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그리스도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 주요 교파인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의 종교들 중 가장 많은 신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계종교로서, 세계 모든 대륙에서 흐르는 여러 지류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앙의 강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지류의 공통된 근원은 하나, 곧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 부르는 예수는 2천여 년 전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살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나타나 활동했던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예수는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고(‘회심’, metanoia),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의 공적 활동 기간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로마 제국에 반역했다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30대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는 글을 남기지 않았고, 그가 죽은 지 수십 년 동안 그에 대해 글을 남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지중해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린 것은 현재의 터키 지역 안디옥에서였습니다. 서기 첫 3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 해안에 이르는 그리스-로마지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5세기부터 7세기에는 북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이 시기 시리아 그리스도인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동아시아로도 전파되었습니다. 10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천년기 후반, 유럽 식민세력의 세계 정복은 그리스도교의 전 지구적 확산을 가속화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는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세 주요 전통이 있으며, 각 전통은 내부적으로 다원성을 보입니다. 세계 전역으로 널리 퍼져 성장한 영국성공회와 오순절교회를 그리스도교 내의 또 다른 독자적 전통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범주조차도 수 세기에 걸쳐 생겨났고 오늘날에도 계속 생겨나고 있는 수 많은 교회와 교단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는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지역 문화와 통합되었다. 다양성은 그리스도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말, 세계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사는 곳은 지구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바뀌었습니다. 21세기에도 그리스도교는 계속 성장하고 있어, 아프리카에서는 독립교회를 포함해 그리스도교 교회가 급증했습니다. 남미에서는 오순절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4세기 동안 지배적 위치에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유럽과 북미에서도 지배적인 종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지구상 어느 다른 종교 전통보다 더 많은 신도를 갖고 있습니다. 전체 지구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삶에 대한 네 가지 복음서가 있습니다. 이 복음서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수행의 기초로서 예수의 탄생, 세례, 혁명적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며 예수를 메시아로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고 전하고 있는 예수의 이야기는 〈신약〉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성서에 나옵니다. 신약성서의 첫 네 권의 책인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는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euangel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 이후 두 세대 정도 지난 서기 약 70년에서 10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전한 예수의 이야기를 기초로 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세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 비유, 사건 등에 관한 ‘공통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공관(共觀, Synoptic) 복음서’로 불립니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를 참조하고 해석을 더해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특한 문체로 쓰여진 요한 복음서는 우주적 세계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습니다. 복음서는 아직 유대교 전통 내에서 정체성을 고심하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로부터 유래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 내부에서 있었던 논쟁을 의식하며 기록되었음을 보여주고,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이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났던 흔적을 보입니다. 복음서마다 예수의 삶과 활동에 대한 설명이 다르고, 때로는 상당히 차이도 보여주지만, 초대교회는 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합치지 않고 차이를 유지한 채 네 복음서를 모두 보존해 왔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루가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다윗 왕의 혈통으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습니다. 두 복음서는 일상적인 이야기와 기적적인 이야기를 섞어 놓았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을 때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나사렛 출신 목수였습니다. 루가의 이야기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친숙합니다. 이 부부는 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방을 구할 수 없어 마구간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예수는 그날 밤 태어나 건초로 가득 채운 구유에 뉘여졌습니다.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은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서둘러 갓난아기를 보러 갔습니다.
마태오는 마구간이나 목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대신 아기 예수를 축복하기 위해 동방에서 별빛을 따라 예물을 가지고 온 동방박사들 또는 점성술사들이 등장합니다. 마르코와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세례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 복음서는 태초의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루가 복음서만 예수가 열두 살 때 그의 부모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하고 있는 예수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중요하게 다룬다. 복음서는 예수의 나이를 특정하고 있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공적 활동을 하던 때 예수의 나이는 서른 살 정도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요한 복음서의 중심 메시지는 근본적 회개와 변화에 관한 것이다. 당시는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기대의 시대였다. 새 시대,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오래 전부터 약속된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기다리는 유대교 운동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새 시대를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 요단강에서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그가 세례를 준 사람 중에는 나사렛 예수가 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세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내려와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의 세례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는 그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예수는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했는데, 그중에는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떠난 어부들도 있었고, 예수의 사역 기간 내내 계속 언급되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군중이 모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자비, 용서, 사랑, 정의를 나타내는 메시지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 들려 고통받는 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예수가 행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놀라운 비유로 사람들을 깨우치는 훌륭한 교사로 묘사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은 채로 길가에 버려졌을 때,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도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이방인 또는 외부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은 민족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우쳐 줍니다.
예수는 당시 죄인으로 배제되던 세리, 간통자, 성매매 여성, 병자와 어울리면서 사회적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그 일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따지기 전에 먼저 그들 자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라고 경고했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죄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므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판단하지 말고 다만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세의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위한 정의로운 통치와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첫 번째로 들어갈 사람들은 엘리트나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배제된 사람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제자들과 군중은 예수를 그들이 오래 기다려온 하느님 나라를 도래하게 할 메시아, 곧 구세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Christos; Christ)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 사건은 예수의 신성과 이 세상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예수가 유대 땅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모습은 로마인 통치자들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 불안을 유발하고 반란을 계획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적 권위와 가르침에도 도전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경계했습니다. 예수는 위선을 비판했고 새로운 예언자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반대자들은 예수를 신흥종파를 만들려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는 정치·종교 당국이 자신에게 씌운 혐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이 공격받고 박해받을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약 3년간의 가르침 사역을 마친 후, 예수는 유대인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했고, 그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예수는 제자 중 하나인 유다에게 배반당했고, 그가 데려온 성전 세력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유대인 대제사장은 예수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신성모독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로마 당국에 끌려간 예수는 선동죄로 기소되어 로마식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때는 금요일이었고, 예수의 매장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일요일 아침, 예수를 따랐던 몇몇 여성이 예수의 시신을 염하고 제대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해보니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들에 따르면, 눈부신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여성들에게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동산지기처럼 보이는 남자가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설명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복음서는 그 후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그의 현존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몇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는 얼마간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인류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의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따르면 ‘그리스도 사건’은 그가 살았던 1세기의 맥락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1세기의 사건이기도 하며, 그 사건을 자기 신앙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삶에서 매일 반복되고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비유대인) 전도로 과감히 방향을 전환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후 50일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성령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신약성서는 불의 혀 같은 성령이 그들 머리 위에 임하고, 예수의 복음을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 그 사건으로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던 제자들(disciples)은 사도들(apostles)로 변화시키는 권능을 얻었고, 그들의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각지로 떠났습니다. (그리스어로 Apostolos는 ‘사자’使者를 의미). 이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날은 ‘오순절’(Pentecost)로 알려졌고 ‘교회의 탄생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의 저자가 1세기 말에 쓴 사도행전은 오순절 사건을 시작으로 초대교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또한 사울이라는 유대인 천막 제작자의 회심은 초대교회의 확장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울은 원래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사람인데,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빛에 눈이 먼 상태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으로 신앙을 얻은 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 지중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고, 종국에는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회당과 공동체에서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설교했는데,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의 메시지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오로’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뿌리에서 점차 분화되는 과정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오로가 벌인 논쟁은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새로 개종한 그리스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거나 유대인의 음식 관습과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가 유대인의 사도로 여긴 베드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열린 공의회(약 서기 50년경)는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이방인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바오로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더 포용적인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겨날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리스 지역의 새로운 교회들에 보낸 바오로의 편지는 신약성서의 필수 경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cclesia)는 그리스어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이 과거의 삶을 떠나 새로운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최초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사도행전 2:44-47)
넓은 의미의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의 ‘카톨릭’(catholic, 소문자 ‘c’)이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좁은 의미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마태오 복음서 18:20)입니다. 보편적이든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든 교회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신약성서가 묘사하는 공동체는 강하고 유기적인 소속감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12)라고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부분이 모두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몸의 지체로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는 공동체의 중심 의식인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고 나누는 성찬(주의 만찬, 성만찬)을 통해 확장됩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 포도주는 “새로운 계약”을 나타냅니다. 빵과 포도주가 하나인 것 같이 그것을 함께 나누는 이들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1고린토 11:23-25)
바오로를 포함해 여러 전도자들의 설교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주요 경쟁 상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파나 신비주의 종교가 아니라 ‘황제숭배’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主, Lord)는 오직 그리스도이므로 황제를 주로 숭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체제전복 집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신앙 때문에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통치와 함께 그리스도교는 합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술은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신앙의 헌신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신경이며,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바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과정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독특성 중 하나는 신앙 진술을 요약한 사도신경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오늘날 보통 “저는... 믿나이다”로 번역하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저는 제 마음을 바칩니다.”입니다. 이는 마음의 언어이자 깊은 헌신의 표현으로,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받을 때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헌신에는 종종 위험이 따랐고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례 의식의 일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입문 의식에서 사람들은 낡은 의복을 벗고 새로운 흰색 세례복을 입고, 침례 의식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헌신의 확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신경은 그 헌신을 표현합니다. 사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경 중 하나로, 그 초기판은 서기 150년경에 작성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의 현재 형태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가톨릭)으로 시작합니다. 세례받는 사람은 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교에서는 극적인 회심의 느낌을 주지만, 훨씬 더 넓고 오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공의회에서 지도자들은 신앙에 대한 공통된 의견을 찾기 위해 모였습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초기 공의회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의회 전 몇 세기 동안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처럼 나타나신 거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는 진정한 신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앙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그런 관점들을 거부했습니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는 또한 하느님을 성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세 ‘위격’(persons)을 포함하는 삼위일체(Trinity)로 표현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회는 신적 신비의 복잡성을 한 분이신 하느님은 초월적 창조주이며,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이며, 성령의 내주하는 힘, 불, 숨이라고 명료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에 대한 이 정의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 니케아신경으로 보존되었습니다.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 창조되지 않고 나신, 성부와 한 본체”로 서술합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신경이며,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바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과정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마다 새로운 신경이 쓰여집니다. 예를 들어, 미국 그리스도연합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사렛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저희에게 오시어 저희와 운명을 함께하시고,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당신과 세상을 화해시키셨습니다.” 엘살바도르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불길 속에서 입증한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희는 가난한 자의 고통 속에서 거듭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교리 논쟁이 있었지만,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저는 ... 믿나이다.”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교리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인격적 헌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는 그리스, 중동, 북아프리카, 인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신학과 전례에서 로마 가톨릭, 개신교 전통 교회들과 구별되며, 수 세기에 걸친 도전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오늘날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로 불리는 정교회 교회들의 기원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초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첫 4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로마와 비잔틴 제국은 물론 오늘날의 중동,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로마의 주교들로 구성된 다섯 총대주교좌(Pentarchy)를 통해 연합하였습니다. 그러나 서기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교회의 새로운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할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런 교리는 인성과 신성의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했고,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파문당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교회와의 친교(Communion)를 유지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표현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칼케돈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차이를 경시하거나, 반대로 두 본성의 연합을 축소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에티오피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도, 이라크, 이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따라 공식적으로 갈라져 나오거나, 거리가 멀고 험난한 지형 때문에 그리스-로마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공동체 중 다수가 나중에 오리엔트 정교회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로마 교황의 지도력 아래 있던 서방 교계제도와 콘스탄티노플에 기반한 동방 교계제도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어, 결국 1054년에 로마 추기경단의 대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는 ‘대분열’에 이르렀습니다. 분열의 원인은 삼위일체 안의 성령의 역할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교황의 권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신학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내용에까지 걸쳐있었습니다. 두 교회의 결별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생겨난 교계제도의 차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리엔트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독특한 신학과 전례는 21세기까지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정교회의 한 가지 독특한 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간 본성을 신성으로 고양하는 수단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화’(神化, theosis), 즉, “신이 됨”을 강조하는 것은 대부분의 서방 교회 신학이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수도원주의는 신실한 남성들과 여성들이 기도와 단순성 속에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 도시 생활과 교회 제도를 떠나면서 형성된 것으로, 초기 교회 전통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수도원 생활은 일찍이 4세기에 성 안토니(St. Anthony)와 이집트의 사막교부들과 함께 시작했으며, 동서양 수도원 전통은 이들을 공통의 기원으로 삼고 이들로부터 영감을 얻습니다. 동방 수도원주의는 공동체 수도생활과 고독 수도생활을 모두 포함하고 육체적 금욕을 강조합니다. 또한 동방 전통은 첫 몇 세기부터 “예수 기도”와 “마음의 기도”라고 부르는 내적 관상 기도의 수행을 발전시켰습니다. 집중과 호흡 중심의 관상 기도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영적 자산으로 존재합니다.
정교회는 풍부한 영적, 전례적 전통의 일부로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의 이콘을 독특한 방법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이콘은 성스러운 이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들의 신성한 의미와 현존을 보게 하는 창문으로 여겨집니다. 서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시각적 이미지를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맹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콘의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7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아나톨리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얻고 있던 신흥종교인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서기 692년 예루살렘에서 거대한 ‘바위의 돔’(Dome of Rock) 모스크가 완공되었습니다. 8세기 후 1453년,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게 함락되었습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정교회의 주요 중심지는 이슬람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교회가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은 오리엔트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에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동방 정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시리아 교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다채로운 역사와 독특한 전례 형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 정교회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이집트 콥트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에리트레아 교회, 인도의 성 토마스 교회, 안디옥의 자코바이트 시리아 교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1년에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참가한 회의는 그들 사이의 역사적 불일치는 주로 언어적, 정치적 요인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며, 그들의 그리스도론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는 아직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 교회와 친교를 이루면서도 동방의 예배 전통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처럼, 유사한 신학과 관습을 공유합니다. 이들 교회들의 화해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로부터 기원하며, 이들의 유산은 교황제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1054년 로마 교회와 정교회의 분리, 1521년 개신교와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톨릭 신자는 오늘날 세계 그리스도인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초대교회는 신자들 사이의 유대감을 ‘보편’을 의미하는 ‘가톨릭’(catholic)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전체 그리스도교 교회는 다양한 교회들이 니케아 신경이 말하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문자 ‘C’로 시작하는 가톨릭(Catholic)은 일반적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친교 안에 있는 교회들에만 적용됩니다. 로마 교회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공동체 중 하나로, 그 역사적 기원은 1세기의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로마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황’으로 알려지게 된 로마 주교의 중심적 권위와 제1의 지위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11세기에 가톨릭 교회는 권위와 교리 문제로 동방의 비잔틴 교회와 결별했지만, 수 세기에 걸쳐 교회의 연합을 회복하고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습니다.
15세기 초,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터키의 비잔틴 제국 침공을 분열된 그리스도교를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신의 섭리”로 여겼습니다. 피렌체 공의회는 그리스 비잔틴 교회는 물론, 콥트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거대한 연합체를 구상했으며, 12세기 마론파 교회와의 연합도 재확인했습니다. 하지만 700여 명의 동방 대표자들과 360명의 라틴 교회 대표자들이 참여했고, 치열한 토론을 뒷받침하는 교회일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재결합 노력이 실패하게 된 데는 보통 세 가지 이유가 거론됩니다. 첫째, 비잔티움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서방의 군사 원조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서방 교회에 대한 악감정이 분열 이후 수 세기에 걸쳐 깊게 뿌리내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셋째, 공의회의 칙령에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한 에페소 주교 마르쿠스 에우게니쿠스가 연합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공의회에서 돌아온 후 자신의 관할권 내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맞서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피렌체 공의회의 환멸에도 불구하고 12세기에 있었던 마론파와의 예상치 못했던 연합에 영감을 받은 매력적 대안을 추구했습니다. 바로 “의례와 정경에서는 동방교회의 것을 따르지만 교회의 동맹에서는 로마 교회를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Uniate)의 창설”이었습니다. 사실 피렌체 공의회에서 합의된 여러 결정이 이러한 연합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마론파는 9세기 시리아에서 커져가는 무슬림의 지배를 피해 레바논 산으로 이주한 이들입니다. 수 세기 동안 고립되어 살아가던 그들을 12세기에 로마 십자군이 발견했고, 양측은 즉시 “공동전선을 구축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한 총대주교 예레미야 2세와 그의 교회 전체가 로마 교회와의 연합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들은 동방 가톨릭 교회 중 정교회를 떠나지 않고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진 유일한 교회입니다. 이들 동방 가톨릭 교회는 정교회 교회들과의 긴장 관계속에 있었고, 또한 로마가 지배하는 가톨릭 교회에 비해 주변적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500년 동안 계속해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 공동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인정되었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로마 교회는 1054년 대분열 이후 고유한 특성을 발전시켰습니다. 수도원 생활에 필수적인 기도, 노동, 공부의 원칙을 제시한 베네딕도(480-550)를 시작으로 수도원 전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초기 교회에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한 수사 비드(673-735), “독일의 사도”로 불렸던 보니파시오(680-754) 등 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수도사였습니다. 중세 초기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지역 경제의 중요한 지주이자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중세의 혼란을 거쳐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수도원은 교회의 영적, 예술적, 지적 생활을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2세기에는 사회와 격리된 채 폐쇄적이면서 때로는 부유한 수도원 생활을 거부하고 보다 참여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추구하는 수도회들이 생겨나 발전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와 그가 창입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가난, 단순성, 봉사를, 도미니크(1170-1221)가 창립한 도미니크 수도회는 교육, 설교, 학문 연구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수도회 회원들은 종종 개혁가이기도 해서, 수도원과 교회 전체의 쇄신을 요구했습니다.
16세기에 그런 개혁가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단절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가톨릭 교회 내부의 부패한 관행을 자체적으로 개혁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반종교 개혁’으로 알려진 운동의 하나인 트리엔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시적이고 위계적이며 구조화된 권위를 재주장했습니다. 이 가톨릭 쇄신 시기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예수회를 창립하면서 교회의 교육과 선교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었습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화와 개종, 아시아와 아프리카 선교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개신교 운동에 대한 강한 반발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준을 따르는 것이 규범이 되면서 동방 가톨릭 교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부터입니다.
오늘날 ‘보편적 친교’는 로마의 바티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시노드, 주교회의, 지역 교구가 모든 대륙에서 교회의 삶과 사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절반 이상이 가톨릭 신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역할을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공의회에서 내린 많은 결정 중에는 지역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에 맞게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주로 라틴어로 진행하던 미사를 포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가 단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가시적 교계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온 백성”임을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설교와 성사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를 강조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작성된 많은 문서 중에 가톨릭 교회와 다른 종교 전통의 새로운 열린 관계를 제시하는 Nostra Aetate(우리 시대에)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16세기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톨릭을 넘어선 그리스도교 개혁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개혁 과정은 새로운 관행, 신학, 운동, 교파를 발생시키며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루터는 성서 연구를 통해, 종교적 권위는 교회 전통이나 주교와 교황의 위계가 아니라 오직 성서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력은 성서의 기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또한 루터는 성서와 교회의 예배를 라틴어에서 지역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신약성서를 연구하면서, 구원은 인간이 어떤 행위나 보속(補贖, penance)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얻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유일하게 합당한 인간의 반응은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 루터는 특히 내세에서 자신의 안녕이나 이미 죽은 사람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교회에서 판매하는 ‘면벌부’(免罰符, Indulgence)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구원은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설교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수도원을 떠나 결혼했고, 이로써 개신교 교회에서 기혼 성직자의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 교계제도를 공격하면서 평신도의 더 많은 참여를 허용했고,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신자는 사제”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했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전통 내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와 형태는 다양했지만, 개인의 신앙, 하느님의 은총, 성서의 권위를 중시하는 데서는 일치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유산을 바탕으로 루터교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루터교 국가교회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에서도 발전했습니다. 개신교의 두 번째 ‘개혁’ 전통은 1522년 울리히 츠빙글리가 개혁 운동을 시작한 스위스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개혁가였던 장 칼뱅이 제네바에서 이끈 개혁 운동으로부터 프랑스, 네덜란드, 헝가리,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개혁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녹스로부터 시작한 장로교 교회도 이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침례교, 성공회, 회중교회는 츠빙글리와 칼뱅의 사상을 계승한 것입니다.
세 번째 개신교 전통은 ‘급진적 종교개혁’을 추구한 재세례파입니다. 이들은 국가교회의 설립과 유아 세례에 대해 루터교,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마음으로부터의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헌신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교회의 강요를 거부했고, 세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성인 신자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의 재세례파에는 메노나이트와 역사 속의 “평화 교회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운동은 영국의 침례교와 퀘이커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16세기에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성공회는 개신교 신학을 수용하면서도 가톨릭 전례와 교계제도의 상당 부분을 유지했습니다. 영국의 일부 개신교인들은 헨리 8세보다 더 철저히 교회의 완전한 정화를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청교도’(Puritans)로 알려지게 된 영국 국교회 내의 급진주의자들 중 일부는 17세기 초에 북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이들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서 “거룩한 국가”(Holy Commonwealths)인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18세기 영국 국교회 사제 존 웨슬리는 극적 회심 체험과 인격적 헌신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감리교’로 불리게 된 이 운동은 사실상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 교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남아있던 이들은 대영제국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서 그들의 그리스도교 형태를 전파했습니다. 대영제국이 해체된 후 그 교회들은 세계성공회연합으로 결합되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도 지속적 개혁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원래 복음주의는 북대서양 영미 세계를 휩쓴 부흥운동을 일으킨 18~19세기 종교 개혁 운동과 교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감리교의 존 웨슬리(1703-1791), 성공회 순회 전도자 조지 화이트필드(1715-1770), 미국 회중교회 설교자이며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이 부흥운동을 이끈 주요 지도자입니다. 1820년대까지 미국 개신교 교단 대부분을 복음주의자들이 지배했고, 그들은 노예제 폐지와 금주법과 같은 개혁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 교단의 경계를 넘어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20세기 초, 일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다윈주의와 현대적 성서 비평을 거부하면서 ‘근본주의’(fundamentalist) 개신교와 ‘주류’(mainline) 개신교 사이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개신교는 미국 정치와 문화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류 개신교 교단은 20세기 중반까지 언론, 대학 및 기타 기관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1960년대에 흑인 개신교 교회는 시민권 운동의 중요 허브 역할을 했으며, 마틴 루터 킹과 같은 목사들이 그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보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 가족 가치’를 추구하며 결성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와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회’(Concerned Women for America)와 같은 조직을 통해 힘을 행사했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개신교 교회 조직이 아니라 개신교 교회 운동입니다. 오늘날에도 지속적 개혁에 참여하는 개신교 교회들의 역동적 운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내내 선교사들은 새로운 민족과 나라에 교회를 세우는 목표를 가지고 전 세계를 여행했고, 제국과 무역의 통로를 따라 전 세계에서 독특한 그리스도교 전통들이 생겨났습니다. 일부는 식민세력의 이익을 도모했고, 일부는 다양한 토착 문화와 정체성의 영향을 받으며 제국주의에 맞섰습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남겨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에 따른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습니다. 3세기에서 7세기 초,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멀리 인도와 중국에서까지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초기 로마 수도사들은 아일랜드와 영국, 독일, 북유럽, 동유럽, 러시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과 가톨릭 반종교개혁이 동시에 일어난 16세기는 유럽의 식민지 확장이 시작된 시기로, 이때 교회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은 남미, 멕시코, 필리핀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 중국에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대영제국은 인도, 실론, 버마, 아프리카, 호주, 북미를 차지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와 대서양 연안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만들었고,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내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확산은 제국, 무역, 식민화의 길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때때로 교회와 선교사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연루되거나 가담했습니다. 그들의 선교는 피식민 민족에 대한 제국의 지배 강화에 복무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 중에는 식민지 억압을 강하게 비판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피선교지 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선교사들은 비그리스도교 신앙 가운데 그들이 이해한 것을 하느님이 모든 곳에 살아 현존하시는 증거로 보면서 교회의 배타주의 신학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많은 원주민이 그들의 새로운 신앙을 유럽인이 전해준 것과 매우 다르게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식민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개종자를 확보하고 지위를 높이기 위해 서로 경쟁했습니다. 16세기에 창립된 예수회는 남미와 동아시아 등지에 사제를 파견하며 가톨릭 선교 단체로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후에 개신교인들도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세워진 새로운 교회들을 연결하는 개신교 선교회들을 조직했습니다.
식민 제국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피선교지 교회들은 그들 고유의 목소리와 지도력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동성과 에너지는 대부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교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모든 문화와 언어로 복음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것이 새롭게 강조되었습니다. 탈식민 시대의 세계 교회는 각자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예배와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문화, 음악, 예술을 활용하면서 유럽 또는 미국의 그리스도교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이후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종교적 신앙과 과학적 발견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지,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를 교회제도에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에 대해 그리스도인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변화를 가져온 데 반해, 개신교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때로는 합의하고 때로는 갈등하기도 하는 다양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최근에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미국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교가 재기하고 오순절교회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와 함께 도래한 근대는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을 분열시킨 종교전쟁이 끝난 후 서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적 차이로 인한 수십년간의 유혈 참사를 겪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적 관용, 정치권력과 종교생활의 분리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 사고에서 이성의 역할을, 즉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부르는 사조는 이성의 원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초자연적 요소 없이 창조주 하느님과 보편적 윤리를 중심으로 세워진 ‘자연종교’를 강조하였습니다. 신생 아메리카 공화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은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지난 2세기 동안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조는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지속적 영감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또한 계몽(the Enlightenment)도 자연 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점에 변화를 가져온 과학혁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7세기의 아이작 뉴턴은 물리학 법칙에 따른 지적 방법을 신학과 성서적 예언의 논쟁에 적용했습니다. 19세기의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과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을 통해 발표한 종의 발달과 진화 이론으로 성서의 창조 설화에 도전했습니다. 근대의 각 세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과학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세계관에 비추어 자신들의 신앙을 새롭게 주장하고 분명히 표현해야 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은 과학적 지식이 확대되면서 점점 작아진 신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과학에 위협받지 않고 과학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
근대의 성서 연구 또한 전통적 신앙에 도전해 왔습니다. 이제 성서 본문은 비판적, 역사적 분석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성서는 무엇일까? 이 특별한 글모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성서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직접적 계시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는 고유한 역사적 가정과 관심에 따라 영감을 받아 쓰여진 글을 모아놓은 것으로, 특정한 역사적 맥락의 산물로 연구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0세기 초, 근대 성서 연구의 다양한 경향에 반발하여 ‘근본주의’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났습니다.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근대적 성서 연구의 악영향으로부터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신앙을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성서 본문의 더 깊은 진리를 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성은 그리스도교 교회에 새로운 균열을 냈지만, 동시에 과거의 분열을 고칠 기회 또한 제공하였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거의 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어버린 분열의 흐름을 통합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교회일치(ecumenical)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경향은,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교회일치운동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1948년에 결성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로, 300개 이상의 개신교와 정교회 교회들이 참여해, 하나의 신앙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정의, 평화, 교육 및 긴급 구호와 같은 공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연합체입니다.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로마 가톨릭과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 간의 긴밀한 협력의 문을 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1,000년간 지속된 상호 파문을 취소하고 서로를 받아들였습니다.
21세기 초, 전 세계적으로 재기한 복음주의 그리스도교는 바티칸, WCC와 함께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의 ‘제3세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서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유일하고, 오류 없고, 권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신학의 공통적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표현되는 개인적 믿음과, 전도 또는 선교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그 믿음을 공유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대규모 집회와 부흥을 수반한 빌리 그레이엄의 세계적 사역은, 20세기 중반의 복음주의 전도자들이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시키는데 라디오, 텔레비전 등 새로운 통신 기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레이엄은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이 초기 근본주의자들의 엄격하고 교조적인 노선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스펙트럼의 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오순절교회의 급성장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일고 있는 새로운 복음주의 물결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순절교회의 예배는 방언과 치유를 포함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여러 면에서 이 운동은 그리스도교의 현대화 노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면 성서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기적과 ‘초자연적인’ 일들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순절운동 또한 현대 기술, 통신 수단, 문화 형식을 열정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고대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역동성 덕분에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미국의 도시들에서 영적으로 충만한 예배와 활기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그리스도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 주요 교파인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의 종교들 중 가장 많은 신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계종교로서, 세계 모든 대륙에서 흐르는 여러 지류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앙의 강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지류의 공통된 근원은 하나, 곧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 부르는 예수는 2천여 년 전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살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나타나 활동했던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예수는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고(‘회심’, metanoia),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의 공적 활동 기간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로마 제국에 반역했다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30대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는 글을 남기지 않았고, 그가 죽은 지 수십 년 동안 그에 대해 글을 남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지중해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린 것은 현재의 터키 지역 안디옥에서였습니다. 서기 첫 3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 해안에 이르는 그리스-로마지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5세기부터 7세기에는 북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이 시기 시리아 그리스도인이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동아시아로도 전파되었습니다. 10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천년기 후반, 유럽 식민세력의 세계 정복은 그리스도교의 전 지구적 확산을 가속화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는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세 주요 전통이 있으며, 각 전통은 내부적으로 다원성을 보입니다. 세계 전역으로 널리 퍼져 성장한 영국성공회와 오순절교회를 그리스도교 내의 또 다른 독자적 전통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범주조차도 수 세기에 걸쳐 생겨났고 오늘날에도 계속 생겨나고 있는 수 많은 교회와 교단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는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지역 문화와 통합되었다. 다양성은 그리스도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말, 세계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사는 곳은 지구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바뀌었습니다. 21세기에도 그리스도교는 계속 성장하고 있어, 아프리카에서는 독립교회를 포함해 그리스도교 교회가 급증했습니다. 남미에서는 오순절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4세기 동안 지배적 위치에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유럽과 북미에서도 지배적인 종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지구상 어느 다른 종교 전통보다 더 많은 신도를 갖고 있습니다. 전체 지구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삶에 대한 네 가지 복음서가 있습니다. 이 복음서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수행의 기초로서 예수의 탄생, 세례, 혁명적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며 예수를 메시아로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고 전하고 있는 예수의 이야기는 〈신약〉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성서에 나옵니다. 신약성서의 첫 네 권의 책인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는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euangel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 이후 두 세대 정도 지난 서기 약 70년에서 10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전한 예수의 이야기를 기초로 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세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 비유, 사건 등에 관한 ‘공통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공관(共觀, Synoptic) 복음서’로 불립니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를 참조하고 해석을 더해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특한 문체로 쓰여진 요한 복음서는 우주적 세계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습니다. 복음서는 아직 유대교 전통 내에서 정체성을 고심하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로부터 유래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 내부에서 있었던 논쟁을 의식하며 기록되었음을 보여주고,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이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났던 흔적을 보입니다. 복음서마다 예수의 삶과 활동에 대한 설명이 다르고, 때로는 상당히 차이도 보여주지만, 초대교회는 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합치지 않고 차이를 유지한 채 네 복음서를 모두 보존해 왔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네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루가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다윗 왕의 혈통으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습니다. 두 복음서는 일상적인 이야기와 기적적인 이야기를 섞어 놓았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을 때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나사렛 출신 목수였습니다. 루가의 이야기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친숙합니다. 이 부부는 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방을 구할 수 없어 마구간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예수는 그날 밤 태어나 건초로 가득 채운 구유에 뉘여졌습니다.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은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서둘러 갓난아기를 보러 갔습니다.
마태오는 마구간이나 목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대신 아기 예수를 축복하기 위해 동방에서 별빛을 따라 예물을 가지고 온 동방박사들 또는 점성술사들이 등장합니다. 마르코와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세례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 복음서는 태초의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루가 복음서만 예수가 열두 살 때 그의 부모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하고 있는 예수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중요하게 다룬다. 복음서는 예수의 나이를 특정하고 있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공적 활동을 하던 때 예수의 나이는 서른 살 정도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요한 복음서의 중심 메시지는 근본적 회개와 변화에 관한 것이다. 당시는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기대의 시대였다. 새 시대,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오래 전부터 약속된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기다리는 유대교 운동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새 시대를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 요단강에서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그가 세례를 준 사람 중에는 나사렛 예수가 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세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내려와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의 세례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는 그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예수는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했는데, 그중에는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떠난 어부들도 있었고, 예수의 사역 기간 내내 계속 언급되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군중이 모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자비, 용서, 사랑, 정의를 나타내는 메시지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 들려 고통받는 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예수가 행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놀라운 비유로 사람들을 깨우치는 훌륭한 교사로 묘사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은 채로 길가에 버려졌을 때,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도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이방인 또는 외부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은 민족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우쳐 줍니다.
예수는 당시 죄인으로 배제되던 세리, 간통자, 성매매 여성, 병자와 어울리면서 사회적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그 일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따지기 전에 먼저 그들 자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라고 경고했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죄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므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판단하지 말고 다만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세의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위한 정의로운 통치와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첫 번째로 들어갈 사람들은 엘리트나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배제된 사람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제자들과 군중은 예수를 그들이 오래 기다려온 하느님 나라를 도래하게 할 메시아, 곧 구세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Christos; Christ)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 사건은 예수의 신성과 이 세상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예수가 유대 땅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모습은 로마인 통치자들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 불안을 유발하고 반란을 계획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적 권위와 가르침에도 도전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경계했습니다. 예수는 위선을 비판했고 새로운 예언자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반대자들은 예수를 신흥종파를 만들려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는 정치·종교 당국이 자신에게 씌운 혐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이 공격받고 박해받을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약 3년간의 가르침 사역을 마친 후, 예수는 유대인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했고, 그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예수는 제자 중 하나인 유다에게 배반당했고, 그가 데려온 성전 세력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유대인 대제사장은 예수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신성모독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로마 당국에 끌려간 예수는 선동죄로 기소되어 로마식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때는 금요일이었고, 예수의 매장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일요일 아침, 예수를 따랐던 몇몇 여성이 예수의 시신을 염하고 제대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해보니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들에 따르면, 눈부신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여성들에게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동산지기처럼 보이는 남자가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설명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복음서는 그 후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그의 현존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몇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는 얼마간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인류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의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따르면 ‘그리스도 사건’은 그가 살았던 1세기의 맥락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1세기의 사건이기도 하며, 그 사건을 자기 신앙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삶에서 매일 반복되고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비유대인) 전도로 과감히 방향을 전환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후 50일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성령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신약성서는 불의 혀 같은 성령이 그들 머리 위에 임하고, 예수의 복음을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 그 사건으로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던 제자들(disciples)은 사도들(apostles)로 변화시키는 권능을 얻었고, 그들의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각지로 떠났습니다. (그리스어로 Apostolos는 ‘사자’使者를 의미). 이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날은 ‘오순절’(Pentecost)로 알려졌고 ‘교회의 탄생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의 저자가 1세기 말에 쓴 사도행전은 오순절 사건을 시작으로 초대교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또한 사울이라는 유대인 천막 제작자의 회심은 초대교회의 확장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울은 원래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사람인데,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빛에 눈이 먼 상태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으로 신앙을 얻은 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 지중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고, 종국에는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회당과 공동체에서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설교했는데,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의 메시지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오로’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뿌리에서 점차 분화되는 과정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오로가 벌인 논쟁은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새로 개종한 그리스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거나 유대인의 음식 관습과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가 유대인의 사도로 여긴 베드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열린 공의회(약 서기 50년경)는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이방인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바오로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더 포용적인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겨날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리스 지역의 새로운 교회들에 보낸 바오로의 편지는 신약성서의 필수 경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cclesia)는 그리스어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이 과거의 삶을 떠나 새로운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최초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사도행전 2:44-47)
넓은 의미의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의 ‘카톨릭’(catholic, 소문자 ‘c’)이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좁은 의미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마태오 복음서 18:20)입니다. 보편적이든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든 교회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신약성서가 묘사하는 공동체는 강하고 유기적인 소속감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12)라고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부분이 모두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몸의 지체로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는 공동체의 중심 의식인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고 나누는 성찬(주의 만찬, 성만찬)을 통해 확장됩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 포도주는 “새로운 계약”을 나타냅니다. 빵과 포도주가 하나인 것 같이 그것을 함께 나누는 이들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1고린토 11:23-25)
바오로를 포함해 여러 전도자들의 설교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주요 경쟁 상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파나 신비주의 종교가 아니라 ‘황제숭배’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主, Lord)는 오직 그리스도이므로 황제를 주로 숭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체제전복 집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신앙 때문에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통치와 함께 그리스도교는 합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술은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신앙의 헌신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신경이며,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바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과정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독특성 중 하나는 신앙 진술을 요약한 사도신경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오늘날 보통 “저는... 믿나이다”로 번역하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저는 제 마음을 바칩니다.”입니다. 이는 마음의 언어이자 깊은 헌신의 표현으로,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받을 때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헌신에는 종종 위험이 따랐고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례 의식의 일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입문 의식에서 사람들은 낡은 의복을 벗고 새로운 흰색 세례복을 입고, 침례 의식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헌신의 확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신경은 그 헌신을 표현합니다. 사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경 중 하나로, 그 초기판은 서기 150년경에 작성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의 현재 형태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가톨릭)으로 시작합니다. 세례받는 사람은 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교에서는 극적인 회심의 느낌을 주지만, 훨씬 더 넓고 오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공의회에서 지도자들은 신앙에 대한 공통된 의견을 찾기 위해 모였습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초기 공의회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의회 전 몇 세기 동안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처럼 나타나신 거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는 진정한 신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앙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그런 관점들을 거부했습니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는 또한 하느님을 성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세 ‘위격’(persons)을 포함하는 삼위일체(Trinity)로 표현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회는 신적 신비의 복잡성을 한 분이신 하느님은 초월적 창조주이며,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이며, 성령의 내주하는 힘, 불, 숨이라고 명료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에 대한 이 정의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 니케아신경으로 보존되었습니다.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 창조되지 않고 나신, 성부와 한 본체”로 서술합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신경이며,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바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과정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마다 새로운 신경이 쓰여집니다. 예를 들어, 미국 그리스도연합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사렛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저희에게 오시어 저희와 운명을 함께하시고,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당신과 세상을 화해시키셨습니다.” 엘살바도르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불길 속에서 입증한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희는 가난한 자의 고통 속에서 거듭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교리 논쟁이 있었지만,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저는 ... 믿나이다.”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교리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인격적 헌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는 그리스, 중동, 북아프리카, 인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신학과 전례에서 로마 가톨릭, 개신교 전통 교회들과 구별되며, 수 세기에 걸친 도전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오늘날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로 불리는 정교회 교회들의 기원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초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첫 4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로마와 비잔틴 제국은 물론 오늘날의 중동,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로마의 주교들로 구성된 다섯 총대주교좌(Pentarchy)를 통해 연합하였습니다. 그러나 서기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교회의 새로운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할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런 교리는 인성과 신성의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했고,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파문당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교회와의 친교(Communion)를 유지했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표현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칼케돈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차이를 경시하거나, 반대로 두 본성의 연합을 축소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에티오피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도, 이라크, 이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따라 공식적으로 갈라져 나오거나, 거리가 멀고 험난한 지형 때문에 그리스-로마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공동체 중 다수가 나중에 오리엔트 정교회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로마 교황의 지도력 아래 있던 서방 교계제도와 콘스탄티노플에 기반한 동방 교계제도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어, 결국 1054년에 로마 추기경단의 대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는 ‘대분열’에 이르렀습니다. 분열의 원인은 삼위일체 안의 성령의 역할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교황의 권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신학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내용에까지 걸쳐있었습니다. 두 교회의 결별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생겨난 교계제도의 차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리엔트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독특한 신학과 전례는 21세기까지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정교회의 한 가지 독특한 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간 본성을 신성으로 고양하는 수단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화’(神化, theosis), 즉, “신이 됨”을 강조하는 것은 대부분의 서방 교회 신학이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수도원주의는 신실한 남성들과 여성들이 기도와 단순성 속에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 도시 생활과 교회 제도를 떠나면서 형성된 것으로, 초기 교회 전통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수도원 생활은 일찍이 4세기에 성 안토니(St. Anthony)와 이집트의 사막교부들과 함께 시작했으며, 동서양 수도원 전통은 이들을 공통의 기원으로 삼고 이들로부터 영감을 얻습니다. 동방 수도원주의는 공동체 수도생활과 고독 수도생활을 모두 포함하고 육체적 금욕을 강조합니다. 또한 동방 전통은 첫 몇 세기부터 “예수 기도”와 “마음의 기도”라고 부르는 내적 관상 기도의 수행을 발전시켰습니다. 집중과 호흡 중심의 관상 기도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영적 자산으로 존재합니다.
정교회는 풍부한 영적, 전례적 전통의 일부로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의 이콘을 독특한 방법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이콘은 성스러운 이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들의 신성한 의미와 현존을 보게 하는 창문으로 여겨집니다. 서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시각적 이미지를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맹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콘의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7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아나톨리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얻고 있던 신흥종교인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서기 692년 예루살렘에서 거대한 ‘바위의 돔’(Dome of Rock) 모스크가 완공되었습니다. 8세기 후 1453년,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게 함락되었습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정교회의 주요 중심지는 이슬람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교회가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은 오리엔트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에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동방 정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시리아 교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다채로운 역사와 독특한 전례 형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 정교회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이집트 콥트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에리트레아 교회, 인도의 성 토마스 교회, 안디옥의 자코바이트 시리아 교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1년에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참가한 회의는 그들 사이의 역사적 불일치는 주로 언어적, 정치적 요인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며, 그들의 그리스도론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는 아직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 교회와 친교를 이루면서도 동방의 예배 전통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처럼, 유사한 신학과 관습을 공유합니다. 이들 교회들의 화해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로부터 기원하며, 이들의 유산은 교황제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1054년 로마 교회와 정교회의 분리, 1521년 개신교와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톨릭 신자는 오늘날 세계 그리스도인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초대교회는 신자들 사이의 유대감을 ‘보편’을 의미하는 ‘가톨릭’(catholic)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전체 그리스도교 교회는 다양한 교회들이 니케아 신경이 말하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문자 ‘C’로 시작하는 가톨릭(Catholic)은 일반적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친교 안에 있는 교회들에만 적용됩니다. 로마 교회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공동체 중 하나로, 그 역사적 기원은 1세기의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로마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황’으로 알려지게 된 로마 주교의 중심적 권위와 제1의 지위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11세기에 가톨릭 교회는 권위와 교리 문제로 동방의 비잔틴 교회와 결별했지만, 수 세기에 걸쳐 교회의 연합을 회복하고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습니다.
15세기 초,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터키의 비잔틴 제국 침공을 분열된 그리스도교를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신의 섭리”로 여겼습니다. 피렌체 공의회는 그리스 비잔틴 교회는 물론, 콥트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거대한 연합체를 구상했으며, 12세기 마론파 교회와의 연합도 재확인했습니다. 하지만 700여 명의 동방 대표자들과 360명의 라틴 교회 대표자들이 참여했고, 치열한 토론을 뒷받침하는 교회일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재결합 노력이 실패하게 된 데는 보통 세 가지 이유가 거론됩니다. 첫째, 비잔티움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서방의 군사 원조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서방 교회에 대한 악감정이 분열 이후 수 세기에 걸쳐 깊게 뿌리내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셋째, 공의회의 칙령에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한 에페소 주교 마르쿠스 에우게니쿠스가 연합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공의회에서 돌아온 후 자신의 관할권 내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맞서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피렌체 공의회의 환멸에도 불구하고 12세기에 있었던 마론파와의 예상치 못했던 연합에 영감을 받은 매력적 대안을 추구했습니다. 바로 “의례와 정경에서는 동방교회의 것을 따르지만 교회의 동맹에서는 로마 교회를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Uniate)의 창설”이었습니다. 사실 피렌체 공의회에서 합의된 여러 결정이 이러한 연합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마론파는 9세기 시리아에서 커져가는 무슬림의 지배를 피해 레바논 산으로 이주한 이들입니다. 수 세기 동안 고립되어 살아가던 그들을 12세기에 로마 십자군이 발견했고, 양측은 즉시 “공동전선을 구축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한 총대주교 예레미야 2세와 그의 교회 전체가 로마 교회와의 연합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들은 동방 가톨릭 교회 중 정교회를 떠나지 않고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진 유일한 교회입니다. 이들 동방 가톨릭 교회는 정교회 교회들과의 긴장 관계속에 있었고, 또한 로마가 지배하는 가톨릭 교회에 비해 주변적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500년 동안 계속해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 공동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인정되었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로마 교회는 1054년 대분열 이후 고유한 특성을 발전시켰습니다. 수도원 생활에 필수적인 기도, 노동, 공부의 원칙을 제시한 베네딕도(480-550)를 시작으로 수도원 전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초기 교회에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한 수사 비드(673-735), “독일의 사도”로 불렸던 보니파시오(680-754) 등 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수도사였습니다. 중세 초기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지역 경제의 중요한 지주이자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중세의 혼란을 거쳐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수도원은 교회의 영적, 예술적, 지적 생활을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2세기에는 사회와 격리된 채 폐쇄적이면서 때로는 부유한 수도원 생활을 거부하고 보다 참여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추구하는 수도회들이 생겨나 발전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와 그가 창입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가난, 단순성, 봉사를, 도미니크(1170-1221)가 창립한 도미니크 수도회는 교육, 설교, 학문 연구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수도회 회원들은 종종 개혁가이기도 해서, 수도원과 교회 전체의 쇄신을 요구했습니다.
16세기에 그런 개혁가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단절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가톨릭 교회 내부의 부패한 관행을 자체적으로 개혁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반종교 개혁’으로 알려진 운동의 하나인 트리엔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시적이고 위계적이며 구조화된 권위를 재주장했습니다. 이 가톨릭 쇄신 시기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예수회를 창립하면서 교회의 교육과 선교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었습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화와 개종, 아시아와 아프리카 선교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개신교 운동에 대한 강한 반발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준을 따르는 것이 규범이 되면서 동방 가톨릭 교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부터입니다.
오늘날 ‘보편적 친교’는 로마의 바티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시노드, 주교회의, 지역 교구가 모든 대륙에서 교회의 삶과 사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절반 이상이 가톨릭 신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역할을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공의회에서 내린 많은 결정 중에는 지역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에 맞게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주로 라틴어로 진행하던 미사를 포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가 단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가시적 교계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온 백성”임을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설교와 성사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를 강조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작성된 많은 문서 중에 가톨릭 교회와 다른 종교 전통의 새로운 열린 관계를 제시하는 Nostra Aetate(우리 시대에)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16세기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톨릭을 넘어선 그리스도교 개혁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개혁 과정은 새로운 관행, 신학, 운동, 교파를 발생시키며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루터는 성서 연구를 통해, 종교적 권위는 교회 전통이나 주교와 교황의 위계가 아니라 오직 성서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력은 성서의 기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또한 루터는 성서와 교회의 예배를 라틴어에서 지역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신약성서를 연구하면서, 구원은 인간이 어떤 행위나 보속(補贖, penance)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얻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유일하게 합당한 인간의 반응은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 루터는 특히 내세에서 자신의 안녕이나 이미 죽은 사람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교회에서 판매하는 ‘면벌부’(免罰符, Indulgence)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구원은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설교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수도원을 떠나 결혼했고, 이로써 개신교 교회에서 기혼 성직자의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 교계제도를 공격하면서 평신도의 더 많은 참여를 허용했고,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신자는 사제”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했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전통 내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와 형태는 다양했지만, 개인의 신앙, 하느님의 은총, 성서의 권위를 중시하는 데서는 일치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유산을 바탕으로 루터교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루터교 국가교회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에서도 발전했습니다. 개신교의 두 번째 ‘개혁’ 전통은 1522년 울리히 츠빙글리가 개혁 운동을 시작한 스위스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개혁가였던 장 칼뱅이 제네바에서 이끈 개혁 운동으로부터 프랑스, 네덜란드, 헝가리,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개혁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녹스로부터 시작한 장로교 교회도 이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침례교, 성공회, 회중교회는 츠빙글리와 칼뱅의 사상을 계승한 것입니다.
세 번째 개신교 전통은 ‘급진적 종교개혁’을 추구한 재세례파입니다. 이들은 국가교회의 설립과 유아 세례에 대해 루터교,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마음으로부터의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헌신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교회의 강요를 거부했고, 세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성인 신자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의 재세례파에는 메노나이트와 역사 속의 “평화 교회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운동은 영국의 침례교와 퀘이커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16세기에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성공회는 개신교 신학을 수용하면서도 가톨릭 전례와 교계제도의 상당 부분을 유지했습니다. 영국의 일부 개신교인들은 헨리 8세보다 더 철저히 교회의 완전한 정화를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청교도’(Puritans)로 알려지게 된 영국 국교회 내의 급진주의자들 중 일부는 17세기 초에 북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이들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서 “거룩한 국가”(Holy Commonwealths)인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18세기 영국 국교회 사제 존 웨슬리는 극적 회심 체험과 인격적 헌신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감리교’로 불리게 된 이 운동은 사실상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 교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남아있던 이들은 대영제국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서 그들의 그리스도교 형태를 전파했습니다. 대영제국이 해체된 후 그 교회들은 세계성공회연합으로 결합되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도 지속적 개혁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원래 복음주의는 북대서양 영미 세계를 휩쓴 부흥운동을 일으킨 18~19세기 종교 개혁 운동과 교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감리교의 존 웨슬리(1703-1791), 성공회 순회 전도자 조지 화이트필드(1715-1770), 미국 회중교회 설교자이며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이 부흥운동을 이끈 주요 지도자입니다. 1820년대까지 미국 개신교 교단 대부분을 복음주의자들이 지배했고, 그들은 노예제 폐지와 금주법과 같은 개혁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 교단의 경계를 넘어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20세기 초, 일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다윈주의와 현대적 성서 비평을 거부하면서 ‘근본주의’(fundamentalist) 개신교와 ‘주류’(mainline) 개신교 사이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개신교는 미국 정치와 문화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류 개신교 교단은 20세기 중반까지 언론, 대학 및 기타 기관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1960년대에 흑인 개신교 교회는 시민권 운동의 중요 허브 역할을 했으며, 마틴 루터 킹과 같은 목사들이 그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보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 가족 가치’를 추구하며 결성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와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회’(Concerned Women for America)와 같은 조직을 통해 힘을 행사했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개신교 교회 조직이 아니라 개신교 교회 운동입니다. 오늘날에도 지속적 개혁에 참여하는 개신교 교회들의 역동적 운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내내 선교사들은 새로운 민족과 나라에 교회를 세우는 목표를 가지고 전 세계를 여행했고, 제국과 무역의 통로를 따라 전 세계에서 독특한 그리스도교 전통들이 생겨났습니다. 일부는 식민세력의 이익을 도모했고, 일부는 다양한 토착 문화와 정체성의 영향을 받으며 제국주의에 맞섰습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남겨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에 따른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습니다. 3세기에서 7세기 초,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멀리 인도와 중국에서까지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초기 로마 수도사들은 아일랜드와 영국, 독일, 북유럽, 동유럽, 러시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과 가톨릭 반종교개혁이 동시에 일어난 16세기는 유럽의 식민지 확장이 시작된 시기로, 이때 교회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은 남미, 멕시코, 필리핀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 중국에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대영제국은 인도, 실론, 버마, 아프리카, 호주, 북미를 차지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와 대서양 연안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만들었고,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내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확산은 제국, 무역, 식민화의 길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때때로 교회와 선교사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연루되거나 가담했습니다. 그들의 선교는 피식민 민족에 대한 제국의 지배 강화에 복무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 중에는 식민지 억압을 강하게 비판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피선교지 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선교사들은 비그리스도교 신앙 가운데 그들이 이해한 것을 하느님이 모든 곳에 살아 현존하시는 증거로 보면서 교회의 배타주의 신학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많은 원주민이 그들의 새로운 신앙을 유럽인이 전해준 것과 매우 다르게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식민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개종자를 확보하고 지위를 높이기 위해 서로 경쟁했습니다. 16세기에 창립된 예수회는 남미와 동아시아 등지에 사제를 파견하며 가톨릭 선교 단체로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후에 개신교인들도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세워진 새로운 교회들을 연결하는 개신교 선교회들을 조직했습니다.
식민 제국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피선교지 교회들은 그들 고유의 목소리와 지도력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동성과 에너지는 대부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교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모든 문화와 언어로 복음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것이 새롭게 강조되었습니다. 탈식민 시대의 세계 교회는 각자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예배와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문화, 음악, 예술을 활용하면서 유럽 또는 미국의 그리스도교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이후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종교적 신앙과 과학적 발견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지,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를 교회제도에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에 대해 그리스도인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변화를 가져온 데 반해, 개신교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때로는 합의하고 때로는 갈등하기도 하는 다양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최근에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미국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교가 재기하고 오순절교회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와 함께 도래한 근대는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을 분열시킨 종교전쟁이 끝난 후 서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적 차이로 인한 수십년간의 유혈 참사를 겪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적 관용, 정치권력과 종교생활의 분리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 사고에서 이성의 역할을, 즉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부르는 사조는 이성의 원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초자연적 요소 없이 창조주 하느님과 보편적 윤리를 중심으로 세워진 ‘자연종교’를 강조하였습니다. 신생 아메리카 공화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은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지난 2세기 동안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조는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지속적 영감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또한 계몽(the Enlightenment)도 자연 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점에 변화를 가져온 과학혁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7세기의 아이작 뉴턴은 물리학 법칙에 따른 지적 방법을 신학과 성서적 예언의 논쟁에 적용했습니다. 19세기의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과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을 통해 발표한 종의 발달과 진화 이론으로 성서의 창조 설화에 도전했습니다. 근대의 각 세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과학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세계관에 비추어 자신들의 신앙을 새롭게 주장하고 분명히 표현해야 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은 과학적 지식이 확대되면서 점점 작아진 신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과학에 위협받지 않고 과학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
근대의 성서 연구 또한 전통적 신앙에 도전해 왔습니다. 이제 성서 본문은 비판적, 역사적 분석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성서는 무엇일까? 이 특별한 글모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성서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직접적 계시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는 고유한 역사적 가정과 관심에 따라 영감을 받아 쓰여진 글을 모아놓은 것으로, 특정한 역사적 맥락의 산물로 연구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0세기 초, 근대 성서 연구의 다양한 경향에 반발하여 ‘근본주의’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났습니다.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근대적 성서 연구의 악영향으로부터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신앙을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성서 본문의 더 깊은 진리를 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성은 그리스도교 교회에 새로운 균열을 냈지만, 동시에 과거의 분열을 고칠 기회 또한 제공하였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거의 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어버린 분열의 흐름을 통합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교회일치(ecumenical)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경향은,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교회일치운동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1948년에 결성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로, 300개 이상의 개신교와 정교회 교회들이 참여해, 하나의 신앙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정의, 평화, 교육 및 긴급 구호와 같은 공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연합체입니다.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로마 가톨릭과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 간의 긴밀한 협력의 문을 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1,000년간 지속된 상호 파문을 취소하고 서로를 받아들였습니다.
21세기 초, 전 세계적으로 재기한 복음주의 그리스도교는 바티칸, WCC와 함께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의 ‘제3세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서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유일하고, 오류 없고, 권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신학의 공통적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표현되는 개인적 믿음과, 전도 또는 선교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그 믿음을 공유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대규모 집회와 부흥을 수반한 빌리 그레이엄의 세계적 사역은, 20세기 중반의 복음주의 전도자들이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시키는데 라디오, 텔레비전 등 새로운 통신 기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레이엄은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이 초기 근본주의자들의 엄격하고 교조적인 노선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스펙트럼의 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오순절교회의 급성장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일고 있는 새로운 복음주의 물결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순절교회의 예배는 방언과 치유를 포함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여러 면에서 이 운동은 그리스도교의 현대화 노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면 성서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기적과 ‘초자연적인’ 일들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순절운동 또한 현대 기술, 통신 수단, 문화 형식을 열정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고대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역동성 덕분에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미국의 도시들에서 영적으로 충만한 예배와 활기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