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드벡은 자신의 주요한 관심사는 에큐메니컬 탐구이지만,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외부적 관계의 개선이 훨씬 더 중요해진 것 같다고 평하며, 종교 간 관계에 관해 『교리의 본성』 3장이 야기한 오해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특히 대표적인 오해는 종교와 교리에 대한 3장의 설명이 신앙주의를 촉진하여 서로 다른 믿음 사이의 대화를 방해한다는 의혹이다. 린드벡이 보기에, 어려움의 주된 원인은 세계 주요 종교들의 특수한 차이를 다룬 편향성으로, 이는 종교를 다른 대부분의 문화-언어적 삶의 형태와 구분 짓는다. 이렇게 구별한 것의 특징은 “특수주의적 보편주의”라고 이름붙여졌고, 이는 보편주의를 자처하는 이념이나 일부 유사-종교를 특징짓는 포괄성과 특수성의 결합이다. 3장에서 주로 두드러진 점은 특수주의적 측면이고, 보편적 차원은 무시되었다. 3장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불균형의 결과이다.
I. 에큐메니컬적 배경
이 책의 에큐메니컬적 배경은, 린드벡이 “굴복 없는 교리적 화해” 또는 “일치된 다양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어떻게 한 역사적 맥락에서 모순되었던 교리들이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더 이상 모순이 아니면서도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린드벡이 보기에 이것은 명백하게 사유하기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그렇기에 이것을 상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 종교와 교리에 대한 이론의 탐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이 가능한 조건을 연구하하기보다 본능적으로 그 가능성의 존재를 반증하려 한다. 그러나 반대로, 에큐메니컬한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방식으로 종교와 교리를 다시 생각해 보는 노력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 낭비로 여길 만큼, 교리적에큐메니즘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문화-언어적 접근은 문화와 종교의 유사점들을 강조한다. 즉 양자 모두 가변적인 어휘와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문법 내지 구문법으로 이루어진 기호 체계(언어)로 볼 수 있다. 문화와 종교는 모두 같은 속(genus)에 속하며, 교회 교리들의 대립은 문법의 대립이라기보다 어휘의 대립으로 이해하면 굴복 없는 교리적 화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즉 일차적인 존재론적 진리 주장의 대립이라기보다, 일차적인 담론에 관한 맥락적 타당성이 있는 이차적 규칙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한, 가능하다. 이러한 규칙들은, 문제가 되는 종교에 능숙한 실천가들이 이 규칙들에 부합하는 담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옳은 것이다. 문화-언어적 접근의 화해 권고들이 다른 접근들보다 충실한 이들의 실천과 더 온전하게 어울리는 한, 이 접근은 종교와 교리에 관한 다른 이해들보다 에큐메니컬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주장될 수 있다.
II. 종교 간 문제와 경험-표현주의
3장에서 답하고자 했던 물음은 문화-언어적 접근이 종교 간의 관계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였다. 종교 간 관계는 에큐메니컬 영역 밖에서 이 이론의 개연성을 평가하기 위한 확실한 선택이다. 그 이유는 에큐메니컬 담론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비그리스도교인들과 그들 종교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담론에 어떤 변칙이 있기 때문이다. 두 영역 모두에서 실천이 이론을, 현실이 가능성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에큐메니컬 영역 바깥에서 문화-언어적 접근의 개연성을 평가하기 위한 영역으로 종교 간 관계를 선택한 주된 이유이다.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해결책은 경험-표현적 방식이며, 그것들은 다시 다원주의와 포괄주의로 나뉘며, 각각은 폴 니터가 상호성 모델과 성취 모델이라고 명명한 유형에 상응한다. 다원주의, 즉 상호성 모델은 정통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정통과 개방성을 화해시키는 어려움을 해소한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에 처음부터 핵심적이었던 믿음을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나거나 무비적이라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목표한 종교 간 관계 개선을 약화시킨다. 거의 모든 세계 종교는 무비성과 매우 흡사한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종교가 자기 종교에 대해 내세우는 주장을 배제”하는 것은 종교 이론의 종교 간 유용성을 파괴하는 행위다.(138)
포괄주의, 또는 성취 모델은 어떤 종교들은 다른 종교들보다 초월적 실재에 대한 내적 보편경험이 더 적절하게 객관화된 것이며, 이 중 최고의 종교는 다른 모든 종교에 있는 선한 것을 전부 포괄한다고 본다. 성취 모델은 이러한 방식으로 무비성과 개방성 사이의 명백한 모순을 해결한다. 성취 모델은 경험-표현적 이론을 일관되게 사용함으로써 명백히 공존 불가능한 세 가르침을 동시에 긍정한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무비적 구원자요 계시자이나, 비그리스도인도 구원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대화와 협력이 장려될 수 있다. 이 해결책의 성공은 에큐메니컬 영역으로부터 들어온 문화-언어적 불청객과의 대립을 더욱 첨예하게 했다.
III. 문화-언어적 대안
문화-언어적 대안에서는 내적인 것보다 외부적인 것이 앞선다. 서로 다른 종교는 문화나 언어처럼, 인간에게 잠재된 원재료로 자아, 공동체, 세계에 관한 상이한(때로 상호배타적인) 경험을 만들어 낸다. 오히려 특수성이 먼저 와서 서로 다른 종교가 궁극으로 여기는 것을 개별화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문화-언어적 해석자라면, 믿음은 외적 말씀(그리스도에 대한 언어적, 성례전적, 행실적 증언)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데서 온다고 할 것이다. 경험-표현주의자들에게는 문화-언어적 관점이 구원론상으로, 인식론상으로 배타주의적이어서 비그리스도교인들의 구원 및 개종을 목표로 하지 않는 대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게다가 문화-언어적관점에서 해석한 무비성은 신앙주의적이고 고립주의적이다.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의 경우, 경험-표현적 견해를 포기한다면, 종교는 그러한 활동에 개입할 이유나 능력이 거의 없어 보인다.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서로 다른 종교들은 실질적으로 중요한 공통점이 없으므로, 자신들이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또는 맺지 않을지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 모른 채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부름받을 수 있다. 이것은 종교 간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개종을 목표로 하지 않는 대화와 협력의 근간으로, 이것은 바람직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의무다.
무비성의 경우, 논의는 종교를 종교가 아닌 모든 것과 형식상 구분 짓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종교는 “우주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 혹은 “포괄적 해석 도식”이며, 이러한 특수성과 “관련시켜서 행동과 믿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을 조직화하는”데 사용된다(113-114). 이러한 정의로 인해 일상 용법상 종교적인 것이 상당히 제외되고, 종교적이지 않은 것이 상당히 포함된다. 각각은 그 특수주의에 의해 서로 분리되고, 그 보편주의 때문에 서로 중첩된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상대 종교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식별하고 기술할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각각의 특수성은 서로 무관하더라도 범위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서로 겹쳐지게 된 관점을 규정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종교에 일상 언어상으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각 종교의 관점으로 재기술될 수 있으며, 재기술 이후에도 결코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이런식으로 두 신앙 간의 소통은 보편주의적인 차원에서 제한적이지만 유의미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다만 3장은 유사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입장을 겨냥하여 특수성을 강조했기에, 고립주의의 위험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질적인 믿음은 틀린 것일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의 맥락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다. 아니면 정당화되지 않아도 진실일 수 있다. 정당화된 믿음과 참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종교 간 상호 존중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모든 신학 영역은 충실성(faithfulness), 적용 가능성(applicability),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에 관심을 가진다. 이 세 가지는 맥락에 따라 구체적 의미를 달리하지만 공통의 틀은 다양한 입장들의 상대적 타당성에 대해 진정한 논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만 각 신학 유형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적 틀 안에 들어가 있어서 각자 나름의 타당성의 기준을 형성하고 있기에 이러한 논쟁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장에서 가능한 최대치는 충실성, 적용 가능성, 이해 가능성이 후기 자유주의 신학들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지를 언급한 다음 독자들이 스스로 평가하게 하는 것이다.
Ⅱ. 텍스트 내재성으로의 충실성
기술 신학(descriptive theology)의 과제는 종교가 신자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규범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제의 수행과 문화-언어적 접근이 양립할 수 있는 한 방식을 “텍스트 내재적(intratextual)”이라 부를 것이다. 반면 “텍스트 외재적(extratextual)” 방식은 텍스트가 지시하는 객관적 실재나 상징하는 경험에서, 즉 텍스트 바깥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으므로 종교를 경험-표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는 특정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므로 내재적 방식에서는 어떤 단어가 종교 안에서 작용하여 실재와 경험을 형성하는지를 검토한다.
의미 있는 기호로서 그것들의 실재는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발생할 때마다 그것들의 텍스트 내재성에 의해, 즉 이야기 안에서 그것들이 위치하는 자리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된다. 신학은 단지 종교를 그 종교 내부에서 설명함으로써만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부적인 것, 즉 종교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 기술한다는 더 강한 의미에서 텍스트 내재적일 수 있으며, 종교적으로 형성된 이차적 개념을 사용하여 모든 것을 기술함으로써 텍스트 내재적일 수 있다. 종교는 그 포괄성, 반성성, 복잡성을 고려하면 기어츠가 말한 “두툼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기어츠에 따르면 “문화는 그러한 것들(사회적 사건, 행동, 제도, 과정 등)이 이해 가능하게-즉, 두툼하게- 기술될 수 있는 하나의 맥락이다.” 또한 종교는 은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텍스트 내재적이다. 주요 종교는 자기만의 기호로 된 규칙(semiotic codes)을 모범적으로 예시한다고 여기는 글들을 추려낸, 비교적 고정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다. 정경 텍스트는 종교의 생존 조건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규범적 신학 기술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텍스트를 그 내재적 의미의 측면에서 의미를 기술하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과 그것이 생성한 텍스트 외적 실재에 관한 관점을 설명하는 문제이다. 이는 정경과 같은 권위적인 텍스트에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정경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세계도 정경이 창조한 세계보다 더 실재적이지 않게 된다. 경전의 세계는 신자들이 삶을 영위하고 실재를 이해하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성경 바깥의 실재와 경험을 기술하는 방식은 모형론에 해당하는데, 이는 성경의 내용을 성경 바깥의 실재에 대한 은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바깥의 실재를 성경의 내용으로 만든다. 바꿔 말하면 텍스트 내재적 신학을 따르면 세계가 텍스트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세계를 흡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뱅에 이르는 여정을 보면 무분별한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졌고 문자로 특정할 수 있는 텍스트 내재적 의미의 우선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해석의 방향은 성경에서 세계를 향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쳐 모형론(typology)적 해석은 합리론, 경건주의, 역사 비평의 발전이 결합한 공격에 무너졌다. 성경은 세상을 보는 렌즈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그 종교적 의미와 문자적 의미는 성경 바깥에 자리하게 되었다. 성경적 섭리 이해를 되찾는 것의 가능 여부는 문학적 방식의 신학적 성경 읽기의 가능 여부에 달려 있다. 예수 이야기를 이해하는 각각의 방식은 텍스트에 관한 물음을 명확히 하고 알려진 예수상을 구체화하는 별개의 해석적(역사적, 현상학적, 실존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교리적) 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예수상은 모두 니케아와 조화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형식상 정통이나 종교적 실천과 이해에 대한 함의는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텍스트 내재적 방법은 문학적 고찰에 의존한다. 규범적 또는 문자적 의미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종류의 텍스트와 일관되어야 하며 텍스트 바깥의 관심사에 암시하는 무언가가 아니어야 하며, 텍스트가 공동체의 언어에 대한 하나의 예시라는 측면에서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즉 예수 이야기를 듣는 주요 이유는 이야기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것이다.
텍스트 내재적 읽기는 텍스트 자체의 문학적 구조로부터, 신학적으로 통제된 의미를 지시하고 있는 해석적 틀을 도출하려 한다. 이 방식은 성경 전체를 아우르도록 확장될 수 있다. 성경에 담긴 다양한 자료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시된 ‘사실적 이야기’라는 특수한 문학적 특징을 지닌 하나의 포괄적 이야기 안에 담겨 있다. 데이비드 켈시를 따르면 “광대하고 느슨하게 구성된 비허구적(non-fictional) 소설” 같다. 나아가 성경의 주요 기능을 명확히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 기술을 제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목적이 피조물의 행위와 목적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충실성의 형식적 기준이 여전히 동일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신학적 기술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다양할 필요가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일차적 초점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수의 이야기에 묘사된 대로 행위자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우리가 삶을 영위하며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 신학은 실질적으로 서로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충실성에 대한 공통의 텍스트 내재적 규범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텍스트 내재적 신학들도 규범에 대해 불일치할 수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정경의 범위와 통일성에 대해 불일치할 수 있다. 텍스트 내재성은 종교나 전통이 충실하게 기술되고 발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수 있지만 이것의 실질적 영향력 또는 교리적 영향력은 어ᄄᅠᆫ 정경에 호소하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
비평 이후의 유형이나 휴기 자유주의적 유형에서 텍스트 내재성은 비평 이전의 갖가지 전통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사실적 이야기와 역사적 또는 과학적 기술을 구분지을 수 있다. 더욱이 역사 비평은 텍스트의 신학적-문학적 해석에 영향을 주어 성경에 대한 비평 이후의 서사적 읽기(narrative reading)는 비평 이전의 읽기와 현저히 다르다. 그러나 텍스트 내재적 접근에서는 정경적 의미를 확정할 때 문학적 고려가 역사 비평적 고려보다 더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비평 이후에 텍스트 내재적 의미에 관한 관심의 초점은 근대 이전의 해석에서 중요했던 텍스트의 몇몇 측면에 대한 태도 변화를 포함한다. 후기 자유주의적 텍스트 내재성은 성경 이후의 세계를 성경의 세계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상상적, 개념적 근거를 제공한다.
텍스트 내재성의 실천은 그저 느슨하게만 명시적 이론과 관련된다. 만약 이론적으로 대중화되더라도 더 많고 더 나은 텍스트 내재적 실천으로 귀결되기보다 주로 텍스트 내재성에 대한 논의로 흐르게 될 것이다. 실천의 조건은 점점 약화되어 우리 시대의 높은 지적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정합적인 종교 언어와 공동체적 삶의 형태로 철저하게 사회화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는 지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더 넓은 문화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신학에는 불길한 일이다. 짧은 신정통주의의 막간이 지나간 후, 종교를 성경 바깥의 틀로 재기술하려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다시 지배적이다. 종교는 그 고유의 측면에서보다 현재 유행하는 범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쉬운 낯선 텍스트가 되었다. 따라서 텍스트 내재적인 신학적 충실성을 방해하는 근본 장애물은 학문적 고려사항이나 지적 고려사항에서 비롯되기 보다 심리 사회적 상황에서 생겨날 것이다.
III. 미래학(FUTUROLOGY)으로서의 적용 가능성
모든 포괄적 해석 체계(All-embracing systems of interpretation)는 자체적인 내적 규준에 따라 적용 가능성을 평가한다. 이러한 체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현재의 현실성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따라 판단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와 비마르크스주의자는 현재의 추세를 기술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미래에 대한 예상은 크게 다를 수 있다.
미래에 관한 관심은 전통적으로 성경의 종교에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 예언자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신실하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선포하되, 아무리 현실성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미래(=약속된 천국?)에 반하는 예언은 거부한다. 또한 종교적 예언은 신학적 해석에 의해 실제 미래와 관계 없이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이에 따르면 예언의 목적은 다가올 일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에 알맞게 현재의 행동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성격적 예언보다 미래학과 더 비슷하다. 미래학은 경험적 연구에 기반하여 “시대의 징조(the signs of the times)”를 발견하기 위한 이차적 연구 작업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경우, 그 목적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에서 해야 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적 제안은 다가올 시나리오에 대한 현실성 있어 보이는 정도에 따라 그 충실성과 적용 가능성이 판단된다.
그러한 시나리오를 구성할 때, 자유주의와 후기자유주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그들이 미래의 비전과 현재 상황을 연결하는 방식에 있다. 자유주의자는 경험, 즉 현재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조정한다. 반면에 후기자유주의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설명한다. 전자는 현재의 추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지만, 후자는 현대적 발전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후기자유주의는 현재의 유행에 저항하거나 자유주의자의 해석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종종 결과적으로 보수적 입장이 될 수 있다. 물론 텍스트 내재적 규범이 새것을 위해 옛것을 거부해야 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린드벡의 관점에서 오늘날 종교에 대한 주도적인 관점은 경험-표현주의이다. 교회들은 교인들을 정합적이고 포괄적인 종교적 관점과 삶의 형태로 사회화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이러한 상품을 조달하는 공급자가 되었다. 사회는 개인들이 사회적 영향을 받기 이전의 자기됨(selfhood)을 경험하도록 장려하고,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보면 동양의 종교와 철학은 ‘초월적 자아의 신화(the myth of the transcendental ego)’를 지탱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풍조는 전반적으로 후기자유주의의 입장과 상반된다.
실제로 무한히 다양화된 종교적 추구를 위한 틀로서 일반화된 관점이 필요하다면 자유주의(=경험-표현주의)는 앞으로도 가장 주류의 관점이 될 것이다. 심층에서의 일치 가설에 개방적인 경험-표현주의는 특수성을 강조하는 문화-언어적 종교 이해보다 이러한 필요를 더 잘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유일신 종교들은 특히나 이런 요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미래학의 추측적 영역에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추세는 언젠가는 변화한다. 어떠한 경향이든 극단으로 나아가면 그 자체의 존립 조건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린드벡은 “미래 일치된 세계의 존재 가능성은 근대성이 품고 있는 산(acids)을 중화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와 자격보다 타인을 향한 관심을 지지하고 개인적 성취보다 사회적 책임 의식을 지지하는 매우 특수한(particular) 관점으로 구성원을 사회화하는 공동체만의 영역(enclaves)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특정한 어떤 종교의 역할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은 경험-표현적 방식보다 문화-언어적 방식으로 해석된다면 진전시키기가 더 쉽다.
세계 질서의 존립 가능성이 아니라 문화 전통의 존립 가능성에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할 때, 이러한 고려는 더욱 유효해진다. 만일 성경이 서구의 상상력을 형성해 왔다면 서구 문화의 활력은 성경을 탁월한 정경 문헌으로 여기며 더 넓은 문화와 밀접하게 접촉하는 집단들에 달려있게 된다. 아마도 이만큼 명확히 규정된 현저한 정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동의 종교와 문화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어떤 종교가 지배보다 섬김을 강조한다는 전제하에, 그 종교가 자기 고유의 특수성과 완전성을 보존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에 더욱 기여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종교 공동체는 그들 고유의 텍스트 내재적 관점과 삶의 형태에 집중하는 만큼 실질적으로 현실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신앙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공동체에 유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해소된다. 개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종교 공동체의 구원은 행위(works)에 의한 것이 아니며 신앙(faith)도 실제적 효력을 위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실함(faithfulness)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선행들이 흘러나온다. 성경의 종교가 민주주의와 과학뿐만 아니라 서구가 보배처럼 여기는 다른 가치들이 창출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렇게 자기 종교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경의 종교가 이 같은 서구적 가치의 악마적 타락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지금은 서구 문명이 세계 문명이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획하지도 않았던 방식으로 될 것이다.
IV. 기량(SKILL)으로서의 이해 가능성
그렇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종교를 더욱 잘 이해하고 신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텍스트 내재성은 완전히 상대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를 스스로 닫힌 상태의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지적 집단으로 만들 수 있다.(발제자: 나도 같은 의견) 둘째로, 이는 종교 간의 선택이 전적으로 자의적이며, 이성적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신앙의 문제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는 종교들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된 토대를 모색하고 있으며 각 종교의 전통을 현재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게 하는 변증적 접근을 취하는 것이 필수인 것 같다. 토대 기획에 대한 후기자유주의의 저항은 이런 관점에서 치명적 결함이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종교에 대한 개인의 견해나 지식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종교를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보편자들에 의해서 비단 교회 밖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반쪽짜리 신자들에게, 그리고 특히 신학자들에게, 신앙은 믿을 만한 것이 된다. 포교를 위하여 성경을 현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가능하다.
변증적 접근과 토대의 모색에 회의적인 후기자유주의자는 번역문을 통해 종교를 배울 수 없다고 본다. 번역을 통해 어느 정도 수준의 의미 전달은 가능하지만, 번역문을 듣고 읽는다고 원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방식을 배우지는 못한다. 따라서 변증적 접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방편적이고 비토대적으로 다양해야 한다. 언어 문법처럼 종교의 문법은 경험을 분석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종교적 능숙함과 언어적 능숙함은 경험을 다룰 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경험 자체는 능숙함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될 수 있다.
또한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은 신학적 종교 연구를 폐쇄적인 지적 집단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학문 분야와 더 밀접하게 교류하도록 만들 수 있다. 역사, 인류학, 사회학, 철학에서 문화-언어적 성향의 확산은 텍스트 내재성, 즉 종교를 그 내부로부터 기술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킨다. 종교를 다른 개념으로 번역하여 설명하려는 자유주의의 시도는 주로 종교인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현대 문화가 그 종교적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번역 – 자유주의적 시도 - 은 부자연스럽고, 복잡하고, 모호한 것이 된다.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 학계의 학자들은 종교의 신빙성이 아니라 종교가 신자들에게 작동하는 방식, 즉 기술적 이해 가능성(descriptive intelligibility)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관심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이다. 반면 종교의 신뢰성에 몰두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점차 20세기 환경에서 19세기의 섬이 되는 것 같다.
여전히 기술적 이해 가능성이 간 학문적 목적만이 아니라 종교적 목적에도 도움이 될 것인가는 문제로 남아 있다. 만일 판단의 기준 혹은 보편적/토대적 구조가 없다면 선택의 이유는 비합리적이며,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맹목적 신앙의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러나 반토대론이 비합리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오늘날 보편타당한 합리성의 기준과 토대적 학문의 가능성이 의심받는 것과는 별개로, 서로 다른 사고틀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선택이 일시적 기분이나 우연적인 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는 언어학자가 탐구하면서 때때로 어림할 수 있으나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심층 문법의 규칙과 비슷하다. 종교와 신학의 합리성은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미학적 성격, 즉 정형화할 수 없는 기량의 특질을 띠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종교와 신학의 기본적 입장은 쿤의 과학적 패러다임처럼 확실한 반박에도 끄떡없으나(확증의 성격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받고 논증될 수 있으며, 이러한 시험과 논증이 결국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성은 과학적 선택뿐만 아니라 종교적 선택에도 제약을 둔다. 비록 이러한 제약이 너무 유연하고 비정형적이어서 기초신학에서도 일반 과학 이론에서도 뚜렷하게 설명될 수 없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이해 가능성은 기량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신빙성은 좋은 성과(performance)에서 나오는 것이지 성과와 무관하게 정형화된 규준을 고수함으로써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합리성이란 신자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과 현실에 대해 종교적으로 이해 가능한 해석을 제공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종교는 일반 과학 이론이나 패러다임에 적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합리적 검증 절차를 거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검증이 종교의 정식화나 폐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서의 합리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자의 지적 노력이 종교 전통의 건강에 기여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근대 이전의 신학적 견해도 종교의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전근대의 신학자들은 계시가 신학적 기획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지만, 신앙을 해설하고 변호하면서 철학적·경험적 고려를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방편적으로 변증학을 인정할 수 있지만, 신앙에 앞서서 신앙을 지배하는 형태의 변증학은 배제된다. 논증으로 믿음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일단 신앙의 언어를 배운 다음에야 논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음의 문제는 후기자유주의의 반토대론이 전통적 언어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종교적 메시지를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몰두하는 문제로, 만일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어떤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면, 종교 공동체로부터 이해 가능하지도 않고, 충실하지도 않고, 적용할 수도 없다는 판단을 받을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후기자유주의의 방법은 번역보다는 고대의 교리교육(catechesis)과 비슷하다. 즉 새로운 개념으로 신앙을 재서술하는 대신, 잠재적 신봉자들에게 종교의 언어와 실천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수 세기 동안 대부분의 종교가 신앙을 전하고 회심자를 얻는 주된 방법이었다. 과거 주류 보편교회로 회심한 이교도 개종자들은 대부분 회심을 결단한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이해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와 삶의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 동기는 다양했으나, 그들은 교리교육을 받고 교리 안에서 새로운 행동 방식을 연습하며,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배우기로 했다. 그들은 낯선 그리스도교 언어와 삶의 형태에 능숙해진 다음에 비로소 지적이고 책임감 있게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신자들은 성경 이야기의 세계와 친밀해졌고 또 상상의 방식도 그 세계에 매우 익숙해져서, 삶 전체를 종교적 측면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적 형태의 성경 세계는 종종 심하게 왜곡되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텍스트 내재적으로 작용했다.
현대 서구 문화는 이러한 사회화가 효력을 잃고 교리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번역이 매력적인 대안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에 있지만, 성경의 유산은 잠복적이면서 탈-텍스트화된 형태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 대중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에도 종교적이었던 과거로부터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은 교리교육을 거부하지만, 그들에게 잠복되어 있는 그리스도교를 명확히 나타내 주는 실존적, 심층 심리학적, 해방적 언어로 복음이 번역되는 것에 자주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효과적인 교리교육은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점진적으로 탈그리스도교화되는 시대에서 교회의 성격이다. 현재 교회는 선교적 확장의 시대와 달리, 문화를 형성하기보다 주로 지배적 문화에 적응하고 있다. 교회는 계속해서 한 가지 방식(fashion)이나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다수 인구를 끌어안으며 좋든 싫든 다수의 경향에 맞춰 나갈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탈그리스도교화가 훨씬 더 진행되거나 아니면 별로 그럴듯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교회가 교인 수를 유지하고자 하고, 신학자가 신앙을 신빙성 있게 만들고자 하는 정당한 욕망으로 인해, 현대어로 번역하는 경험-표현적 방법이 계속해서 선호될 것이다.
V. 결론
이상의 논의가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후기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할 만한 교리적, 신학적 이유가 없음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후기자유주의가 강조하는 텍스트 내재적인 이해 가능성은 한때 문화적으로 국교회 체제였다가 아직 분명하게 국교회 체제를 벗어나지 않은 어색한 과도기에 있는 그리스도교 같은 종교의 필요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후기자유주의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온전함이 텍스트 내재성을 요구하고 있고, 아마도 서구 사회의 활력은 장기적으로 결국 성경적 관점이 텍스트 내재적이고 번역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문화를 형성하는 힘에 의존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현재 유행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종교적으로 관심이 있는 대중의 아우성에 저항해야 한다. 대신에 신학은 계속되는 탈그리스도교화가 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진정성을 공동체적으로 가능하게 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도 궁극적 시험 기준은 성과다. 만일 어떤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이 실제로 사용될 때 관련 공동체에 개념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유용함이 입증된다면, 그것은 곧 표준적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장은 신학적 성과가 아니며, 기껏해야 임시변통적 변증학의 단편에 불과하다. 이 장에서 신학을 논하기는 했지만 텍스트 내재성의 기준에 따라 펼쳐 낸 어떤 단일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학적 주장은 거의 없다.
이 장은 그저 과거의 성과에 의존해 미래의 작업을 제안했을 뿐이다. 독자는, 과거 몇십 년간 에큐메니컬 대화의 교리적 결과가 다른 어떤 틀(이를테면, 명제적 또는 상징적 교리 이해)보다 문화-언어적 종교관 및 교리에 대한 규칙 이론의 맥락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 책이 촉발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신학적인 면에서 텍스트 내재성이야말로 문화-언어적 종교 이해 및 교리에 대한 규칙적 관점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하는 원천이었다. 물론 이것은 후학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검토된 이후에야 최종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장의 목적은 교리의 규칙 이론이 어려운 사례들 (고전 그리스도론의 무조건성, 마리아론 발전의 불가역성, 교도권의 무류성)에서 작동하는지 살펴봄으로써, 규칙 이론이(그리고 함축상, 이와 관련된 종교에 대한 문화-언어적 이해가) 신학적으로 그리고 에큐메니컬적으로 유용한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규칙 이론은 다른 이론들보다 역사적 변화 속에서 교리의 영속성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교회 교리를 실천과 더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써 교리를 규범적으로 더 효력 있게 만든다.
5.1. 니케아와 칼케돈
고대의 삼위일체론적 신조와 그리스도론적 신조의 무조건성과 영속성을 성공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한편으로 교리들을, 다른 한편으로 교리를 정형화하여 담아낸 용어 및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동일한 신앙, 동일한 가르침, 동일한 교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가능성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징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교리를 표현한 이미지와 교리가 동일시되기에, 교리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구분은 교리 내부의 구분이 아닌 교리와 경험 사이의 구분이다. 비논증적 상징을 담는 형식이 변하면, 상징이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경험도 일반적으로 그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맥락 또한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의미를 결정하는 데 이바지한다. 이 관점에서 교리의 형식이나 맥락이 바뀌면 상징의 내용이나 실질도 또한 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차적 명제 및 이차적 명제(규칙)와 그것들을 담은 형식이 서로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하나의 동일한 명제가 다양한 개념을 사용한 다양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일한 문법 구조나 작용이 규제적 의미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되고 재기술될 수 있다.
한편 여러 가지 다른 정형문구로 표현된다 할 때, 그 안에 있는 동일한 내용이 무엇인지 진술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오직 다양한 정형문구가 동치임을 봄으로써, 그리고 보통 다음 단계에서 동치인 규칙들을 진술함으로써, 그 형식과 별개로 자기-동일적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비슷하게, 니케아와 칼케돈의 교리들이 그것들을 정형화하여 담아낸 개념과 구별될 수 있음을 보이는 유일한 방법은, 형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동치의 귀결을 갖는 표현으로 이 교리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타나시오스는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곧 아들에 대한 언급이라는 규칙의 측면에서 동일본질의 의미를 표현했다. 이 신학자는 니케아 교리를 존재론과 관련된 일차적 명제가 아니라, 이차적인 발화 규칙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이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삼위일체론 그리고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논쟁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도교의 신조들에는 최소한 세 가지 규제적 원리가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즉, 유일신론의 원리, 역사적 특수성의 원리, 그리스도론적 최대주의의 원리가 그것이다. 이 세 규칙의 상호작용으로 규정된 용납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은 것으로 느껴질 때, 그것들은 모두 거부되었다. 이 세 규칙의 압력과 인지 부조화를 덜 일으키도록 조정된 것이 마지막에 가톨릭 정통이 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케아와 칼케돈의 정형문구는 가장 이른 시기 층위의 전통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었던 규제적 원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담론을 고대 후기의 고전적 세계에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능한 결과 중 하나(어쩌면 유일하게 가능한 결과)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들 신조는 주류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중요했던 교리적 규칙들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정형문구를 만들 때는 전형(paradigms)을 따라야 한다. 원래의 전형이 형성되도록 지도한 동일한 규칙들이 새로운 정형문구를 구성하는 데 작용한다면, 이 정형문구는 동일한 교리를 표현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새로운 정형문구를 만드는 일, 즉 새로운 상황에 맞게 신조를 다시 작성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교회 전체가 어떤 교리적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일 자체가 아주 드물고 어려운 성과이기 때문이며, 특히나 그것이 예전적, 표현적 기능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어려운 성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적인 표현보다 고전적인, 또는 불가해한 개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 개념을 통해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상징적이고 지적인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신자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하고, 선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대의 정형문구는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권위를 지니는 것은 신조의 정형문구들이 예시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 필자 주) 규칙들이다.
5.2. 마리아론
원죄 없는 잉태, 성모 승천 등을 포함하는 마리아 교리는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론이나 또는 영혼 불멸론 같은 조건적 교리만큼 체계적으로 숙고한 결과이기보다, 종교적 숭배와 감수성의 발전에 따른 산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마리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역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마리아 교리는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암묵적으로만 내재되어 있던 것에 관한 새로우면서도 지속적으로 타당한 발견 내지 통찰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규칙 이론이 성경 시대 이후 이렇게 특수한 형태의 발전에서 발생한 불가역성의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물음은 형식에 관한 것이지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규제적 접근이 신학적 선택지를 열어두는가를 묻는 문제다.
모든 어법에는 그 어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한정하는 숨겨진 제약이 있다. 그런데 그 제약이 무엇인지는 오직 새로운 것을 말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리고 그 시도에 실패하거나 성공함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론도 마찬가지로,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야 제약과 허용의 문법적 원리 또는 논리적 원리를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정확하고 올바른 질문이 정확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제기될 수 있어서 근저의 구조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마리아 공경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교리와 결합하고 하나님이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점에 관한 예리한 인식과 결합하여 오랫동안 천천히 자라난 다음에야 원죄 없는 잉태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될 수 있고 대답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 문법이 초기 세대에 숨겨진 방식으로 우리 주님의 어머니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동시에 동일한 교리가 가역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서방의 신학과 죄의식의 맥락에서만 마리아론이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해서, 여기서 근저의 규칙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훨씬 어려운 문제다. 문제시 되는 것은(마리아론 자체가 아니라 마리아론의 배경이 된 – 필자 주) 서방 전통의 원죄 개념이다. 원죄없는 잉태 교리는 그 교리의 발생과 관련된 일부 규칙들 (죄에 관한 특정한 신학과 연관된 규칙들)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에,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론 교리와 달리 가역적인 것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규칙 이론은 역사적 주류 그리스도교가 필요로 하는 보다 분명한 교의적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교리가 신앙 공동체에 조건적으로/무조건적으로 필수적이든 개정될 수 없으며 조건적 교리조차 때로는 불가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한다. 동시에 규칙 이론은 구체적 교리의 지위에 관한 실질적 문제를 결정하지 않기에, 교리가 발전하거나 후퇴할 여지를 모두 남겨 둔다.
5.3. 무류성
무류성은 교리보다는 교회의 본성과 관련되기에 현재까지의 문제와 논리적으로 구별된다.
무류한 것은 공동체의 교리적 결정이며, 교리는 무류가 아니라 개혁할 수 없는 것이다. 무류성은 심각한 오류 즉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하는 오류로부터 면제되는 것이다. 무류성의 긍정은 단순히 교회가 그리고/또는 교회의 교도권이 교회의 정체성이나 안녕에 필수적인 특정한 쟁점에 관하여 엄숙한 결정을 내릴 때 신앙의 문법에 치명적으로 어긋나지 않음을 긍정한다.
무류성은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말할 수 있나와 관련된다. 그러나 주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이 능숙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언어적으로 능숙한 사람은 널리 소통하는 것과는 관심 없는 종파나 고립된 변두리보다 주류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 또는 정통이라고, 그리고 에큐메니컬이라고 불린 이들 말이다. 이 정형문구의 결과들을 일상적인 신앙생활과 종교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바로 여기 속한 이들이다. 문화-언어적 접근에서, 종교 교리는 무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존재론적으로는 참이 아니더라도 체계 내적으로는 참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의 함의를 알기 위해서 두 가지 질문을 다루어야 한다.
1) 이렇게 교리에 부여된 확실성은 신학적으로 충분한가?
이 문제는 경험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다양한 것이 종교적으로 충분하냐는 문제이다. (보증의 문제 – 필자 주)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교회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대해 ‘자연 이성’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소위 ‘종교적’) 확신이 신자들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이러한 비판은 이해의 실패, 근대적 편견, 신학적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문제는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가?”이지 “그리스도교는 진리인가?”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에게 진리이자,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신자들 – 필자 주)은 실제로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지를 비그리스도교인들보다 더 잘 알지만, 교리의 특성이 그리스도교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비신자도 능숙하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러한 비판은 데카르트적인 근대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즉, 확실성이 보편적 의심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확실성이 먼저 있고, 그것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서 의심이 뒤따른다.
셋째로 이러한 비판은 잘못된 종류의 초자연주의라는 신학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신앙의 내적 논리에 대한 교리적 결정이 올바른지를 신학적으로 판단하는 일이 경험적인 판단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들은 규준들의 진정성에 대한 무류한 지식을 한편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 즉 대가도 공로도 없이 받은 은총의 선물임을 인정할 수 있다.
2) 무류성의 자리, 즉 교리를 보증하는 권위의 자리는 어떠한가?
(문화-언어적 모델은) 무류성의 자리가 한 언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공동체 전체라고 제안한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입장에 가깝게 들린다. 즉, 교회가 성령에 열려 있으며 또한 성경 시대부터 현재까지 모든 신실한 증인들과 시공간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한, 하나의 전체로서의 교회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에도, 공식 교도권에도, 에큐메니컬 공의회조차도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규칙 이론이 어떤 신학적 선택지를 특별히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의 중요성과 조건적 교리의 가능성이다. 개신교의 ‘오직 성경’과 로마 가톨릭의 공식 교도권에 대한 강조는 조건적으로 필요하나 가역적인 교리이다. 정교회의 관점은 교회가 나뉘지 않을 때 적절하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점은 교회가 분리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권위, 곧 궁극적인 최종 법정을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이 모든 것들은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들은 재해석될 수 있다. 성경에 부여된 최종 권위는 성경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려되어야 한다. 공식 교도권, 특히 교황의 경우는, 교황이 교회 일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에 대변인이 되기를 진지하게 추구한다는 알려지지 않은 조건처럼, 그가 무류성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무류성에 관한 세 가지 이론(정교회, 개신교, 가톨릭 – 필자 주)은 동일한 규칙에 대한 다양한 정립, 아니면 적어도 양립 가능한 행동 규칙에 대한 다양한 정립이 될 것이다. 이처럼 교리를 규칙으로 볼 경우, 규칙의 적용 영역을 구분하면, 각각의 교리는 충돌하지 않는다. 이 경우, 명제적 진리들이 서로 확고부동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교리는 종종 화해할 것이라는 점이 뒤따른다. 결론적으로, 규칙 이론은 주류 역사적 전통의 어떤 교의에도 저촉되지 않는 듯하며, 또한 에큐메니컬적 일치와 불일치를 의미 있게 논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5.4. 규제적 관점의 우월성
교리의 본성에 관한 규제적 견해와 현대의 명제적 견해 사이의 일치는 몇 가지 면에서 불일치보다 더 두드러진다. 로너간과 라너는 모두 교리가 규칙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로너간이 마리아 유형의 ‘정서적’ 성격에 관해 쓴 글을 예로 들자면, 그는 이런 교리들이 어떤 고정된 명제적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규칙을 보여주는 예시라는 주장에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너간은 삼위일체론과 같은 고전적 교리의 경우, 교리의 규제적 기능이 먼저 명확하게 지각된 후에 스콜라주의의 등장과 함께 형이상학적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고 주장되었다고 본다. 이 경우 신조의 확언에 대해서도 교리의 권위는 반드시 일차적인 존재론적 지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규칙 이론에 동의하는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 교회에 필수적인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필수적이지 않다.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주변적인 것이 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또한 교리적 명제가 영속적이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정형문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수정된 또는 역사주의적 명제 이론은 규칙 이론 못지않게 역사적 변화와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불일치의 실제적 결과는 어떤 면에서 사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존재하고, 어떤 목적에서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
주요한 이론적 논쟁의 관건은 ‘오컴의 면도날’을 적절하게 응용하는 것이다. 규제적 관점에서 보면, 명제주의적 해석은 필요 이상의 해석이다. 만일 니케아 교리 같은 교리가 규칙으로서 영속적인 규범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나아가서 존재론적 지시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삼위일체론의 경우, 그것은 한정된 사안이다. 규칙 이론은 그리스도교 언어의 삼위일체론적 유형이 신성의 형이상학적 구조와 상응하는지에 대한 사변을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사변이 교리상 필수도 아니며 구속력이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살고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공동체적 규범이 되지 못하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이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실재에 더 잘 상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물음은 종말의 이편에서는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은 또한 신학적 평가와도 무관하다. 어느 이론이 신학적으로 가장 좋은지는 그것이 성경과 전통의 자료를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삶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얼마나 잘 조직하는가에 달려 있다.
삼위일체 교리가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이론 구성을 위한 규칙 또는 규칙의 결합이라면, 상술한 두 가지 유형의 이론이, 같은 규칙을 따를 때, 둘 다 교리적으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교리가 존재론적 지시를 가진 명제라면, 해당 교리가 존재론적으로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두 이론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한 가지 형태만이 참일 가능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명제적 견해의 실제 단점은 사소하지 않다. 명제적 견해는 어느 한 이론이 이단적임을 암시한다. 삼위일체 교리가 규제적일뿐 아니라 명제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만, 논쟁 당사자 양쪽 모두 그런 이유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라도 해보았는지가 전혀 분명하지 않다.
명제적 접근과 규제적 접근이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요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해석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대조하는 것이다. 영혼 불멸의 교리를 예로 들면, 명제적 접근의 경우, 그 교리가 나타내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를 따르다보면, 끝없는 사변적 재해석 과정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규제적 접근의 경우,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구체적 삶과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교리는 해석이 아닌 따라야 할 대상이므로, 신학자의 과제는 교리가 적용되는 상황(일시적/지속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명제적 접근의 경우, 비트겐슈타인의 방식대로, 언어는 일하지 않고 빈둥댄다. 규제적 접근의 경우, 도구가 현실과 맞물리고, 교리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교회의 실천과 직접 관련된다. 니케아와 칼케돈과 관련한 문제는 그것들을 현대적 범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성경 이야기의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이 말하는 한 분 하나님께 가는 길로 최대한 넓게 해석함에 있어 어떻게 그것들만큼 또는 더 잘 할 수 있는 가이다. 따라서 규칙 이론은 교리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대신, 현대화된 그리고 상대화시키는 명제적 해석보다 교리의 규제적 효과를 높이는 데 더 알맞을 수 있다.
따라서 교리의 교칙 이론이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규제적 견해가 적어도 규범성에 관해서는 (명제적 견해보다) 더 우월하다. 형이상학에 맞춰진 신학적 사변의 교리적 적합성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실천에 초점을 두는 것은 무엇이 교리에 관하여 규범적인지를 더 쉽게 명시할 수 있게 한다.
본 장은 규칙 이론이 교리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들보다 장점이 많다는 것을 논증한다.
Ⅰ. 교리와 교리 문제
교리는 집단의 정체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과 실천에 관해 공동체 내에서 권위를 갖는 가르침이다. 그 교리는 공식적일 수도 비공식적일 수도 있지만 효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어떤 종교 단체든 그 정체성을 식별할 믿음과 실천이 없다면 여타 집단과 구별되는 고유한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첫째, 교리의 불가피성이 있다. 일례로 ‘신조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지는 신조로 작동한다. 둘째, 실제 효력을 갖는 교리와 공식적 교리의 구분이다. 공식적이면서도 사실상 교리로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암묵적으로 인정되지만 공식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논쟁은 암묵적 교리가 명시적 교리로, 작용만 하던 교리가 공식적 교리로 되게끔 하는 수단이다. 공식적 교리가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①교리는 그것이 무엇을 반대하는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②공식 교리는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지향점이나 신념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변함없는 신념이더라도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없거나, 대체로 사소한 문제였던 것이 상황에 따라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에 관한 결정은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교리 때문에 매우 핵심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을 바탕으로 넷째, 신학과 교리의 구분에 이를 수 있다. 신학과 교리는 상호 연관되어 있으나 서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명백히 공식화된 교리에 대해서는 합의하더라도 그 해석 방식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대치할 수도 있고, 대조적으로 고백적 차이(교파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는 상당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교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기는 어렵다.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교리는 더 이상 객관적 실재의 재현이 아닌 개인적 선호의 표현으로 경험되기에, 과거의 교리에 대한 현대적 방식의 재해석과 표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경험-표현적 접근은 종교의 사유화와 주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쉽게 사용될 수 있다. 여기에는 반-교리주의 또한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얼마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주관주의는 사회적 공동체의 약화로 이어지기에, 열린 사회는 개방성의 유지를 위해 교리적으로 헌신된 종교 공동체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로는 불충분하며 ‘사회학적 종파주의(sociological sectarianism)’가 필요할 것이다.
교리적 표준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고 올바른 교리에 관한 관심으로 되돌리기에 전통적인 명제적 개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우선 명제주의는 새 교리의 발전과 옛 교리의 사장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옛 교리의 새로운 재해석을 설명할 수 없고 마지막으로 대립적 교리의 화해가 각 정체성의 유지와 병행될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경험-표현주의는 정반대의 어려움들이 있다. 근저의 문제는 영속성과 변화,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한 대응은 상대주의적 입장이다. 자기-동일적으로 수 세기 내내 지속된 핵심 내용은 없으며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반대의 극단은 성경주의(개신교)와 전통주의(가톨릭)가 있다. 두 경우 모두의 결점은 문자와 정신을 혼동하는 것이다. 상대주의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어떤 발언이든 상황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오히려 과거에 대한 충실함을 훼손하는 경직성에 빠지게 된다.
변화하는 형태 중 어느 것이 영속적 실체에 충실한지의 문제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종교를 효과적으로 내면화한 사람이다. 그들은 구체적 용법들이 신앙의 내적 규칙에 부합하는지 알고 공식 교리의 어설픈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어설픈 지도를 위한 자리도 있다. 빈약한 대용품이더라도 영감도 반성도 없는 편견보다는 나은 것이다.
Ⅱ. 문법과 교리, 연속성과 변화
본서의 목적에 부합하여 고려할 이론은 규칙이론과 수정된 명제적 이론뿐이다. 상징 이론은 교리의 전통적 특징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이 있기에 현재 가장 인기 있더라도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고전적 명제이론은 교리를 존재론적 내포를 가진 진리 주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에 또한 배제될 것이다. 현대적 명제주의의 형태는 교리가 존재론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이 주장을 담을 수 있는 다양한 개념 내지 정형문구를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결함을 극복하려 한다. 이는 교리에 불변적 측면과 변화하는 측면의 공존 가능성에 열려 있다.
교리가 규칙이라 말한다고 해서 교리가 명제를 포함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규칙 이론에 따르면 교리로서의 교리는 일차 명제가 아닌 이차 명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리는 존재론적 진리 주장이 아닌 체계 내적인 진리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규칙 이론은 교리적으로 의미 있는 측면을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용되는 방식을 특징짓는 문법에서 찾는다. 따라서 문화-언어적 시각에서 종교는 포괄적인 해석의 매개이거나 범주적인 틀이다. 나아가 어휘와 문법을 구분한다면 교리는 어휘가 아닌 종교 문법을 반영하며, 문법과의 관계에서 실효성을 획득한다. 대부분 교리는 바른 용법을 규정하기보다 바른 용법을 제시한다. 즉 규칙을 적용하는 모범적인 사례 내지는 전형(paradigm)인 것이다. 비록 문법책에 수록된 문법보다 훨씬 불완전하고 많은 예외로 인하여 종교 내부의 근본적인 상호 관련성에 대해 종종 오해하게 만들더라도 교리의 안내자 역할은 불가피하다. 언어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법이나 교과서의 교리를 통해 안내받는 것이 불가피한 것과 같다.
교리의 주요 문법적 핵심과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인지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은 가변적이다. 종교의 일차적 진리 주장은 그 주장이 변화하는 인간 세상에 해석적 도식을 적용함으로써 발생하는 한 변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시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계속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의미 양태(modus significandi)’가 아닌 기껏해야 ‘의미대상(significantum)’이다. 신학적·종교적 변혁은 변함없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상대주의로 이어지나 규칙이론을 채택한다면 저 변혁이 자기-동일적 이야기와 새로운 세계들의 융합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불변성에는 초자연적 설명이 불필요하며, 언어와 종교 그리고 문화에서 관찰되는 일종의 안정성일 뿐이다. 언어·종교·문화는 인간이 변화하는 세상을 보는 렌즈이거나 인간들이 자신의 설명을 담아내는 매개이다. 따라서 종교가 만들어 낸 경험 또한 가변적이며, 이는 표현주의 모델과 대조된다. 그러나 규칙이론을 따르면 사랑의 경험은 가변적일 수 있지만, 예수 이야기에 의해 진정으로 형성되는 한 그리스도교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통의 경험적 핵심을 식별하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문화-언어적 접근에서는 그렇게 해야 할 압박이 없다. 중요한 점은 어떤 분위기의 공통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공통의 대상인 것이다.
내적 경험 안의 변화들은 확신 안에서의 변화처럼 연속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음의 흔적이다. 다양성이 정체성을 손상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종교의 항구적 요소가 객관적 설명이나 내적 경험의 차원에서 찾기 어려운 이유는 그러한 설명들이 종교의 규범적 형태를 특정 세계에 알맞은 경험이나 진리 주장과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언어와 비슷할 정도로, 확언과 경험이 막대하게 변화하는 중에도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교리가 명제나 표현적 상징보다 문법 규칙과 닮았다는 점을 인식하면 교리의 정형 문구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영속성과 통일성이 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비신학적(nontheological) 종교 이론은 종교간의 우열을 따지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하나의 종교 이론이 “종교적으로 유용”하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가 우월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를 예로 들자면 종교적으로 유용한 종교 이론은 기독교 내부에서 ‘우리가 타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배제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에 대한 해석 또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언어적 관점은 종교적으로 유용해보이지 않는다. 문화-언어적 접근에서는 한 언어나 문화를 다른 것보다 ‘더 참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대부분 자기 종교의 무비성((無比性, unsurpassability)을 주장하지만 그 중 어느 것이 참된 것인가? 내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가능함을 인정할 수 있는가? 요컨대, 종교간에 서로 개종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대화와 협력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 본 장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무비성, 대화, ‘다른 신앙인’의 구원 문제, 그리고 문화-언어적 맥락에서의 ‘진리’ 개념을 다룬다.
I. 무비성
이 절 말미에서 종교적 진리와 실재의 관계를 ‘지도’와 ‘목적지에 도착함’의 관계에 유비시키는 부분이 나온다. 본 절의 이해를 위해 먼저 이 내용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전제: 지도는 실제 여행 도중에 사용될 때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여행하는 방법에 대한 명제로 인정된다.
① 가상공간에 대한 지도는 (범주적 오류를 가졌기에) 참/거짓 명제를 형성할 수 없다.
② 목적지와 관련없는 지도는 실재와 상응하더라도 목적지에 가는데 어떠한 안내도 제공하지 않는다.
③ 지도 자체가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지도는 오독되고 오용되는 한, 이것은 거짓 명제에도 속한다.
④ 반대로 지도에 오류가 있다 해도 여행자를 바르게 인도한다면 참된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⑤ 고의로 잘못된 길을 안내하는 지도는 무관한 지도보다 나쁘다.
⑥ 어떤 지도는 목적지로 갈수록 모호할 수 있다.
⑦ 최종적이고, 완전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양한 버전들의 지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는 결국 지도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참과 거짓이 나뉜다. 범주적으로 참된 종교가 있더라도 존재론적으로 참인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항상 그렇게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올바른 종교’가 있다 해도 또한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이 내용을 염두에 두고 본 장에서 논하는 종교간 비교의 방법을 살펴보자. 린드벡에 따르면 종교간 비교는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 상징적 효과(symbolic efficacy), 범주의 정확성(categorial adequacy)의 카테고리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 명제적 진리 : 특정 종교를 ‘신앙’하는 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적 진술에 “명제적 진리”가 있다고 간주한다. 명제적 진리는 존재론적 상응 혹은 명제와 대상 간의 일대일 대응관계(isomorphism)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명제적 진리에 입각한 종교간 비교는 각 종교가 지닌 명제적 진리의 우열과 관련되어 있다.
(2) 상징적 효과 : 경험-표현적 접근에서 진리는 “상징적 효과”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관점의 종교간 비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신적인 것(divine)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재현하는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3) 범주의 정확성 :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종교들은 주로 실재를 이해하고, 경험을 표현하고,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서로 다른 어법(idioms)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진리를 고려할 때도 범주(또는 ‘문법’ 혹은 ‘게임의 규칙’)의 측면이 중심이 된다. 종교간 비교라는 측면에서 문화-언어적 관점은 이러한 범주가 있다고 여겨지는 종교를 “범주적으로 참되다”라고 할 수 있다.
린드벡은 종교에 대한 범주적 적절성/진리 적용을 수학 체계에 빗대어 설명한다.
첫째, 수학 체계 자체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으로 규정되는 명제가 아니라, 실재의 측량이라는 측면에서 일차적(또는 제1지향적=firstintentional) 진리와 거짓을 진술할 수 있는 어법(idiom)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범주 개념 또한 그러하다. 즉 범주의 적절성은 의미 있는 진술(meaningful statement)을 가능하게 할 뿐 명제적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범주적으로 참된 종교는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그 종교 안에서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의미성은 명제적 참뿐만 아니라 거짓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종교 간 차이는 경우에 따라 실재에 대한 수학적 기술와 비수학적 기술—예컨대 양적 기술과 질적 기술—의 차이처럼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구 종교와 서구 종교에 영향을 받은 문화에는 불교의 열반(Nirvana)을 직접적으로 가리킬 수단이 없고, 따라서 (적어도 초기에는) 열반에 대해 참/거짓을 판단하거나 의미적으로 부정할 수조차 없다. “God”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인과 철학자의 접근이 다르기에, 그리스도인은 철학자가 말하는 “God”이 무언가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여긴다. 어쨌든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God”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증과 성경의 “God”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논리적 관련이 없다.
따라서 문화-언어적 접근은 다양한 종교 and/or 철학이 진리, 경험, 범주의 적절성에 대해 비교 불가능한 개념들을 각각 가지고 있을 가능성, 심지어 가장 중요한 것(즉,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비교가 불가능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인정한다. 따라서 문화-언어적 접근은 다른 관점들과는 달리 종교를 비교할 때 공통의 틀(common framework)을 제안하지 않는다.
(1) 이 세 가지 진리 중 전통적으로 가장 익숙한 것은 명제적 진리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종적인 종교는 다른 종교가 비교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명제적 무오성(inerrancy)이 있어야 한다. 무비적 종교에 논리적으로 필요한 또 다른 요건은 아퀴나스가 “계시 가능한 것”(revelabilia)이라고 부른 것의 극치(즉, 인간이 경험하는 시공간의 세계 안에 계시될 수 있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진리들)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종교를 표현적 참(=상징적 효과)으로 이해하면 종교적 상보성은 높아지지만 특정 종교의 무비성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거나, 최소한 약한 의미에서만 무비적이다. 진리 그 자체에는 상한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징적 효과의 관점에서 종교가 표하는 진리란 본유적인 상한선이 없기 때문이다,
(3) 범주적 관점으로 이해한 종교는 표현적 관점보다는 분명 더 무비성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명제적 관점보다는 더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다.
(3)-1 더 강한 무비성 : 종교적 대상, 즉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킬 수 있게 해 주는 개념과 범주를 유일하게 가진 단 하나의 종교를 상정할 수 있다.(이것이 종교간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이 종교는 어떤 형태든 명제적인(표현적인 측면에서도) 참/거짓이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일 것이다. 범주적으로는 다른 종교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명제적으로나 표현적으로는 참도 거짓도 아닐 수 있다. 이것들은 종교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는데, 마치 ‘무게’의 개념이 없을 때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다.(?) 인지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종교든 적어도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지거나 아주 약간의 진리를 가질 수 있지만, 범주적 해석에서는 완전히 오류적인 범주를 가지고 있는 종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종교간의 우열은 그 범주에 의해서 극명하게 나뉘어진다.
(3)-2 더 약한 무비성 : 범주적 진리는 명제적 오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제적 다양성보다 무비성이 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오류도 가능태로 존재해야 한다(Even if there is only one religion in which reference to God can occur (if there is such a being) yet it will be open to all sorts of falsehoods in what it affirms of him.). 이러한 관점은 종교의 명제적 진리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것이 문제로 보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로너간이 “의식의 조직적 차별화(systematic differentiation of consciousness)”(※설명 필요 : 체계적인 의식의 분화?)라고 부른 것에 영향받은 문화에서는 ‘상응에 의한 진리(truth by correspondence)는 명제적이다’라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드벡에 따르면 이러한 명제적 관점은 후대에 고착화된 “통속화된 형태의 합리론(vulgarized forms of a rationalism)”의 영향이며, 상응에 의한 진리는 본래 명제적이라기보다는 범주적인 측면에서 우선되는 것이었다. 어떤 종교가 문화 체계와 견줄 정도로 삶의 형태에 대한 일련의 언어 게임이라면, 그 전체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와 상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종교가 단일하고 거대한 명제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즉 종교가 다양한 존재적 차원에서 사물의 핵심에 놓여 있는 궁극적 실재 및 궁극적 선(善)에 어느 정도까지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집단과 개인이 대상들을 내면화하고 수행하는 한, 종교는 하나의 참된 명제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한, 종교는 거짓이다.
II. 종교들간의 상호 관계(=대화)
린드벡이 제시하는 가능한 종교간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 약속과 달성의 관계(명제적)
ex)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 / 유대교・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관점
(2) 동일하거나 비슷한 경험을 다양하게 객관화한 것(표현적)
ex)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샹카라의 관계
※ 문화-언어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처한 맥락에 따라 실천의 함의가 전혀 다르며, 결과적으로 신비적 경험 자체도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3) (서로 다르지만 양립할 수 있는 존재의 여러 차원으로 안내한다는 의미에서)상보적 관계
ex) 불교의 명상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행동(?)
(4) 정면으로 대립하는 관계
ex) 고등종교와 나치주의/사탄주의의 관계
(5) 정합적인 것과 비정합적인 것, 진정한(authentic) 것과 거짓된 것의 관계
ex) 신실하게 자신의 종교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속한 비도덕인 사람보다 다른 종교에서 그 종교를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과 더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린드벡은 종교간 대화의 욕구가 주로 (2)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는 달리 문화-언어적 대안은 특정한 형태의 종교간 대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실제로 종교간 토론을 해야 할 이유는 다양하다. 그는 오히려 종교들의 깊은 경험이나 신앙이 이러한 문제의 동기와 다양성을 가릴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물음이 어떤 식으로든 대답 되더라도, 종교들이 핵심 경험을 공유한다고 전제하지 않고 각 종교가 다 다르다고 간주하면서도 대화에 임할 수 있는 또 다른 신학적 토대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교회가 회심을 진척시키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사심 없이 이웃을 섬김으로써 자신들의 주님을 본받도록 부름받았다는 점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될 수 있다.(->예를 들어, 이것이 개종을 하게 만드는 요인인지와 완전히 별개로, 그리스도 교회는 주님을 닮기 위해 이웃에 대한 이타적 섬김을 요청받는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될 수 있다 ?) 그렇기에 때때로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과제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더 나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되도록, 불교 신자가 더 나은 불교 신자가 되도록 고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은 아주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매우 고된 대화와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린드벡은 이러한 언어-문화적 관점에서 - 어쩌면 오직 이 관점에서만 - 타 종교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맡기신 사명의 고유한 독특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 내부의 담론일 뿐이다. 이는 명확히 성경적인 고찰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성경적 종교들이 채택하도록 제안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성경적 종교들은 그들 고유의 적절한 포괄적인 문화-언어적 체계 안에 있으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논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종교는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위한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질 공산이 크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단순히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공통의 핵심 경험이라는 가정이 부추기는 비교에 관여하면서 서로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 없이 서로 간의 일치와 불일치를 계속 탐구할 수 있다.
III. 구원과 다른 신앙들
이 장에서는 다른 종교, 혹은 비종교인의 구원 문제를 다룬다. 만약 자신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면, 종교간의 대화는 어려워진다. 적어도 자신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여기는 이에게 개종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은 타인의 파멸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짓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화와 협력의 자리를 논쟁과 개종의 요구가 자리잡는다.
린드벡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한다. 리스도교 전통에서 문제의 핵심은 오직 그리스도(solo Christo)에 의한 구원이고, 여기서 중요한 딜레마는 이를 비그리스도교인의 구원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1)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부정하는 견해(주류이지만)와 2) 타종교의 구원에 대해 불가지로 외면하는 견해는 배제된다.
그 동안 타종교/비종교인의 구원에 관한 기독교 내 이론은 두 가지이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모든 인간에게 효력을 가진다. 2) 인간의 운명은 죽음 혹은 그 후에 다가오는 세상의 생명이신 예수와 마주하면서 결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중 전자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칼 라너와 버나드 로너간 등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비록 비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내적 구원 경험과 관련된 궁극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신봉하지 않더라도, 혹은 그와 가시적 성례전으로 연합되어 있지 않더라도, 내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비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역사하는 것과 동일한 칭의(稱義, justification - 하나님이 죄인의 상태의 인간을 의인의 상태로 옮기는 행위)와 구원을 이미 공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칼 라너 - “익명의 그리스도인”)
그러나 고전적 인지주의자와 문화-언어적 측면에서 종교를 해석하는 이들은 이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인지주의자는 개별 종교 너머의 보편종교를 찾으려 했고, 이러한 다양성을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근본 조항(fundamental articles)으로 환원코자 하였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이신론(理神論)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에 대한 근대의 인식 또한 여러 종교에 공통되는 명제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문화-언어적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전망 이론(prospective theory)이다. 즉 비록 비그리스도교인 또한 ‘아직’ 믿지 않았을 뿐 미래의 구원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 비그리스도교인의 구원을 장래에 ‘들음에서 오는 믿음’(fides ex auditu)으로 설명하는 것 - 이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그리스도 또한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죽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보는 정통 가톨릭에서 반대되었던 듯 하지만, 칼 라너는 “죽는다는 것 자체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복음에 분명히 직면하는 순간으로 그려져야 한다(dying itself be pictured as the point at which every human being is ultimately and expressly confronted by the gospel, by the crucified and risen Lord)”(?)는 이론을 세운다. 궁극적인 죽음은 시공간과 경험, 추측 너머에 있으며, 인간이 현생에 가지는 신앙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 밖에는—구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저주(damnation)가 없다. 오히려 신앙의 언어를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또한 ‘들음에서 오는 믿음’이 강조될 때, 명시적 신앙은 신자의 실존적 깊이를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오만을 막는다. 그들의 사랑을 비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구별해 주는 것은 현재 그들이 가진 사랑의 주관적인 질이 아니라, 그 사랑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하에서는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에 오만boasting이 들어설 자리가 없음을 길게 설명한다)
다만 이러한 설명들이 기독교 내부에서 여러 난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신화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문제는 남아 있다.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기존의 어떤 공동체 내지 집단과 그 구성원 특유의 기본적 사고방식과 감정 및 행동 패턴에 대한 궁극적인 정당성을 제공하며 동기와 행동을 연결하는 담론적 상징과 비담론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로 본다. 이들에게 종교란 인간 경험의 초월적 극치와 깊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흔히 현대인이 인간에게 가장 심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즉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를 구성하는(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의례, 신화, 믿음, 행동의 패턴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인간 모델은 경험-표현적 모델의 반대 방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감과 비현실감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현대 신학자에게 무엇이 믿을 만해 보이는지는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그들의 학문, 철학, 신학적 논거보다 그들의 사회적 배경과 지적 훈련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든 신화적 요소가 필수라는 점과, 종말론적 미래에서의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은혜’(gratia Christi)에 대한 원초적, 전언어적 경험이라는 신화만큼 신학적으로 일리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기독교 내부에서 비기독교인의 구원 가능성은 타당성(그만큼의 부당성 또한)을 가지고 주장될 수 있다.
IV. 종교와 진리에 대한 부록(excursus)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종교와 진리 주장의 관계이다. 일반적인 신자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종교가 상징적으로나 표현적으로 참일 뿐 아니라 범주적으로 참일 가능성을 허용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또한 명제적으로도 진리일 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문화-언어적 접근도 진리 주장을 인정할 수 있는가?
우선 정합적(coherence)인 성격을 가진 ‘체계 내적’(intrasystematic) 진리 진술과 실재와 상응(correspondence to reality)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 진리 진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인식론적 실재론자에 따르면, 실재는 일차 명제(first-order propositions)에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발화(發話, utterances)는 관련된 전체 맥락과 정합적일 때 ‘체계 내적으로 참’이다.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종교를 보면 이와 관련된 전체 맥락은 단지 여러 발언으로만이 아니라 서로 상관되는 삶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Christus est Dominus)를 외치는 십자군의 살인은 그 발화의 함의와 행동이 모순되기에 거짓이다. 인지-명제적 종교 이론은 종교 체계가 형식을 갖춰 구성된 일련의 명시적 진술보다 자연 언어에 더 가깝다는 사실, 그리고 이 언어를 알맞게 사용하면 특정한 행동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차이점이 고려된 다음에는 종교가 수학적 체계와 마찬가지로 전체적 정합성을 갖추려 한다는 점, 이에 따라 특정 발화가 체계 내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는 이 전체적 정합성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체계 내적 진리는 존재론적 진리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적으로 비일관적이지 않은 종교 내에서의 발화는 이러한 점에서 체계 내적으로 참일 수 있지만, 이는 결코 그 말의 존재론적 진리나 의미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교적 발화가 실재와 상응하기 위해서는 그 발화가 지니는 속성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분’,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분’에 상응하는 삶의 양식과 존재 방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기능을 할 때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비종교적인 발화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울이나 루터와 같은 이는 진리를 단언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 진리에 관한 무언가를 하는 것, 즉 어떤 삶의 방식에 헌신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종교적 발화는 오직 수행적 사용(performatory use) 명제적 실효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수행적 사용을 통해서 종교적 발화가 명제적 실효성을 얻는다는 것은 인식론상 실재적인 방식 – 즉 정신이 신의 실재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언어적 설명은 같이 고전적인, 그리고 온건한 정도의 명제론은 배제할 필요가 없다. 대표적으로 대표적으로 아퀴나스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에서 인간의 의미 양태(modus significandi)는 신적인 존재 안에 어떤 것과도 상응하지 않지만, 의미된 것(significatum)은 상응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경우 “하나님의 선하심”의 내용은 우리가 절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어의 모순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바로 종교적 발화의 수행적 기능에 기대는 것이다.
이러한 고안을 위해, 린드벡은 “문장은 명제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종교적 문장은 오직 확정적인 상황에서만 일차적 또는 존재론적 참이나 거짓 값을 갖기에 충분할 만큼 지시적 구체성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문장의 신학적, 교리적 사용은 중요하지만 이는 명제적 사용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목적상, 이 문장은 개인과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하게 만드는 경배, 선포, 순종, 약속-경청, 약속-준수의 행위 속에서 사용될 때만, 존재론적 진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일차적 명제가 된다.
결론적으로 종교는 인지주의적 이론뿐만 아니라 문화-언어적 이론에서도 존재론적으로 참된 주장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화-언어적 접근에서는 인식론적 실재론과 진리대응론을 거부(또는 수용)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주의적 접근과 문화-언어적 접근에서 각각 명제가 발화될 수 있는 조건은 매우 다르다. 인지주의자에게 명제적인 것은 주로 전문적 신학과 교리인 반면, 언어-문화적 모델에서는 일상적 종교 언어가 기도, 찬양, 설교, 권면을 통해 삶을 형성하는 데 사용될 때 명제적 참·거짓이 드러난다. 오직 이러한 일상적 언어의 차원에서만 진리나 거짓이 언어적으로 드러나고 그것들이 궁극적 신비에 상응하는지 여부도 언어적으로 드러낸다. 반대로 전문적 신학과 공식 교리는 종교적 언어의 관한 이차적인 담론이다. 이차적 담론은 성공적으로 존재론적 의미를 담은 주장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러한 주장이 예전적, 선포적(kerygmatic), 윤리적 발화 및 행동 양식을 설명하고, 옹호하고, 분석하고, 규제하는 데 관여한다. 문법 자체는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에 대해 참이나 거짓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언어에 관한 주장만 하듯이, 신학과 교리는 이차적 활동인만큼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 참이나 거짓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이는 우리를 다음 장에서 다룰 중요한 문제, 즉 교회의 교리 문제로 이끈다. 교회 교리가 일차적 명제가 아니라면, 교회 교리는 무엇인가? 교회 교리는 교리의 영속성과 규범성을 인정하고, 또한 교회가 가르치는 역할의 무오류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비명제적으로 해석될(문화-언어적 관점은 그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수 있을까? 문화-언어적 접근의 에큐메니컬적 유용성은 대개 이 질문에 성공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번 장의 과제는 비신학적 입장에서 종교와 종교의 교리에 대한 문화-언어적 접근의 근거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만일 종교와 경험의 관계를 비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문화-언어적 접근이 전통적인 인지적 접근이나 경험-표현적 접근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문화-언어적 접근은 확실한 개념적 난점들을 피하고, 다른 접근보다 종교의 여러 측면을 더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2.1. 경험-표현적 모델
로너간과 같은 대부분의 경험-표현주의적 신학자들은 종교적 현상 전반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종교적 경험의 기본적 일치에 대한 핵심 확언을 뒷받침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에게는 종교적 경험의 근저에 있는 일치를 주장할 신학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그러나 비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다른 데서와 같이 그의 경험-표현적 이론에서 가장 문제 되는 요소다. 이 핵심 경험이 다양한 종교에 공통적이기 때문에 그 경험의 독특한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공통성에 관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텅 빈 주장이 된다.
2.2. 문화-언어적 대안
여기서는 종교를 신화나 이야기 속에서 구체화되고 장중한 의례 안에 구현된 포괄적 해석도식으로 본다. 이 해석 도식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구조화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종교적인 것은 아니며, 여기서 종교란 분명 “우주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식별하고 기술하기 위해, 그리고 이와 관련시켜서 행동과 믿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을 조직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종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신과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종교는 삶과 사고 전체를 형성하는 일종의 문화적 그리고/또는 언어적 틀이나 매개로 볼 수 있다. 종교는 칸트의 선험적인 것(a priori)처럼 기능한다. 비록 여기서 종교가 일련의 획득된 기술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종교는 신념 모음이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상징이 아니라, 실재를 기술하고 믿음을 진술할 수 있게 하며 내적 태도, 느낌,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어법(idiom)과 비슷하다. 종교는 문화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로 개인의 주관성이 나타난 것이기보다는 개인의 주관성을 형성하는 공동체적 현상이다.
종교와 경험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고 변증법적이다. ‘내적인’ 경험과 ‘외적인’ 종교적, 문화적 요소의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전자를 주도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언어적 모델은 내적 경험으로부터 종교의 외적 특징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경험을 파생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언어-문화적 모델은 인간 경험이 문화-언어적 형식에 의해 형성되고 주조되는 측면, 어떤 의미에서는 구성되는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의 일부이다. 종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주조하고 형성하는 외적 언어(verbum externum)이다. 내적 언어는 다양한 종교 안에 공통된 경험이 아니라 참된 종교, 즉 참된 외적 언어를 듣고 받아들이기 위한 능력이다.
문화-언어적 관점의 한 가지 장점은 다른 두 접근 방식의 독특하고 종종 서로 경쟁하는 강조점을 수용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는 의미 있는 문화적 성취들이 흘러나오는 경험적 기반에 형태와 강렬함을 부여하는 문화의 궁극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공식의 기본 이미지는 셸링과 헤겔의 관념론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 가깝다. 이 두 모델 모두 종교적 경험에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전자에서는 경험이 근원적이 고, 후자에서는 경험이 파생된 것이다.
언어적-문화적 접근에 따르면, 실존의 모든 차원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포괄적 도식 내지 이야기는 우리가 그 안에서 활동하는 매개이고, 자신의 삶을 영위할 때 사용하는 일련의 기량이다. 그 상징 어휘와 구문법에는 여러 목적이 있고, 실재에 대한 진술을 정형화 하는 것은 그 목적 중 하나일 뿐이다. 종교인이 되는 것은 – 문화나 언어에 능숙해지는 것 못지않게 – 실천과 훈련을 통해 일련의 기술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근원적 지식은 종교에 관한 것도,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도 아니라, 이러저러한 식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종교의 의례, 기도, 모본이 종교의 신념이나 행동 규범을 정형화한 진술보다 통상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언어-문화 모델에는 결과적으로 표현적 측면을 위한 여지도 있다. 종교의 미학적 차원과 비추론적인 상징적 차원 – 시, 음악, 미술, 의례 등 –을 통해서 종교의 기본 패턴이 내면화되고, 나타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종교가 일단 내면화된 다음 기능하는 방식은 인지주의적 측면보다 표현주의적 측면에서 더 잘 기술된다. 그리고 경험-표현적 모델에 못지 않게 문화-언어적 모델에도 경험 및 표현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두 모델은 경험의 본성 및 경험과 표현-전달의 관계를 서로 상당히 다르게 이해한다. 후자에서, 전달 및 표현 수단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으로, 일종의 유사-초월론적 선험관념이다. 어떤 경험을 갖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표현할 수단이 필요하며, 우리의 표현 체계와 언어 체계가 풍부할수록 우리의 경험은 더 미묘하고 다양할 수 있고, 더 섬세하게 구별될 수 있다. 언어에 내재된 분류 방식과 범주 유형은 일단 습득하면 우리의 감각에 밀려오는 그 자체로는 경험이 아닌 무질서한 혼란을 질서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일단 언어를 배우면, 언어는 의식적인 경험과 활동의 전경험적인 신체적 기초를 형성한다. 따라서 언어는 경험에 앞선 인간 실존과 행위의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경험은 언어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구조화된 인지적 활동의 부산물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경제적인 가설은 종교적 경험과 주어진 문화, 언어, 삶의 양식의 관계가 유사하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서적 경험은 항상 대상에 대한 사전 인식에 의존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모두 개념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감각 경험으로부터 해석된 것이다.
종교적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상화으이 변화와 문화-언어적 체계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종교적 해석 도식이 새로운 맥락에 적용되면서 변칙들을 낳기 때문에 변모되고, 폐기되고, 교체되는 것이다. 예언자적 인물의 경우, 그는 어떻게 물려받은 믿음, 실천, 의례의 패턴이 수정된 틀로 재생산되어야 하는지를(또한 어떻게 재생산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파악한다. 인과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논리적으로는 종교적 경험과 그에 대한 표현은 언어-문화적 모델에서 이,삼차적이다. 먼저 종교와 종교의 언어, 교리, 예전이라는 객관적인 현실과 행동 양식이 나오고, 그다음 이를 통해 감정들이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것으로 형성된다. 경험-표현적 전통이 대체로 종교의 특징으로 보는 거룩한 것 내지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감각은 공통의 특질이 아니라, 일종의 가족 유사성이다. 종교는 최소한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깊은 감정, 태도, 인식을 상이하게 형성하고 낳는 일련의 다채로운 문화-언어적 체계의 분류명으로, 적어도 그럴듯하게 이해될 수 있다. 요컨대, 대안적 모델은 종교를 가장 중요한 것 – 삶과 죽음, 옳고 그름, 혼돈과 질서, 의미와 무의미 같은 궁극적 문제들 – 을 다루는 어법으로 이해한다. 이는 종교가 그 고유의 이야기, 신화, 교리에서 다루는 문제들이다. 종교는 의례, 가르침,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의식적 마음뿐만 아니라 개인적, 문화적 잠재의식에 그들의 답을 각인시킨다.
2.3. 비교의 비결정성
우리는 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개념들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개념들은 무엇이 그 고유의 진리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적절한 증거인지에 관한 견해를 각각 형성한다. 문화-언어적 모델 이론가들은 두 가지 언어가 중첩되는 발음을 사용하거나 공통의 지시 대상을 갖는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두 언어가 비슷하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점은 문법 유형, 언급 방식, 의미론적 구조와 구문론적 구조이다. 모든 종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권한다는 정보보다, ‘사랑’과 ‘하나님’에 대해 특수하고 때로는 모순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 믿음, 의례, 행동의 독특한 유형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기껏해야 경험-표현적 입장이 증명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지, 그 입장이 거짓임을 입증하지는 않으며, 이는 최종적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쟁점이다. 경험-표현주의는 과학적 종교 연구에서는 열등한 이론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목적(예컨대, 신학적 목적)에서는 우월한 이론일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그러한지 여부가 다음 장에서 우리가 다룰 문제다.
대명제 : 그리스도교를 특정한 공동체의 삶과 실천에 뿌리내리고 그 공동체 고유의 법칙에 지배받는 문화-언어적 체계로 이해해야 한다
①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와 정체성에 헌신이 오히려 완전히 첨단을 달리는 것일 수 있다 / 자유주의 신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②근대 후기(late modern)의 혹은 탈근대적(postmodern) 세속 이성의 도구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명료화하고 변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③그러므로, 교회와 신학은 세속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고서도, 오히려 그들 고유의 주장으로서 세상과 만날 수 있다.
2. 이에 대한 반박
①린드벡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믿음에 대한 이성적인 정당화를 방해한다. 그가 규정하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성경에서 읽어낸 교회 고유의 교리들’이기에, 본유적으로 신앙주의(fideism)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나의 종교적 확신을 나의 신앙이라는 특수성 속에 가둘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이 자신의 믿음들에 대한 이성적 설명을 제시하기를 바란다면, 비그리스도교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의 주요 기준들에 의지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교리를 고수하는 것이 인식론적 고립을 가져온다.
②린드벡의 신학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거부함으로써 교회가 세계에서 고립되도록 조언하는 나쁜 의미에서의 ‘종파주의’이며, 아마도 무책임한 신학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이 책에서 교리에 대한 깊은 고민 –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 이 결여되어 있다는 혐의에 기인한다. 그의 이론은 과도하게 사회과학에 의존하여 지나치게 얄팍하게 교회를 이해하고 있다. 그가 신학의 교리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③린드벡은 탈근대적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경도되어 진리, 특히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가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3. 브루스 마샬의 대답
①왜 내가 당신과 이성적인 대화를 위하여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들이 무엇인가에 관한 합의에 이를 필요가 있는가? 서로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진리의 주요 기준들이 무엇인가에 관해 동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합의 – 우리가 같은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성적 확신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합의 - 면 충분하다. 만일 진리의 절대적 기준들을 공유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소한 의견 차이를 넘어서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 이 절대적 기준의 합의를 포기하는 것이 교리과 신학을 지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신학자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②린드벡의 관점은 직접적으로는 교회론적인 문제로, 이 때 교회는 넓은 의미의 교회가 아닌 ‘교회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대단히 좁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린드벡의 서술은 실제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다.
한편 사회과학적 접근은 확실히 린드벡의 독특한 입장이다. 전통에 대한 확신을 가진 신학자가 사회과학이나 분석철학을 서슴치 않고 다루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리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고 귀결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창조교리는, 그것이 아무리 잘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적 독특성’을 지닌다.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 또한 기독교의 창조교리에 동의할지는 미지수고, 이러한 신앙이 없는 이들은 특히나 더욱 거부할 것이다.
한편 창조교리 (다른 교리들도 포함하여)는 그리스도교인과 비그리스도교인이 불일치/반대라는 결론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의 일치를 기대할 만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린드벡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오히려 린드벡의 제안 - 자기 공동체의 주요 신념과 교리에서, 이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기 위한 타당한 근거와 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찾으라 - 을 따르는 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린드벡은 이를 위한 근거와 자원을 그리스도론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모든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기 때문이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대화하고 논쟁하고 설득할 만큼 충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자신들의 말을 들을 사람들을 세상에서 발견하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인지적으로 ‘세상을 흡수’하고 실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책무에 관한 명령은 이 책무의 교리적 고향이 그리스도론이든 창조든 간에 동일하게 엄중하다. 이 명령에 정확히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들에 의해 형성된 방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교회는 신앙이 합리적으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적 정체성이 교회의 역사적인 주요 교리들에 의해 형성된다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단순히 교회의 생명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해 우리의 육신과 죽음을 수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가 시종일관 구축되어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경우 세상에 대한 교회의 참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할수록 강화될 것이며, 교회가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잃을수록 약화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명감은 교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교리에 대한 교회의 헌신에 정비례하지 (반대자들이 추정하듯) 반비례하지 않는다. 문화적 동화를 사회학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후퇴하는 신학적 종파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③린드벡이 진리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는 지적은 주로 용어의 부적절함에 기인한다. 린드벡은 “범주적”(categorial) 진리, “체계 내적”(intrasystematic) 진리, 그리고 “존재론적”(ontological) 진리를 말한다. 비판가들은 린드벡이 첫 두 진리만을 선호한다고 의심해 왔지만, 그렇지 않다. 린드벡이 생각한 마지막 진리 개념은 실재에 상응함 내지 사물과 사유의 일치(adaequatio mentis ad rem)라는 전통적 진리 개념과 맞닿아 있다. 범주적 진리는 언어철학에서 ‘의미와 지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체계 내적 진리는 ‘보증(warrant)이나 정당화—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점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신념은 지지하고 다른 신념은 거부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린드벡에게 세 가지 다른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의미, 보증,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더라면 더 명확했을 것이다.
이상의 비판들은 특히 제3장 「여러 종교와 하나의 참된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데, 린드벡은 독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상대주의 및 여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의혹을 고려하여, 「종교 간 관계와 에큐메니즘: 『교리의 본성』 3장을 다시 돌아보며」에서 종교적 진리 주장의 “특수주의적 보편성”(particularistic universality)을 논의하였다.
린드벡은 자신의 주요한 관심사는 에큐메니컬 탐구이지만,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외부적 관계의 개선이 훨씬 더 중요해진 것 같다고 평하며, 종교 간 관계에 관해 『교리의 본성』 3장이 야기한 오해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특히 대표적인 오해는 종교와 교리에 대한 3장의 설명이 신앙주의를 촉진하여 서로 다른 믿음 사이의 대화를 방해한다는 의혹이다. 린드벡이 보기에, 어려움의 주된 원인은 세계 주요 종교들의 특수한 차이를 다룬 편향성으로, 이는 종교를 다른 대부분의 문화-언어적 삶의 형태와 구분 짓는다. 이렇게 구별한 것의 특징은 “특수주의적 보편주의”라고 이름붙여졌고, 이는 보편주의를 자처하는 이념이나 일부 유사-종교를 특징짓는 포괄성과 특수성의 결합이다. 3장에서 주로 두드러진 점은 특수주의적 측면이고, 보편적 차원은 무시되었다. 3장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불균형의 결과이다.
I. 에큐메니컬적 배경
이 책의 에큐메니컬적 배경은, 린드벡이 “굴복 없는 교리적 화해” 또는 “일치된 다양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어떻게 한 역사적 맥락에서 모순되었던 교리들이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더 이상 모순이 아니면서도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린드벡이 보기에 이것은 명백하게 사유하기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그렇기에 이것을 상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 종교와 교리에 대한 이론의 탐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이 가능한 조건을 연구하하기보다 본능적으로 그 가능성의 존재를 반증하려 한다. 그러나 반대로, 에큐메니컬한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방식으로 종교와 교리를 다시 생각해 보는 노력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 낭비로 여길 만큼, 교리적에큐메니즘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문화-언어적 접근은 문화와 종교의 유사점들을 강조한다. 즉 양자 모두 가변적인 어휘와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문법 내지 구문법으로 이루어진 기호 체계(언어)로 볼 수 있다. 문화와 종교는 모두 같은 속(genus)에 속하며, 교회 교리들의 대립은 문법의 대립이라기보다 어휘의 대립으로 이해하면 굴복 없는 교리적 화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즉 일차적인 존재론적 진리 주장의 대립이라기보다, 일차적인 담론에 관한 맥락적 타당성이 있는 이차적 규칙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한, 가능하다. 이러한 규칙들은, 문제가 되는 종교에 능숙한 실천가들이 이 규칙들에 부합하는 담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옳은 것이다. 문화-언어적 접근의 화해 권고들이 다른 접근들보다 충실한 이들의 실천과 더 온전하게 어울리는 한, 이 접근은 종교와 교리에 관한 다른 이해들보다 에큐메니컬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주장될 수 있다.
II. 종교 간 문제와 경험-표현주의
3장에서 답하고자 했던 물음은 문화-언어적 접근이 종교 간의 관계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였다. 종교 간 관계는 에큐메니컬 영역 밖에서 이 이론의 개연성을 평가하기 위한 확실한 선택이다. 그 이유는 에큐메니컬 담론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비그리스도교인들과 그들 종교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담론에 어떤 변칙이 있기 때문이다. 두 영역 모두에서 실천이 이론을, 현실이 가능성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에큐메니컬 영역 바깥에서 문화-언어적 접근의 개연성을 평가하기 위한 영역으로 종교 간 관계를 선택한 주된 이유이다.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해결책은 경험-표현적 방식이며, 그것들은 다시 다원주의와 포괄주의로 나뉘며, 각각은 폴 니터가 상호성 모델과 성취 모델이라고 명명한 유형에 상응한다. 다원주의, 즉 상호성 모델은 정통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정통과 개방성을 화해시키는 어려움을 해소한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에 처음부터 핵심적이었던 믿음을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나거나 무비적이라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목표한 종교 간 관계 개선을 약화시킨다. 거의 모든 세계 종교는 무비성과 매우 흡사한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종교가 자기 종교에 대해 내세우는 주장을 배제”하는 것은 종교 이론의 종교 간 유용성을 파괴하는 행위다.(138)
포괄주의, 또는 성취 모델은 어떤 종교들은 다른 종교들보다 초월적 실재에 대한 내적 보편경험이 더 적절하게 객관화된 것이며, 이 중 최고의 종교는 다른 모든 종교에 있는 선한 것을 전부 포괄한다고 본다. 성취 모델은 이러한 방식으로 무비성과 개방성 사이의 명백한 모순을 해결한다. 성취 모델은 경험-표현적 이론을 일관되게 사용함으로써 명백히 공존 불가능한 세 가르침을 동시에 긍정한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무비적 구원자요 계시자이나, 비그리스도인도 구원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대화와 협력이 장려될 수 있다. 이 해결책의 성공은 에큐메니컬 영역으로부터 들어온 문화-언어적 불청객과의 대립을 더욱 첨예하게 했다.
III. 문화-언어적 대안
문화-언어적 대안에서는 내적인 것보다 외부적인 것이 앞선다. 서로 다른 종교는 문화나 언어처럼, 인간에게 잠재된 원재료로 자아, 공동체, 세계에 관한 상이한(때로 상호배타적인) 경험을 만들어 낸다. 오히려 특수성이 먼저 와서 서로 다른 종교가 궁극으로 여기는 것을 개별화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문화-언어적 해석자라면, 믿음은 외적 말씀(그리스도에 대한 언어적, 성례전적, 행실적 증언)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데서 온다고 할 것이다. 경험-표현주의자들에게는 문화-언어적 관점이 구원론상으로, 인식론상으로 배타주의적이어서 비그리스도교인들의 구원 및 개종을 목표로 하지 않는 대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게다가 문화-언어적관점에서 해석한 무비성은 신앙주의적이고 고립주의적이다.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의 경우, 경험-표현적 견해를 포기한다면, 종교는 그러한 활동에 개입할 이유나 능력이 거의 없어 보인다.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서로 다른 종교들은 실질적으로 중요한 공통점이 없으므로, 자신들이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또는 맺지 않을지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 모른 채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부름받을 수 있다. 이것은 종교 간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개종을 목표로 하지 않는 대화와 협력의 근간으로, 이것은 바람직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의무다.
무비성의 경우, 논의는 종교를 종교가 아닌 모든 것과 형식상 구분 짓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종교는 “우주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 혹은 “포괄적 해석 도식”이며, 이러한 특수성과 “관련시켜서 행동과 믿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을 조직화하는”데 사용된다(113-114). 이러한 정의로 인해 일상 용법상 종교적인 것이 상당히 제외되고, 종교적이지 않은 것이 상당히 포함된다. 각각은 그 특수주의에 의해 서로 분리되고, 그 보편주의 때문에 서로 중첩된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상대 종교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식별하고 기술할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각각의 특수성은 서로 무관하더라도 범위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서로 겹쳐지게 된 관점을 규정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종교에 일상 언어상으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각 종교의 관점으로 재기술될 수 있으며, 재기술 이후에도 결코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이런식으로 두 신앙 간의 소통은 보편주의적인 차원에서 제한적이지만 유의미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다만 3장은 유사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입장을 겨냥하여 특수성을 강조했기에, 고립주의의 위험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질적인 믿음은 틀린 것일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의 맥락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다. 아니면 정당화되지 않아도 진실일 수 있다. 정당화된 믿음과 참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종교 간 상호 존중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Ⅰ. 평가의 문제
모든 신학 영역은 충실성(faithfulness), 적용 가능성(applicability),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에 관심을 가진다. 이 세 가지는 맥락에 따라 구체적 의미를 달리하지만 공통의 틀은 다양한 입장들의 상대적 타당성에 대해 진정한 논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만 각 신학 유형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적 틀 안에 들어가 있어서 각자 나름의 타당성의 기준을 형성하고 있기에 이러한 논쟁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장에서 가능한 최대치는 충실성, 적용 가능성, 이해 가능성이 후기 자유주의 신학들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지를 언급한 다음 독자들이 스스로 평가하게 하는 것이다.
Ⅱ. 텍스트 내재성으로의 충실성
기술 신학(descriptive theology)의 과제는 종교가 신자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규범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제의 수행과 문화-언어적 접근이 양립할 수 있는 한 방식을 “텍스트 내재적(intratextual)”이라 부를 것이다. 반면 “텍스트 외재적(extratextual)” 방식은 텍스트가 지시하는 객관적 실재나 상징하는 경험에서, 즉 텍스트 바깥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으므로 종교를 경험-표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는 특정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므로 내재적 방식에서는 어떤 단어가 종교 안에서 작용하여 실재와 경험을 형성하는지를 검토한다.
의미 있는 기호로서 그것들의 실재는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발생할 때마다 그것들의 텍스트 내재성에 의해, 즉 이야기 안에서 그것들이 위치하는 자리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된다. 신학은 단지 종교를 그 종교 내부에서 설명함으로써만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부적인 것, 즉 종교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 기술한다는 더 강한 의미에서 텍스트 내재적일 수 있으며, 종교적으로 형성된 이차적 개념을 사용하여 모든 것을 기술함으로써 텍스트 내재적일 수 있다. 종교는 그 포괄성, 반성성, 복잡성을 고려하면 기어츠가 말한 “두툼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기어츠에 따르면 “문화는 그러한 것들(사회적 사건, 행동, 제도, 과정 등)이 이해 가능하게-즉, 두툼하게- 기술될 수 있는 하나의 맥락이다.” 또한 종교는 은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텍스트 내재적이다. 주요 종교는 자기만의 기호로 된 규칙(semiotic codes)을 모범적으로 예시한다고 여기는 글들을 추려낸, 비교적 고정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다. 정경 텍스트는 종교의 생존 조건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규범적 신학 기술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텍스트를 그 내재적 의미의 측면에서 의미를 기술하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과 그것이 생성한 텍스트 외적 실재에 관한 관점을 설명하는 문제이다. 이는 정경과 같은 권위적인 텍스트에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정경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세계도 정경이 창조한 세계보다 더 실재적이지 않게 된다. 경전의 세계는 신자들이 삶을 영위하고 실재를 이해하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성경 바깥의 실재와 경험을 기술하는 방식은 모형론에 해당하는데, 이는 성경의 내용을 성경 바깥의 실재에 대한 은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바깥의 실재를 성경의 내용으로 만든다. 바꿔 말하면 텍스트 내재적 신학을 따르면 세계가 텍스트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세계를 흡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뱅에 이르는 여정을 보면 무분별한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졌고 문자로 특정할 수 있는 텍스트 내재적 의미의 우선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해석의 방향은 성경에서 세계를 향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쳐 모형론(typology)적 해석은 합리론, 경건주의, 역사 비평의 발전이 결합한 공격에 무너졌다. 성경은 세상을 보는 렌즈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그 종교적 의미와 문자적 의미는 성경 바깥에 자리하게 되었다. 성경적 섭리 이해를 되찾는 것의 가능 여부는 문학적 방식의 신학적 성경 읽기의 가능 여부에 달려 있다. 예수 이야기를 이해하는 각각의 방식은 텍스트에 관한 물음을 명확히 하고 알려진 예수상을 구체화하는 별개의 해석적(역사적, 현상학적, 실존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교리적) 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예수상은 모두 니케아와 조화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형식상 정통이나 종교적 실천과 이해에 대한 함의는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텍스트 내재적 방법은 문학적 고찰에 의존한다. 규범적 또는 문자적 의미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종류의 텍스트와 일관되어야 하며 텍스트 바깥의 관심사에 암시하는 무언가가 아니어야 하며, 텍스트가 공동체의 언어에 대한 하나의 예시라는 측면에서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즉 예수 이야기를 듣는 주요 이유는 이야기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것이다.
텍스트 내재적 읽기는 텍스트 자체의 문학적 구조로부터, 신학적으로 통제된 의미를 지시하고 있는 해석적 틀을 도출하려 한다. 이 방식은 성경 전체를 아우르도록 확장될 수 있다. 성경에 담긴 다양한 자료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시된 ‘사실적 이야기’라는 특수한 문학적 특징을 지닌 하나의 포괄적 이야기 안에 담겨 있다. 데이비드 켈시를 따르면 “광대하고 느슨하게 구성된 비허구적(non-fictional) 소설” 같다. 나아가 성경의 주요 기능을 명확히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 기술을 제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목적이 피조물의 행위와 목적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충실성의 형식적 기준이 여전히 동일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신학적 기술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다양할 필요가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일차적 초점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수의 이야기에 묘사된 대로 행위자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우리가 삶을 영위하며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 신학은 실질적으로 서로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충실성에 대한 공통의 텍스트 내재적 규범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텍스트 내재적 신학들도 규범에 대해 불일치할 수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정경의 범위와 통일성에 대해 불일치할 수 있다. 텍스트 내재성은 종교나 전통이 충실하게 기술되고 발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수 있지만 이것의 실질적 영향력 또는 교리적 영향력은 어ᄄᅠᆫ 정경에 호소하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
비평 이후의 유형이나 휴기 자유주의적 유형에서 텍스트 내재성은 비평 이전의 갖가지 전통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사실적 이야기와 역사적 또는 과학적 기술을 구분지을 수 있다. 더욱이 역사 비평은 텍스트의 신학적-문학적 해석에 영향을 주어 성경에 대한 비평 이후의 서사적 읽기(narrative reading)는 비평 이전의 읽기와 현저히 다르다. 그러나 텍스트 내재적 접근에서는 정경적 의미를 확정할 때 문학적 고려가 역사 비평적 고려보다 더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비평 이후에 텍스트 내재적 의미에 관한 관심의 초점은 근대 이전의 해석에서 중요했던 텍스트의 몇몇 측면에 대한 태도 변화를 포함한다. 후기 자유주의적 텍스트 내재성은 성경 이후의 세계를 성경의 세계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상상적, 개념적 근거를 제공한다.
텍스트 내재성의 실천은 그저 느슨하게만 명시적 이론과 관련된다. 만약 이론적으로 대중화되더라도 더 많고 더 나은 텍스트 내재적 실천으로 귀결되기보다 주로 텍스트 내재성에 대한 논의로 흐르게 될 것이다. 실천의 조건은 점점 약화되어 우리 시대의 높은 지적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정합적인 종교 언어와 공동체적 삶의 형태로 철저하게 사회화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는 지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더 넓은 문화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신학에는 불길한 일이다. 짧은 신정통주의의 막간이 지나간 후, 종교를 성경 바깥의 틀로 재기술하려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다시 지배적이다. 종교는 그 고유의 측면에서보다 현재 유행하는 범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쉬운 낯선 텍스트가 되었다. 따라서 텍스트 내재적인 신학적 충실성을 방해하는 근본 장애물은 학문적 고려사항이나 지적 고려사항에서 비롯되기 보다 심리 사회적 상황에서 생겨날 것이다.
III. 미래학(FUTUROLOGY)으로서의 적용 가능성
모든 포괄적 해석 체계(All-embracing systems of interpretation)는 자체적인 내적 규준에 따라 적용 가능성을 평가한다. 이러한 체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현재의 현실성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따라 판단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와 비마르크스주의자는 현재의 추세를 기술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미래에 대한 예상은 크게 다를 수 있다.
미래에 관한 관심은 전통적으로 성경의 종교에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 예언자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신실하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선포하되, 아무리 현실성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미래(=약속된 천국?)에 반하는 예언은 거부한다. 또한 종교적 예언은 신학적 해석에 의해 실제 미래와 관계 없이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이에 따르면 예언의 목적은 다가올 일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에 알맞게 현재의 행동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성격적 예언보다 미래학과 더 비슷하다. 미래학은 경험적 연구에 기반하여 “시대의 징조(the signs of the times)”를 발견하기 위한 이차적 연구 작업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경우, 그 목적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에서 해야 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적 제안은 다가올 시나리오에 대한 현실성 있어 보이는 정도에 따라 그 충실성과 적용 가능성이 판단된다.
그러한 시나리오를 구성할 때, 자유주의와 후기자유주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그들이 미래의 비전과 현재 상황을 연결하는 방식에 있다. 자유주의자는 경험, 즉 현재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조정한다. 반면에 후기자유주의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설명한다. 전자는 현재의 추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지만, 후자는 현대적 발전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후기자유주의는 현재의 유행에 저항하거나 자유주의자의 해석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종종 결과적으로 보수적 입장이 될 수 있다. 물론 텍스트 내재적 규범이 새것을 위해 옛것을 거부해야 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린드벡의 관점에서 오늘날 종교에 대한 주도적인 관점은 경험-표현주의이다. 교회들은 교인들을 정합적이고 포괄적인 종교적 관점과 삶의 형태로 사회화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이러한 상품을 조달하는 공급자가 되었다. 사회는 개인들이 사회적 영향을 받기 이전의 자기됨(selfhood)을 경험하도록 장려하고,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보면 동양의 종교와 철학은 ‘초월적 자아의 신화(the myth of the transcendental ego)’를 지탱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풍조는 전반적으로 후기자유주의의 입장과 상반된다.
실제로 무한히 다양화된 종교적 추구를 위한 틀로서 일반화된 관점이 필요하다면 자유주의(=경험-표현주의)는 앞으로도 가장 주류의 관점이 될 것이다. 심층에서의 일치 가설에 개방적인 경험-표현주의는 특수성을 강조하는 문화-언어적 종교 이해보다 이러한 필요를 더 잘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유일신 종교들은 특히나 이런 요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미래학의 추측적 영역에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추세는 언젠가는 변화한다. 어떠한 경향이든 극단으로 나아가면 그 자체의 존립 조건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린드벡은 “미래 일치된 세계의 존재 가능성은 근대성이 품고 있는 산(acids)을 중화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와 자격보다 타인을 향한 관심을 지지하고 개인적 성취보다 사회적 책임 의식을 지지하는 매우 특수한(particular) 관점으로 구성원을 사회화하는 공동체만의 영역(enclaves)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특정한 어떤 종교의 역할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은 경험-표현적 방식보다 문화-언어적 방식으로 해석된다면 진전시키기가 더 쉽다.
세계 질서의 존립 가능성이 아니라 문화 전통의 존립 가능성에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할 때, 이러한 고려는 더욱 유효해진다. 만일 성경이 서구의 상상력을 형성해 왔다면 서구 문화의 활력은 성경을 탁월한 정경 문헌으로 여기며 더 넓은 문화와 밀접하게 접촉하는 집단들에 달려있게 된다. 아마도 이만큼 명확히 규정된 현저한 정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동의 종교와 문화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어떤 종교가 지배보다 섬김을 강조한다는 전제하에, 그 종교가 자기 고유의 특수성과 완전성을 보존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에 더욱 기여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종교 공동체는 그들 고유의 텍스트 내재적 관점과 삶의 형태에 집중하는 만큼 실질적으로 현실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신앙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공동체에 유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해소된다. 개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종교 공동체의 구원은 행위(works)에 의한 것이 아니며 신앙(faith)도 실제적 효력을 위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실함(faithfulness)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선행들이 흘러나온다. 성경의 종교가 민주주의와 과학뿐만 아니라 서구가 보배처럼 여기는 다른 가치들이 창출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렇게 자기 종교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경의 종교가 이 같은 서구적 가치의 악마적 타락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지금은 서구 문명이 세계 문명이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획하지도 않았던 방식으로 될 것이다.
IV. 기량(SKILL)으로서의 이해 가능성
그렇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종교를 더욱 잘 이해하고 신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텍스트 내재성은 완전히 상대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를 스스로 닫힌 상태의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지적 집단으로 만들 수 있다.(발제자: 나도 같은 의견) 둘째로, 이는 종교 간의 선택이 전적으로 자의적이며, 이성적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신앙의 문제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는 종교들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된 토대를 모색하고 있으며 각 종교의 전통을 현재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게 하는 변증적 접근을 취하는 것이 필수인 것 같다. 토대 기획에 대한 후기자유주의의 저항은 이런 관점에서 치명적 결함이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종교에 대한 개인의 견해나 지식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종교를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보편자들에 의해서 비단 교회 밖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반쪽짜리 신자들에게, 그리고 특히 신학자들에게, 신앙은 믿을 만한 것이 된다. 포교를 위하여 성경을 현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가능하다.
변증적 접근과 토대의 모색에 회의적인 후기자유주의자는 번역문을 통해 종교를 배울 수 없다고 본다. 번역을 통해 어느 정도 수준의 의미 전달은 가능하지만, 번역문을 듣고 읽는다고 원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방식을 배우지는 못한다. 따라서 변증적 접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방편적이고 비토대적으로 다양해야 한다. 언어 문법처럼 종교의 문법은 경험을 분석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종교적 능숙함과 언어적 능숙함은 경험을 다룰 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경험 자체는 능숙함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될 수 있다.
또한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은 신학적 종교 연구를 폐쇄적인 지적 집단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학문 분야와 더 밀접하게 교류하도록 만들 수 있다. 역사, 인류학, 사회학, 철학에서 문화-언어적 성향의 확산은 텍스트 내재성, 즉 종교를 그 내부로부터 기술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킨다. 종교를 다른 개념으로 번역하여 설명하려는 자유주의의 시도는 주로 종교인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현대 문화가 그 종교적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번역 – 자유주의적 시도 - 은 부자연스럽고, 복잡하고, 모호한 것이 된다.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 학계의 학자들은 종교의 신빙성이 아니라 종교가 신자들에게 작동하는 방식, 즉 기술적 이해 가능성(descriptive intelligibility)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관심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이다. 반면 종교의 신뢰성에 몰두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점차 20세기 환경에서 19세기의 섬이 되는 것 같다.
여전히 기술적 이해 가능성이 간 학문적 목적만이 아니라 종교적 목적에도 도움이 될 것인가는 문제로 남아 있다. 만일 판단의 기준 혹은 보편적/토대적 구조가 없다면 선택의 이유는 비합리적이며,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맹목적 신앙의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러나 반토대론이 비합리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오늘날 보편타당한 합리성의 기준과 토대적 학문의 가능성이 의심받는 것과는 별개로, 서로 다른 사고틀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선택이 일시적 기분이나 우연적인 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는 언어학자가 탐구하면서 때때로 어림할 수 있으나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심층 문법의 규칙과 비슷하다. 종교와 신학의 합리성은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미학적 성격, 즉 정형화할 수 없는 기량의 특질을 띠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종교와 신학의 기본적 입장은 쿤의 과학적 패러다임처럼 확실한 반박에도 끄떡없으나(확증의 성격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받고 논증될 수 있으며, 이러한 시험과 논증이 결국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성은 과학적 선택뿐만 아니라 종교적 선택에도 제약을 둔다. 비록 이러한 제약이 너무 유연하고 비정형적이어서 기초신학에서도 일반 과학 이론에서도 뚜렷하게 설명될 수 없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이해 가능성은 기량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신빙성은 좋은 성과(performance)에서 나오는 것이지 성과와 무관하게 정형화된 규준을 고수함으로써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합리성이란 신자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과 현실에 대해 종교적으로 이해 가능한 해석을 제공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종교는 일반 과학 이론이나 패러다임에 적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합리적 검증 절차를 거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검증이 종교의 정식화나 폐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서의 합리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자의 지적 노력이 종교 전통의 건강에 기여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근대 이전의 신학적 견해도 종교의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전근대의 신학자들은 계시가 신학적 기획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지만, 신앙을 해설하고 변호하면서 철학적·경험적 고려를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방편적으로 변증학을 인정할 수 있지만, 신앙에 앞서서 신앙을 지배하는 형태의 변증학은 배제된다. 논증으로 믿음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일단 신앙의 언어를 배운 다음에야 논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음의 문제는 후기자유주의의 반토대론이 전통적 언어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종교적 메시지를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몰두하는 문제로, 만일 후기자유주의 신학이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어떤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면, 종교 공동체로부터 이해 가능하지도 않고, 충실하지도 않고, 적용할 수도 없다는 판단을 받을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후기자유주의의 방법은 번역보다는 고대의 교리교육(catechesis)과 비슷하다. 즉 새로운 개념으로 신앙을 재서술하는 대신, 잠재적 신봉자들에게 종교의 언어와 실천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수 세기 동안 대부분의 종교가 신앙을 전하고 회심자를 얻는 주된 방법이었다. 과거 주류 보편교회로 회심한 이교도 개종자들은 대부분 회심을 결단한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이해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와 삶의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 동기는 다양했으나, 그들은 교리교육을 받고 교리 안에서 새로운 행동 방식을 연습하며,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배우기로 했다. 그들은 낯선 그리스도교 언어와 삶의 형태에 능숙해진 다음에 비로소 지적이고 책임감 있게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신자들은 성경 이야기의 세계와 친밀해졌고 또 상상의 방식도 그 세계에 매우 익숙해져서, 삶 전체를 종교적 측면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적 형태의 성경 세계는 종종 심하게 왜곡되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텍스트 내재적으로 작용했다.
현대 서구 문화는 이러한 사회화가 효력을 잃고 교리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번역이 매력적인 대안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에 있지만, 성경의 유산은 잠복적이면서 탈-텍스트화된 형태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 대중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에도 종교적이었던 과거로부터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은 교리교육을 거부하지만, 그들에게 잠복되어 있는 그리스도교를 명확히 나타내 주는 실존적, 심층 심리학적, 해방적 언어로 복음이 번역되는 것에 자주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효과적인 교리교육은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점진적으로 탈그리스도교화되는 시대에서 교회의 성격이다. 현재 교회는 선교적 확장의 시대와 달리, 문화를 형성하기보다 주로 지배적 문화에 적응하고 있다. 교회는 계속해서 한 가지 방식(fashion)이나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다수 인구를 끌어안으며 좋든 싫든 다수의 경향에 맞춰 나갈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탈그리스도교화가 훨씬 더 진행되거나 아니면 별로 그럴듯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교회가 교인 수를 유지하고자 하고, 신학자가 신앙을 신빙성 있게 만들고자 하는 정당한 욕망으로 인해, 현대어로 번역하는 경험-표현적 방법이 계속해서 선호될 것이다.
V. 결론
이상의 논의가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후기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할 만한 교리적, 신학적 이유가 없음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후기자유주의가 강조하는 텍스트 내재적인 이해 가능성은 한때 문화적으로 국교회 체제였다가 아직 분명하게 국교회 체제를 벗어나지 않은 어색한 과도기에 있는 그리스도교 같은 종교의 필요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후기자유주의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온전함이 텍스트 내재성을 요구하고 있고, 아마도 서구 사회의 활력은 장기적으로 결국 성경적 관점이 텍스트 내재적이고 번역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문화를 형성하는 힘에 의존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현재 유행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종교적으로 관심이 있는 대중의 아우성에 저항해야 한다. 대신에 신학은 계속되는 탈그리스도교화가 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진정성을 공동체적으로 가능하게 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도 궁극적 시험 기준은 성과다. 만일 어떤 후기자유주의적 접근이 실제로 사용될 때 관련 공동체에 개념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유용함이 입증된다면, 그것은 곧 표준적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장은 신학적 성과가 아니며, 기껏해야 임시변통적 변증학의 단편에 불과하다. 이 장에서 신학을 논하기는 했지만 텍스트 내재성의 기준에 따라 펼쳐 낸 어떤 단일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학적 주장은 거의 없다.
이 장은 그저 과거의 성과에 의존해 미래의 작업을 제안했을 뿐이다. 독자는, 과거 몇십 년간 에큐메니컬 대화의 교리적 결과가 다른 어떤 틀(이를테면, 명제적 또는 상징적 교리 이해)보다 문화-언어적 종교관 및 교리에 대한 규칙 이론의 맥락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 책이 촉발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신학적인 면에서 텍스트 내재성이야말로 문화-언어적 종교 이해 및 교리에 대한 규칙적 관점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하는 원천이었다. 물론 이것은 후학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검토된 이후에야 최종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장의 목적은 교리의 규칙 이론이 어려운 사례들 (고전 그리스도론의 무조건성, 마리아론 발전의 불가역성, 교도권의 무류성)에서 작동하는지 살펴봄으로써, 규칙 이론이(그리고 함축상, 이와 관련된 종교에 대한 문화-언어적 이해가) 신학적으로 그리고 에큐메니컬적으로 유용한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규칙 이론은 다른 이론들보다 역사적 변화 속에서 교리의 영속성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교회 교리를 실천과 더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써 교리를 규범적으로 더 효력 있게 만든다.
5.1. 니케아와 칼케돈
고대의 삼위일체론적 신조와 그리스도론적 신조의 무조건성과 영속성을 성공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한편으로 교리들을, 다른 한편으로 교리를 정형화하여 담아낸 용어 및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동일한 신앙, 동일한 가르침, 동일한 교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가능성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징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교리를 표현한 이미지와 교리가 동일시되기에, 교리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구분은 교리 내부의 구분이 아닌 교리와 경험 사이의 구분이다. 비논증적 상징을 담는 형식이 변하면, 상징이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경험도 일반적으로 그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맥락 또한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의미를 결정하는 데 이바지한다. 이 관점에서 교리의 형식이나 맥락이 바뀌면 상징의 내용이나 실질도 또한 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차적 명제 및 이차적 명제(규칙)와 그것들을 담은 형식이 서로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하나의 동일한 명제가 다양한 개념을 사용한 다양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일한 문법 구조나 작용이 규제적 의미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되고 재기술될 수 있다.
한편 여러 가지 다른 정형문구로 표현된다 할 때, 그 안에 있는 동일한 내용이 무엇인지 진술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오직 다양한 정형문구가 동치임을 봄으로써, 그리고 보통 다음 단계에서 동치인 규칙들을 진술함으로써, 그 형식과 별개로 자기-동일적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비슷하게, 니케아와 칼케돈의 교리들이 그것들을 정형화하여 담아낸 개념과 구별될 수 있음을 보이는 유일한 방법은, 형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동치의 귀결을 갖는 표현으로 이 교리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타나시오스는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곧 아들에 대한 언급이라는 규칙의 측면에서 동일본질의 의미를 표현했다. 이 신학자는 니케아 교리를 존재론과 관련된 일차적 명제가 아니라, 이차적인 발화 규칙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이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삼위일체론 그리고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논쟁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도교의 신조들에는 최소한 세 가지 규제적 원리가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즉, 유일신론의 원리, 역사적 특수성의 원리, 그리스도론적 최대주의의 원리가 그것이다. 이 세 규칙의 상호작용으로 규정된 용납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은 것으로 느껴질 때, 그것들은 모두 거부되었다. 이 세 규칙의 압력과 인지 부조화를 덜 일으키도록 조정된 것이 마지막에 가톨릭 정통이 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케아와 칼케돈의 정형문구는 가장 이른 시기 층위의 전통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었던 규제적 원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담론을 고대 후기의 고전적 세계에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능한 결과 중 하나(어쩌면 유일하게 가능한 결과)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들 신조는 주류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중요했던 교리적 규칙들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정형문구를 만들 때는 전형(paradigms)을 따라야 한다. 원래의 전형이 형성되도록 지도한 동일한 규칙들이 새로운 정형문구를 구성하는 데 작용한다면, 이 정형문구는 동일한 교리를 표현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새로운 정형문구를 만드는 일, 즉 새로운 상황에 맞게 신조를 다시 작성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교회 전체가 어떤 교리적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일 자체가 아주 드물고 어려운 성과이기 때문이며, 특히나 그것이 예전적, 표현적 기능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어려운 성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적인 표현보다 고전적인, 또는 불가해한 개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 개념을 통해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상징적이고 지적인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신자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하고, 선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대의 정형문구는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권위를 지니는 것은 신조의 정형문구들이 예시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 필자 주) 규칙들이다.
5.2. 마리아론
원죄 없는 잉태, 성모 승천 등을 포함하는 마리아 교리는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론이나 또는 영혼 불멸론 같은 조건적 교리만큼 체계적으로 숙고한 결과이기보다, 종교적 숭배와 감수성의 발전에 따른 산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마리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역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마리아 교리는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암묵적으로만 내재되어 있던 것에 관한 새로우면서도 지속적으로 타당한 발견 내지 통찰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규칙 이론이 성경 시대 이후 이렇게 특수한 형태의 발전에서 발생한 불가역성의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물음은 형식에 관한 것이지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규제적 접근이 신학적 선택지를 열어두는가를 묻는 문제다.
모든 어법에는 그 어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한정하는 숨겨진 제약이 있다. 그런데 그 제약이 무엇인지는 오직 새로운 것을 말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리고 그 시도에 실패하거나 성공함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론도 마찬가지로,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야 제약과 허용의 문법적 원리 또는 논리적 원리를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정확하고 올바른 질문이 정확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제기될 수 있어서 근저의 구조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마리아 공경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교리와 결합하고 하나님이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점에 관한 예리한 인식과 결합하여 오랫동안 천천히 자라난 다음에야 원죄 없는 잉태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될 수 있고 대답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 문법이 초기 세대에 숨겨진 방식으로 우리 주님의 어머니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동시에 동일한 교리가 가역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서방의 신학과 죄의식의 맥락에서만 마리아론이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해서, 여기서 근저의 규칙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훨씬 어려운 문제다. 문제시 되는 것은(마리아론 자체가 아니라 마리아론의 배경이 된 – 필자 주) 서방 전통의 원죄 개념이다. 원죄없는 잉태 교리는 그 교리의 발생과 관련된 일부 규칙들 (죄에 관한 특정한 신학과 연관된 규칙들)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에,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론 교리와 달리 가역적인 것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규칙 이론은 역사적 주류 그리스도교가 필요로 하는 보다 분명한 교의적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교리가 신앙 공동체에 조건적으로/무조건적으로 필수적이든 개정될 수 없으며 조건적 교리조차 때로는 불가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한다. 동시에 규칙 이론은 구체적 교리의 지위에 관한 실질적 문제를 결정하지 않기에, 교리가 발전하거나 후퇴할 여지를 모두 남겨 둔다.
5.3. 무류성
무류성은 교리보다는 교회의 본성과 관련되기에 현재까지의 문제와 논리적으로 구별된다.
무류한 것은 공동체의 교리적 결정이며, 교리는 무류가 아니라 개혁할 수 없는 것이다. 무류성은 심각한 오류 즉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하는 오류로부터 면제되는 것이다. 무류성의 긍정은 단순히 교회가 그리고/또는 교회의 교도권이 교회의 정체성이나 안녕에 필수적인 특정한 쟁점에 관하여 엄숙한 결정을 내릴 때 신앙의 문법에 치명적으로 어긋나지 않음을 긍정한다.
무류성은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말할 수 있나와 관련된다. 그러나 주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이 능숙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언어적으로 능숙한 사람은 널리 소통하는 것과는 관심 없는 종파나 고립된 변두리보다 주류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 또는 정통이라고, 그리고 에큐메니컬이라고 불린 이들 말이다. 이 정형문구의 결과들을 일상적인 신앙생활과 종교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바로 여기 속한 이들이다. 문화-언어적 접근에서, 종교 교리는 무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존재론적으로는 참이 아니더라도 체계 내적으로는 참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의 함의를 알기 위해서 두 가지 질문을 다루어야 한다.
1) 이렇게 교리에 부여된 확실성은 신학적으로 충분한가?
이 문제는 경험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다양한 것이 종교적으로 충분하냐는 문제이다. (보증의 문제 – 필자 주)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교회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대해 ‘자연 이성’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소위 ‘종교적’) 확신이 신자들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이러한 비판은 이해의 실패, 근대적 편견, 신학적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문제는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가?”이지 “그리스도교는 진리인가?”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에게 진리이자,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신자들 – 필자 주)은 실제로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지를 비그리스도교인들보다 더 잘 알지만, 교리의 특성이 그리스도교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비신자도 능숙하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러한 비판은 데카르트적인 근대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즉, 확실성이 보편적 의심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확실성이 먼저 있고, 그것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서 의심이 뒤따른다.
셋째로 이러한 비판은 잘못된 종류의 초자연주의라는 신학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신앙의 내적 논리에 대한 교리적 결정이 올바른지를 신학적으로 판단하는 일이 경험적인 판단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들은 규준들의 진정성에 대한 무류한 지식을 한편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 즉 대가도 공로도 없이 받은 은총의 선물임을 인정할 수 있다.
2) 무류성의 자리, 즉 교리를 보증하는 권위의 자리는 어떠한가?
(문화-언어적 모델은) 무류성의 자리가 한 언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공동체 전체라고 제안한다. 이는 동방 정교회의 입장에 가깝게 들린다. 즉, 교회가 성령에 열려 있으며 또한 성경 시대부터 현재까지 모든 신실한 증인들과 시공간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한, 하나의 전체로서의 교회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에도, 공식 교도권에도, 에큐메니컬 공의회조차도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규칙 이론이 어떤 신학적 선택지를 특별히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의 중요성과 조건적 교리의 가능성이다. 개신교의 ‘오직 성경’과 로마 가톨릭의 공식 교도권에 대한 강조는 조건적으로 필요하나 가역적인 교리이다. 정교회의 관점은 교회가 나뉘지 않을 때 적절하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점은 교회가 분리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권위, 곧 궁극적인 최종 법정을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이 모든 것들은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들은 재해석될 수 있다. 성경에 부여된 최종 권위는 성경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려되어야 한다. 공식 교도권, 특히 교황의 경우는, 교황이 교회 일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에 대변인이 되기를 진지하게 추구한다는 알려지지 않은 조건처럼, 그가 무류성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무류성에 관한 세 가지 이론(정교회, 개신교, 가톨릭 – 필자 주)은 동일한 규칙에 대한 다양한 정립, 아니면 적어도 양립 가능한 행동 규칙에 대한 다양한 정립이 될 것이다. 이처럼 교리를 규칙으로 볼 경우, 규칙의 적용 영역을 구분하면, 각각의 교리는 충돌하지 않는다. 이 경우, 명제적 진리들이 서로 확고부동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교리는 종종 화해할 것이라는 점이 뒤따른다. 결론적으로, 규칙 이론은 주류 역사적 전통의 어떤 교의에도 저촉되지 않는 듯하며, 또한 에큐메니컬적 일치와 불일치를 의미 있게 논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5.4. 규제적 관점의 우월성
교리의 본성에 관한 규제적 견해와 현대의 명제적 견해 사이의 일치는 몇 가지 면에서 불일치보다 더 두드러진다. 로너간과 라너는 모두 교리가 규칙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로너간이 마리아 유형의 ‘정서적’ 성격에 관해 쓴 글을 예로 들자면, 그는 이런 교리들이 어떤 고정된 명제적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규칙을 보여주는 예시라는 주장에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너간은 삼위일체론과 같은 고전적 교리의 경우, 교리의 규제적 기능이 먼저 명확하게 지각된 후에 스콜라주의의 등장과 함께 형이상학적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고 주장되었다고 본다. 이 경우 신조의 확언에 대해서도 교리의 권위는 반드시 일차적인 존재론적 지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규칙 이론에 동의하는 셈이다.
어떤 상황에서 교회에 필수적인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필수적이지 않다.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주변적인 것이 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또한 교리적 명제가 영속적이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정형문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수정된 또는 역사주의적 명제 이론은 규칙 이론 못지않게 역사적 변화와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불일치의 실제적 결과는 어떤 면에서 사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존재하고, 어떤 목적에서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
주요한 이론적 논쟁의 관건은 ‘오컴의 면도날’을 적절하게 응용하는 것이다. 규제적 관점에서 보면, 명제주의적 해석은 필요 이상의 해석이다. 만일 니케아 교리 같은 교리가 규칙으로서 영속적인 규범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나아가서 존재론적 지시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삼위일체론의 경우, 그것은 한정된 사안이다. 규칙 이론은 그리스도교 언어의 삼위일체론적 유형이 신성의 형이상학적 구조와 상응하는지에 대한 사변을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사변이 교리상 필수도 아니며 구속력이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그리스도인이 살고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공동체적 규범이 되지 못하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이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실재에 더 잘 상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물음은 종말의 이편에서는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은 또한 신학적 평가와도 무관하다. 어느 이론이 신학적으로 가장 좋은지는 그것이 성경과 전통의 자료를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삶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얼마나 잘 조직하는가에 달려 있다.
삼위일체 교리가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이론 구성을 위한 규칙 또는 규칙의 결합이라면, 상술한 두 가지 유형의 이론이, 같은 규칙을 따를 때, 둘 다 교리적으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교리가 존재론적 지시를 가진 명제라면, 해당 교리가 존재론적으로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두 이론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한 가지 형태만이 참일 가능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명제적 견해의 실제 단점은 사소하지 않다. 명제적 견해는 어느 한 이론이 이단적임을 암시한다. 삼위일체 교리가 규제적일뿐 아니라 명제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만, 논쟁 당사자 양쪽 모두 그런 이유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라도 해보았는지가 전혀 분명하지 않다.
명제적 접근과 규제적 접근이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요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해석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대조하는 것이다. 영혼 불멸의 교리를 예로 들면, 명제적 접근의 경우, 그 교리가 나타내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를 따르다보면, 끝없는 사변적 재해석 과정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규제적 접근의 경우,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구체적 삶과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교리는 해석이 아닌 따라야 할 대상이므로, 신학자의 과제는 교리가 적용되는 상황(일시적/지속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명제적 접근의 경우, 비트겐슈타인의 방식대로, 언어는 일하지 않고 빈둥댄다. 규제적 접근의 경우, 도구가 현실과 맞물리고, 교리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교회의 실천과 직접 관련된다. 니케아와 칼케돈과 관련한 문제는 그것들을 현대적 범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성경 이야기의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이 말하는 한 분 하나님께 가는 길로 최대한 넓게 해석함에 있어 어떻게 그것들만큼 또는 더 잘 할 수 있는 가이다. 따라서 규칙 이론은 교리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대신, 현대화된 그리고 상대화시키는 명제적 해석보다 교리의 규제적 효과를 높이는 데 더 알맞을 수 있다.
따라서 교리의 교칙 이론이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규제적 견해가 적어도 규범성에 관해서는 (명제적 견해보다) 더 우월하다. 형이상학에 맞춰진 신학적 사변의 교리적 적합성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실천에 초점을 두는 것은 무엇이 교리에 관하여 규범적인지를 더 쉽게 명시할 수 있게 한다.
본 장은 규칙 이론이 교리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들보다 장점이 많다는 것을 논증한다.
Ⅰ. 교리와 교리 문제
교리는 집단의 정체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과 실천에 관해 공동체 내에서 권위를 갖는 가르침이다. 그 교리는 공식적일 수도 비공식적일 수도 있지만 효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어떤 종교 단체든 그 정체성을 식별할 믿음과 실천이 없다면 여타 집단과 구별되는 고유한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첫째, 교리의 불가피성이 있다. 일례로 ‘신조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지는 신조로 작동한다. 둘째, 실제 효력을 갖는 교리와 공식적 교리의 구분이다. 공식적이면서도 사실상 교리로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암묵적으로 인정되지만 공식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논쟁은 암묵적 교리가 명시적 교리로, 작용만 하던 교리가 공식적 교리로 되게끔 하는 수단이다. 공식적 교리가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①교리는 그것이 무엇을 반대하는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②공식 교리는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지향점이나 신념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변함없는 신념이더라도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없거나, 대체로 사소한 문제였던 것이 상황에 따라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에 관한 결정은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교리 때문에 매우 핵심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을 바탕으로 넷째, 신학과 교리의 구분에 이를 수 있다. 신학과 교리는 상호 연관되어 있으나 서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명백히 공식화된 교리에 대해서는 합의하더라도 그 해석 방식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대치할 수도 있고, 대조적으로 고백적 차이(교파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는 상당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교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기는 어렵다.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교리는 더 이상 객관적 실재의 재현이 아닌 개인적 선호의 표현으로 경험되기에, 과거의 교리에 대한 현대적 방식의 재해석과 표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경험-표현적 접근은 종교의 사유화와 주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쉽게 사용될 수 있다. 여기에는 반-교리주의 또한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얼마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주관주의는 사회적 공동체의 약화로 이어지기에, 열린 사회는 개방성의 유지를 위해 교리적으로 헌신된 종교 공동체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로는 불충분하며 ‘사회학적 종파주의(sociological sectarianism)’가 필요할 것이다.
교리적 표준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고 올바른 교리에 관한 관심으로 되돌리기에 전통적인 명제적 개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우선 명제주의는 새 교리의 발전과 옛 교리의 사장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옛 교리의 새로운 재해석을 설명할 수 없고 마지막으로 대립적 교리의 화해가 각 정체성의 유지와 병행될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경험-표현주의는 정반대의 어려움들이 있다. 근저의 문제는 영속성과 변화,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한 대응은 상대주의적 입장이다. 자기-동일적으로 수 세기 내내 지속된 핵심 내용은 없으며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반대의 극단은 성경주의(개신교)와 전통주의(가톨릭)가 있다. 두 경우 모두의 결점은 문자와 정신을 혼동하는 것이다. 상대주의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어떤 발언이든 상황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오히려 과거에 대한 충실함을 훼손하는 경직성에 빠지게 된다.
변화하는 형태 중 어느 것이 영속적 실체에 충실한지의 문제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종교를 효과적으로 내면화한 사람이다. 그들은 구체적 용법들이 신앙의 내적 규칙에 부합하는지 알고 공식 교리의 어설픈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어설픈 지도를 위한 자리도 있다. 빈약한 대용품이더라도 영감도 반성도 없는 편견보다는 나은 것이다.
Ⅱ. 문법과 교리, 연속성과 변화
본서의 목적에 부합하여 고려할 이론은 규칙이론과 수정된 명제적 이론뿐이다. 상징 이론은 교리의 전통적 특징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이 있기에 현재 가장 인기 있더라도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고전적 명제이론은 교리를 존재론적 내포를 가진 진리 주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에 또한 배제될 것이다. 현대적 명제주의의 형태는 교리가 존재론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이 주장을 담을 수 있는 다양한 개념 내지 정형문구를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결함을 극복하려 한다. 이는 교리에 불변적 측면과 변화하는 측면의 공존 가능성에 열려 있다.
교리가 규칙이라 말한다고 해서 교리가 명제를 포함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규칙 이론에 따르면 교리로서의 교리는 일차 명제가 아닌 이차 명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리는 존재론적 진리 주장이 아닌 체계 내적인 진리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규칙 이론은 교리적으로 의미 있는 측면을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용되는 방식을 특징짓는 문법에서 찾는다. 따라서 문화-언어적 시각에서 종교는 포괄적인 해석의 매개이거나 범주적인 틀이다. 나아가 어휘와 문법을 구분한다면 교리는 어휘가 아닌 종교 문법을 반영하며, 문법과의 관계에서 실효성을 획득한다. 대부분 교리는 바른 용법을 규정하기보다 바른 용법을 제시한다. 즉 규칙을 적용하는 모범적인 사례 내지는 전형(paradigm)인 것이다. 비록 문법책에 수록된 문법보다 훨씬 불완전하고 많은 예외로 인하여 종교 내부의 근본적인 상호 관련성에 대해 종종 오해하게 만들더라도 교리의 안내자 역할은 불가피하다. 언어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법이나 교과서의 교리를 통해 안내받는 것이 불가피한 것과 같다.
교리의 주요 문법적 핵심과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인지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은 가변적이다. 종교의 일차적 진리 주장은 그 주장이 변화하는 인간 세상에 해석적 도식을 적용함으로써 발생하는 한 변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시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계속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의미 양태(modus significandi)’가 아닌 기껏해야 ‘의미대상(significantum)’이다. 신학적·종교적 변혁은 변함없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상대주의로 이어지나 규칙이론을 채택한다면 저 변혁이 자기-동일적 이야기와 새로운 세계들의 융합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불변성에는 초자연적 설명이 불필요하며, 언어와 종교 그리고 문화에서 관찰되는 일종의 안정성일 뿐이다. 언어·종교·문화는 인간이 변화하는 세상을 보는 렌즈이거나 인간들이 자신의 설명을 담아내는 매개이다. 따라서 종교가 만들어 낸 경험 또한 가변적이며, 이는 표현주의 모델과 대조된다. 그러나 규칙이론을 따르면 사랑의 경험은 가변적일 수 있지만, 예수 이야기에 의해 진정으로 형성되는 한 그리스도교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통의 경험적 핵심을 식별하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문화-언어적 접근에서는 그렇게 해야 할 압박이 없다. 중요한 점은 어떤 분위기의 공통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공통의 대상인 것이다.
내적 경험 안의 변화들은 확신 안에서의 변화처럼 연속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음의 흔적이다. 다양성이 정체성을 손상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종교의 항구적 요소가 객관적 설명이나 내적 경험의 차원에서 찾기 어려운 이유는 그러한 설명들이 종교의 규범적 형태를 특정 세계에 알맞은 경험이나 진리 주장과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언어와 비슷할 정도로, 확언과 경험이 막대하게 변화하는 중에도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교리가 명제나 표현적 상징보다 문법 규칙과 닮았다는 점을 인식하면 교리의 정형 문구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영속성과 통일성이 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비신학적(nontheological) 종교 이론은 종교간의 우열을 따지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하나의 종교 이론이 “종교적으로 유용”하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가 우월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를 예로 들자면 종교적으로 유용한 종교 이론은 기독교 내부에서 ‘우리가 타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배제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에 대한 해석 또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언어적 관점은 종교적으로 유용해보이지 않는다. 문화-언어적 접근에서는 한 언어나 문화를 다른 것보다 ‘더 참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대부분 자기 종교의 무비성((無比性, unsurpassability)을 주장하지만 그 중 어느 것이 참된 것인가? 내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가능함을 인정할 수 있는가? 요컨대, 종교간에 서로 개종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대화와 협력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 본 장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무비성, 대화, ‘다른 신앙인’의 구원 문제, 그리고 문화-언어적 맥락에서의 ‘진리’ 개념을 다룬다.
I. 무비성
이 절 말미에서 종교적 진리와 실재의 관계를 ‘지도’와 ‘목적지에 도착함’의 관계에 유비시키는 부분이 나온다. 본 절의 이해를 위해 먼저 이 내용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전제: 지도는 실제 여행 도중에 사용될 때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여행하는 방법에 대한 명제로 인정된다.
① 가상공간에 대한 지도는 (범주적 오류를 가졌기에) 참/거짓 명제를 형성할 수 없다.
② 목적지와 관련없는 지도는 실재와 상응하더라도 목적지에 가는데 어떠한 안내도 제공하지 않는다.
③ 지도 자체가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지도는 오독되고 오용되는 한, 이것은 거짓 명제에도 속한다.
④ 반대로 지도에 오류가 있다 해도 여행자를 바르게 인도한다면 참된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⑤ 고의로 잘못된 길을 안내하는 지도는 무관한 지도보다 나쁘다.
⑥ 어떤 지도는 목적지로 갈수록 모호할 수 있다.
⑦ 최종적이고, 완전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양한 버전들의 지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는 결국 지도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참과 거짓이 나뉜다. 범주적으로 참된 종교가 있더라도 존재론적으로 참인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항상 그렇게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올바른 종교’가 있다 해도 또한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이 내용을 염두에 두고 본 장에서 논하는 종교간 비교의 방법을 살펴보자. 린드벡에 따르면 종교간 비교는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 상징적 효과(symbolic efficacy), 범주의 정확성(categorial adequacy)의 카테고리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 명제적 진리 : 특정 종교를 ‘신앙’하는 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적 진술에 “명제적 진리”가 있다고 간주한다. 명제적 진리는 존재론적 상응 혹은 명제와 대상 간의 일대일 대응관계(isomorphism)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명제적 진리에 입각한 종교간 비교는 각 종교가 지닌 명제적 진리의 우열과 관련되어 있다.
(2) 상징적 효과 : 경험-표현적 접근에서 진리는 “상징적 효과”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관점의 종교간 비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신적인 것(divine)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재현하는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3) 범주의 정확성 :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종교들은 주로 실재를 이해하고, 경험을 표현하고,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서로 다른 어법(idioms)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진리를 고려할 때도 범주(또는 ‘문법’ 혹은 ‘게임의 규칙’)의 측면이 중심이 된다. 종교간 비교라는 측면에서 문화-언어적 관점은 이러한 범주가 있다고 여겨지는 종교를 “범주적으로 참되다”라고 할 수 있다.
(1) 이 세 가지 진리 중 전통적으로 가장 익숙한 것은 명제적 진리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종적인 종교는 다른 종교가 비교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명제적 무오성(inerrancy)이 있어야 한다. 무비적 종교에 논리적으로 필요한 또 다른 요건은 아퀴나스가 “계시 가능한 것”(revelabilia)이라고 부른 것의 극치(즉, 인간이 경험하는 시공간의 세계 안에 계시될 수 있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진리들)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종교를 표현적 참(=상징적 효과)으로 이해하면 종교적 상보성은 높아지지만 특정 종교의 무비성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거나, 최소한 약한 의미에서만 무비적이다. 진리 그 자체에는 상한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징적 효과의 관점에서 종교가 표하는 진리란 본유적인 상한선이 없기 때문이다,
(3) 범주적 관점으로 이해한 종교는 표현적 관점보다는 분명 더 무비성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명제적 관점보다는 더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다.
(3)-1 더 강한 무비성 : 종교적 대상, 즉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킬 수 있게 해 주는 개념과 범주를 유일하게 가진 단 하나의 종교를 상정할 수 있다.(이것이 종교간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이 종교는 어떤 형태든 명제적인(표현적인 측면에서도) 참/거짓이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일 것이다. 범주적으로는 다른 종교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명제적으로나 표현적으로는 참도 거짓도 아닐 수 있다. 이것들은 종교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는데, 마치 ‘무게’의 개념이 없을 때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다.(?) 인지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종교든 적어도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지거나 아주 약간의 진리를 가질 수 있지만, 범주적 해석에서는 완전히 오류적인 범주를 가지고 있는 종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종교간의 우열은 그 범주에 의해서 극명하게 나뉘어진다.
(3)-2 더 약한 무비성 : 범주적 진리는 명제적 오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제적 다양성보다 무비성이 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오류도 가능태로 존재해야 한다(Even if there is only one religion in which reference to God can occur (if there is such a being) yet it will be open to all sorts of falsehoods in what it affirms of him.). 이러한 관점은 종교의 명제적 진리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것이 문제로 보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로너간이 “의식의 조직적 차별화(systematic differentiation of consciousness)”(※설명 필요 : 체계적인 의식의 분화?)라고 부른 것에 영향받은 문화에서는 ‘상응에 의한 진리(truth by correspondence)는 명제적이다’라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드벡에 따르면 이러한 명제적 관점은 후대에 고착화된 “통속화된 형태의 합리론(vulgarized forms of a rationalism)”의 영향이며, 상응에 의한 진리는 본래 명제적이라기보다는 범주적인 측면에서 우선되는 것이었다. 어떤 종교가 문화 체계와 견줄 정도로 삶의 형태에 대한 일련의 언어 게임이라면, 그 전체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와 상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종교가 단일하고 거대한 명제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즉 종교가 다양한 존재적 차원에서 사물의 핵심에 놓여 있는 궁극적 실재 및 궁극적 선(善)에 어느 정도까지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집단과 개인이 대상들을 내면화하고 수행하는 한, 종교는 하나의 참된 명제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한, 종교는 거짓이다.
II. 종교들간의 상호 관계(=대화)
린드벡이 제시하는 가능한 종교간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 약속과 달성의 관계(명제적)
ex)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 / 유대교・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관점
(2) 동일하거나 비슷한 경험을 다양하게 객관화한 것(표현적)
ex)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샹카라의 관계
※ 문화-언어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처한 맥락에 따라 실천의 함의가 전혀 다르며, 결과적으로 신비적 경험 자체도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3) (서로 다르지만 양립할 수 있는 존재의 여러 차원으로 안내한다는 의미에서)상보적 관계
ex) 불교의 명상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행동(?)
(4) 정면으로 대립하는 관계
ex) 고등종교와 나치주의/사탄주의의 관계
(5) 정합적인 것과 비정합적인 것, 진정한(authentic) 것과 거짓된 것의 관계
ex) 신실하게 자신의 종교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속한 비도덕인 사람보다 다른 종교에서 그 종교를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과 더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린드벡은 종교간 대화의 욕구가 주로 (2)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는 달리 문화-언어적 대안은 특정한 형태의 종교간 대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실제로 종교간 토론을 해야 할 이유는 다양하다. 그는 오히려 종교들의 깊은 경험이나 신앙이 이러한 문제의 동기와 다양성을 가릴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물음이 어떤 식으로든 대답 되더라도, 종교들이 핵심 경험을 공유한다고 전제하지 않고 각 종교가 다 다르다고 간주하면서도 대화에 임할 수 있는 또 다른 신학적 토대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교회가 회심을 진척시키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사심 없이 이웃을 섬김으로써 자신들의 주님을 본받도록 부름받았다는 점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될 수 있다.(->예를 들어, 이것이 개종을 하게 만드는 요인인지와 완전히 별개로, 그리스도 교회는 주님을 닮기 위해 이웃에 대한 이타적 섬김을 요청받는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될 수 있다 ?) 그렇기에 때때로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과제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더 나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가 되도록, 불교 신자가 더 나은 불교 신자가 되도록 고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은 아주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매우 고된 대화와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린드벡은 이러한 언어-문화적 관점에서 - 어쩌면 오직 이 관점에서만 - 타 종교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맡기신 사명의 고유한 독특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 내부의 담론일 뿐이다. 이는 명확히 성경적인 고찰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성경적 종교들이 채택하도록 제안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성경적 종교들은 그들 고유의 적절한 포괄적인 문화-언어적 체계 안에 있으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논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종교는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위한 서로 다른 근거를 가질 공산이 크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단순히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공통의 핵심 경험이라는 가정이 부추기는 비교에 관여하면서 서로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 없이 서로 간의 일치와 불일치를 계속 탐구할 수 있다.
III. 구원과 다른 신앙들
이 장에서는 다른 종교, 혹은 비종교인의 구원 문제를 다룬다. 만약 자신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면, 종교간의 대화는 어려워진다. 적어도 자신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여기는 이에게 개종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은 타인의 파멸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짓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화와 협력의 자리를 논쟁과 개종의 요구가 자리잡는다.
린드벡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한다. 리스도교 전통에서 문제의 핵심은 오직 그리스도(solo Christo)에 의한 구원이고, 여기서 중요한 딜레마는 이를 비그리스도교인의 구원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1)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부정하는 견해(주류이지만)와 2) 타종교의 구원에 대해 불가지로 외면하는 견해는 배제된다.
그 동안 타종교/비종교인의 구원에 관한 기독교 내 이론은 두 가지이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모든 인간에게 효력을 가진다. 2) 인간의 운명은 죽음 혹은 그 후에 다가오는 세상의 생명이신 예수와 마주하면서 결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중 전자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칼 라너와 버나드 로너간 등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비록 비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내적 구원 경험과 관련된 궁극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신봉하지 않더라도, 혹은 그와 가시적 성례전으로 연합되어 있지 않더라도, 내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비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역사하는 것과 동일한 칭의(稱義, justification - 하나님이 죄인의 상태의 인간을 의인의 상태로 옮기는 행위)와 구원을 이미 공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칼 라너 - “익명의 그리스도인”)
그러나 고전적 인지주의자와 문화-언어적 측면에서 종교를 해석하는 이들은 이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인지주의자는 개별 종교 너머의 보편종교를 찾으려 했고, 이러한 다양성을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근본 조항(fundamental articles)으로 환원코자 하였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이신론(理神論)으로 간주하였다.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에 대한 근대의 인식 또한 여러 종교에 공통되는 명제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문화-언어적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전망 이론(prospective theory)이다. 즉 비록 비그리스도교인 또한 ‘아직’ 믿지 않았을 뿐 미래의 구원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 비그리스도교인의 구원을 장래에 ‘들음에서 오는 믿음’(fides ex auditu)으로 설명하는 것 - 이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그리스도 또한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죽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보는 정통 가톨릭에서 반대되었던 듯 하지만, 칼 라너는 “죽는다는 것 자체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복음에 분명히 직면하는 순간으로 그려져야 한다(dying itself be pictured as the point at which every human being is ultimately and expressly confronted by the gospel, by the crucified and risen Lord)”(?)는 이론을 세운다. 궁극적인 죽음은 시공간과 경험, 추측 너머에 있으며, 인간이 현생에 가지는 신앙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 밖에는—구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저주(damnation)가 없다. 오히려 신앙의 언어를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또한 ‘들음에서 오는 믿음’이 강조될 때, 명시적 신앙은 신자의 실존적 깊이를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오만을 막는다. 그들의 사랑을 비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구별해 주는 것은 현재 그들이 가진 사랑의 주관적인 질이 아니라, 그 사랑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하에서는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에 오만boasting이 들어설 자리가 없음을 길게 설명한다)
다만 이러한 설명들이 기독교 내부에서 여러 난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신화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문제는 남아 있다.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기존의 어떤 공동체 내지 집단과 그 구성원 특유의 기본적 사고방식과 감정 및 행동 패턴에 대한 궁극적인 정당성을 제공하며 동기와 행동을 연결하는 담론적 상징과 비담론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로 본다. 이들에게 종교란 인간 경험의 초월적 극치와 깊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흔히 현대인이 인간에게 가장 심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즉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를 구성하는(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의례, 신화, 믿음, 행동의 패턴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인간 모델은 경험-표현적 모델의 반대 방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감과 비현실감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현대 신학자에게 무엇이 믿을 만해 보이는지는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그들의 학문, 철학, 신학적 논거보다 그들의 사회적 배경과 지적 훈련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든 신화적 요소가 필수라는 점과, 종말론적 미래에서의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은혜’(gratia Christi)에 대한 원초적, 전언어적 경험이라는 신화만큼 신학적으로 일리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기독교 내부에서 비기독교인의 구원 가능성은 타당성(그만큼의 부당성 또한)을 가지고 주장될 수 있다.
IV. 종교와 진리에 대한 부록(excursus)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종교와 진리 주장의 관계이다. 일반적인 신자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종교가 상징적으로나 표현적으로 참일 뿐 아니라 범주적으로 참일 가능성을 허용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또한 명제적으로도 진리일 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문화-언어적 접근도 진리 주장을 인정할 수 있는가?
우선 정합적(coherence)인 성격을 가진 ‘체계 내적’(intrasystematic) 진리 진술과 실재와 상응(correspondence to reality)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 진리 진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인식론적 실재론자에 따르면, 실재는 일차 명제(first-order propositions)에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발화(發話, utterances)는 관련된 전체 맥락과 정합적일 때 ‘체계 내적으로 참’이다. 문화-언어적 관점에서 종교를 보면 이와 관련된 전체 맥락은 단지 여러 발언으로만이 아니라 서로 상관되는 삶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Christus est Dominus)를 외치는 십자군의 살인은 그 발화의 함의와 행동이 모순되기에 거짓이다. 인지-명제적 종교 이론은 종교 체계가 형식을 갖춰 구성된 일련의 명시적 진술보다 자연 언어에 더 가깝다는 사실, 그리고 이 언어를 알맞게 사용하면 특정한 행동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차이점이 고려된 다음에는 종교가 수학적 체계와 마찬가지로 전체적 정합성을 갖추려 한다는 점, 이에 따라 특정 발화가 체계 내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는 이 전체적 정합성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체계 내적 진리는 존재론적 진리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적으로 비일관적이지 않은 종교 내에서의 발화는 이러한 점에서 체계 내적으로 참일 수 있지만, 이는 결코 그 말의 존재론적 진리나 의미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교적 발화가 실재와 상응하기 위해서는 그 발화가 지니는 속성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분’,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분’에 상응하는 삶의 양식과 존재 방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기능을 할 때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비종교적인 발화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바울이나 루터와 같은 이는 진리를 단언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 진리에 관한 무언가를 하는 것, 즉 어떤 삶의 방식에 헌신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종교적 발화는 오직 수행적 사용(performatory use) 명제적 실효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수행적 사용을 통해서 종교적 발화가 명제적 실효성을 얻는다는 것은 인식론상 실재적인 방식 – 즉 정신이 신의 실재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언어적 설명은 같이 고전적인, 그리고 온건한 정도의 명제론은 배제할 필요가 없다. 대표적으로 대표적으로 아퀴나스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에서 인간의 의미 양태(modus significandi)는 신적인 존재 안에 어떤 것과도 상응하지 않지만, 의미된 것(significatum)은 상응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경우 “하나님의 선하심”의 내용은 우리가 절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어의 모순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바로 종교적 발화의 수행적 기능에 기대는 것이다.
이러한 고안을 위해, 린드벡은 “문장은 명제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종교적 문장은 오직 확정적인 상황에서만 일차적 또는 존재론적 참이나 거짓 값을 갖기에 충분할 만큼 지시적 구체성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문장의 신학적, 교리적 사용은 중요하지만 이는 명제적 사용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목적상, 이 문장은 개인과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하게 만드는 경배, 선포, 순종, 약속-경청, 약속-준수의 행위 속에서 사용될 때만, 존재론적 진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일차적 명제가 된다.
결론적으로 종교는 인지주의적 이론뿐만 아니라 문화-언어적 이론에서도 존재론적으로 참된 주장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화-언어적 접근에서는 인식론적 실재론과 진리대응론을 거부(또는 수용)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주의적 접근과 문화-언어적 접근에서 각각 명제가 발화될 수 있는 조건은 매우 다르다. 인지주의자에게 명제적인 것은 주로 전문적 신학과 교리인 반면, 언어-문화적 모델에서는 일상적 종교 언어가 기도, 찬양, 설교, 권면을 통해 삶을 형성하는 데 사용될 때 명제적 참·거짓이 드러난다. 오직 이러한 일상적 언어의 차원에서만 진리나 거짓이 언어적으로 드러나고 그것들이 궁극적 신비에 상응하는지 여부도 언어적으로 드러낸다. 반대로 전문적 신학과 공식 교리는 종교적 언어의 관한 이차적인 담론이다. 이차적 담론은 성공적으로 존재론적 의미를 담은 주장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러한 주장이 예전적, 선포적(kerygmatic), 윤리적 발화 및 행동 양식을 설명하고, 옹호하고, 분석하고, 규제하는 데 관여한다. 문법 자체는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에 대해 참이나 거짓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언어에 관한 주장만 하듯이, 신학과 교리는 이차적 활동인만큼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 참이나 거짓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이는 우리를 다음 장에서 다룰 중요한 문제, 즉 교회의 교리 문제로 이끈다. 교회 교리가 일차적 명제가 아니라면, 교회 교리는 무엇인가? 교회 교리는 교리의 영속성과 규범성을 인정하고, 또한 교회가 가르치는 역할의 무오류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비명제적으로 해석될(문화-언어적 관점은 그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수 있을까? 문화-언어적 접근의 에큐메니컬적 유용성은 대개 이 질문에 성공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번 장의 과제는 비신학적 입장에서 종교와 종교의 교리에 대한 문화-언어적 접근의 근거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만일 종교와 경험의 관계를 비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문화-언어적 접근이 전통적인 인지적 접근이나 경험-표현적 접근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문화-언어적 접근은 확실한 개념적 난점들을 피하고, 다른 접근보다 종교의 여러 측면을 더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2.1. 경험-표현적 모델
로너간과 같은 대부분의 경험-표현주의적 신학자들은 종교적 현상 전반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종교적 경험의 기본적 일치에 대한 핵심 확언을 뒷받침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에게는 종교적 경험의 근저에 있는 일치를 주장할 신학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그러나 비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다른 데서와 같이 그의 경험-표현적 이론에서 가장 문제 되는 요소다. 이 핵심 경험이 다양한 종교에 공통적이기 때문에 그 경험의 독특한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공통성에 관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텅 빈 주장이 된다.
2.2. 문화-언어적 대안
여기서는 종교를 신화나 이야기 속에서 구체화되고 장중한 의례 안에 구현된 포괄적 해석도식으로 본다. 이 해석 도식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구조화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종교적인 것은 아니며, 여기서 종교란 분명 “우주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식별하고 기술하기 위해, 그리고 이와 관련시켜서 행동과 믿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을 조직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종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신과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종교는 삶과 사고 전체를 형성하는 일종의 문화적 그리고/또는 언어적 틀이나 매개로 볼 수 있다. 종교는 칸트의 선험적인 것(a priori)처럼 기능한다. 비록 여기서 종교가 일련의 획득된 기술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종교는 신념 모음이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상징이 아니라, 실재를 기술하고 믿음을 진술할 수 있게 하며 내적 태도, 느낌,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어법(idiom)과 비슷하다. 종교는 문화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로 개인의 주관성이 나타난 것이기보다는 개인의 주관성을 형성하는 공동체적 현상이다.
종교와 경험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고 변증법적이다. ‘내적인’ 경험과 ‘외적인’ 종교적, 문화적 요소의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전자를 주도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언어적 모델은 내적 경험으로부터 종교의 외적 특징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경험을 파생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언어-문화적 모델은 인간 경험이 문화-언어적 형식에 의해 형성되고 주조되는 측면, 어떤 의미에서는 구성되는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의 일부이다. 종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주조하고 형성하는 외적 언어(verbum externum)이다. 내적 언어는 다양한 종교 안에 공통된 경험이 아니라 참된 종교, 즉 참된 외적 언어를 듣고 받아들이기 위한 능력이다.
문화-언어적 관점의 한 가지 장점은 다른 두 접근 방식의 독특하고 종종 서로 경쟁하는 강조점을 수용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는 의미 있는 문화적 성취들이 흘러나오는 경험적 기반에 형태와 강렬함을 부여하는 문화의 궁극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공식의 기본 이미지는 셸링과 헤겔의 관념론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 가깝다. 이 두 모델 모두 종교적 경험에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전자에서는 경험이 근원적이 고, 후자에서는 경험이 파생된 것이다.
언어적-문화적 접근에 따르면, 실존의 모든 차원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포괄적 도식 내지 이야기는 우리가 그 안에서 활동하는 매개이고, 자신의 삶을 영위할 때 사용하는 일련의 기량이다. 그 상징 어휘와 구문법에는 여러 목적이 있고, 실재에 대한 진술을 정형화 하는 것은 그 목적 중 하나일 뿐이다. 종교인이 되는 것은 – 문화나 언어에 능숙해지는 것 못지않게 – 실천과 훈련을 통해 일련의 기술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근원적 지식은 종교에 관한 것도,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도 아니라, 이러저러한 식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종교의 의례, 기도, 모본이 종교의 신념이나 행동 규범을 정형화한 진술보다 통상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언어-문화 모델에는 결과적으로 표현적 측면을 위한 여지도 있다. 종교의 미학적 차원과 비추론적인 상징적 차원 – 시, 음악, 미술, 의례 등 –을 통해서 종교의 기본 패턴이 내면화되고, 나타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종교가 일단 내면화된 다음 기능하는 방식은 인지주의적 측면보다 표현주의적 측면에서 더 잘 기술된다. 그리고 경험-표현적 모델에 못지 않게 문화-언어적 모델에도 경험 및 표현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두 모델은 경험의 본성 및 경험과 표현-전달의 관계를 서로 상당히 다르게 이해한다. 후자에서, 전달 및 표현 수단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으로, 일종의 유사-초월론적 선험관념이다. 어떤 경험을 갖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표현할 수단이 필요하며, 우리의 표현 체계와 언어 체계가 풍부할수록 우리의 경험은 더 미묘하고 다양할 수 있고, 더 섬세하게 구별될 수 있다. 언어에 내재된 분류 방식과 범주 유형은 일단 습득하면 우리의 감각에 밀려오는 그 자체로는 경험이 아닌 무질서한 혼란을 질서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일단 언어를 배우면, 언어는 의식적인 경험과 활동의 전경험적인 신체적 기초를 형성한다. 따라서 언어는 경험에 앞선 인간 실존과 행위의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경험은 언어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구조화된 인지적 활동의 부산물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경제적인 가설은 종교적 경험과 주어진 문화, 언어, 삶의 양식의 관계가 유사하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서적 경험은 항상 대상에 대한 사전 인식에 의존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모두 개념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감각 경험으로부터 해석된 것이다.
종교적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상화으이 변화와 문화-언어적 체계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종교적 해석 도식이 새로운 맥락에 적용되면서 변칙들을 낳기 때문에 변모되고, 폐기되고, 교체되는 것이다. 예언자적 인물의 경우, 그는 어떻게 물려받은 믿음, 실천, 의례의 패턴이 수정된 틀로 재생산되어야 하는지를(또한 어떻게 재생산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파악한다. 인과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논리적으로는 종교적 경험과 그에 대한 표현은 언어-문화적 모델에서 이,삼차적이다. 먼저 종교와 종교의 언어, 교리, 예전이라는 객관적인 현실과 행동 양식이 나오고, 그다음 이를 통해 감정들이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것으로 형성된다. 경험-표현적 전통이 대체로 종교의 특징으로 보는 거룩한 것 내지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감각은 공통의 특질이 아니라, 일종의 가족 유사성이다. 종교는 최소한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깊은 감정, 태도, 인식을 상이하게 형성하고 낳는 일련의 다채로운 문화-언어적 체계의 분류명으로, 적어도 그럴듯하게 이해될 수 있다. 요컨대, 대안적 모델은 종교를 가장 중요한 것 – 삶과 죽음, 옳고 그름, 혼돈과 질서, 의미와 무의미 같은 궁극적 문제들 – 을 다루는 어법으로 이해한다. 이는 종교가 그 고유의 이야기, 신화, 교리에서 다루는 문제들이다. 종교는 의례, 가르침,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의식적 마음뿐만 아니라 개인적, 문화적 잠재의식에 그들의 답을 각인시킨다.
2.3. 비교의 비결정성
우리는 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개념들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개념들은 무엇이 그 고유의 진리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적절한 증거인지에 관한 견해를 각각 형성한다. 문화-언어적 모델 이론가들은 두 가지 언어가 중첩되는 발음을 사용하거나 공통의 지시 대상을 갖는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두 언어가 비슷하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점은 문법 유형, 언급 방식, 의미론적 구조와 구문론적 구조이다. 모든 종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권한다는 정보보다, ‘사랑’과 ‘하나님’에 대해 특수하고 때로는 모순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 믿음, 의례, 행동의 독특한 유형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기껏해야 경험-표현적 입장이 증명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지, 그 입장이 거짓임을 입증하지는 않으며, 이는 최종적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쟁점이다. 경험-표현주의는 과학적 종교 연구에서는 열등한 이론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목적(예컨대, 신학적 목적)에서는 우월한 이론일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그러한지 여부가 다음 장에서 우리가 다룰 문제다.
1. 린드벡의 주장
대명제 : 그리스도교를 특정한 공동체의 삶과 실천에 뿌리내리고 그 공동체 고유의 법칙에 지배받는 문화-언어적 체계로 이해해야 한다
①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와 정체성에 헌신이 오히려 완전히 첨단을 달리는 것일 수 있다 / 자유주의 신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②근대 후기(late modern)의 혹은 탈근대적(postmodern) 세속 이성의 도구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명료화하고 변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③그러므로, 교회와 신학은 세속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고서도, 오히려 그들 고유의 주장으로서 세상과 만날 수 있다.
2. 이에 대한 반박
①린드벡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믿음에 대한 이성적인 정당화를 방해한다. 그가 규정하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성경에서 읽어낸 교회 고유의 교리들’이기에, 본유적으로 신앙주의(fideism)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나의 종교적 확신을 나의 신앙이라는 특수성 속에 가둘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이 자신의 믿음들에 대한 이성적 설명을 제시하기를 바란다면, 비그리스도교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의 주요 기준들에 의지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교리를 고수하는 것이 인식론적 고립을 가져온다.
②린드벡의 신학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거부함으로써 교회가 세계에서 고립되도록 조언하는 나쁜 의미에서의 ‘종파주의’이며, 아마도 무책임한 신학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이 책에서 교리에 대한 깊은 고민 –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 이 결여되어 있다는 혐의에 기인한다. 그의 이론은 과도하게 사회과학에 의존하여 지나치게 얄팍하게 교회를 이해하고 있다. 그가 신학의 교리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③린드벡은 탈근대적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경도되어 진리, 특히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가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3. 브루스 마샬의 대답
①왜 내가 당신과 이성적인 대화를 위하여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들이 무엇인가에 관한 합의에 이를 필요가 있는가? 서로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진리의 주요 기준들이 무엇인가에 관해 동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합의 – 우리가 같은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성적 확신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합의 - 면 충분하다. 만일 진리의 절대적 기준들을 공유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소한 의견 차이를 넘어서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 이 절대적 기준의 합의를 포기하는 것이 교리과 신학을 지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신학자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②린드벡의 관점은 직접적으로는 교회론적인 문제로, 이 때 교회는 넓은 의미의 교회가 아닌 ‘교회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대단히 좁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린드벡의 서술은 실제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다.
한편 사회과학적 접근은 확실히 린드벡의 독특한 입장이다. 전통에 대한 확신을 가진 신학자가 사회과학이나 분석철학을 서슴치 않고 다루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리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고 귀결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창조교리는, 그것이 아무리 잘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적 독특성’을 지닌다.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 또한 기독교의 창조교리에 동의할지는 미지수고, 이러한 신앙이 없는 이들은 특히나 더욱 거부할 것이다.
한편 창조교리 (다른 교리들도 포함하여)는 그리스도교인과 비그리스도교인이 불일치/반대라는 결론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의 일치를 기대할 만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린드벡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오히려 린드벡의 제안 - 자기 공동체의 주요 신념과 교리에서, 이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기 위한 타당한 근거와 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찾으라 - 을 따르는 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린드벡은 이를 위한 근거와 자원을 그리스도론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모든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기 때문이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대화하고 논쟁하고 설득할 만큼 충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자신들의 말을 들을 사람들을 세상에서 발견하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인지적으로 ‘세상을 흡수’하고 실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책무에 관한 명령은 이 책무의 교리적 고향이 그리스도론이든 창조든 간에 동일하게 엄중하다. 이 명령에 정확히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들에 의해 형성된 방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교회는 신앙이 합리적으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적 정체성이 교회의 역사적인 주요 교리들에 의해 형성된다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단순히 교회의 생명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해 우리의 육신과 죽음을 수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가 시종일관 구축되어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경우 세상에 대한 교회의 참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할수록 강화될 것이며, 교회가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잃을수록 약화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명감은 교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교리에 대한 교회의 헌신에 정비례하지 (반대자들이 추정하듯) 반비례하지 않는다. 문화적 동화를 사회학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후퇴하는 신학적 종파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③린드벡이 진리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는 지적은 주로 용어의 부적절함에 기인한다. 린드벡은 “범주적”(categorial) 진리, “체계 내적”(intrasystematic) 진리, 그리고 “존재론적”(ontological) 진리를 말한다. 비판가들은 린드벡이 첫 두 진리만을 선호한다고 의심해 왔지만, 그렇지 않다. 린드벡이 생각한 마지막 진리 개념은 실재에 상응함 내지 사물과 사유의 일치(adaequatio mentis ad rem)라는 전통적 진리 개념과 맞닿아 있다. 범주적 진리는 언어철학에서 ‘의미와 지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체계 내적 진리는 ‘보증(warrant)이나 정당화—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점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신념은 지지하고 다른 신념은 거부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린드벡에게 세 가지 다른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의미, 보증,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더라면 더 명확했을 것이다.
이상의 비판들은 특히 제3장 「여러 종교와 하나의 참된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데, 린드벡은 독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상대주의 및 여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의혹을 고려하여, 「종교 간 관계와 에큐메니즘: 『교리의 본성』 3장을 다시 돌아보며」에서 종교적 진리 주장의 “특수주의적 보편성”(particularistic universality)을 논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