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아시아와 세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현대 불교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은 상좌부(Theravada)와 대승(Mahayana) 전통이며, 대승의 일부인 밀교(Vajrayana)가 제3의 물결로 인정됩니다.
기원전 5세기에 인도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좌를 포기하고 가족과 왕궁을 버리고 숲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고통, 질병, 늙음, 죽음과 같은 피할 수 없는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실한 구도와 깊은 명상을 통해 그는 큰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깨달은 자” 또는 “각성한 자”를 의미하는 경칭인 붓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붓다는 모든 생명의 고통을 이해하여 도덕적 삶, 명상, 실재의 자각을 통한 고통 극복의 가르침으로 일생동안 인도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습니다. 일부는 그를 따라 세속을 떠나서 비구와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반 신도로 남아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경하면서 수행 공동체를 지원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붓다에 대한 경외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헌신은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특정 민족이나 지역에 특별히 제한되지 않는 점에서 보편적인 종교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불교 전통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이 남아있습니다. 스리랑카,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한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전통과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의 대승 전통입니다. 대승불교의 하나로서 히말라야의 밀교 전통은 세 번째 주요 흐름으로 인식될 정도로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구분되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며 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해 온 역사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21세기 초반부터 모든 것이 혼재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젊은 싯다르타 왕자는 궁전 밖으로 나가 4가지 광경(노인, 병자, 시신, 수행자)을 만났습니다. 왕으로서의 삶을 떠나 숲에서 살기 시작한 그는 인간 고통의 근원을 발견하기 위해 명상과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궁의 사치와 숲에서의 극기 수행 모두를 거부하고 두 극단 사이의 “중도”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역사적 붓다의 생애에서 전설적인 상황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 중 하나는 기원 1세기에 아슈바고샤(Ashvaghosha)가 전한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는 오늘날의 네팔 히말라야 기슭에 위치한 룸비니에서 샤캬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출생일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부는 기원전 563년으로 하고 다른 일부는 기원전 480년으로 출생을 인정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예언자는 그가 위대한 왕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만약 왕자가 늙음, 병듦, 죽음, 수행의 “4가지 삶의 현실”을 보게 된다면 왕의 삶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왕은 아들이 위대한 통치자가 되기를 바랐으므로 이 네 가지 삶의 현실로부터 싯다르타 왕자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9세 나이에 싯다르타는 궁전의 안락함을 벗어나 처음으로 고통에 직면하였고, 이것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앞의 네 가지 광경을 보았습니다. 늙어서 쪼그라진 사람, 병든 사람, 시신, 유행하는 수행자입니다. 네 번째 광경의 유행하는 수행자는 싯다르타에게 인간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사치스러운 궁궐 생활을 버렸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들과 수행자들과 더불어 숲에서 공부하고 금욕적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가혹한 육체의 고행만으로는 고통에 대한 답이 되거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궁궐에서의 방종한 생활과 숲속의 금욕적 삶을 모두 거치면서 마침내 이 두 극단 사이의 균형인 “중도”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마을 소녀에게서 음식을 받아 육신의 힘을 회복하고 명상 수행을 통해 내면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싯다르타는 악마 마라를 물리쳤습니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욕망의 불길을 “끄는” 열반을 얻었습니다. 그 순간에 싯다르타는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으므로, “석가족의 성자”인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립니다.
전승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나무로 알려진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는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을 때까지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있기로 맹세했습니다. 밤새 앉아 있으면서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깊은 고요함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고요함 속에서 고통의 근원이 되는 욕심, 집착, 이기심의 순환을 더욱 깊고 명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악마 마라는 그를 유혹하면서 열정의 화살로 그를 공격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욕망, 두려움, 교만, 갈망이 그의 명확한 정신 집중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땅에 손을 얹으면서 자신의 확고한 결의를 증명하기 위해 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샛별이 떠올랐을 때 고타마 싯다르타는 붓다가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깨달은 자”입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과 고통의 원인을 깨우쳤습니다. 이러한 깨달은 상태는 고통의 근원인 자아 중심적 애착의 불을 말 그대로 “불어서 끄는” 것이라서 열반이라고도 합니다.
이 깨달음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석가족의 성자”인 석가모니 붓다라고 불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지고 널리 존경받는 아미타불(Amitabha (Amida) Buddha), 비로자나불(Vairochana Buddha), 약사여래(Bhaishajya-guru)가 있습니다. 붓다는 수천의 형태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불성”이 모든 존재의 참된 깨달은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붓다는 큰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고 그들도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합니다. 깨달은 후 붓다는 약 45년 동안 북부 인도 대륙의 도시와 마을에서 가르쳤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제자들에게 고통에 대한 가르침을 펼쳤으며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첫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이 가르침에는 중도(中道),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가 있습니다. 붓다가 드러낸 진리를 불법(佛法)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설법과 가르침은 우주의 참된 본질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법을 뜻합니다. 그는 바라나시 외곽의 사르나트로 불리는 사슴공원(녹야원)에서 첫 번째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이 첫 번째 설법은 고통 전반에 대한 설명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것을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부처는 흔히 먼저 질병을 진단한 다음 그 병을 고칠 약을 처방하는 의사로 묘사됩니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생은 괴로움을 수반한다.
붓다가 인간의 상태로 진단한 “질병”은 영어로 “고통” 또는 “불만족”을 뜻하는 두카(duhkha)라는 말입니다. 붓다는 세 가지 종류의 두카를 말했습니다. 첫째,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서 일상의 고통이 있습니다. 둘째, 변화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행복한 감정과 행복한 상태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삶 자체도 무상하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셋째, 어떠한 “나”도 홀로 있을 수 없다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조건 지어지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혼자서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고통이 발생합니다.
2. 괴로움은 욕망과 집착으로 생긴다.
붓다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고, 욕망하며, 집착하는 충동이 괴로움의 주요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무상하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붙잡으려 한다면 강물의 일부를 가두려고 하는 것처럼 큰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것은 불법으로 얻게된 기쁜 소식입니다. 에고 중심적인 욕망을 없애고 고통을 종식시켜 영원히 “만족하지 못한” 느낌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4. 그 길은 “팔정도(八正道)”이다.
이 자유를 발전시키려면 수행의 여정을 따르는 윤리적 행동, 생각, 명상 습관을 닦아야 합니다. 이 8가지 습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이해(正見) 건전하지 못한 행동과 생각에 결과가 따르듯이 건전한 행동과 생각에도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진실로 깊이 아는 것입니다.
올바른 의도(正思惟) 분노와 자기중심적인 습관과 자비, 이해, 사랑의 습관으로 행동이 형성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언행(正語) 말의 도덕적 의미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진정성입니다.
올바른 행동(正業) 모든 도덕의 기반인 오계(五戒)를 지켜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로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생계(正命) 기본 계율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올바른 노력(正念) 밭을 경작하는 관심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삶의 방식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마음챙김(正精進)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걷기 마음챙김, 신체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을 포함한 명상 수행에 대한 순간순간의 인식을 통해 “마음에 머물기”를 개발합니다.
올바른 집중(正定) 흩어지고 산만해진 정신과 마음을 중심의 초점으로 가져오고, 그 집중된 정신과 마음을 통해 명확하게 보는 능력을 개발합니다.
붓다는 엄격한 규율을 따르고 불교도에게 법을 가르치는 비구와 비구니 공동체로서 승가를 설립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승가에는 승려와 일반 신도 모두를 포함한다고 봅니다.
붓다를 따르던 사람들을 승가(Sangha), 즉 비구와 비구니 공동체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비구와 비구니가 된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는 수계식을 거행하는 것을 세속을 떠나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우기에만 수행원에 정착하고 그 외에는 집없이 유행하는 수행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승가는 붓다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처음에는 붓다의 제자 중에 여전히 집에서 거주하는 일반 신도들도 있었습니다.
수계한 사람과 일반 신도 모두 수도 생활의 근간이 되는 기본윤리로서 5계를 지켰습니다. 나중에는 수계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한 승가 계율인 구족계(Prtimoksha)로 발전했습니다.
수행 공동체와 신도 공동체는 상호 의존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도는 승려들로부터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면서 승려들에게 음식, 의복, 거처와 함께 물질적 필수품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신도들은 승려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하는 것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좋은 업보를 얻는 “공덕”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불교인들은 삼보(三寶, 불, 법, 승)에 “귀의”합니다. 하지만 삼보에 대한 해석은 불교 전통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불교 전통에서 “삼보(三寶 , 세 가지 보물)”는 불, 법, 승입니다. 불교의 세계 전체에서 불교도인은 모두 이 삼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인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깨닫는 삶의 중심이 되는 붓다,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를 따릅니다.
고대 팔리어에서 “귀의”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붓담 사라남 가챠미.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맘 사라남 가챠미. “나는 불법에 귀의합니다.”
상함 사라남 가챠미. "나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불, 법, 승은 계속해서 불교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지만, 모든 곳에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도는 붓다가 인간적인 안내자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정토 불교도는 무량광의 영원한 불로 여겨지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며 사후에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일본 선종에서는 붓다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욕망과 다르지 않게 고통을 초래한다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죽여라!”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불교가 아시아 전역에 퍼짐에 따라 상좌부(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장로의 방식”), 대승(동아시아에서는 “거대한 수레”)이 있고, 밀교(티벳에서는 “금강 수레”)라는 뚜렷한 사상과 실천의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밀교는 독특하고 생생한 대승불교의 형태로서 현재 상당히 많은 신도들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가 남쪽의 불교를 대체하고 헤프탈파 훈족이 북쪽 사찰을 침략하여 약탈하면서 6세기와 7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까지 터키인들의 반복적인 침략으로 불교는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불교는 아시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불교로 개종한 인도의 아쇼카 왕은 실론 섬(또는 스리랑카)에 전통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서기 5세기까지 불교는 현재의 미얀마와 태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13세기까지 초기 불교 학파인 상좌부 Theravada), 즉 “장로의 방식”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지배적인 전통이 되었습니다.
서기 1세기에 불교 승려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서기 7세기에 이르러 불교는 유교와 도교의 문화 및 사상과 교류하면서 중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무렵에는 한국에서도 불교 전통이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6세기에 불교 전통이 일본에 소개되어 신도(Shintō)와 같은 토착 전통의 환경에서 발전했습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발전하고 나중에 동아시아에서 번성한 이러한 형태의 불교를 대승 또는 “거대한 수레”라고 합니다.
8세기에 인도 북동부의 탄트라 전통에 의해 형성된 불교가 티베트의 높은 산악 고원으로 퍼졌습니다. 그곳에서 토착 종교와 동아시아에서 티벳으로 전해진 불교 형태가 상호 작용하여 “금강 수레"인 밀교(Vajrayana)라는 역동적 형태의 대승불교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흐름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특별히 존경하는 경전, 불교 생활과 수행에 적용하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에 의해 어느 정도 차별화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의 흐름을 특정 사상이나 지리 영역으로 너무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상좌부 학파는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주요 특징은 경전과 주석의 팔리어 정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를 숭배하며,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을 영적 모델로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장로들의 길”이라는 뜻의 Theravada(상좌부)는 오늘날 동남아시아와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종파입니다. 이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를 이어 내려온 가르침에 가장 충실한 학파라고 자부합니다. 미국에서 상좌부 불교는 유럽계 미국인들이 위빠사나 또는 “통찰 명상”을 수행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스리랑카, 태국, 캄보디아 및 기타 전통적인 전통 국가인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습니다. 상좌부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고대 팔리어로 쓰여진 경전과 주석으로 구성된 팔리어 경전은 역사적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정확한 출처로 간주됩니다. 다른 학파들이 경전에 대한 다양한 개정판을 내거나 경전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포함하는 반면에, 상좌부 전통에서는 팔리 경전이 결정적인 기준이라고 믿습니다.
2. 2,500년 전 인도에 살았던 영적 길잡이인 인간으로서 역사적 붓다를 강조합니다. 다른 불교 종파는 여러 붓다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거나 여러 붓다를 공경하지만, 상좌부에서는 석가모니 붓다를 중심으로 봅니다.
3. 상좌부 불교의 이상적인 영적 모델은 아라한(팔리어) 또는 아르하트(산스크리트)입니다. 아라한(Arahants)은 글자 그대로 “영예로운 자”를 의미하며, 열반을 성취하고 번뇌와 욕망이 소멸되도록 수행을 완성한 불교 수행자입니다.
기원 이후에 출현하여 동아시아에서 번성한 대승 전통은 경전과 수행 형식에 유연함을 허용하여 다른 불교의 흐름보다 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승 전통은 따르는 이들 모두가 모든 중생 구원에 헌신하는 보살이 되도록 권장합니다.
서기 200년경에 이르러 불교 전통의 새로운 흐름이 인도 불교 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흐름은 말 그대로 “거대한 수레”인 대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비구, 비구니, 신도의 활동은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1.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과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일반 신도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거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승이라는 단어는 수레 또는 뗏목을 의미하며, 고통의 강을 건너 “다른 언덕”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뗏목 또는 수레로 불교 가르침의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따라서 대승은 “거대한 수레”입니다.
2. 대승 전통은 초기에 작성된 많은 새로운 경전을 정통 가르침으로 간주하여 경전의 정통성에 대해 더 유연합니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정토경과 같이 많은 새로운 경전에서 모든 현상의 공함(shunyata), 자비의 중요성(karuna), 불성의 보편성과 같은 가르침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3. 대승 전통에서 이상적인 종교적 인물은 보살로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입니다. 보살은 전적으로 자비(karuna)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깊은 지혜(prajna)에 의해 알려집니다. 보살의 이상적 인간상은 수행처의 아라한(산스크리트어로 아르하트)의 이상적 인간상과 대조되는데, 일부 대승 학파는 자기 해방 지향적이어서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대승불교는 19세기에 이주한 중국인과 일본인 이민자들이 가져온 미국 최초의 주요 불교 흐름입니다. 오늘날 대승 전통의 두 가지 주요 특징인 선과 정토 불교에는 아시아계 미국인과 비아시아계 미국인 수행자가 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이민자들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자신들의 문화 방식으로 대승불교를 소개하며 꾸준히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주요 흐름인 금강승은 대승불교 전통에서 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탄트라 불교”라고도 불리며 만트라, 만다라, 무드라와 같은 독특한 의례적 수행과 도구들이 더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7세기 대승불교 내에서 중요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금강승(金剛乘, Vajrayana)라고 불리는 이 흐름은 티베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이아몬드 수레” 또는 “번개 수레”인 금강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빠른 방법을 뜻하며 대승불교의 난해한 형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티베트 전통은 대승불교 철학의 특징인 모든 조건화된 사물의 “공(空)”에 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상좌부 승려의 가르침과 명상 수행 모두를 구현하는 것으로 봅니다. 금강승은 탄트라 불교라고도 불리는데,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지혜와 자비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수행 체계로서 탄트라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금강승의 수행을 특징짓는 세 가지 용어는 각각 명확한 의례적 의미, 내적인 정신물리학적 의미, 비밀의 초월적 의미가 있습니다.
만트라 - 부처나 보살의 신성한 힘과 우주 에너지를 담고 있는 노래이거나 명상을 위한 음절 또는 구. 만트라는 말 그대로 자신 안에 있는 이러한 신성한 에너지를 불러내어 부정적인 정신 상태로부터 “마음을 보호”합니다.
만다라 - 2차원 또는 3차원 형태로 부처와 보살의 다양한 영역과 우주 에너지를 나타내는 의식 또는 내면의 시각화를 위한 “원” 혹은 우주 다이어그램입니다.
무드라 - 손이나 몸의 위치로 만든 “상징” 또는 “의례적 몸짓”으로 금강승 의식으로 다양한 붓다와 보살의 특성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100,000명 이상의 티베트 금강승 불교도들이 인도와 전 세계에서 난민이 되었습니다. 현재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티베트 승려의 4대 혈통 중 하나이며 북인도에서 망명 중인 티베트 정부를 이끌고 있습니다. 라마(lamas), 툴쿠스(tulkus), 린포체(rinpoches)라고 불리는 다른 티베트 지도자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대부분 유럽계 미국인 추종자들을 이끌어냈습니다. 1990년대에만 상당수의 티베트 신도들이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은 이제 수백 년 된 금강승 전통과 미국의 수십 년 된 금강승 수행이 만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아시아와 세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현대 불교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은 상좌부(Theravada)와 대승(Mahayana) 전통이며, 대승의 일부인 밀교(Vajrayana)가 제3의 물결로 인정됩니다.
기원전 5세기에 인도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좌를 포기하고 가족과 왕궁을 버리고 숲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고통, 질병, 늙음, 죽음과 같은 피할 수 없는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실한 구도와 깊은 명상을 통해 그는 큰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깨달은 자” 또는 “각성한 자”를 의미하는 경칭인 붓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붓다는 모든 생명의 고통을 이해하여 도덕적 삶, 명상, 실재의 자각을 통한 고통 극복의 가르침으로 일생동안 인도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습니다. 일부는 그를 따라 세속을 떠나서 비구와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반 신도로 남아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경하면서 수행 공동체를 지원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붓다에 대한 경외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헌신은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특정 민족이나 지역에 특별히 제한되지 않는 점에서 보편적인 종교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불교 전통의 두 가지 주요 흐름이 남아있습니다. 스리랑카,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한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전통과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의 대승 전통입니다. 대승불교의 하나로서 히말라야의 밀교 전통은 세 번째 주요 흐름으로 인식될 정도로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구분되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며 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해 온 역사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21세기 초반부터 모든 것이 혼재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젊은 싯다르타 왕자는 궁전 밖으로 나가 4가지 광경(노인, 병자, 시신, 수행자)을 만났습니다. 왕으로서의 삶을 떠나 숲에서 살기 시작한 그는 인간 고통의 근원을 발견하기 위해 명상과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궁의 사치와 숲에서의 극기 수행 모두를 거부하고 두 극단 사이의 “중도”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역사적 붓다의 생애에서 전설적인 상황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 중 하나는 기원 1세기에 아슈바고샤(Ashvaghosha)가 전한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는 오늘날의 네팔 히말라야 기슭에 위치한 룸비니에서 샤캬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출생일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부는 기원전 563년으로 하고 다른 일부는 기원전 480년으로 출생을 인정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예언자는 그가 위대한 왕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만약 왕자가 늙음, 병듦, 죽음, 수행의 “4가지 삶의 현실”을 보게 된다면 왕의 삶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왕은 아들이 위대한 통치자가 되기를 바랐으므로 이 네 가지 삶의 현실로부터 싯다르타 왕자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9세 나이에 싯다르타는 궁전의 안락함을 벗어나 처음으로 고통에 직면하였고, 이것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앞의 네 가지 광경을 보았습니다. 늙어서 쪼그라진 사람, 병든 사람, 시신, 유행하는 수행자입니다. 네 번째 광경의 유행하는 수행자는 싯다르타에게 인간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사치스러운 궁궐 생활을 버렸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들과 수행자들과 더불어 숲에서 공부하고 금욕적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가혹한 육체의 고행만으로는 고통에 대한 답이 되거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궁궐에서의 방종한 생활과 숲속의 금욕적 삶을 모두 거치면서 마침내 이 두 극단 사이의 균형인 “중도”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마을 소녀에게서 음식을 받아 육신의 힘을 회복하고 명상 수행을 통해 내면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싯다르타는 악마 마라를 물리쳤습니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욕망의 불길을 “끄는” 열반을 얻었습니다. 그 순간에 싯다르타는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으므로, “석가족의 성자”인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립니다.
전승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나무로 알려진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는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을 때까지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있기로 맹세했습니다. 밤새 앉아 있으면서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깊은 고요함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고요함 속에서 고통의 근원이 되는 욕심, 집착, 이기심의 순환을 더욱 깊고 명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악마 마라는 그를 유혹하면서 열정의 화살로 그를 공격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욕망, 두려움, 교만, 갈망이 그의 명확한 정신 집중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땅에 손을 얹으면서 자신의 확고한 결의를 증명하기 위해 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샛별이 떠올랐을 때 고타마 싯다르타는 붓다가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깨달은 자”입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과 고통의 원인을 깨우쳤습니다. 이러한 깨달은 상태는 고통의 근원인 자아 중심적 애착의 불을 말 그대로 “불어서 끄는” 것이라서 열반이라고도 합니다.
이 깨달음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석가족의 성자”인 석가모니 붓다라고 불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지고 널리 존경받는 아미타불(Amitabha (Amida) Buddha), 비로자나불(Vairochana Buddha), 약사여래(Bhaishajya-guru)가 있습니다. 붓다는 수천의 형태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불성”이 모든 존재의 참된 깨달은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붓다는 큰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고 그들도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합니다. 깨달은 후 붓다는 약 45년 동안 북부 인도 대륙의 도시와 마을에서 가르쳤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제자들에게 고통에 대한 가르침을 펼쳤으며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첫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이 가르침에는 중도(中道),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가 있습니다. 붓다가 드러낸 진리를 불법(佛法)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설법과 가르침은 우주의 참된 본질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법을 뜻합니다. 그는 바라나시 외곽의 사르나트로 불리는 사슴공원(녹야원)에서 첫 번째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이 첫 번째 설법은 고통 전반에 대한 설명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것을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부처는 흔히 먼저 질병을 진단한 다음 그 병을 고칠 약을 처방하는 의사로 묘사됩니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생은 괴로움을 수반한다.
붓다가 인간의 상태로 진단한 “질병”은 영어로 “고통” 또는 “불만족”을 뜻하는 두카(duhkha)라는 말입니다. 붓다는 세 가지 종류의 두카를 말했습니다. 첫째,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서 일상의 고통이 있습니다. 둘째, 변화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행복한 감정과 행복한 상태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삶 자체도 무상하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셋째, 어떠한 “나”도 홀로 있을 수 없다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조건 지어지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혼자서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고통이 발생합니다.
2. 괴로움은 욕망과 집착으로 생긴다.
붓다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고, 욕망하며, 집착하는 충동이 괴로움의 주요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무상하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붙잡으려 한다면 강물의 일부를 가두려고 하는 것처럼 큰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것은 불법으로 얻게된 기쁜 소식입니다. 에고 중심적인 욕망을 없애고 고통을 종식시켜 영원히 “만족하지 못한” 느낌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4. 그 길은 “팔정도(八正道)”이다.
이 자유를 발전시키려면 수행의 여정을 따르는 윤리적 행동, 생각, 명상 습관을 닦아야 합니다. 이 8가지 습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이해(正見)
건전하지 못한 행동과 생각에 결과가 따르듯이 건전한 행동과 생각에도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진실로 깊이 아는 것입니다.
올바른 의도(正思惟)
분노와 자기중심적인 습관과 자비, 이해, 사랑의 습관으로 행동이 형성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언행(正語)
말의 도덕적 의미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진정성입니다.
올바른 행동(正業)
모든 도덕의 기반인 오계(五戒)를 지켜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로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생계(正命)
기본 계율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올바른 노력(正念)
밭을 경작하는 관심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삶의 방식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마음챙김(正精進)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걷기 마음챙김, 신체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을 포함한 명상 수행에 대한 순간순간의 인식을 통해 “마음에 머물기”를 개발합니다.
올바른 집중(正定)
흩어지고 산만해진 정신과 마음을 중심의 초점으로 가져오고, 그 집중된 정신과 마음을 통해 명확하게 보는 능력을 개발합니다.
붓다는 엄격한 규율을 따르고 불교도에게 법을 가르치는 비구와 비구니 공동체로서 승가를 설립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승가에는 승려와 일반 신도 모두를 포함한다고 봅니다.
붓다를 따르던 사람들을 승가(Sangha), 즉 비구와 비구니 공동체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비구와 비구니가 된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는 수계식을 거행하는 것을 세속을 떠나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우기에만 수행원에 정착하고 그 외에는 집없이 유행하는 수행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승가는 붓다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처음에는 붓다의 제자 중에 여전히 집에서 거주하는 일반 신도들도 있었습니다.
수계한 사람과 일반 신도 모두 수도 생활의 근간이 되는 기본윤리로서 5계를 지켰습니다. 나중에는 수계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한 승가 계율인 구족계(Prtimoksha)로 발전했습니다.
수행 공동체와 신도 공동체는 상호 의존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도는 승려들로부터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면서 승려들에게 음식, 의복, 거처와 함께 물질적 필수품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신도들은 승려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하는 것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좋은 업보를 얻는 “공덕”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불교인들은 삼보(三寶, 불, 법, 승)에 “귀의”합니다. 하지만 삼보에 대한 해석은 불교 전통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불교 전통에서 “삼보(三寶 , 세 가지 보물)”는 불, 법, 승입니다. 불교의 세계 전체에서 불교도인은 모두 이 삼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인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깨닫는 삶의 중심이 되는 붓다,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를 따릅니다.
고대 팔리어에서 “귀의”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붓담 사라남 가챠미.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맘 사라남 가챠미. “나는 불법에 귀의합니다.”
상함 사라남 가챠미. "나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불, 법, 승은 계속해서 불교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지만, 모든 곳에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도는 붓다가 인간적인 안내자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정토 불교도는 무량광의 영원한 불로 여겨지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며 사후에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일본 선종에서는 붓다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욕망과 다르지 않게 고통을 초래한다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죽여라!”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불교가 아시아 전역에 퍼짐에 따라 상좌부(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장로의 방식”), 대승(동아시아에서는 “거대한 수레”)이 있고, 밀교(티벳에서는 “금강 수레”)라는 뚜렷한 사상과 실천의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밀교는 독특하고 생생한 대승불교의 형태로서 현재 상당히 많은 신도들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가 남쪽의 불교를 대체하고 헤프탈파 훈족이 북쪽 사찰을 침략하여 약탈하면서 6세기와 7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까지 터키인들의 반복적인 침략으로 불교는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불교는 아시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불교로 개종한 인도의 아쇼카 왕은 실론 섬(또는 스리랑카)에 전통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서기 5세기까지 불교는 현재의 미얀마와 태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13세기까지 초기 불교 학파인 상좌부 Theravada), 즉 “장로의 방식”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지배적인 전통이 되었습니다.
서기 1세기에 불교 승려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서기 7세기에 이르러 불교는 유교와 도교의 문화 및 사상과 교류하면서 중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무렵에는 한국에서도 불교 전통이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6세기에 불교 전통이 일본에 소개되어 신도(Shintō)와 같은 토착 전통의 환경에서 발전했습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발전하고 나중에 동아시아에서 번성한 이러한 형태의 불교를 대승 또는 “거대한 수레”라고 합니다.
8세기에 인도 북동부의 탄트라 전통에 의해 형성된 불교가 티베트의 높은 산악 고원으로 퍼졌습니다. 그곳에서 토착 종교와 동아시아에서 티벳으로 전해진 불교 형태가 상호 작용하여 “금강 수레"인 밀교(Vajrayana)라는 역동적 형태의 대승불교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흐름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특별히 존경하는 경전, 불교 생활과 수행에 적용하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에 의해 어느 정도 차별화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의 흐름을 특정 사상이나 지리 영역으로 너무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상좌부 학파는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주요 특징은 경전과 주석의 팔리어 정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를 숭배하며,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을 영적 모델로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장로들의 길”이라는 뜻의 Theravada(상좌부)는 오늘날 동남아시아와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종파입니다. 이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를 이어 내려온 가르침에 가장 충실한 학파라고 자부합니다. 미국에서 상좌부 불교는 유럽계 미국인들이 위빠사나 또는 “통찰 명상”을 수행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스리랑카, 태국, 캄보디아 및 기타 전통적인 전통 국가인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습니다. 상좌부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고대 팔리어로 쓰여진 경전과 주석으로 구성된 팔리어 경전은 역사적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정확한 출처로 간주됩니다. 다른 학파들이 경전에 대한 다양한 개정판을 내거나 경전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포함하는 반면에, 상좌부 전통에서는 팔리 경전이 결정적인 기준이라고 믿습니다.
2. 2,500년 전 인도에 살았던 영적 길잡이인 인간으로서 역사적 붓다를 강조합니다. 다른 불교 종파는 여러 붓다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거나 여러 붓다를 공경하지만, 상좌부에서는 석가모니 붓다를 중심으로 봅니다.
3. 상좌부 불교의 이상적인 영적 모델은 아라한(팔리어) 또는 아르하트(산스크리트)입니다. 아라한(Arahants)은 글자 그대로 “영예로운 자”를 의미하며, 열반을 성취하고 번뇌와 욕망이 소멸되도록 수행을 완성한 불교 수행자입니다.
기원 이후에 출현하여 동아시아에서 번성한 대승 전통은 경전과 수행 형식에 유연함을 허용하여 다른 불교의 흐름보다 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승 전통은 따르는 이들 모두가 모든 중생 구원에 헌신하는 보살이 되도록 권장합니다.
서기 200년경에 이르러 불교 전통의 새로운 흐름이 인도 불교 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흐름은 말 그대로 “거대한 수레”인 대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비구, 비구니, 신도의 활동은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1.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과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일반 신도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거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승이라는 단어는 수레 또는 뗏목을 의미하며, 고통의 강을 건너 “다른 언덕”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뗏목 또는 수레로 불교 가르침의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따라서 대승은 “거대한 수레”입니다.
2. 대승 전통은 초기에 작성된 많은 새로운 경전을 정통 가르침으로 간주하여 경전의 정통성에 대해 더 유연합니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정토경과 같이 많은 새로운 경전에서 모든 현상의 공함(shunyata), 자비의 중요성(karuna), 불성의 보편성과 같은 가르침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3. 대승 전통에서 이상적인 종교적 인물은 보살로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입니다. 보살은 전적으로 자비(karuna)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깊은 지혜(prajna)에 의해 알려집니다. 보살의 이상적 인간상은 수행처의 아라한(산스크리트어로 아르하트)의 이상적 인간상과 대조되는데, 일부 대승 학파는 자기 해방 지향적이어서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대승불교는 19세기에 이주한 중국인과 일본인 이민자들이 가져온 미국 최초의 주요 불교 흐름입니다. 오늘날 대승 전통의 두 가지 주요 특징인 선과 정토 불교에는 아시아계 미국인과 비아시아계 미국인 수행자가 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이민자들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자신들의 문화 방식으로 대승불교를 소개하며 꾸준히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주요 흐름인 금강승은 대승불교 전통에서 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탄트라 불교”라고도 불리며 만트라, 만다라, 무드라와 같은 독특한 의례적 수행과 도구들이 더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7세기 대승불교 내에서 중요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금강승(金剛乘, Vajrayana)라고 불리는 이 흐름은 티베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이아몬드 수레” 또는 “번개 수레”인 금강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빠른 방법을 뜻하며 대승불교의 난해한 형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티베트 전통은 대승불교 철학의 특징인 모든 조건화된 사물의 “공(空)”에 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상좌부 승려의 가르침과 명상 수행 모두를 구현하는 것으로 봅니다. 금강승은 탄트라 불교라고도 불리는데,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지혜와 자비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수행 체계로서 탄트라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금강승의 수행을 특징짓는 세 가지 용어는 각각 명확한 의례적 의미, 내적인 정신물리학적 의미, 비밀의 초월적 의미가 있습니다.
만트라 - 부처나 보살의 신성한 힘과 우주 에너지를 담고 있는 노래이거나 명상을 위한 음절 또는 구. 만트라는 말 그대로 자신 안에 있는 이러한 신성한 에너지를 불러내어 부정적인 정신 상태로부터 “마음을 보호”합니다.
만다라 - 2차원 또는 3차원 형태로 부처와 보살의 다양한 영역과 우주 에너지를 나타내는 의식 또는 내면의 시각화를 위한 “원” 혹은 우주 다이어그램입니다.
무드라 - 손이나 몸의 위치로 만든 “상징” 또는 “의례적 몸짓”으로 금강승 의식으로 다양한 붓다와 보살의 특성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100,000명 이상의 티베트 금강승 불교도들이 인도와 전 세계에서 난민이 되었습니다. 현재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티베트 승려의 4대 혈통 중 하나이며 북인도에서 망명 중인 티베트 정부를 이끌고 있습니다. 라마(lamas), 툴쿠스(tulkus), 린포체(rinpoches)라고 불리는 다른 티베트 지도자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대부분 유럽계 미국인 추종자들을 이끌어냈습니다. 1990년대에만 상당수의 티베트 신도들이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은 이제 수백 년 된 금강승 전통과 미국의 수십 년 된 금강승 수행이 만나는 곳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