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가라!!! 아리스토텔레스(이제부터 간단히 그)는 젊은이(아마도 미성년자)는 정치학의 적합한 수강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실천철학(정치학과 윤리학)은 삶의 경험이 없이는 논의하기 어렵다. 어린 나이에 윤리학의 천재, 정치학의 천재가 나왔다는 말은 유사 이래 들어본 적이 없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경험이 부족해도 상관없는 학문이 있을까? 그는 다른 책에서 그것을 수학이라고 말한다. 초등학생이 미적분을 너끈히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면 그의 말이 맞다. 수학은 기본적인 약속을 바탕으로 한 연역적 체계일 뿐 삶의 구체적 경험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애들이 집에 가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올바른 실천적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어린 사람들은 감정에 치우쳐서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다. 실천철학의 목적은 단지 앎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인데,(반면에 이론철학의 목적은 앎이다. 알면 그만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앎을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애들이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것 같다. 이 문제는 뒤에서 따져볼 것이다.
2)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제 3장 1~4절)
앞에서, 좋음은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더 좋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목적의 위계질서에서 상위의 것이다.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은? 당연히 최상위를 차지하는 목적이다. 이것이 행복(eudaimonia)이다. 행복은 ‘잘 사는 것’이고, 삶은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는 곧 ‘잘 행위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잘 사는 것=잘 행위하는 것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이것은 그의 주장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고 그도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이 무엇이냐, 잘 사는 게 뭐냐고 물으면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쾌락), 부, 명예, 건강 등등 다양한 답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러면 그것들 중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와 고대 희랍인들은 차이가 난다. 우리는 무엇이 행복인지는 각자 결정하는 것이지 정답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저들은, 그리고 그는 답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대체로 행복에 관한 주관주의자이고 저들은 객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실컷 논의할 예정이라신다. 기다려보자.
3) 실천철학의 원리 또는 출발점(제 3장 5~6절)
완전한 무지에서는 어떤 앎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론적인 탐구의 경우,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란 감각경험을 의미한다. 반면에 실천철학의 경우에는 좋은 습관을 통해 잘 길러진 상태가 바로 출발점이다. 이것이 실천철학의 출발점이자 원리이다. (출발점과 원리는 희랍어 archē를 옮긴 말이다. 그 뜻은 뒤에서 다시 정리하자.)
그는 올바른 습관에 의해 덕이 길러진다고 말한다.(뒤의 2권에서) 올바른 습관에 의해 길러지지 못하면 실천적 논의의 출발점에 서지도 못한 것이다. 올바른 가치판단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이 시가교육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다. 가치관이 잘못 형성된 아이를 윤리학 공부를 통해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까? 그는 어렵다고 본다. 올바른 가치관이 전제되어야 개별적인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덕의 형성에 관한 제 2권을 공부하면서 충분히 논의될 것 같다.
4) 쾌락적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제 5장)
희랍인들은 전통적으로 삶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인생의 목적은 즐거움(쾌락)이야, 라는 쾌락적 삶. 우리는 이것을 쾌락주의라고 부른다. 올바른 삶은 덕을 발휘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는 정치적 삶. 실천철학은 이런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다. 세 번째는 진리를 탐구하는 관조적 삶이다.
그는 쾌락적 삶을 짐승의 삶, 노예의 삶이라고 낮춘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 역시 쾌락의 중요성과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다만 쾌락이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 쾌락은 좋은 것임을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은 즐거운 삶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쾌락주의와 그의 차이는, 전자는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놓고, 후자는 쾌락이 행복에 수반하는, 행복의 필요조건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는 철학에 노벨상이 있다면 맨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에 주어져야 한다고 할 만큼 그의 쾌락 이론을 칭송한단다. 매우 흥미롭다고 한다. 우리가 거기까지(7권 후반부, 10권 전반부) 읽을 수 없단다. 안 가르쳐준단다. 그러면 왜 얘기를 꺼내냐는 민주샘의 항의에, 약올리는 거라신다. 나중에 논문을 알려줄테니 읽어보라신다. 아마 가르치는 걸 엄청 좋아하니 나중에 설명해 줄 게 분명하다.(내기 할 사람~)
정치적 삶(도덕적 삶)과 관조적 삶은 그가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1권 7장에서 다를 것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2. 생각해 볼 문제
실천철학은 애들과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가 많아도 애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위한다면 애들과 마찬가지로 실천철학의 수강생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삶, 올바른 행위를 위해 실천철학이 필요한 것인데 이성에 따른 삶의 태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윤리학 공부를 아무리 해도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윤리학 전공자는 그 공부를 통해 더 윤리적인 삶을 사는가? 정의를 다루는 법을 공부한 사람은 더 정의롭게 행동하는가? 법을 잘 다루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는가? 자신을 잘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데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지 않는가?
그는 올바른 습관에 의해 잘 자란 사람,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이 실천철학의 수강생이라고 말한다. 그런 성품이 실천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런 출발점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윤리학이나 정치학은 그들을 영리한 사람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올바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면 윤리학은 왜 공부하나? 실천철학은 이미 좋은 성품을 갖춘 이들에게 실천적 사태에 관한 명료한 이해를 갖추도록 해주는 학문이다. 그 행동이 왜 올바른 것인지, 그런 삶이 왜 행복한 것인지, 그 왜(이유, 원리)를 설명하는 일이 실천철학의 과제다. 한마디로 자기명료화의 작업이다.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도덕, 윤리 시간에 하는 일은 무엇인가? 제 2권, 덕에 대해 읽으면서 더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3. 개념어 정리
1) eudaimonia ; 행복, happiness
(에우다이모니아를 행복으로 번역하는 것은 잠정적이다. 이는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이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행복 개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2) ariston : 최고선
(agathon(good)의 최상급이 ariston(best)이다.)
3) eu zen ; (good, well + to live) → to live well, good livingl, 잘 사는 것
4) eu prattein ; (good, well + to do) → to do well, good doing, 잘 행위하는 것
5) archē : 시작, 출발, 근원, 원인, 원리 등
(아르케는 시작이면서 끝일 수 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목적(telos)의 개념이다. 우리가 성취하려는 목적은 시간의 순서상 일의 끝에 도달해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동시에 우리의 행위를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행위를 일으키는 시작이다. 내가 그이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그이를 만난다는 나의 목적은 작동된다. 내 행위의 시작이며 원리가 된다. 이것이 목적인(목적으로서의 원인)이다. 내가 드디어 그이를 만나면 나의 목적은 성취된다. 나의 행위의 끝은 목적의 성취다. 세계의 모든 운동은 목적을 지향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목적은 만물을 움직이는 출발점이며 동시에 운동을 마무리하는 끝이다. 시작이며 끝이다.)
6) hēdonē ; 즐거움, 쾌락
(모든 종류의 쾌락을 포괄한다. 감각적 쾌락에서 독서하는 즐거움까지. 영어 hedonism(쾌락주의)가 여기서 왔다.)
4. 과제
그는 “돈을 버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이라고 말한다.(1권 5장 8절) 무슨 뜻인가? 내가 부자가 되기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돈을 버는데, 왜 이게 강제된 삶, 자유롭지 못한 삶인가?
지난 시간에 1장을 읽으면서 좋음의 의미와 목적의 위계질서에 대해 논의했고,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2장과 3장 1절~4절을 통해 최고선과 정치학(정치술)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전에, 지난 시간에 마무리되지 않은 주요 문제 거리인 ‘에르곤(ergon, 여기에서는 성과물)이 있는 행위와 없는 행위의 구별’ 문제, 예컨대 “의술, 가르침, 배움에는 에르곤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편상범 선생님께서는 13세기에 쓰인 아퀴나스의 주석서까지 찾아보고 해답을 가져오셨다. (존경스럽다. 역시 나를 정말로 성장시키는 것은 책보다는 선생님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우리의 이전 결론과는 다르게) 의술과 가르침, 배움 등의 행위는 에르곤이 있는 경우에 속한다. 에르곤은 행위 이전에는 없던 것이 생성된 결과물인데, 의술 행위 이후에는 없던 건강이, 가르침과 배움 이후에는 없던 앎이 생성된다. 선생님께서는 아퀴나스의 해석에 대해 받아들일 만한 것 같다고 하셨지만, 아직 몇몇 사람들은 혼란과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차시 진도 범위인 2장과 3장 4절까지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겠다. 저번처럼 적극적인 질문 제시와 활발한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한다.
1. 핵심 내용
(1) 최상의 좋음(최고선)과 정치학
<요약> 우리의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좋음은 목적이다. 목적에는 위계가 있다. 그 위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게 아니다. 끝이 있다. 그러한 궁극 목적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다. 최고선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다른 모든 학문을 종속시키는 가장 주인 된 학문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란다면, ‘이것’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다.”라고 말한다. 목적의 위계가 끝없이 이어지지는 않으며(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행위와 욕구에는 궁극적인, 최상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진도가 나가지 않은 부분이지만 간단하게 프리뷰하자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잘 사는 것’, 즉 행복일 것이다. 최고선으로서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다음 시간에 이루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최고선은 어떤 학문에 속하는가? 최고선은 모든 기술과 학문이 추구하는 최상의 목적이므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주인된 기술(학문)을 통해 실현된다. 그것이 바로 정치술(정치학)이다. 승마술과 병법, 경제학은 모두 정치학에 종속된다. 한 개인의 최고선이 잘 사는 것이라면, 정치학의 최고선은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개인이 잘 사는 것’과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학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학문에 대해서도 더 상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의 좋음’과 ‘공동체의 좋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가 동등한 것 또한 아니다. 공동체의 좋음은 한 개인의 좋음보다 더 크고 완전하며 더 신적이다. 이때 ‘더 크고 완전하며 신적이다.’라는 말은 더 바람직하고 좋고, 가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용기 있는 삶을 사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용기를 발휘해 국가를 구한다면, 즉 공동체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면 당연히 ‘더’ 바람직하다.
(2) 정치학의 논증 방법
<요약> 윤리학적 혹은 정치학적 주제들에 대해 논증할 때, 수학적 논증 수준으로 엄밀하게 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어떤 학문에서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논증을 할 때에는 엄밀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학문에서 똑같은 정도의 정확성(엄밀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답을 가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좋음들 역시 그러한 어떤 가변성을 가지는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도덕은 관습의 차이를 나타낼 뿐, 보편적 본질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그랬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도 가변성은 있기 마련이므로 정확하게 또는 엄밀하게 논증될 수 없다고 해서 가치의 문제가 반드시 관습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에도 본성적인 보편성이 있다.
따라서 정치학이나 윤리학과 같이 인간의 좋음을 주제로 하는 공부를 할 때에는 ‘대체로 어떤 경향이 있는지’, 또는 ‘개연적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지곤 하는지’ 정도의 논증 수준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2. 생각해 볼 내용
(1) theios: 신적인[theos(신)의 형용사]
‘공동체의 좋음은 한 개인의 좋음보다 더 크고 완전하며 더 신적이다.’라는 부분과 관련하여 중요한 개념이 번외로 다루어졌는데, 바로 ‘theios(신적인, 신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모든 것들이 추구하는 선으로서, 가치의 근원이자 최고선의 담지자이다. 모든 것들은 신을 추구하기에 신과 닮으려 하고 신을 지향한다. 예를 들어 모든 생명체는 번식을 통해 신의 영원한 지속성을 닮으려 하고, 인간은 번식 외에도 사유를 통해 신과 닮은 활동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만물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설명한다.(형이상학 제 12권) 신은 만물의 변화가 지향하는 목적, 즉 목적인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적 국가와 자유주의적 국가
이번 시간의 핵심 내용이 정치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동선 개념과 자유주의를 비교하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가 공동선(공동체 모두에게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특히 영국 경험론을 근간으로 하는 권리 중심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도덕과 정치를 지배하게 된 이후로, 선의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국가 행위는 개개인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간섭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가치를 추구하는 주체는 각 개인이며 국가는 가치를 추구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국가는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들간의 간섭을 통제하는 소극적(negative)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이념이 우리의 삶을 잘 설명해주는가? 예를 들어보자. 한 공동체에서 귀찮지만 누군가는 공동체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지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 일을 맡는다. 자신에게는 이익이 아니지만 공동체 전체에게는 이익이기 때문에, 즉 공동선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호의 생각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설명이 될 수 없다. 지호 자신이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지호가 선택했을 뿐이라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공동의 선,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선은 없기 때문이다. 선을 추구하는 주체는 오직 개인이다. 지호가 추구한 것은 공동선이 아니라 지호라는 개인이 선택한 개인적 선이다. 만일 지호의 동료가 “네가 원해서 네가 선택한 것이잖아. 나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고 너는 원한 것이지. 네가 나보다 더 나은 것은 없어. 서로 다른 가치를 선택했을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의 관점에 충실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이 우리들의 공동체적 삶과 정신을 온전히 그리고 충분히 표현해주고 있나?
모든 가치 선택은, 그것이 타인의 선택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개인의 취향과 마찬가지로 모두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애국심이라고 한다면, 애국심을 갖고 안 갖고는 개인의 선택이다. 요즘에는 한일전 경기를 보며 진심으로 일본을 응원하는 아이들이 많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면 나와 다른 이 아이들의 선택을 쿨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게 쉽지 않은 걸 보면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거나(부족하거나), 쿨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적극적(positive) 가치는 없고, 국가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이나 간섭을 조절하는 소극적(negative) 역할만 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국가관은 신자유주의의 최소국가 이념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이런 자유주의 국가에서 약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까?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없다면 약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늘은 1권 1장을 읽었다. 첫 시간이라 그런지 겨우 한 쪽을 읽었다.(Deep Reading이니까) 핵심 내용, 질문 및 토론 등의 순서로 정리해 본다.
1. 핵심 내용
(1) 좋음이란 무엇인가?
‘좋음’ 또는 ‘좋은 것’이라는 말은 어떤 언어에서든 매우 일상적이고 기초적인 어휘다. 기초적인 말일수록 그것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기초적이라는 것은 다른 어려운 말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데 동원되기는 쉽지만(기초니까), 막상 그 말을 정의하라고 하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좋음이란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막막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을 목적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좋음은 추구하는 것, 즉 목적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무언가 좋은 것을 위한 것이니, 좋음은 우리가(인간의 경우에는) 추구하는 목적이라는 말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2) 목적의 위계질서
모든 좋음이, 즉 목적이 동등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보다 더 상위에 있다. 상위의 목적은 그 아래의 목적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래서 목적들간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든 예를 보자. 마구(말을 타는데 필요한 도구)제작술의 목적은 마구의 생산이고, 승마술의 목적은 말을 잘 타는 것이며, 병법의 목적은 전쟁에서의 승리다. 위의 세 가지 기술(마구제작술, 승마술, 병법)의 목적은 동등하지 않다. 마구 제작은 말을 잘 타기 위한 것이므로 마구제작술의 목적은 승마술에 종속된다. 말을 잘 타는 것은 승리를 위한 것이므로 병법에 종속된다. 결국 마구제작술, 승마술, 병법의 목적들은 그 순서대로 상위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상위의 목적일수록 당연히 더 좋은 것, 더 선택할 만한 것이다. 좋음은 곧 목적이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그 목적들은 위계질서를 이룬다.
2. 질문 및 토론
1장 2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경우에는 그 목적이 활동이며, 다른 것들의 경우에는 활동과는 구별되는 어떤 성과물이 있기 때문이다.” 활동이 목적인 경우와 성과물이 목적인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편선생님은 춤추기와 집짓기라는 예로 설명한다. 춤추기의 목적은 춤추는 활동 자체이고, 집짓기의 목적은 집짓는 활동이 아니라, 집이라는 성과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든 사례에서 그 구별을 찾자면, 마구제작술은 그 성과물(마구)이 목적이고, 승마술의 목적은 말을 타는 활동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양자가 구별된다.
(1) 여기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럼 공부의 목적은 어디에 속하는가? 공부라는 활동 자체인가, 그 결과물인가? 긴 설명이 이어졌다. 순수한 이론적 탐구는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하니 활동 자체가 목적이지만, 응용 학문의 경우는 기술적 생산을 목적으로 하니 그 결과물이 목적이다.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교육의 목적은 어떤가? 교육 활동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학생의 성장이라는 성과가 목적인가? 의술은 어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술의 목적은 건강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건강은 의술 활동의 결과물인가? 건강은 마구나 집과 같은 활동 바깥의 결과인가? 이런 식으로 여러 질문과 복잡한 설명들이 계속되었지만, 그럴수록 명료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1장 마지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 자체가 목적인 경우와 성과물이 목적인 경우의 구별은 목적의 위계질서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마구제작술은 마구라는 성과물이 목적이고, 승마술은 승마활동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즉 성과물이 있는냐 없느냐에서 구별되지만, 마구제작술은 승마술에 종속되고 이것은 다시 병법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성과물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매달려 혼란스러운 문답을 계속했다는 말인가? 궁금한 점은 그대로 남는다. 공부의 목적은 공부라는 활동 그 자체인가 아니면 공부의 성과물인가? 의술의 목적인 건강은 의술의 성과물인가? 그렇다면 건강은 마구나 집과 같은 성과물에 속하나? 도대체 성과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성과물은 반드시 유형의 것인가?(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의 구별처럼). 각자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다음 시간이 기대된다.
(2) 공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기특한 질문에 대한 논의 중에 나온 이야기.
공부의 목적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논어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말하는 학습(공부)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어떤 다른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니다. 아리스토텔테스 형이상학의 첫 구절은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한다.”이다. 이 말 역시 공부는 알고 싶어하는 본성을 충족시키는 일이지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함축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공부는 어떤가? (이와 관련한 읽을거리가 과제로 주어졌다. 좋은 질문을 했다는 상인가 벌인가?)
(3) 춤추기의 목적은 춤추기이고, 승마술의 목적은 승마활동 자체라는 설명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댄서가 춤추는 목적은 돈이고, 승마선수가 말 타는 목적은 금메달이라면, 춤추기나 승마 활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과물이 목적이 아닌가? 아니라는 답변. 춤추기의 본래적(자체적) 목적은 춤추기이고, 춤추기에 부가될 수 있는 돈, 상대방 유혹, 등등의 주관적 목적은 부수적이다. 부수적이라는 말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돈 안 받고 춤을 추어도 춤추기이다. 그래서 돈과 춤추기는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
(4) 목적의 위계질서와 관련된 논의와 활동에 수반하는 성과물 여부에 대한 논의가 뒤섞여서 정리가 잘 안 되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첫날임에도 모든 참여자가 질문과 토론에 적극 참여하여 매우 활기찬 시간이었다.
마인드랩 딥리딩 <니코마코스 윤리학> 3주차(2025.9.25.)
정리: 안 두 옥
내용 정리
1) 정치학의 수강 대상 (제3장 5~8절)
애들은 가라!!! 아리스토텔레스(이제부터 간단히 그)는 젊은이(아마도 미성년자)는 정치학의 적합한 수강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실천철학(정치학과 윤리학)은 삶의 경험이 없이는 논의하기 어렵다. 어린 나이에 윤리학의 천재, 정치학의 천재가 나왔다는 말은 유사 이래 들어본 적이 없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경험이 부족해도 상관없는 학문이 있을까? 그는 다른 책에서 그것을 수학이라고 말한다. 초등학생이 미적분을 너끈히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면 그의 말이 맞다. 수학은 기본적인 약속을 바탕으로 한 연역적 체계일 뿐 삶의 구체적 경험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애들이 집에 가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올바른 실천적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어린 사람들은 감정에 치우쳐서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다. 실천철학의 목적은 단지 앎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인데,(반면에 이론철학의 목적은 앎이다. 알면 그만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앎을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애들이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것 같다. 이 문제는 뒤에서 따져볼 것이다.
2)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제 3장 1~4절)
앞에서, 좋음은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더 좋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목적의 위계질서에서 상위의 것이다.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은? 당연히 최상위를 차지하는 목적이다. 이것이 행복(eudaimonia)이다. 행복은 ‘잘 사는 것’이고, 삶은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는 곧 ‘잘 행위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잘 사는 것=잘 행위하는 것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이것은 그의 주장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고 그도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이 무엇이냐, 잘 사는 게 뭐냐고 물으면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쾌락), 부, 명예, 건강 등등 다양한 답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러면 그것들 중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와 고대 희랍인들은 차이가 난다. 우리는 무엇이 행복인지는 각자 결정하는 것이지 정답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저들은, 그리고 그는 답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대체로 행복에 관한 주관주의자이고 저들은 객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실컷 논의할 예정이라신다. 기다려보자.
3) 실천철학의 원리 또는 출발점(제 3장 5~6절)
완전한 무지에서는 어떤 앎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론적인 탐구의 경우,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란 감각경험을 의미한다. 반면에 실천철학의 경우에는 좋은 습관을 통해 잘 길러진 상태가 바로 출발점이다. 이것이 실천철학의 출발점이자 원리이다. (출발점과 원리는 희랍어 archē를 옮긴 말이다. 그 뜻은 뒤에서 다시 정리하자.)
그는 올바른 습관에 의해 덕이 길러진다고 말한다.(뒤의 2권에서) 올바른 습관에 의해 길러지지 못하면 실천적 논의의 출발점에 서지도 못한 것이다. 올바른 가치판단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이 시가교육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다. 가치관이 잘못 형성된 아이를 윤리학 공부를 통해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까? 그는 어렵다고 본다. 올바른 가치관이 전제되어야 개별적인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덕의 형성에 관한 제 2권을 공부하면서 충분히 논의될 것 같다.
4) 쾌락적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제 5장)
희랍인들은 전통적으로 삶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인생의 목적은 즐거움(쾌락)이야, 라는 쾌락적 삶. 우리는 이것을 쾌락주의라고 부른다. 올바른 삶은 덕을 발휘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는 정치적 삶. 실천철학은 이런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다. 세 번째는 진리를 탐구하는 관조적 삶이다.
그는 쾌락적 삶을 짐승의 삶, 노예의 삶이라고 낮춘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 역시 쾌락의 중요성과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다만 쾌락이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 쾌락은 좋은 것임을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은 즐거운 삶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쾌락주의와 그의 차이는, 전자는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놓고, 후자는 쾌락이 행복에 수반하는, 행복의 필요조건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는 철학에 노벨상이 있다면 맨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에 주어져야 한다고 할 만큼 그의 쾌락 이론을 칭송한단다. 매우 흥미롭다고 한다. 우리가 거기까지(7권 후반부, 10권 전반부) 읽을 수 없단다. 안 가르쳐준단다. 그러면 왜 얘기를 꺼내냐는 민주샘의 항의에, 약올리는 거라신다. 나중에 논문을 알려줄테니 읽어보라신다. 아마 가르치는 걸 엄청 좋아하니 나중에 설명해 줄 게 분명하다.(내기 할 사람~)
정치적 삶(도덕적 삶)과 관조적 삶은 그가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1권 7장에서 다를 것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2. 생각해 볼 문제
실천철학은 애들과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가 많아도 애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위한다면 애들과 마찬가지로 실천철학의 수강생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삶, 올바른 행위를 위해 실천철학이 필요한 것인데 이성에 따른 삶의 태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윤리학 공부를 아무리 해도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윤리학 전공자는 그 공부를 통해 더 윤리적인 삶을 사는가? 정의를 다루는 법을 공부한 사람은 더 정의롭게 행동하는가? 법을 잘 다루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는가? 자신을 잘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데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지 않는가?
그는 올바른 습관에 의해 잘 자란 사람,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이 실천철학의 수강생이라고 말한다. 그런 성품이 실천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런 출발점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윤리학이나 정치학은 그들을 영리한 사람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올바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면 윤리학은 왜 공부하나? 실천철학은 이미 좋은 성품을 갖춘 이들에게 실천적 사태에 관한 명료한 이해를 갖추도록 해주는 학문이다. 그 행동이 왜 올바른 것인지, 그런 삶이 왜 행복한 것인지, 그 왜(이유, 원리)를 설명하는 일이 실천철학의 과제다. 한마디로 자기명료화의 작업이다.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도덕, 윤리 시간에 하는 일은 무엇인가? 제 2권, 덕에 대해 읽으면서 더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3. 개념어 정리
1) eudaimonia ; 행복, happiness
(에우다이모니아를 행복으로 번역하는 것은 잠정적이다. 이는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이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행복 개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2) ariston : 최고선
(agathon(good)의 최상급이 ariston(best)이다.)
3) eu zen ; (good, well + to live) → to live well, good livingl, 잘 사는 것
4) eu prattein ; (good, well + to do) → to do well, good doing, 잘 행위하는 것
5) archē : 시작, 출발, 근원, 원인, 원리 등
(아르케는 시작이면서 끝일 수 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목적(telos)의 개념이다. 우리가 성취하려는 목적은 시간의 순서상 일의 끝에 도달해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동시에 우리의 행위를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행위를 일으키는 시작이다. 내가 그이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그이를 만난다는 나의 목적은 작동된다. 내 행위의 시작이며 원리가 된다. 이것이 목적인(목적으로서의 원인)이다. 내가 드디어 그이를 만나면 나의 목적은 성취된다. 나의 행위의 끝은 목적의 성취다. 세계의 모든 운동은 목적을 지향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목적은 만물을 움직이는 출발점이며 동시에 운동을 마무리하는 끝이다. 시작이며 끝이다.)
6) hēdonē ; 즐거움, 쾌락
(모든 종류의 쾌락을 포괄한다. 감각적 쾌락에서 독서하는 즐거움까지. 영어 hedonism(쾌락주의)가 여기서 왔다.)
4. 과제
그는 “돈을 버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이라고 말한다.(1권 5장 8절) 무슨 뜻인가? 내가 부자가 되기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돈을 버는데, 왜 이게 강제된 삶, 자유롭지 못한 삶인가?
마인드랩 딥리딩 <니코마코스 윤리학> 2주차(2025.9.18.)
정리: 안 두 옥
지난 시간에 1장을 읽으면서 좋음의 의미와 목적의 위계질서에 대해 논의했고,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2장과 3장 1절~4절을 통해 최고선과 정치학(정치술)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전에, 지난 시간에 마무리되지 않은 주요 문제 거리인 ‘에르곤(ergon, 여기에서는 성과물)이 있는 행위와 없는 행위의 구별’ 문제, 예컨대 “의술, 가르침, 배움에는 에르곤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편상범 선생님께서는 13세기에 쓰인 아퀴나스의 주석서까지 찾아보고 해답을 가져오셨다. (존경스럽다. 역시 나를 정말로 성장시키는 것은 책보다는 선생님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우리의 이전 결론과는 다르게) 의술과 가르침, 배움 등의 행위는 에르곤이 있는 경우에 속한다. 에르곤은 행위 이전에는 없던 것이 생성된 결과물인데, 의술 행위 이후에는 없던 건강이, 가르침과 배움 이후에는 없던 앎이 생성된다. 선생님께서는 아퀴나스의 해석에 대해 받아들일 만한 것 같다고 하셨지만, 아직 몇몇 사람들은 혼란과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차시 진도 범위인 2장과 3장 4절까지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겠다. 저번처럼 적극적인 질문 제시와 활발한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한다.
1. 핵심 내용
(1) 최상의 좋음(최고선)과 정치학
<요약> 우리의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좋음은 목적이다. 목적에는 위계가 있다. 그 위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게 아니다. 끝이 있다. 그러한 궁극 목적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다. 최고선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다른 모든 학문을 종속시키는 가장 주인 된 학문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란다면, ‘이것’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다.”라고 말한다. 목적의 위계가 끝없이 이어지지는 않으며(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행위와 욕구에는 궁극적인, 최상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진도가 나가지 않은 부분이지만 간단하게 프리뷰하자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잘 사는 것’, 즉 행복일 것이다. 최고선으로서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다음 시간에 이루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최고선은 어떤 학문에 속하는가? 최고선은 모든 기술과 학문이 추구하는 최상의 목적이므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주인된 기술(학문)을 통해 실현된다. 그것이 바로 정치술(정치학)이다. 승마술과 병법, 경제학은 모두 정치학에 종속된다. 한 개인의 최고선이 잘 사는 것이라면, 정치학의 최고선은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개인이 잘 사는 것’과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학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학문에 대해서도 더 상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의 좋음’과 ‘공동체의 좋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가 동등한 것 또한 아니다. 공동체의 좋음은 한 개인의 좋음보다 더 크고 완전하며 더 신적이다. 이때 ‘더 크고 완전하며 신적이다.’라는 말은 더 바람직하고 좋고, 가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용기 있는 삶을 사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용기를 발휘해 국가를 구한다면, 즉 공동체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면 당연히 ‘더’ 바람직하다.
(2) 정치학의 논증 방법
<요약> 윤리학적 혹은 정치학적 주제들에 대해 논증할 때, 수학적 논증 수준으로 엄밀하게 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어떤 학문에서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논증을 할 때에는 엄밀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학문에서 똑같은 정도의 정확성(엄밀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답을 가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좋음들 역시 그러한 어떤 가변성을 가지는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도덕은 관습의 차이를 나타낼 뿐, 보편적 본질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그랬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도 가변성은 있기 마련이므로 정확하게 또는 엄밀하게 논증될 수 없다고 해서 가치의 문제가 반드시 관습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에도 본성적인 보편성이 있다.
따라서 정치학이나 윤리학과 같이 인간의 좋음을 주제로 하는 공부를 할 때에는 ‘대체로 어떤 경향이 있는지’, 또는 ‘개연적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지곤 하는지’ 정도의 논증 수준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2. 생각해 볼 내용
(1) theios: 신적인[theos(신)의 형용사]
‘공동체의 좋음은 한 개인의 좋음보다 더 크고 완전하며 더 신적이다.’라는 부분과 관련하여 중요한 개념이 번외로 다루어졌는데, 바로 ‘theios(신적인, 신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모든 것들이 추구하는 선으로서, 가치의 근원이자 최고선의 담지자이다. 모든 것들은 신을 추구하기에 신과 닮으려 하고 신을 지향한다. 예를 들어 모든 생명체는 번식을 통해 신의 영원한 지속성을 닮으려 하고, 인간은 번식 외에도 사유를 통해 신과 닮은 활동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만물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설명한다.(형이상학 제 12권) 신은 만물의 변화가 지향하는 목적, 즉 목적인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적 국가와 자유주의적 국가
이번 시간의 핵심 내용이 정치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동선 개념과 자유주의를 비교하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가 공동선(공동체 모두에게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특히 영국 경험론을 근간으로 하는 권리 중심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도덕과 정치를 지배하게 된 이후로, 선의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국가 행위는 개개인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간섭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가치를 추구하는 주체는 각 개인이며 국가는 가치를 추구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국가는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들간의 간섭을 통제하는 소극적(negative)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이념이 우리의 삶을 잘 설명해주는가? 예를 들어보자. 한 공동체에서 귀찮지만 누군가는 공동체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지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 일을 맡는다. 자신에게는 이익이 아니지만 공동체 전체에게는 이익이기 때문에, 즉 공동선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호의 생각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설명이 될 수 없다. 지호 자신이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지호가 선택했을 뿐이라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공동의 선,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선은 없기 때문이다. 선을 추구하는 주체는 오직 개인이다. 지호가 추구한 것은 공동선이 아니라 지호라는 개인이 선택한 개인적 선이다. 만일 지호의 동료가 “네가 원해서 네가 선택한 것이잖아. 나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고 너는 원한 것이지. 네가 나보다 더 나은 것은 없어. 서로 다른 가치를 선택했을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의 관점에 충실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이 우리들의 공동체적 삶과 정신을 온전히 그리고 충분히 표현해주고 있나?
모든 가치 선택은, 그것이 타인의 선택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개인의 취향과 마찬가지로 모두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애국심이라고 한다면, 애국심을 갖고 안 갖고는 개인의 선택이다. 요즘에는 한일전 경기를 보며 진심으로 일본을 응원하는 아이들이 많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면 나와 다른 이 아이들의 선택을 쿨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게 쉽지 않은 걸 보면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거나(부족하거나), 쿨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적극적(positive) 가치는 없고, 국가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이나 간섭을 조절하는 소극적(negative) 역할만 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국가관은 신자유주의의 최소국가 이념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이런 자유주의 국가에서 약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까?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없다면 약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3. 개념어 정리
(1) physis : nature, 자연, 본성
(2) nomos : 관습, 규범, 법
마인드랩 딥리딩 <니코마코스 윤리학> 1주차(2025. 09. 11)
정리: 안 두 옥
오늘은 1권 1장을 읽었다. 첫 시간이라 그런지 겨우 한 쪽을 읽었다.(Deep Reading이니까) 핵심 내용, 질문 및 토론 등의 순서로 정리해 본다.
1. 핵심 내용
(1) 좋음이란 무엇인가?
‘좋음’ 또는 ‘좋은 것’이라는 말은 어떤 언어에서든 매우 일상적이고 기초적인 어휘다. 기초적인 말일수록 그것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기초적이라는 것은 다른 어려운 말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데 동원되기는 쉽지만(기초니까), 막상 그 말을 정의하라고 하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좋음이란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막막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을 목적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좋음은 추구하는 것, 즉 목적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무언가 좋은 것을 위한 것이니, 좋음은 우리가(인간의 경우에는) 추구하는 목적이라는 말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2) 목적의 위계질서
모든 좋음이, 즉 목적이 동등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보다 더 상위에 있다. 상위의 목적은 그 아래의 목적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래서 목적들간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든 예를 보자. 마구(말을 타는데 필요한 도구)제작술의 목적은 마구의 생산이고, 승마술의 목적은 말을 잘 타는 것이며, 병법의 목적은 전쟁에서의 승리다. 위의 세 가지 기술(마구제작술, 승마술, 병법)의 목적은 동등하지 않다. 마구 제작은 말을 잘 타기 위한 것이므로 마구제작술의 목적은 승마술에 종속된다. 말을 잘 타는 것은 승리를 위한 것이므로 병법에 종속된다. 결국 마구제작술, 승마술, 병법의 목적들은 그 순서대로 상위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상위의 목적일수록 당연히 더 좋은 것, 더 선택할 만한 것이다. 좋음은 곧 목적이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그 목적들은 위계질서를 이룬다.
2. 질문 및 토론
1장 2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경우에는 그 목적이 활동이며, 다른 것들의 경우에는 활동과는 구별되는 어떤 성과물이 있기 때문이다.” 활동이 목적인 경우와 성과물이 목적인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편선생님은 춤추기와 집짓기라는 예로 설명한다. 춤추기의 목적은 춤추는 활동 자체이고, 집짓기의 목적은 집짓는 활동이 아니라, 집이라는 성과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든 사례에서 그 구별을 찾자면, 마구제작술은 그 성과물(마구)이 목적이고, 승마술의 목적은 말을 타는 활동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양자가 구별된다.
(1) 여기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럼 공부의 목적은 어디에 속하는가? 공부라는 활동 자체인가, 그 결과물인가? 긴 설명이 이어졌다. 순수한 이론적 탐구는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하니 활동 자체가 목적이지만, 응용 학문의 경우는 기술적 생산을 목적으로 하니 그 결과물이 목적이다.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교육의 목적은 어떤가? 교육 활동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학생의 성장이라는 성과가 목적인가? 의술은 어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술의 목적은 건강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건강은 의술 활동의 결과물인가? 건강은 마구나 집과 같은 활동 바깥의 결과인가? 이런 식으로 여러 질문과 복잡한 설명들이 계속되었지만, 그럴수록 명료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1장 마지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 자체가 목적인 경우와 성과물이 목적인 경우의 구별은 목적의 위계질서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마구제작술은 마구라는 성과물이 목적이고, 승마술은 승마활동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즉 성과물이 있는냐 없느냐에서 구별되지만, 마구제작술은 승마술에 종속되고 이것은 다시 병법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성과물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매달려 혼란스러운 문답을 계속했다는 말인가? 궁금한 점은 그대로 남는다. 공부의 목적은 공부라는 활동 그 자체인가 아니면 공부의 성과물인가? 의술의 목적인 건강은 의술의 성과물인가? 그렇다면 건강은 마구나 집과 같은 성과물에 속하나? 도대체 성과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성과물은 반드시 유형의 것인가?(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의 구별처럼). 각자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다음 시간이 기대된다.
(2) 공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기특한 질문에 대한 논의 중에 나온 이야기.
공부의 목적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논어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말하는 학습(공부)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어떤 다른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니다. 아리스토텔테스 형이상학의 첫 구절은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한다.”이다. 이 말 역시 공부는 알고 싶어하는 본성을 충족시키는 일이지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함축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공부는 어떤가? (이와 관련한 읽을거리가 과제로 주어졌다. 좋은 질문을 했다는 상인가 벌인가?)
(3) 춤추기의 목적은 춤추기이고, 승마술의 목적은 승마활동 자체라는 설명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댄서가 춤추는 목적은 돈이고, 승마선수가 말 타는 목적은 금메달이라면, 춤추기나 승마 활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과물이 목적이 아닌가? 아니라는 답변. 춤추기의 본래적(자체적) 목적은 춤추기이고, 춤추기에 부가될 수 있는 돈, 상대방 유혹, 등등의 주관적 목적은 부수적이다. 부수적이라는 말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돈 안 받고 춤을 추어도 춤추기이다. 그래서 돈과 춤추기는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
(4) 목적의 위계질서와 관련된 논의와 활동에 수반하는 성과물 여부에 대한 논의가 뒤섞여서 정리가 잘 안 되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첫날임에도 모든 참여자가 질문과 토론에 적극 참여하여 매우 활기찬 시간이었다.
3. 기억해야 할 개념
(1) techē: 기술, 예술, 기예
(2) methodos(following after~, persuit): meta(after) + hodos(way)
‘~을 따라가다.’, ‘~을 추구하다.’
(3) agathon(goodness, the good): 좋음
(4) energeia(activity, actuality): 활동, 현실태(발휘태)
(5) dynamis(power, potentiality): 능력, 가능태(잠재태)
(6) ergon(work, deed): 일, 행위 → 결과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