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이

바하이교는 19세기 바하울라에 의해서 창시되었습니다. 모든 종교의 정신적 근원은 하나라는 종교의 단일성과, 모든 인류가 신 아래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인류의 단일성을 주장합니다.






19세기 중후반, 이란의 12개 시아파 무슬림 공동체에서 바하이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시라즈의 아시드 알리 무함마드 (훗날 바브 또는 "게이트"로 명명됨)는 하나님의 전령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추종자인 미르자 후사인 알리 (바하올라 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명명됨)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둘 다 박해받고 수감되었지만, 바하이의 기본적인 율법과 관습을 설명한 바하올라의 『지성서』를 포함해 많은 저술물을 남겼습니다.




바하이신앙은 19세기 중후반, 열두이맘파 시아 무슬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페르시아, 오늘날의 이란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라즈 출신 알리 모함마드[후에 ‘문(門)’을 의미하는 ‘바압’이란 존칭으로 불림]가 자신이 신의 사자(使者)라고 주장했고, 이어 그의 추종자인 미르자 호세인 알리[후에 ‘신의 영광’을 의미하는 ‘바하올라’라는 존칭으로 불림] 역시 신으로부터 신성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평생에 걸친 박해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모두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는 바하이신앙의 기본 가르침과 율법을 담고 있는 바하올라의 『지성서(至聖書)』(Kitab-i-Aqdas)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하이신앙은 오늘날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단히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활기찬 세계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맘[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가계의 계승자]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인물을 이슬람 공동체의 정신적 안내자이자 권위 있는 지도자로 인정합니다. 그들은 9세기에 사라진 열두 번째 이맘, 모함마드 알 마흐디가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최후의 날, 세상에 다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두이맘파에서 출현한 한 학파인 샤이키들은 12대 이맘이 정말 1844년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수립하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44년 이 학파의 지도자가 죽은 후, 많은 추종자는 그의 유언에 따라 ‘약속된 분’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44년 5월 23일 시라즈에서 세이예드 알리 모함마드[Siyid'Ali-Muhammad 1819-1850, 이름 앞에 붙은 ‘세이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가문 남성에게 붙여지는 존칭]라는 젊은이가 한 샤이키 지도자에게 그들이 찾고 있는 약속된 인물이 바로 자기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압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압은 아랍어로 "문"을 의미하며, 이 호칭은 본인이 12번째 이맘에게 이르는 문임을 암시합니다. 바압은 곧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맘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느님의 사자라고 주장했고, 조만간 출현할 자신보다 더 위대한 인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바압의 주위엔 즉시 18명의 추종자가 모였습니다. 그는 이들을 이란 전역으로 보내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들의 손엔 바압이 쓴 꾸란 주석이 들려 있었습니다. 바비운동은 도시지역 신학자들과 상인들, 그리고 여타 직업군의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는 시아파 성직자들과 페르시아 당국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바압을 체포, 이란 북서부 오지에 감금시켰습니다. 바압은 감옥에서도 계속해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가 저술한 『바얀』에는 자신의 새로운 종교를 위한 새로운 율법과 자신보다 더 위대한 또 다른 신성한 신의 사자(使者)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시아파 성직자들에게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결국 바압은 1850년 7월 9일,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추종자들에 대한 학살은 더욱 격렬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수천 명의 바비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초창기 개종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르자 호세인 알리(1817-1892)는 바비운동의 현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1848년 바비 지도자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아랍어로 “신의 영광”을 의미하는 바하올라라는 칭호를 얻었다. 1852년 한 그룹의 바비가 이란 국왕 암살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여파로 바하올라는 테헤란에 있는 한 지하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하올라는 처음으로 신의 계시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이리의 아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모든 영광의 산들바람이 나에게 불어왔고 나에게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1852년 12월 바하올라는 감옥에서 풀려나 국외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도시 바그다드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바하올라는 신학, 윤리학, 신비주의 등을 주제로 저술활동을 시작했고, 이란에 흩어져 있던 바비들을 재정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비들은 차츰 바하올라를 바압이 약속한 신성한 신의 사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하올라는 1863년 4월 소수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그 약속된 인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주장과 증가하는 위상으로 인해 바하올라는 또다시 추방되었습니다. 바그다드에서 이스탄불로, 이스탄불에서 다시 유럽에 있는 터키의 작은 도시 에디르네로 떠나야 했고, 결국 1868년 팔레스타인 아카로 이송되었습니다. 바하올라는 가족과 함께 그곳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만년엔 교외의 한 저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 2년을 제외하면 바하올라는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고 자유롭게 글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바하올라가 평생에 걸쳐 서한, 에세이 혹은 책의 형태로 남긴 저술은 18,000편이 넘습니다. 그 속에는 바하이신앙의 신학적 교리, 사회개혁 원리, 개인의 영적 발전을 위한 가르침 등이 담겨있습니다. 기도, 단식, 개인적인 행동규범, 바하이 행정의 기본 질서 등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핵심 경전인 『지성서』(至聖書)는 1874년에 완성되었다. 바하올라의 후기 저술은 사회개혁의 방향과 바하이문명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하올라는 신의 계시가 당신의 현시자들을 통해 내려온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현시자는 신의 화신(化身)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신의 속성과 의지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특별한 인물이며,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의 사명은 인류사회의 연속적인 영적 진화 단계와 궤를 같이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하이들은 바하올라의 사명이 크리슈나, 부처, 아브라함, 조로아스터, 모세, 예수 그리스도, 무함마드, 그리고 바압으로 이어진 역사적 계시 과정의 정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하올라는 189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뉴욕에서는 3만 명의 바하이들이 모인 가운데 100주년 추모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국적, 민족, 계급, 직업, 종교적 배경을 망라하는 5백만 명 이상의 바하이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19세기 후반, 많은 이란 바하이들이 박해를 피해 중동, 동유럽, 미국 등지로 이주했습니다. 바하이신앙이 미국에 처음 전파된 것은 미국으로 이민 온 바하이 교사들을 통해서였습니다. 바하이 지도부의 국제적인 노력으로 바하이공동체는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바하이신앙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널리 퍼진 종교 중 하나로, 200여 개국에 500만 명 이상의 바하이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인종적으로는 2,100개 이상의 상이한 인종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바압의 추종자들은 하나 둘 바하올라를 바압이 예언한 인물로 인정했고 1870년대에는 거의 모두 바하이가 되었습니다. 바하올라의 영향력으로 시아파 무슬림들의 개종도 증가했습니다. 1870년대와 1880년대부터는 이란계 유대인과 조로아스터교인도 상당한 수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바하이 교사들은 이집트, 수단, 팔레스타인, 터키, 인도를 방문하여 수니파 무슬림과 소수의 기독교인을 개종시켰습니다. 이란 바하이들은 박해를 피해 북쪽으로 피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큰 규모의 바하이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한 교사는 버마로 여행을 가서 현지 무슬림들과 불교도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그 결과로 생겨난 바하이공동체는 처음에는 느슨하게 조직되었지만, 점차적으로 바하올라의 글을 얻게 되어 그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켜 나아갔습니다.


바하올라의 여러 저술은 그의 장남 압바스 에펜디(1844-1921)가 그의 뒤를 이어 바하이 공동체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을 압돌바하, 즉 ‘바하올라의 시종’이라고 부른 압바스가 거의 모든 바하이들로부터 지도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압돌바하의 지도력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바하이신앙을 전파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또한 바하이공동체의 공고화와 공동체 생활의 강화를 우선시했습니다. 이란에서는 바하이학교가 문을 열었고 여성의 활동이 장려되었습니다. 압돌바하는 모든 바하이가 바하이 성일(聖日)을 준수하도록 격려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바하이 축제’를 장려하였습니다.


바하이신앙은 중동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브라힘 조지 케이랄라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레바논 출신의 아랍 기독교 신자로 1889년 이집트에 거주할 때 바하이가 되었습니다. 3년 후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케이랄라는 1892년 12월 뉴욕에 도착했고 1894년 봄에는 시카고에 정착해서 사람들에게 영성(靈性)을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그 해 말까지 5, 6명의 미국인이 바하이가 되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침례교 경력을 가진 뉴잉글랜드 출신 손턴 체이스였습니다. 그는 당시 47세였으며 한 생명보험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약간의 가톨릭 신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적어도 한 명의 유대인이 있었지만, 대다수 개종자는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의 백인 개신교도들이었습니다.


1898년 케이랄라는 한 그룹의 미국 바하이들을 데리고 팔레스타인으로 가 압돌바하를 만났습니다. 미국 바하이들은 케이랄라의 가르침과 바하이 경전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압돌바하는 미국인들에게 바하올라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4명의 페르시아인 바하이 교사를 미국으로 보냅니다. 1905년까지 6, 7권의 바하이경전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몇몇 도시에서는 바하이 공동체가 행정기구를 선출했습니다. 시카고에서는 바하이들이 1900년 바하이 출판회를 조직했습니다. 1903년에는 전국의 바하이들이 뜻을 모아 바하이 사원 건립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들은 1908년 사원 부지를 구입했고, 1909년엔 미국 최초의 바하이 전국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미국 최초의 국가적 바하이 조직인 바하이 사원 협회[the Bahá’í Temple Unity]가 설립되었습니다. 사원건립 프로젝트는 이후 50년 동안 미국 바하이공동체 활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912년엔 압돌바하가 직접 북아메리카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8개월 동안 점점 더 증가하는 개종자들에게 바하이신앙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 전역을 순회했습니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과 바하이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성장이 다소 둔화되기는 했지만, 1912년부터 1921년까지 바하이 신앙은 더 많은 미국 내 지역과 도시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압돌바하는 훗날 ‘신성한 계획’이라고 명명된 14통의 엽서를 통해 북미 바하이들에게 이 새로운 신앙을 전 세계에 전파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유훈록에서 바하올라가 정한 바하이 세계의 행정 질서를 위해 필수적인 제도와 조항에 대해 상세한 기술을 남겼습니다. 또한 이 문서를 통해 자신의 장손 쇼기 에펜디(Shoghi Effendi)와 (훗날 선출될) 세계정의원(Universal Justice House)을 후계자로 인정했습니다.


1921년 압돌바하가 사망했을 당시 쇼기 에펜디(1897-1957)는 아직 25살도 되지 않은 청년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쇼기 에펜디는 서둘러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으며, 자신이 바하이 신앙의 수장인 “하느님의 대업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재임 15년 동안, 쇼기 에펜디는 압돌바하의 유훈과 바하올라의 저술에 입각해 9명 이상의 바하이가 살고 있는 모든 지역에 선출직 행정기구인 지방성령회/정신회(Local Spiritual Assembly)를 설립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지역 수준에서 충분한 여건이 조성된 모든 국가 또는 지역에 국가성령회/정신회(National Spiritual Assembly)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또한 많은 바하올라의 저술을 영어로 번역했고, 많은 기본적인 바하이 가르침을 명확하게 정의(定義)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쇼기 에펜디는 신학적,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 미국인들이 보낸 많은 질문에 답해, 그러한 문제에 대한 바하이 입장을 더욱 명확히 했습니다.


보다 발전된 조직, 명확한 이해, 그리고 경전에 대한 접근성이 향상되면서 미국 바하이 공동체는 질적으로도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바하이 사원 건립을 위해 설립된 조직은 1925년 미국과 캐나다를 아우르는 국가성령회로 발전했습니다. 그 다음 해까지 미국에서는 40개의 지방성령회가 선출되었습니다. 미국 바하이 숫자는 1926년 1,500명에서 1936년 2,800명, 1944년 5,000명, 1963년 10,000명으로 증가해 왔습니다.


쇼기 에펜디가 바하이 신앙의 조직과 공고화에 힘을 쏟는 동안, 급부상한 파시즘과 스탈린주의가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바하이 공동체를 위협했습니다. 쇼기 에펜디는 바하이 신앙을 전 세계에 체계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일련의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최초의 7개년계획(1937-44)은 미국과 캐나다 바하이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영국 바하이들은 전쟁 발발로 공동체가 약화되었으므로, 그리고 이란 바하이들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 계획에서 거의 제외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미국의 모든 주와 캐나다의 모든 지방에서 적어도 하나의 지방성령회가 선출되고,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엔 적어도 한 명의 바하이가 정착을 하거나, 적어도 한 명의 원주민이 바하이로 개종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또 그 속에는 일리노이주 윌멧에 건립 중인 바하이 사원의 외부 공사를 완성하는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1944년에 성공적으로 완료됩니다. 제2차 7개년계획(1946-53) 속에는 캐나다 국가성령회의 설립, 그리고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 각각 하나의 국가성령회를 설립하는 목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서유럽 10개국에 바하이 신앙을 전파하고, 윌멧 바하이 사원의 내부 공사를 완성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계획인 10개년 십자군 계획(1953년-1963년)은 전 세계 모든 바하이들이 합심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시골 지역과 태평양 지역 전역에 바하이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쇼기 에펜디는 10개년 십자군 계획 기간 중인 1957년 갑자기 타계했습니다. 생전에 그는 27명의 바하이들을 ‘성업 선양자’로 임명했는데, 이는 존경과 신뢰의 표시이지 무슨 권한이 있는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국가성령회는 바하올라, 압돌바하, 쇼기 에펜디의 글에 언급된 세계정의원이 선출될 수 있을 때까지 성업 선양자들이 신앙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10개년 십자군 계획이 끝난 1963년 세계정의원이 선출되었고, 이후엔 이 기구가 쇼기 에펜디의 국제계획 수립 관행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서유럽에서 바하이 수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현재 이들 나라의 바하이 숫자는 1963년의 20배인 25만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에서의 성장은 주로 수천 명의 바하이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이 보여준 매력의 결과였습니다. 이 젊은이들 중 많은 수는 시골로 가서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바하이 신앙을 전파했고, 그 결과 수천 명의 소수민족이 바하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하이 공동체에 속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비율이 이 덕분에 약 10%에서 20%로 크게 높아졌고, 바하이 신앙은 50개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74년 미국 바하이 인구는 10년 전보다 6배가 많은 60,000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비록 성장률은 둔화되었지만 미국 바하이 공동체는 계속해서 증가해왔습니다. 2013년 기준, 신자 수는 약 171,000명입니다. 이 속에는 이민으로 증가한 숫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10,000명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서 바하이들이 조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는 이란에서 이슬람정권이 집권한 후 박해를 피해 망명한 1만에서 1만2000명에 달하는 이란 바하이들이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이루어진 바하이 공동체의 확장은 그를 통해 증가된 자원을 몇 가지 새로운 분야에 투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덕분에 바하이 공동체는 인종차별 철폐, 사회발전, 세계평화 증진 등의 주제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쥬니어유스(12-14세), 유스(15-20세), 성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웃과 마을을 변화시키는 역량을 키우도록 하는 일련의 핵심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사회에 점점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바하이의 증가는 또한 바하이 도서 시장의 확장시켰고, 이에 자극받은 작가들과 학자들이 보다 다양하고 심도 깊은 바하이 서적을 출판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바하이신앙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 영화, 동영상 혹은 “바하이 성가(聖歌)” 등 바하이공동체의 문화적 표현은 훨씬 더 정교해졌습니다. 언론의 관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은 지금, 바하이 신앙은 분명 더 이상 외래종교가 아니라 5, 6세대 구성원을 지닌 미국의 토착종교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현재 바하이의 숫자는 7백만 명이 넘습니다. 바하이신앙은 기독교 다음으로 많은 나라에 퍼진 종교전통으로, 200개 이상의 국가와 자치령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이 종교는 오늘날 공동체에 속한 2,100개 이상의 인종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다양하고도 가장 어린 독자적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바하이 신앙의 핵심 원칙은 신의 단일성, 종교의 단일성, 인류의 단일성입니다. 1912년 미국 방문 당시 압돌바하는 특히 미국에서 인종적 정의(racial justice)와 양성평등(gender equality)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하이들은 인종적 정의와 양성평등, 그리고 종교 간 대화와 협력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바하이 정책과 바하이 행정기구 임원의 선출에서도 공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1912년 어느 날 아침, 미국을 방문 중이던 압돌바하는 뉴햄프셔의 한적한 거리에서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행색은 초라하고 옷도 매우 남루한 노인으로, 누더기가 다 된 더러운 바지가 그의 다리를 간신히 덮고 있었습니다. 압돌바하는 그 남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에 있는 집 현관 뒤로 가서 자신의 바지를 하나 벗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지를 노인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시길.” 그런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행비서에게 하던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난해한 교리보다는 도덕적 행위와 실천에 중점을 둔 압돌바하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인류의 단일성이라는 바하이 원칙의 기초인 인간의 평등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바하올라의 가르침을 알리기 위해 압돌바하가 미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준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바하이들은 우리 인간의 삶의 목적이 신을 알아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며, 인류문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바하이 신앙의 핵심 가르침은 신의 단일성, 종교의 단일성, 인류의 단일성입니다. 바하이 신앙의 가르침은 이러한 단일성을 성취하고 세계평화를 수립하는데 장벽이 되어온 각종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바하이들은 모든 신앙의 신적 기원에 대한 확신 때문에, 종교간 대화와 이해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압돌바하가 1912년 미국인들에게 바하올라의 주요 가르침을 설명했을 때, 그는 많은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독자적 탐구, 과학과 종교의 본질적인 조화, 모든 종교의 뿌리는 같다는 점, 남성과 여성의 평등, 그리고 모든 종류의 편견을 없애고 인류의 일체성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 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보편적 의무교육의 중요성, 경제적 문제에 대한 정신적 해결책의 필요성, 세계공용어 채택의 이점, 그리고 보편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세계통치체제 구축의 당위성 등을 주장했습니다.


권위 있는 바하이 문헌들은 미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도전적인 문제로 인종차별을 꼽습니다. 미국 바하이공동체는 설립 이후 상당한 에너지를 인종차별과 싸우는데 쏟아 왔습니다. 1912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압돌바하는 백인 전용 호텔에서 묵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미국 유색인종 진흥협회(NAACP) 제4차 전국대회에서 평등을 주제로 연설했습니다. 압돌바하는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바하이인 루이 그레고리를 워싱턴 주류사회 엘리트들이 참석한 리셉션에 초대하고 자신의 오른쪽에 앉혔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에게 백인 바하이와 결혼하라고 권유했고, 그들의 결합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사랑을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루이와 루이자 그레고리의 결혼은 바하이공동체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인종 간 결혼이었으며, 바하이는 인종 간 결혼의 관행을 계속 장려하고 있습니다. 루이 그레고리는 바하이 행정기구인 지방성령회(워싱턴 DC, 1911년 선출)와 국가성령회(1912년 선출)에서 봉사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습니다. 압돌바하는 또한 백인 바하이들과 흑인 바하이들이 별도의 지역공동체를 설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바하이 지역공동체에서 미국인들이 인종적으로 통합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종 통합과 평등을 위한 미국 바하이공동체의 오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중 하나는 높은 수준의 인종 다양성으로, 바하이 공동체는 상당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페르시아인과 동남아시아 이민자,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하이들은 전국적으로 인종적 이해와 우호 증진을 위한 노력에 매우 적극적입니다.


양성평등 촉진은 바하이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 미국 바하이 공동체는 남녀의 비율이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나타난 여느 신흥종교가 그러하듯이, 바하이 공동체 초창기엔 3분의 2가 여성이었습니다. 20세기 초 가장 활동적인 바하이 연사(演士)와 교도자(敎道者)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습니다. 독일, 프랑스,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 하와이, 일본, 한국에 바하이를 전했거나 공동체를 설립한 사람들은 모두 미국 바하이 여성들이었습니다. 미국인 여성 바하이 마사 루트는 24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바하이신앙을 가르쳤습니다. 루트는 바하이 경전이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북아메리카 최초의 바하이 국가성령회 의원 9명 가운데 3명은 여성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 바하이 국가성령회에는 4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바하이 행정기구에서는 여성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미국 바하이공동체에서는 여성의 역할 향상이 여전히 최우선 과제입니다. 1990년대, 국가성령회는 양성평등 문제를 보다 더 부각시키기 위해 양성평등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바하이력은 태양력이며, 일 년은 한 달이 19일인 달 19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 달은 단식을 위한 달이고 9일은 성일(聖日)로, 성일은 모두 바압과 바하올라의 생애와 관련된 날입니다. 바하이는 다양한 길이의 3편의 필수 기도문 가운데 하나를 매일 낭송합니다. 이 외에도 특별한 날 낭송하는 특별기도문과 개인적인 기도문이 있는데, 망자를 위한 기도문 한 편을 제외한 모든 기도는 개인적으로 낭송합니다.




바하이력은 1844년, 바압의 사역이 시작된 해를 원년으로 삼습니다. 한 달이 19일이고 일 년이 19개월이면 총 일수는 361일로, 태양력의 길이 365일(윤년일 경우는 366일)에서 4, 5일이 남게 됩니다. 이 4일 혹은 5일은 윤일(閏日)이라 하여 18번째 달과 19번째 달 사이, 구체적으로 말하면 2월 26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바하이력 새해는 춘분[노루즈]인 3월 21일 시작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바하이력에는 9개의 성일(聖日)이 있으며, 대부분 바압과 바하올라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된 날들입니다. 바하이 성일에 해당하는 날 바하이들은 일을 쉬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바하이 하루와 마찬가지로 성일은 일몰에 시작, 다음 일몰에 끝납니다. 성일 축제는 일반적으로 다과가 뒤따르는 예배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성일 행사는 바하이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습니다.


고원(高遠)의달[Ala, Loftiness]이라고 명명된 바하이력 마지막 달은 3월 1일 일몰(日沒)과 함께 시작해서 3월 20일 일몰과 함께 끝납니다. 바하이는 이 한 달 동안 단식(斷食)을 합니다. 매일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은 물론 음료, 담배 등 일체의 것을 끊는 것입니다. 단 15세 미만 또는 70세 이상, 임신, 수유 또는 월경 중인 여성, 여행자, 병자, 중노동에 종사하는 사람 등은 단식에서 면제됩니다. 단식기간 중 바하이들은 식당이나 서로의 집에 모여 해가 뜨기 전에 기도하고 식사를 하거나, 해가 진 이후에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합니다. 


단식의 목적은 우리 인간이 창조주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인지를 상기하고, 잠시나마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체험을 하며, 굶주리고 있는 동료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 향상시키는 등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바하올라는 세 가지 필수기도를 계시했습니다. 바하이들은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 매일 낭송해야 하는 영적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장편 필수기도는 24시간 한번 언제든지 낭송하면 됩니다. 중편 필수기도는 새벽부터 정오 사이에 한 번, 정오부터 일몰 사이에 한 번, 일몰부터 자정 사이에 한 번, 이렇게 세 번 낭송해야 합니다. 단편 필수기도는 정오부터 일몰 사이에 한 번 낭송한다. 이들 필수기도는 항상 개인적으로 혼자 낭송합니다.


바압, 바하올라, 압돌바하 생존 시, 사람들은 그들에게 망자를 위한 기도, 치유를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위한 기도 등 각종 특별한 상황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하이 기도서에는 수백 편의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기도서는 가장 먼저 번역되는 바하이 경전들 중 하나입니다. 바하이들에겐 기도를 낭송하는 것이 일상적인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바하이 예배모임에서도 그 중심엔 기도가 있습니다. 바하이들은 개인적인 언어로도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공동체예배나 공공예배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하이 예배활동으로는 경전 낭독, 음악 공연, 19일 축제, 혹은 존경받는 공동체 구성원을 초청, 바하이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모임 등이 있습니다. 성직자가 없으므로 이러한 활동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공동체 구성원이면 누구나 주도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새로운 바하이 핵심활동으로는 성인 스터디 서클, 기도모임, 청소년 프로그램 등이 있습니다.




바하이 신앙에는 성직자가 없기 때문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누구나 예배를 계획하고 이끌 수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정확하고 경건하게 경전을 낭독하거나, 페르시아어나 아랍어 경전인 경우 운율을 넣어 낭송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바하이 기도에 운율을 넣어 노래하는 경우는 아직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성경, 코란, 그리고 다른 세계종교의 경전이 바하이 예배에서 가끔, 특히 바하이가 아닌 일반 대중이 초대가 되었을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바하올라와 바압, 그리고 압돌바하의 저술, 특히 기도가 프로그램의 중심입니다. 전체 신자가 경전 구절을 함께 낭송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대신 일반적으로는 한 사람이 읽거나 낭송하고, 다른 사람은 조용히 그를 경청합니다. 이러한 예배는 하느님의 말씀을 찬양하고 그에 대해 묵상하는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바하이 예배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음악입니다. 여기에는 기악 연주[단 모든 음악이 아카펠라인 바하이 사원은 제외], 녹음된 음악을 듣거나 함께 노래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음악 장르로서의 바하이 음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바하이를 주제로 하는 음악이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로 작곡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은 보통 바하이 경전으로부터 따온 구절을 포함합니다. 미국 최초의 바하이 찬송가는 1903년에 출판되었으며, 대부분 개신교 찬송가를 다소 수정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직후 바하이를 주제로 한 찬송가가 작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 음반, 만화영화 등 다른 형태의 대중문화가 출현하면서 바하이 노래도 더 다양한 장르로 작곡되었습다. 통기타는 바하이 음악에서 특히 중요한 악기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바하이 음악이 휴대용 악기가 편리한 집이나 임대공간에서 연주되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는 바하이 음악의 몇몇 고전 작품이 작곡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컨트리 음악과 재즈가 바하이 음악의 새로운 장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바하이 청소년들은 워크숍을 통해 랩과 힙합으로 바하이 주제를 다루는 음악이나 촌극을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은 1960년대 이후 바하이 음악의 중요한 장르가 되었으며, 1992년 바하이 세계대회에서는 합창단이 데뷔, 바하이 복음성가 음악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항상 예배를 위해 모인 사람들을 고양시키고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바하이 공동체에서는 매주 열리는 예배모임이 없는 대신 19일 축제로 알려진 정기적인 지역 모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매 바하이 달 첫 번째 저녁, 19일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축제는 예배, 행정, 사교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상적으로 바하이들에게만 개방됩니다.


예배 부분은 위에서 소개한 예배모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누구나 낭독하거나 낭송할 기도문이나 경전구절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축제 중 행정 부분에서, 바하이 공동체의 사업이 논의되고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이후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다과를 즐기고 대화를 나누는 사교적인 시간으로 축제가 마무리됩니다.


바하이 모임의 일반적인 유형은 사랑방 모임입니다. 쇼기 에펜디가 묘사한 “고전적인” 사랑방 모임은 바하이가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 우정 어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신앙이나 사회적 담론에 대한 논의 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방 모임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하이 신앙에 대해 배우려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와 토론이 그것입니다. 모든 바하이는 이러한 모임을 정기적으로 주최하도록 권장되고 있습니다. 때때로 바하이 공동체가 가정집이나 바하이 센터에서 보다 큰 규모의 공식적인 사랑방 모임을 개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임은 바하이신앙과 관련된 한 주제에 대한 설명(설명하는 사람이 꼭 바하이교도일 필요는 없습니다)으로 시작합니다. 이 프레젠테이션 뒤에는 질문과 토론, 그리고 다과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바하이 신앙에서는 진리에 대한 독자적인 탐구를 강조하기 때문에 질문과 토론은 사랑방 모임에서 중요합니다. 공식적인 사랑방 모임은 거의 항상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바하이가 되는 절차는 아주 단순합니다. 바하이 경전에 대한 이해를 확인하고 자신의 신앙을 선언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하이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는 15세부터 필수기도를 시작, 바하이공동체의 활동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길러집니다.




바하이가 되기 위한 공식적인 입문의식은 없습니다. 바하올라를 믿고 바하이가 되고 싶으면 온라인에서도 신자 카드에 서명, 바하이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바하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것은 당사자가 바하이 신앙의 기본 가르침을 이해하고 신자가 되고자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이루어집니다. 새 신자는 바하이 기도서나 바하이 경전을 선물받기도 하고, 비공식적인 축하행사가 마련되기도 합니다.

 

바하이들은 유아기부터 자녀들에게 바하이 기도를 외우도록 가르칩니다. 일단 아이가 3살 정도가 되면 바하이 어린이교실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아동에게 개방되어 있는 어린이 교실은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열린 마음, 사랑, 정직, 연민, 인내 등의 덕목을 가르칩니다. 함께 일하는 것이 강조될 수도 있고, 바하이 기도, 원칙, 역사 등을 배우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에 초점을 맞춘 주니어 유스(12~14세)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열립니다. 유스(15~20세)들은 요점 중심으로 개발된 일련의 루히 교재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루히 커리큘럼을 통해 참가자들은 어떻게 예배모임을 열고, 가정방문을 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수업을 조정하고, 바하이역사를 설명하고, 바하이신앙에 대한 질문에 답할 것인지 등을 배웁니다.

 

바하이가정 자녀들은 15세가 되면 필수기도와 단식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더 이른 나이에도, 특히 부분적 단식을 준수하고자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바하이 자녀들은 본인이 거부하지 않는 한 어느 시점부터는 자동적으로 바하이로 간주됩니다. 바하이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처벌은 없습니다. 그 결정은 진리에 대한 독립적인 탐구라는 바하이 원칙에 따라 자유롭게 내려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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