관한 논의를 벌인다. 철학자의 최후에 어울리는 주제다. 여기서 플라톤은 자신의 영혼관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소크라테스를 통해 영혼불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증명한다.
1) 순환 논증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상대로부터 생겨난다. 잠드는 것은 깨어있음으로부터, 깨어있음은 잠든 상태로부터 생겨난다. 삶과 죽음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삶은 죽음으로부터 죽음은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삶이 죽음으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엔가 있어야만(희랍인들의 경우 하데스에) 하며, 이것은 죽음 뒤에도 영혼은 다른 삶을 위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죽는다고 해서 영혼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2) 상기 논증
플라톤에게 앎은 곧 상기(anamnēsis)다. 망각했던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게 앎이다. 상기설은 <메논>과 <파이돈> 두 대화편에 나오는데, 전자에서는 앎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후자에서는 영혼불멸의 한 증거로서 상기설이 등장한다. 우리가 살면서 감각으로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는 서로 크기가 같은 것들을 보게 되지만 완벽하게 동일한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같음 자체, 완벽한 동일성 등을 알게 된다. 그런 앎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으니 전생에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망각했던 지식을 상기하여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기는 전생에서의 영혼을 전제한다. 같음 자체(같음의 이데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데아에 대한 앎도 마찬가지로 전생에서 알았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3) 유사성 논증
위의 상기 논증은 인간의 전생을 입증해 줄 수 있지만, 죽음 이후의 내세를 증명하는 논증은 아니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유사성 논증을 펼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가시(可視)적인(물질적인) 것들과 가지(可知)적인(비물질적인) 것들로 구분되며, 가시적인 것들은 서로 결합할 수 있고 다시 해체될 수도 있는 복합적인 것들이지만 가지적인 것들은 불변하는 것들이다. 영혼은 비가시적인 이데아와 같은 종류의 존재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영혼은 신적이며 불사적이고 가지적인 것과 유사하며, 육체는 사멸하고 비가지적이며 변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영혼은 같은 종류인 신적이고 불변하는 이데아와 같은 영역에 존재한다.
유사성 논증에 이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영혼과 그렇지 못한 자의 영혼을 비교한다. 철학자는 살면서 불변하는 가지적 대상(이데아)를 탐구하며 지식(에피스테메)을 추구하는데, 이를 통해 그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자신에게 친숙한 불변의 세계로 떠나지만, 비철학자의 영혼은 평생 육체에 속한 것들을 추구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육체적인 것에 불들려 방황하게 된다. 결국 철학을 한다는 것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며,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4)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
심미아스는 영혼에 대한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뤼라가 잘 조율되었을 때 생기는 현들의 조화를 영혼에 비유한다. 현이 끊어지면 현들의 조화가 깨지듯이 육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영혼 또한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의 육체가 뜨거움과 차가움, 마름과 축축함의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 즉 조화가 곧 영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육체의 소멸은 곧 영혼의 소멸을 불러오게 된다.
케베스는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은 거부한다. 마치 옷을 만드는 직공이 여러 벌의 옷을 만들어 입어 옷이 헤어지는 것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해도 결국에는 죽는 것처럼, 영혼이 여러 육체를 통해 윤회한다고 해도 영원히 윤회하지 못하고 소멸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윤회한다고 해서 영혼이 불멸한다는 보장은 못 한다는 말이다.
5) 소크라테스의 응답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미아스의 반론에 답하지만, 그 중 하나만 보자. 뤼라의 경우 현의 팽팽함이 (소리의) 조화의 원인이지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그것과 달리 영혼이 육체의 조화를 유지시키는 원인이다. 뤼라의 현과 조화의 관계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와는 정반대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비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반론이다.
영혼도 소멸할 수 있다는 케베스의 반론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응답한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우연적 성질과 필연적 성질의 구별을 통해 응답한 셈이다. 인간의 키가 크고 작음은 인간에게 우연적 성질이다. 하지만 삼이라는 숫자에 홀수라는 성질은 필연적이다. 눈에게 차가운 성질 또한 필연적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에게 삶은 필연적 성질이며 따라서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응답이 결정적인 논변이 될 수는 없다.
(2) 영혼의 부분들(플라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justice)의 문제를 다루면서 국가의 3 계급과 함께 영혼의 3부분을 논의한다. 그는 영혼의 세 부분이 서로 다른 부분들일 수밖에 없음을 논증한다. 먼저 이성과 욕구의 구별이다. 우리는 갈증을 느낄 때 욕구가 발동하여 물을 마시려 한다. 반면에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이성은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수술 후의 갈증에도 특정 신호가 있기 전에는 물을 마셔서는 안 되는 상황처럼) 동일한 것(물)에 대해 이성과 욕구는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이는 이성과 욕구가 동일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성은 밀어내고 욕구는 끌어당기는데 이 양자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나의 것이 동시에 밀어내면서 끌어당긴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이성과 기개가 같은 부분일 수 없음을, 그리고 기개와 욕구도 같은 부분일 수 없음을 입증하면서 기개는 이성과도 욕구와도 다른 부분임을 보인다.(기개가 이성 및 욕구와 어떻게 분리되는지에 관한 부분은 <국가> 4권을 검토하여 스스로 정리하고 궁금한 것은 질문을 통해 해결하면 좋겠다.)
<참고> 선분의 비유
수업 중 간략히 설명한 <국가> 6권의 선분의 비유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범위를 설명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아래와 같다.
1) 우리의 인식주관의 상태는 크게 의견(독사)와 지식(에픽스테메, 노에시스)로 구분되며 그 구분은 인식주관이 상대하는 대상의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 의견은 가시적인 것들(可視界, the visible, 감각대상)을 상대하여 생기는 것이며, 지식은 가지적인 것들(可知界, the intelligible, 사유대상)을 대상으로 한다. 이 구분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과 동굴 밖의 비유에 해당한다.
2) 의견은 다시 상상과 믿음으로 구분되며 이것들 또한 각기 다른 대상을 상대한다. 전자는 그림자와 같은 상(이미지), 후자는 눈에 보이는 생명체나 물질들이다.
3) 지식은 다시 추론적 사고와 이데아에 대한 앎으로 구분되며, 이 구분 또한 서로 다른 대상을 상대하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는 수학적 대상을 후자는 이데아를 대상으로 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1) 영혼과 육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육체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영혼은 육체의 제1현실태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영혼은 육체의 가능태가 실현된 능력이다. 만일 도끼가 생명체라면 도끼의 절단능력이 도끼의 영혼이다. 눈이 독립된 생명체라면 눈의 시각능력이 바로 눈의 영혼이다. 도끼라는 질료는 가능태이고, 그것의 능력인 절단능력은 제1현실태, 그 절단능력을 발휘하여 장작을 패는 활동은 제2현실태이다. 결국, 육체는 제1가능태, 육체의 능력인 영혼은 제1현실태(제2가능태), 그 능력을 발휘하는 활동은 제2현실태이다. 이처럼 영혼은 육체와 독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2) 영혼과 대상의 일치
영혼의 활동은 크게 감각작용과 사유작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감각능력의 현실태와 감각대상의 현실태가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즉 주체와 대상이 현실태에서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이다. 이를 청각의 예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귀(감각기관) - 청각능력 – 소리를 들음/소리가 남 – 소리를 내는 능력 – 종(감각대상)
(가능태) (제1현실태) (제2현실태/제2현실태) (제1현실태) (가능태)
능동자인 감각대상의 제2현실태와 수동자인 감각기관(인간)의 제2현실태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 “종소리가 들린다(난다)”는 사태와 “나는 종소리를 듣는다”는 사태는 동일한 사태를 두 측면(능동자의 측면, 수동자의 측면)에서 본 것일 뿐이다. 양자는 동일한 하나의 사태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의지 개념에 관해(402쪽),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욕구 개념에 관해(408쪽) 검토하고, 8장 윤리학으로 넘어간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7주차(2026. 04. 30)
오늘은 운명의 날이다. 스토아학파를 중심으로 운명론 내지 결정론을 검토한다.
(1) 원인은 연쇄(chain)가 아니라 관계망(network)이다.
스토아학파는 공동원인과 보조원인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두 마리 황소가 쟁기를 끄는데 순전히 한 마리가 끌지 않고 두 마리가 함께 끈다면 두 황소는 공동원인이다. 그리고 혼자서도 들 수 있는 짐을 드는데 내가 돕는다면 나는 보조원인이 된다. 어떤 사건이나 상태의 원인을 하나로 지정하면 자주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연쇄가 아니라 관계망이다.
원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불교의 인연(因緣)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 원인 내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참나무가 생겨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도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도토리는 인이다. 그러나 도토리만으로 참나무가 생겨날 수 없다. 도토리가 싹이 트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토양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이 연이다. 토양이 수분을 갖추기 위해서는 비가 와야 하고, 비가 오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연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면 인연의 그물망, 이른바 인드라망이 된다. 삼라만상이 그물과 같이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 앞에 한 그릇의 밥이 오기까지 온 우주의 공덕이 있음을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인연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2) 인과적 결정론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 없이 어떤 사태가 발생할 수는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에 적용하면 결정론에 도달한다. 유물론의 경우, 이러한 결정론을 피하기 어렵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싹이 보이나 그 문제의식이 명료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을 계승한 에피쿠르스나 스토아학파에 이르러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의 인과법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로 보는, 다시 말해 물질세계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도 물질적 존재로 보는 유물론의 경우, 인간의 정신이 갖는다고 여겨지는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를 마련하기 어렵게 된다. 뇌신경의 물리적 변화가 곧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대과학의 기본적인 관점 또한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모든 물리적 변화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게으름의 논증(Lazy Argument)
이러한 결정론을 서양 고대에는 운명론이라고 부른다. 운명론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스토아의 대응에 대해 잘 정리된 키케로의 <운명에 관하여>를 보면, 운명론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게으름의 논증이 등장한다. 만일 나의 삶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미 정해진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면 나는 어떤 일도 할 이유가 없게 된다. 케니의 예를 바꿔 우리의 고등학생 사례를 들어보자. 원인 없는 일은 없다는 보편적 결정론을 받아들인 고등학생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만일 대학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대학에 갈 것이다. 대학에 못 갈 운명이라면 아무리 공부해도 못 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공부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사례는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 오래 살 운명이라면 내가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나는 살 것이다. 아파도 치료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내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걸어가도 우승하게 될 것이다. 등등.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게으름 논증이다. 학교에서 운명론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반론이다.
게으름 논증은 결정론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반응이다. 결정론은 기본적으로 인과의 법칙을 충실하게 존중한다. 공부 안하고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다른 요행의 원인이 없다면 인과율에 어긋난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다는 사실은 내가 그럴 만큼의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내가 대학에 합격할 운명이라는 말은 내가 그만큼 공부를 할 운명이라는 것을 포함한 말이다. 스토아철학의 대표적 이론가인 크리시포스는 이런 사태를 복합적 사실이라고 부른다. 복합적 사실은 복합적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으름 논증은 결정론의 핵심인 인과율을 무시하고 있다는 오류를 범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결정론의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과의 사슬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위의 고등학생의 반응은 자신이 인과의 사슬에서 빠져나온 듯이 말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가 대학 합격의 선행 원인이라는 사실은 뺀 것이다. 대학 합격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사실인데 말이다. 너는 대학에 합격할 운명이야, 라는 말은 너는 열심히 공부할 운명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합격을 위해서는 다른 원인들의 작용도 필요하지만.
(4) 결정론과 자유
결정론이 일으키는 윤리적인 가장 심각한 문제는 행위자의 자유의 여지가 사라지며,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팽이의 비유를 더 살펴본다. 팽이가 돌아가는 외적 원인은 아이가 팽이를 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 원인만으로 팽이가 돌지는 않는다. 팽이는 잘 돌아가는 내적 성질을 갖기 때문에 돈다. 팽이의 내적 본성은 팽이가 돌아가는 공동원인이 된다. 팽이의 내적 본성에 해당하는 인간 행위의 내적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적 자극에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동의(assent)는 외적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강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자발적 동의라는 것이다. 이것이 행위자의 자유와 책임의 여지를 마련해주는가?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자유 개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1) 무차별의 자유(liberty of indifference)
행위자에게 행위의 책임을 물으려면 행위의 순간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 행위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자유를 무차별의 자유라고 부른다. 행위자의 선택 이전에는 무차별의 상태에 있다는 의미인 듯하다. 자유가 오직 이런 의미만을 갖는다면 스토아학파는 자유의 여지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사태는 이미 결정된 대로 진행될 뿐이기 때문이다.
2) 자발성의 자유(liberty of spontaneity)
행위자가 그 행위를 원해서 자발적으로 행한다면 그는 자발성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토아학파의 결정론은 자유의 여지를 확보한다. 덕을 갖춘 인간은 자신의 성품에서 비롯한 동의에 의해 행위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원인이 행위를 촉발하지만 그것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자발성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율적 행위를 한다.
이러한 자발성의 자유를 잘 보여주는 비유가 수레에 묶인 개의 비유다. 수레에 묶인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할 수도 있고, 자발적으로 따라갈 수도 있다. 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으로 따라가느냐 억지로 끌려가느냐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수레가 가는 방향을 따라가게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개는 자발성의 자유를 누린다. 자유는 사건의 바꾸는 게 아니라 사건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운명의 수레를 기꺼이 따라가는 자는 자유롭지만, 저항하는 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발성의 자유에 대한 현대적 옹호는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를 참고하면 좋겠다.)
(5) 반론
결정론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입장을 흔히 양립론(compatibilism)이라고 부르는데 스토아학파 또한 여기에 속한다. 양립론에 대해 강한 결정론에서는 반론을 제기한다. 성품에 따른 동의 여부 역시 이미 결정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수레와 개의 비유를 보자면,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개와 억지로 끌려가는 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니 자발적 동의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현대에는 자유와 결정론에 대해 철학적 논의에 아니라 과학자들도 참여한다. 인과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뇌의 신호와 정신적 선택(의도)의 시간적 순서를 실험한 리벳(Libet, 1983)을 참고하면 좋겠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해 케니는 뒤의 7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검토하고 있는데(406쪽) 이 논의 또한 현대에도 이어지고 흥미로운 이론이다. 예습하면 좋겠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6장 형이상학은 건너뛰고 7장을 공부할 것이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중세철학> 6주차(2026. 04. 23)
오늘은 스토아학파의 인식론과 이것을 비판하는 회의주의에 대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일부를 검토했다. 수정한 오역은 생략하고 내용만 간략히 정리한다.
(1) 지식(앎), 의견(믿음), 그리고 그 사이의 인지(파악, 포착, katalepsis)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이래 전통적인 구별이 된 지식(에피스테메)과 의견(독사) 사이에 인지(카탈렙시스)라는 중간 단계를 넣는다.
1) 지식(앎)은 절대 틀린 것일 수 없다는 확신을 동반한다. 물론 이 표현은 주관적 관점에서의 마음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한 주관적 확신은 증거와 검증 등의 검토를 통해 뒷받침되기에 생겨난 확신이다. 그래서 내가 P를 안다는 것과 P가 거짓이라는 것은 함께 할 수 없다. 인식의 최고 단계인 진리에 대한 파악이라고 할 수 있다.
2) 의견(믿음, 독사)은 앎과 같은 확신이 결여되었지만 내가 인정하는 인식의 수준이다. 내가 P를 믿는다(의견을 갖는다)는 것과 P가 거짓이라는 사실이 공존할 수 있다.
3) 인지(카탈렙시스)는 지식만큼의 확고한 판단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단지 의견이 아니라 거짓일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닌 인식의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 보다 확실한 는증과 검토를 거치면 지식에 이르게 된다. 인지는 인지적 현상(phantasia kataleptike)에 대한 동의인데, 인지적 현상은 나(인식주관)의 감각이나 이성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상이며,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인상에만 동의를 하며, 그 동의가 바로 인지이다.
(2) 인상과 동의
여기서 잠시 전 시간에도 언급한 스토아학파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우리(인식주관)에게 인상으로 다가온다. 인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왜곡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참된 인상에 동의하고, 거짓 인상을 거부하여야 한다. 이성에 의한 동의 여부에서 인간의 자유가 발생한다. 나에게 드러나는 인상 자체는 어쩔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어떤 판단을 하는지는 나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 인상이나 수용(동의)하는 게 아니라 인지적 인상만을 수용해야 한다. 물에 반이 잠긴 막대기의 인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 막대기는 꺽여있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그런 인상에 동의하면 곤란하다. 이는 감정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욕적인 언사에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사태 자체(엄밀히 말하면 사태가 드러낸 인상)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내가 그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분노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불교의 12연기와 유사한 구도를 갖는다. 대상과 나의 만남(촉,觸)은 나에게 수(受, 느낌)를 일으킨다. 이 수(미세한 느낌)가 바로 스토아의 인상과 유사하다. 이 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여기까지는 아직 감정이라고 할 수 없다. 감정의 싹이라고난 할까? 이 수의 미세한 느낌에 반응하는 것이 애(愛, 갈애渴愛)다. 좋은 느낌은 갖고 싶고 싫은 느낌은 거부하고 싶은 상태가 바로 애인데, 여기서부터 감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놓지 않고 집착하는 상태가 취(取)다. 이 감정의 불길은 그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로 변하여 새로운 나를, 나의 업(karma)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유(有)다. 오랜 명상 수행을 하면 수의 단계에서 그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리게 된다.
스토아철학에서 자유는 주어진 인상에 동의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단계에서 나타난다. 나의 몸을 비롯한 외부 세계는 인과의 법칙, 로고스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성)은 그런 세계에 대한 나의 판단과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3) 회의주의와 스토아의 대응
회의주의자는 스토아의 인지적 인상 또는 참된 인상이 거짓된 인상과 과연 구별가능한지를 문제삼는다. 마치 내가 쌍둥이 형제를 보고 착각할 수 있듯이, 거짓된 인상을 보고 참된 인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회의주의자는 스토아가 주장하는 모든 인지적 인상이 사실은 거짓된 인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스토아의 응답이 ‘식별불가능자의 동일성(identity of indiscernibles)’ 주장이다. 완전히 식별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같은 것, 즉 하나라는 말이다. 회의주의자가 말한 쌍둥이의 예를 보면, 우리가 잠시 착각할 수는 있지만, 쌍둥이 형제가 완전히 동일하여 식별불가능하지는 않다. 쌍둥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세상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동일할 수 없다. 아무리 같아 보여도 반드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공간적 좌표라도 다르다. 지금 내가 구별하기 어려워도 원리적으로 식별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일 완전히 식별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같은 것, 하나의 것이다.
(4) 현상을 대하는 두 입장
현상(인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어떤 현상도 그것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참임을 보증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앎(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회의주의자들이 취하는 인식론적 비관론이다.
그러나 모든 인상이 우리를 속이는가? 물에 반이 잠겨 꺾인 나무의 인상도 있지만 모든 인상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성을 통해 인상들을 분류할 수 있고 참된(인지적) 인상에 동의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스토아철학의 인식론적 낙관론이다.
(5) 장소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시간 절대공간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다.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빈 공간은 없다. 공간은 무엇이 있는 자리(place)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간 공간 개념은 뉴턴 역학이 전제한 유클리드적인 수학적 공간과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현대 물리학에 가깝게 보인다. 그렇다고 그의 시간 공간 개념을 과학적 선구라고 평가할 일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간(장소나 자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만)은 질적으로 무차별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두 특정한 물질이 자리하는 장소다. 아래는 무거운 것들의 자리고 위는 가벼운 것들의 자리다. 무거운 돌이나 흙이 아래를 향하고 공기나 불이 위로 향하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방해가 없다면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물질의 본성 중 하나다.
< 예고 >
다음 시간에는 318부터, 스토아학파의 운명론에 대해 공부한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대철학> 5주차(2026. 04. 16)
오늘은 3장 논리학과 4장 인식론을 공부했다.
< 오역 바로잡기 및 정리 >
(1) 202. 로크가 말하였듯이, ‘신은 인간을 단지 두 발로 걷는 수준으로 창조하지 않았으며, 인간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임무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맡겼다.’
이렇게 바꾸자. ‘신은 인간을 단지 두 발로 걷는 수준으로 만들고 이성적으로 만드는 임무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맡긴 것은 아니다.’
희랍어
라틴어
영어
한국어
ousia
substantia
substance
실체(무엇)
poson
quantitas
quantity
양(얼마만큼)
poion
qualitas
quality
질(어떠함)
pros ti
relatio
rerative/relation
관계(어떤 것에 얽힘)
pou
ubi
where
장소(어디에)
pote
quando
when
시간(언제)
keisthai
situs/positio
to be in a position
위치, 상태(어떻게 놓여있음)
echein
habitus
to have
소유(가짐, 지님)
poiein
actio
to do/to make
능동(입힘)
paschein
passio
to be affected
수동(입음)
(2) 214 – 215. <범주론>
(3) 253. 겸손
영어 modesty를 보고 겸손이라고 번역한 듯. 4주덕(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하나인 절제(sōphrosynē)를 의미한다.
(4) 267. 하지만 이상적인 정의가 무엇인지를....또한 어떻게 그것이 이데아의 체계에서.... 변증술의 임무에 속한다.
이렇게 바꾸자. ‘..... 또한 그것이(이상적인 정의가) 최고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가 주재하는 이데아들의 체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갖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변증술의 임무에 속한다.’
(5) 272. 기억은 경험으로 구성되며
기억은 경험을 구성하며
(6) 273. 철학적 지혜
sophia에 대한 번역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 한국어 번역본을 참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구에서도 이것을 wisdom으로 번역하는 게 오랜 관행이고 여전히 대세다. 케니는 이런 관행을 이제는 고치자며, understanding으로 바꾼다. 소피아는 이론적 탐구의 영역에서 지적인 덕(탁월함)을 잘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자가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지혜롭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나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를 가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론지(이론적 앎), 또는 완전지(에피스테메와 누스가 결합된 완전한 이론적 앎의 상태)라고 옮기는 게 좋겠다.
<참고>
반즈(Jonathan Barnes)가 1984년에 아리스토텔레스 영어 번역 전집을 개정하여(여러 권위 있는 번역자들이 참여) 옥스퍼드에서 출판하였다. 케니와 반즈는 2014년에 그 전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관련 책들만 모아서 많은 부분을 수정하여 출판하였다.(단톡방에 책 파일을 올릴 예정) 두 사람은 책 서문에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였는지 밝히고 있는데, 그 일부(p.20)를 발췌하여 아래에 번역과 함께 소개한다. 나는 학위논문(1999년)을 쓸 때부터 지혜(wisdom)라는 말은 소피아의 번역어로 쓸 수 없고, 지혜는 프로네시스에만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기존의 영어 번역과 다르게 프로네시스는 실천적 지혜(실천지)로, 소피아는 이론지(완전지)로 옮겼는데, 지금 보면 케니와 반즈가 수정한 것과 그 의도가 일치한다, 나는 두 사람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내 논문을 보았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다. 아레테, 에우다이모니아, 에피스테메, 로고스 등 다른 용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정리하여 소개할 것이다. 마음이 급한 사람은 내가 논문에서 설명하고 있으니 요청하면 제공할 것이다.
A few examples may indicate where we have replaced the
earlier versions of technical terms. For ‘arete’ we have reverted
to the traditional ‘virtue’ in place of the ‘excellence’ introduced
by Barnes in the Revised Oxford Translation. We
have preferred ‘correct reasoning’ to ‘right reason’ for ‘orthos
logos’. As for ‘phronesis’ and ‘sophia’, for centuries the standard
translations were ‘prudence’ and ‘wisdom’. But ‘prudence’
now means something like ‘caution’, and the expert knowledge
of scientists and philologists is no longer called ‘wisdom’,
which has acquired an overwhelmingly practical sense.
So we have opted for ‘wisdom’ for ‘phronesis’ and ‘understanding’
for ‘sophia’. It goes without saying that neither of
those two translations is an exact fit—not even for the most
part or in the majority of cases. The same is true of ‘virtue’
and ‘arete’, of ‘happiness’ and ‘eudaimonia’, and of any number
of other pairings.
(ChatGPT 번역)
몇 가지 예를 들어, 우리가 전문 용어들의 이전 번역을 어디에서 수정했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arete’에 대해서는, Barnes가 Revised Oxford Translation에서 도입한 ‘excellence(탁월성)’ 대신, 전통적인 번역어인 ‘virtue(덕)’로 다시 돌아갔다. ‘orthos logos’에 대해서는 ‘right reason’보다 ‘correct reasoning(올바른 추론/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택했다.
또한 ‘phronesis’와 ‘sophia’의 경우, 수세기 동안 표준 번역은 각각 ‘prudence’와 ‘wisdom’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prudence’는 대체로 ‘신중함’ 정도의 뜻을 가지게 되었고, 과학자나 문헌학자의 전문적 지식을 더 이상 ‘wisdom’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이 말은 압도적으로 실천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phronesis’에는 ‘wisdom(지혜)’을, ‘sophia’에는 ‘understanding(이해)’을 택했다. 물론 이 두 번역어 가운데 어느 것도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대체로, 혹은 대부분의 경우에도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이는 ‘virtue’와 ‘arete’, ‘happiness’와 ‘eudaimonia’,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대응 번역어 쌍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7) 281. katalepsis를 ‘인상’이라고 번역하였으나 고쳐야 한다. 파악, 포착, 이해, 인지 등의 용어가 좋겠다. 영어 번역에서는 grasp, apprehension, comprehension 등을 사용하며, 케니는 조금 오래된 번역어인 cognition을 투덜거리며 선택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 스토아 인식론과 회의주의 사이의 논쟁을 살펴볼 때 다시 검토하겠지만, 여기서는 스토아 인식론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만 소개한다.
외부대상(물체나 사태)은 우리에게 인상(phantasma, 영 impression, appearance)을 남긴다. 우리는 이 인상에 동의하여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인상은 외부세계를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잘 선택(동의 또는 거부)해야 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확실한 인상을 선택하여 강하게 동의하는 것이 바로 카탈렙시스(파악, 이해, 인지)다. 이것을 다시 검토하여 온전한 지식에 이르게 되면, 즉 더 강하게 확신하여 동의할 때 비로소 에피스테메(지식, 앎, knowledge, knowing)라고 한다. 플라톤이 의견(doxa, opinion, belief, 믿음)과 지식(에피스테메)을 구별한 것에 스토아는 카탈렙시스(파악, 이해)라는 중간 단계를 넣었다.
복습하면서 질문이 생기면 단톡방에 올려주면 참 좋겠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대철학> 4주차(2026. 04. 09)
정리 ; 안 두옥
보충 : 편 상범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이론(150)에서부터 2장 끝까지 공부했다.
(1) 좋은 정체와 나쁜 정체
좋은 정체와 나쁜 정체를 구별하는 기준은 국가의 통치가 공동선(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느냐 통치자의 이익을 위하느냐에 따른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좋은 정체는 통치자의 수에 따라 왕정, 귀족정(최선자정체), 혼합정(중간정)이고, 이것이 변질된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이 나쁜 정체다. 과두정과 민주정이 당시의 가장 흔한 정치형태이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정체의 분석과 평가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두 정체의 외면적 차이는 통치자가 소수냐 다수냐이지만, 실제로는 부자의 통치와 빈자의 통치로 구별된다. 즉 경제적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다.
정체의 차이는 그 정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도 구별된다. 과두정은 부유함을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부자들이 국가에 기여하는 자이고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므로 정치적인 권리를 가지며 빈자들은 정치에 참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반면에 민주정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자유로운 시민이면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민주정에도 여러 여러 종류가 있어 재산의 정도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이 달라진다.
민주정은 왜 나쁜 정체인가? 시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오직 다수인 빈자들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며, 시민의 자유를 최고의 원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유는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면, 인간의 나쁜 습성이나 욕구까지 인정하는 셈인데,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옳지 못한 욕구까지 요구하는 민주정은 좋은 정체일 수가 없다.
(2) 도구들이 자동기계처럼 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이론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히 노예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그가 모든 노예를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예컨대 전쟁 포로로 노예가 된 사람까지 노예로 마땅하다고 본 것은 아니지만, 본성적으로 이성적 능력이 부족한 자들은 노예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다는 이른바, 본성적 노예에 관한 이론은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다. 그는 노예를 살아있는 도구라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는 만일 도구들이 자동기계처럼 스스로 알아서 일을 한다면 하인이나 노예가 필요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가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많은 일을 하는 자동기계들이 인간의 일을 대신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일을 안 하는가? 고대 희랍의 노동자나 노예보다 일을 적게 할까? 그 높은 생산력으로 이제 우리는 모두 희랍의 시민들처럼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적 활동에 힘을 기울이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강조하는 여가의 삶을 누리고 있는가? 왜 그렇지 못할까?
(3) 영혼과 정신도 물질이다
스토아학파는 유물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도 모두 물질적이다. 주목할 부분은 그들이 왜 정신을 물질이라고 보았냐는 점이다. 그들은 만일 정신이나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면 물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과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후에 데카르트 이원론의 가장 큰 난점을 예견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감정에 대한 세네카의 분석
우리는 외적인 사태(내 몸의 상태까지 포함하여)가 곧바로 나의 감정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컨대 상대가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면 나의 몸은 바로 반응하여 심장이 뛰고 혈압이 상승하면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세네카는 사물이나 사태가 나에게 일으킨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상(impression, phantasia)이라고 본다. 이 인상을 나의 마음(정신)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발생한다. 상대의 말에 따른 인상을 나의 정신이 수용하면, 즉 인정하면 예컨대 분노의 감정이 발생한다. 수용하지 않으면 분노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 감정은 사태가 일으킨 인상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존한다. 그래서 감정은 판단이다.
감정이 판단이라면 다른 판단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판단인지 잘못된 판단인지 평가의 대상이 된다. 지구가 네모나다는 판단처럼 잘못된 판단이라면 고쳐야 한다. 잘못된 판단에 따른 감정 역시 고쳐야 한다. 대부분의 감정은 그릇된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게 스토아의 평가다.
<오역 바로잡기>
(1) 151. (아테네의) 헌법 → 정체. 영어 constitution을 보고 헌법이라고 번역했으나, 이 경우에는 헌법이 아니라 정체(정치체제)다.
(2) 160.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끌어당기는... →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끌어당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12권에서 신이 만물을 움직이는 방식을, 사랑의 대상(사랑받는 자)이 사랑하는 이를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나의 애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를 자신을 향하도록 이끈다. 물론 이런 운동이 모두 자각적인 것은, 즉 나는 신을 사랑한다고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충동이 번식을 통해 신(영원함)에 다가가려는 의식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충동 자체가 신을 지향하는 활동이라는 말이다.
(3) 188.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정념이라고 할 수 없다. → 사물이 스스로 드러낸 인상에 영향받은 것은 정념이 아니다. 이렇게 고쳐야 뜻이 명확해지고 ‘인상’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살아난다. 빼먹으면 안 되는 용어다. 그리고 정념(passion)은 오늘날의 감정(emotion)과 욕구(desire)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나중에 다시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 보충 >
지난 시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질문들
(1) 195. “클레멘스는 플라톤을 이원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이단설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자로 여겼으며...” 질문은 플라톤도 이원론자인데 어떻게 이원론적 주장에 대항하는 동맹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클레멘스가 이원론적 이단이라고 지목한 교파는 영지주의(gnosticism)인데, 영지주의는 세계를 선한 영적 세계와 악한 물질 세계로 나누는 이원론이다. 이 두 세계는 원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실재이며, 인간의 경우에도 영혼과 육체는 선과 악으로 분리되며, 악한 물질(육체)의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영지주의의 이원론과는 다르다. 이데아의 세계와 물질적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만, 물질적 세계는 악이 아니라 단지 이데아의 순수성을 결여한, 부족한 세계일 뿐이다. 이데아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악이란 선의 결여나 부족일 뿐이지 그 자체로 실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물질세계가 선한 신의 창조의 결과인 것과 통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기독교 철학으로 가져다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선과 악을 독립된 것으로 보는 원리적인 이원론이 아니다. 선의 이데아라는 하나의 근원적인 원리에 따라 세계가 구성된 것처럼, 기독교에서도 신의 선한 의지에 의해 세상이 창조된 것이다. 이원론과 일원론을 도식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점을 잘 일깨워준 좋은 질문이었다.
(2) 왜 민주정은 나쁜 정체들 중 제일 괜찮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정체가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주정이 과두정이나 참주정보다 항상 더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어떤 민주정이고 어떤 과두정이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그는 민주정과 과두정을 여러 형태로 분류하는데, 최악의(극단적) 민주정은 온건한 과두정보다 훨씬 나쁘다. 최악의 민주정은 법보다도 민중의 결정에 따라 통치하는 정체다. 법이 지배하는 민주정에서는 시민들 중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법이 최고권력을 갖지 못하면 민중선동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며, 민중들은 선동에 빠져 독재하는 집단이 되어버린다. 그런 민주정은 참주정과 닮았다. 참주에게는 아첨꾼이, 민중에게는 선동가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런 정체는 법에 의해 통치하는 과두정보다 더 나쁜다. 과두정에서도 법이 아니라 족벌들이 통치하는 경우에는 최악의 민주정과 마찬가지로 참주정에 가깝다.
민주정과 과두정이 좋은 정체에 근접하는, 그리하여 안정을 꾀하는 방법은 중간정(혼합정-민주정과 과두정의 혼합)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민주정이 부자들의 권리를 상당 부분 인정하여 함께 통치하거나, 과두정이 가난한 시민들이 가능한 정치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드는 방법이다. 중간정에 얼마나 수렴하는가에 따라 과두정이나 민주정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근접할수록 좋아진다. 중간정이 되면 좋은 정체가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매우 드물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정이 대체로 과두정보다 괜찮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과두정이 민주정보다 더 쉽게 분열되고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 과두정은 부를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놓는 정체인데, 부의 속성상 권력을 함께 나누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자는 빈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뿐만아니라 부자들끼리도 다투기 쉽다. 반면에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정의 빈자들은 단지 부자들과만 갈등한다. 그래서 과두정보다는 민주정이 안정적이다.
민주정이 과두정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능력은 부족해도 다중의 모임이 서로를 채울 수 있다. 마치 부자 한 사람이 마련한 잔치보다 여러 사람이 하나씩 음식을 준비하면 더 푸짐한 잔치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럴만한 수준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야 하지 무조건 많이 모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또한 전문적인 안목이 반드시 훌륭한 평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판단이 중요할 수 있다. 음악을 연주하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은 연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잘 평가할 수 있고, 음식의 맛이나 건축가가 지은 집도 전문가보다 직접 먹어보고 살아본 사람이 더 잘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모든 대중들의 의견이 존중할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만한 수준이 되는 대중들이어야만 한다. 그는 이것도 매우 드문 경우라고 본다. 대중들은 대체로 공동선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특히 장인(기술자)들은 자신들의 관점과 이익에만 충실한 습관이 형성되어 공동선을 무시하기 쉬우니, 시민의 자격을 주지 않는 게 더 좋다고 그는 말한다. 여러 직종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이익에만 충실한지는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다.
마인드랩 딥리딩 <고대철학> 3주차(2026. 04. 02)
오늘은 저녁에 직장에서 일이 생기거나 이동 시간이 부족한 샘들이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반장샘도 출장을 갔다. 김채수 샘, 김예슬 샘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코로나 시절 풍경이 될 뻔했다.
< 오역 바로잡기 >
(1) 131쪽 두 번째 문단, ‘더욱이 형상은 인식, 즉 다른 것들의....’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다른 것들, 즉 감각적 실체들의 인식에도 존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바꾸자. ‘그것들(영원불변하는 형상들)은 다른 것들에 대한 인식에도, 존재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부연설명하자면, 모든 이론(여기서는 이데아론)은 현상(감각적 대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데아가 개별적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 어떻게 인식 가능한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2) 같은 문단, ‘마치 어떤 문제를 회의함으로써....’
역자가 doubling을 doubting으로 잘못 보았다. ‘그것을 두 배로 만들어...’로 고치자. 이데아론은 설명되어야 할 것들에 해당하는 만큼의 이데아들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두 배인가? 설명되어야 할 대상들(감각대상)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강독시간에 설명했으니 모두 잘 기억하리라 믿는다. 다음 시간에 복습 겸 확인할 확률이 높다.
(3) 139쪽, ‘이론적인 학문은 .... 그 자체로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분야이다.’
‘지식과 이해 그 자체를 위해’라고 고치자. 사소하지만 이론적 지식을 왜 추구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하려면 고치는 게 좋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다는 점은 널이 알려져 있다.’라는 말은 원문에 없으니 지우자. 그냥 ‘특히 윤리학과 정치학이 이에 속한다.’
제작학, 실천철학, 이론철학의 구별은 어떤 기준으로 분류되는가? 그 목적에 따라 나뉜다는 점이 중요하다.
(4) 141쪽, 첫 문단, ‘사람의 특성, 청중들의 태도’
특성은 성품이라고, 태도는 마음상태라고 옮기는 게 좋다. 영어 원문에서는 character와 mood, 말하는 사람의 성품과 청중들의 기분이다. 희랍어 원문은 ēthos와 diatheinai인데, 전자는 성품이나 성격(영어의 ethics이 여기서 나왔다)을, 후자는 청중들의 마음이 놓여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간단히 청중들의 마음상태다.
(5) 141쪽, 두 번째 문단, ‘예를 들어 그는 분노를.... 감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장이 길어서 역자가 두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렇게 바꾸자. ‘예를 들면 그는 분노를, 우리 자신이나 친구에 대한 부당한 모욕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복수를 하려는, 고통을 동반한 욕구라고 정의한다.’ 어떤 욕구인지를, 즉 복수를 하려는 욕구인지를 잘 드러낸 번역이어야 한다.
(6) 141쪽, 아래 인용문,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하여 화를 내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를 지우자. 그냥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지적하기 때문에 더 모욕감을 느끼고 화를 낸다는 의미다.
< 주목할 내용 >
(1) 141쪽 설득의 3요소 ;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1) 화자의 성품(에토스) ; 같은 말을 해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설득의 힘이 다르다. 진실성이 없는 성품의 사람이 말하면 믿기 어렵다. 정직한 사람의 말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습관에 의해 형성된 성품의 힘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마음상태라고 하고 뒤이어 이것을 감정(pathos)이라고 친절하게 바꿔 말한다. 듣는 사람의 현재 감정이 어떤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같은 말을 들어도 괴로울 때, 슬플 때, 사랑할 때, 미워할 때, 같은 판단을 내리지 않기 쉽다.
3) 말이 지닌 합리성, 즉 로고스다.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2) 141쪽, 감정이란 무엇인가
20세기 후반부터 풍성하게 논의되는 현대의 감정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정의 지향성(intentionality, aboutness)이다. 우리의 다른 의식과 마찬가지로 감정 또한 ‘무엇에 대한’ 것이며, 그 무엇(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분노의 예를 들어보자. 분노는 상대가 나(또는 나와 가까운 사람, 내가 일정 부분 동일시하는 사람)를 부당하게 모욕했다는 판단을 함축한다. 그래서 나와 판단을 달리 하는, 즉 부당하지 않거나 모욕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는다. ‘부당한’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분노의 대상이 다른 사람들은 정의관이 다르기 쉽다.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지에 대한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정의관을 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분노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가 하는 말보다도 그의 감정을 엿보는 게 정확하다. 말보다는 감정이 그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르로의 감정을 돌아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나의 생각이나 말보다 나의 감정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다. 감정 철학은 뒤에서 스토아철학을 공부하면서 더 세밀히 검토할 부분이다.
< 주의 >
(1) 위에 지적한 오역은 잘못된 지적일 수 있다. 원문과 대조하면서 각자 확인해보자.
(2) 다음 시간은 2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150)부터 공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