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교회’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단일 교회 회중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그리스도인에 이르는)와, 그리스도인이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건물’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교회의 구조와 규모는 하나의 작은 공간으로 되어 있는 성전에서 거대한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교회’는 건물이자 공동체이며 공간이자 정신입니다. 공동체의 정신은 공동체가 모여 함께하는 의례를 통해 생겨나고 표현됩니다. 사제는 밝은 미소로 회중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말합니다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회중은 응답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사제는 손짓을 하며 말합니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그러면 교인들은 따뜻하게 악수하거나 포옹하면서 서로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예배를 위한 모임을 ‘교회’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와 서로에 대한 공유된 헌신의 정신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란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건물을 보면 나라마다 오래된 흙벽돌 교회, 통나무 교회, 상가 건물에 들어선 교회, 고딕 양식의 교회, 현대식 대성당 등 교회 공동체와 지역 문화만큼이나 많은 유형들이 있습니다. 교회 건물에는 성전 이외에도 주방과 친교실, 교실, 도서관 등 여러 시설이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들어 ‘대형교회’가 출현하면서 완전히 새롭고 훨씬 더 포괄적인 교회 ‘캠퍼스’(campus)가 등장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거대한 성전부터 도서관, 유치원, 식당, 카페 같은 부대시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 건축에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도교 공간 장식에 자주 사용되는 십자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이미지는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의 회화적 표현인 이콘인데, 그들은 이콘으로 예배 공간을 장식하고, 이콘을 집에 모시거나 일상 생활 중에 갖고 다니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구원 이야기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 기둥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과 인간의 교차적 존재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대중적인 한 찬송의 가사처럼 “오래된 거친 십자가”의 단순한 모양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하느님과 서로에게 향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사건을 재경험하는 의미의 십자가형 건물에 모여 예배합니다. 어떤 교회에는 아무런 장식 없이 벽에 돌출된 십자가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잠시 멈출 때, 손으로 ‘성호’(sign of the cross)를 그으면서 상징적으로 자신의 몸에 십자가를 새기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갈 때,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 제단으로 나아갈 때, 또는 집에서 식사하기 위해 앉을 때 성호를 긋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될 때 사제는 신자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어 주고, 부모는 잠자리에 누운 아이의 이마에 성호를 그어 줍니다. 성호는 축복이며, 참회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교단의 사제나 목사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거나 세례에 사용할 물을 축성할 때, 그리고 새로 세례 받는 그리스도인의 이마에도 성호를 긋습니다.
개신교 교회의 제단에 있는 십자가는 단순한 나무거나, 윤을 낸 황동이거나, 평범한 모양인 것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는 십자가는 죽음에 갇힐 수 없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전통은 십자가에 못 받힌 그리스도의 형상을 십자고상(十字苦像, crucifix)으로 재현됩니다. 이 십자고상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앙 여정에서 추구해야 할 희생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 십자고상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약속은 고난을 기적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정교회에서는 십자가 외에 이콘이라고 하는 그림이나 모자이크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787년 제7차 공의회 때부터 이런 그림은 십자가와 함께 거룩하고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콘은 그리스도, 삼위일체, 성모 마리아, 또는 성인들을 표현합니다. 영원을 향해 열려 있는 ‘창’(window)으로 이해되는 이콘은 시각적 형태를 통해 사람들의 눈을 신에게 향하게 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콘은 성육신 신비의 완전한 권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복음서 1:14). 이콘의 인간 형상은 이콘을 통해 숭배받는 하느님이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성화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정교회 그리스도인에게 인간 삶의 목표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 즉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일깨워주며, 이것이 바로 ‘신화’(神化, theosis)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정교회에서는 무리지어 행진하며 이콘을 운반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여러 작은 제단에 이콘을 모시기도 합니다. 이콘은 거룩한 이미지를 회중에게 생동감 있게 보여주거나, 사제가 성찬례를 준비할 때 성사적 신비를 가리는 성화벽(聖畵壁, iconostasis)에 그려져 걸립니다. 정교회 신자들의 가정에서도 중요한 곳이나 제단에 이콘을 모십니다.
미디어, 예술, 상업 세계의 이미지가 포화 상태에 이른 오늘날, 인간의 시각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성스러움을 향하게 하는 이콘의 힘은 정교회 교회 바깥에서도 인정받으며 환영받고 있습니다. 비잔틴 전통의 영감을 받았지만 정교회 신자는 아닌 오늘날의 일부 예술가들은 마틴 루서 킹 목사, 도로시 데이, 마하트마 간디 같은 현대 ‘성인’의 이콘도 만듭니다. 전통적 이콘과 현대적 이콘 모두 인간의 눈을 신에게 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으로”(창세기 1:26) 창조된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 의식(儀式)은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는 성찬식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제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실제 몸과 피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성찬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만찬을 상기시켜주는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 의례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가 가족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시켜 줍니다. 식탁에서 유대감을 나누는 것은 예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는 ‘내집단’(in-group)만이 아니라 사회의 죄인, 배제된 사람, 주변화된 사람과 식사로 교제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식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중심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토 10:17)라고 썼습니다.
‘성만찬’(Holy Communion) 또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고 불리는 의식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그리스어로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트’(Eucharist,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 가졌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느님께 감사드린 후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찬례 의식에서는 이때의 이야기를 읊습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고린토 11:23-25).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했던 말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성찬례에서 낭독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따르면,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의 ‘친교’는 교회 공동체의 친교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상징일까요?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하셔서 빵과 포도주가 성별(聖別)되는 것일까요?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현존이 공동체 안에, 그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성찬의 심오한 신비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어떤 이들은 작은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을 먹고 마시지만, 어떤 이들은 완전한 식사 형식으로 주의 만찬을 거행합니다. 대부분의 가톨릭과 정교회 교회는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지만, 19세기 금주령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 중에는 무알콜 대체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찬 해석에 대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든, 성찬식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땅에서 나는 빵이 몸을 튼튼하게 하는 것처럼 “생명의 빵”은 영을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매주일 성찬식을 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또는 교회력으로 정한 특별한 날에 거행합니다. 성공회, 제자교회, 루터교 교회는 거의 매 주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매일 미사의 절정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대부분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인의 필요와 일정에 맞춰 매일 여러 번 미사를 올립니다. 정교회는 ‘성찬예배’라고 부르는 의식을 매일, 매 주일 거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성찬의식을 거행합니다. 가톨릭과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는 청년이 교회 생활에 완전히 참여하는 견진성사 때 성찬 의식을 하고, 혼인성사 때 성찬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와 목사는 성별된 빵과 포도주를 병자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빈도와 방식이 무엇이든, 성찬식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성찬식 안에 그리스도교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드라마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성공회 성찬 예식사에 따르면 성찬례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는 성찬식은 화해와 봉사를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사명으로 끝이 납니다.
성서의 시편은 그리스도교 찬양의 기초가 되는 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성가에 기초한 교회의 음악적 전통은 예배 중에 시편의 시들을 노래합니다.
성서 안에는 ‘시편’이라 불리는 찬양집이 있습니다. 시편은 성서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기도와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찬양집은 1640년 보스턴에서 출판된 『베이 시편집』(Bay Psalm Book)이었습니다. 버지니아의 성공회 신자들은 시편을 읊는 단선율 전통을 지켜왔고,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그들의 고유한 운율의 ‘시편노래’(Psalmody)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성공회 교회 성가대들은 단선율 성가 전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50개의 기도와 노래를 포함한 시편은 다윗 왕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여러 세기에 걸쳐 수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에는 풍성함과 자비로 생명의 복을 주는 하느님께 가슴으로 노래하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또한 참회와 탄식의 시, 버림과 배반의 시, 분노와 정의로운 노여움을 표현하는 시도 있습ㄴ지다. 인간 감정의 폭만큼이나 넓고 다양한 시편의 내용은 시편이 왜 2,500여 년 동안 살아 있는 기도서로 소중히 여겨져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시편은 기쁨의 표현으로 가득하고, 절망의 때에 위안을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과 유대교 전통 모두 시편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시편을 읽거나 소리 내어 낭독하기도 했지만, 쉼표나 멜로디를 표기한 것을 보면 노래로 불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청원과 감사로, 예루살렘 순례의 찬양으로, 축제의 노래로 시편을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시편을 노래했으며, 가끔 현악기 반주도 곁들여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시편은 유대교 기도서와 전례에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편은 초대교회에서도 기도와 노래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000여년 동안 시편은 공동예배와 개인예배에서 기도로 사용되어 왔으며, 교회의 예배에서 교독으로 낭송됩니다. 7세기에 그레고리오 성가의 형태로 시작된 시편 노래는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일상 생활 리듬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수도원은 매일 다섯 번 또는 일곱 번 드리는 기도에 시편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으며, 매주 시편 150편 전체를 노래합니다. 정교회에서도 시편은 그리스 정교회의 비잔틴 성가나 러시아 정교회의 슬라브 성가와 같이 성찬예배를 통해 계속 생동하고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 전통이 영국 성공회 특유의 단선율 성가 또는 영창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편 교송(交誦)은 처음엔 성가대가 불렀는데, 나중엔 회중 예배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마찬가지로 단선율 성가는 반주 없이 불려집니다. 이 성가의 리듬은 고정된 박자가 아니라 시편 자체의 단어가 갖는 운율을 따릅니다. 단선율 시편 노래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와 같이 삼위일체적 찬가로 틀이 잡혀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단선율 성가 음반이 교회를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느리고 단순한 음악은 바쁜 세상에서 불안하게 서두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노래와 명상 사이의 시편 성가는 호흡의 흐름과 시의 리듬을 따릅니다. 베네딕도회 수사 데이비드 스타인들-라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편 성가의 운율적인 고요가 우리의 영혼에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순수하고 고요하면서도 솟구치는 시편 성가의 소리는 시끄럽고 산만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길을 알려줍니다. 그 길은 보이는 것처럼 멀리 있지 않아요.”
방언을 하는 오순절교회 신자로부터 고요한 수도원의 관상까지, 기도는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입니다. 기도는 공동체적일 수도 있고 개인적일 수도 있으며, 주기도문과 같이 확립된 문구, 혹은 즉흥적인 생각으로도 구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자세, 행동, 기도 환경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흑인교회의 기도전통에 대해 설명한 『하느님과의 대화』의 저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학자 제임스 M. 워싱턴은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대화의 인간적 측면은 여러 형식을 취합니다. 기도에는 봉헌 찬양 형식이 있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배에서는 부르심과 응답 형태의 기도 때 “하느님을 찬미하라!”와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는 감사의 언어도 있습니다. 워싱턴은 기도는 “우리 영혼의 별을 헤아리는 것”이고, “감사하나이다”와 같은 말은 영혼의 별인 하느님의 선물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면의 회개와 고백을 통해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원의 말로 그날의 당면한 필요와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집단으로든 개인으로든 기도는 마음의 의향이며, 의례적 행위만큼이나 존재의 방식입니다. 기도는 듣고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감사와 찬양과 회개와 청원의 기도를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교회에서나 일요일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에 언제 어디서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팔을 든 채 서서 기도하거나, 머리를 숙이고 앉아서 기도하는 등 기도에는 여러 자세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기도합니다. 최근 영국 성공회 교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도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아침에 달리기를 할 때, 수영장에서 수영할 때, 해변에서 산책할 때, 사무실에서 쉴 때 기도한다고 답했습니다. 미국 알래스카의 한 학교 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제 방으로 갑니다. 거기서 방문을 잠그고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바람, 구름, 우리가 걷는 땅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기도는 아주 오래되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외우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인 주기도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많은 기도는 성서, 특히 시편에서 직접 유래했습니다. 이 고대의 보고(寶庫)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기도의 말들을 가슴으로 반복합니다. 성공회의 공동기도서에는 ‘본기도’(Collects, 本祈禱)라고 하는 연중 모든 주, 모든 계절, 모든 경우를 위한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기도문들에서 깊은 의미를 찾습니다. 대림절 첫 주일에 성공회 교인은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게 하소서 …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문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그 의미에 깊이 의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슴으로부터 하는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헤지지 않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 특히 개혁교회, 복음주의교회, 오순절교회 전통의 그리스도인은 읽거나 암송하도록 정형화된 기도보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즉흥적 기도를 강조합니다. 이들은 교회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기 위해 자주 모입니다. 소그룹을 만들어 직접 만나 기도하거나, 온라인 기도 모임을 가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이 정치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거나, 세계 평화를 위한 특별한 목적의 기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오순절교회의 ‘방언’ 체험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오순절 때 체험한 ‘성령 세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언은 황홀경 상태에서 나오는 말로, 그것을 하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체험입니다.
고요하고 말이 없는 기도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기도는 ‘마음의 주의’를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침묵 명상 수행인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를 하기도 합니다. 향심기도는 신성한 단어나 구절을 반복하면서 깊은 고요에 이르는 것인데, 이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전통에서 공통적인 영적 수행의 한 형태입니다.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전통으로, 정교회와 가톨릭 전통의 수도생활을 통해 보존되어 온 것으로, 오늘날에는 평신도 사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토머스 머튼의 글들이 기도의 내적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지침서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머튼은 가톨릭 기도 전통만이 아니라 사막교부들과 정교회의 ‘마음의 기도’(‘예수 기도’)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는 불교 수행자들과도 친분을 갖고 그들의 명상 전통을 접하면서 동양의 영성도 탐구했습니다. 머튼은 그의 책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가 우리에게 명료해지는 내적 침묵”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가스펠 음악은 미국의 흑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발전했습니다. 노예들의 ‘링 샤우트’(ring-shout)에서 영향을 받은 가스펠 음악은 20세기에 도시 중심으로 옮겨갔고, 점차 종교적, 세속적 맥락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종교 경험은 항상 노래와 함께했으며, 그 노래는 미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음악 전통 중 하나인 가스펠 음악을 탄생시켰습니다. 위대한 영가(spiritual, 靈歌) 및 가스펠 가수 마할리아 잭슨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우리에겐 성가대도 오르간도 없었어요. 드럼, 심벌즈, 탬버린, 트라이앵글을 사용했죠. 우리는 노래하고 박수치고 발을 구르며 온몸으로 노래했어요. 우리에게는 노예 시절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박자감과 리듬감이 있었고, 음악은 아주 강렬하고 표현이 뛰어났어요. 그 음악을 듣다 보면 눈물이 흐르곤 했어요.”
가스펠 음악의 진화는 아프리카 노예의 음악 형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링 샤우트’라고 불리게 된 이 전통은 노래와 춤을 리드미컬한 박자로 결합시켰는데, 훗날 19세기 후반에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에 도입되었습니다. 이 음악은 설교 후의 함성, 박수, 링 댄스와 함께했습니다. 함께 노래하는 중의 ‘부름과 응답’ 양식은 찬양 인도자와 회중 사이의 독특한 교송이 되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를 통해 유행하면서 가스펠 음악의 주된 리듬이 되었습니다.
흑인 가스펠 음악은 신자들이 가슴으로 노래하는 전도 집회와 시골 교회의 영적 강렬함에서 탄생했습니다. 가스펠 음악은 보통 4부 화음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스미소니언 협회 의뢰로 가스펠 음악의 기원을 조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골에서 도시 공동체로 이동함에 따라 독특한 스타일과 레퍼토리가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로 20세기 도시에서 생긴 현상입니다. 도시 환경에서 기회와 고통을 경험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스미소니언 협회가 출간한 We’ll Understand It Better, By and By (머지않아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를 편집한 버니 존슨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도시 공동체에 변화의 꿈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한 과거의 많은 부분도 가져왔다. 그것은 낯설고, 종종 싸늘한 환경에서 뿌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탄탄한 지반을 제공해주는 전통이었다. 미국의 흑인음악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의 새로운 차원은 가스펠이라고 알려지게 된 도시 교회 음악의 발전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도시 교회의 맥락에서 흑인 회중의 강렬하고 즉흥적인 노래 형식은 새로운 음량, 스타일, 악기 사용을 수반하는 것으로 발전했습니다.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새로운 장르에서 부름-응답 형식이 꽃피었습니다. 〈In the Morning, When I Rise〉(아침에 내가 일어날 때)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 리더가 ‘In the morning’을 열정적으로 부르면 회중은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When I Rise’라 응답하며 교회를 뒤흔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쟁쟁한 작곡가들 또한 가스펠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찰스 A. 틴들리는 필라델피아의 감리교 설교자였는데, 그가 작곡한 “Stand By Me”(제 곁에 있어 주세요)와 “I‘ll Overcome Someday”(언젠가는 승리할 거야)와 같은 찬송가는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새로운 흑인 가스펠 음악의 대중적인 산물이 되었습니다. 루시 B. 캠벨은 미국침례교협의회의 고전 레퍼토리가 된 가스펠 노래들을 작곡했습니다. 토머스 A. 도시가 아내와 딸을 잃고 작곡한 “Precious Lord, Take My Hand”(존귀하신 주님, 제 손을 붙잡아 주세요)는 흑인 가스펠 레퍼토리에 블루스 스타일을 도입한 것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시카고가 가스펠 음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면서 ‘시카고 가스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흑인 가스펠 음악의 에너지와 리듬은 교회에서는 물론 순회 가스펠 합창단과 4중주단, 가스펠 스타일의 다양한 대중음악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아레사 프랭클린과 같은 스타들은 연예계에 가스펠의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가스펠 음악 협회는 매년 ‘도브 어워즈’를 개최하고 수상자를 가스펠 음악 명예의 전당에 올립니다. 하지만 가스펠 음악은 여전히 그 심장과 영혼의 중심을 가스펠 음악의 원천인 신앙 공동체, 즉 교회에 두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사회 정의를 위해 행동하라는 부르심으로 이해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선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식량, 주택, 의료 문제와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계로 나아갑니다.
한 그리스도인 자원봉사자는 봉사와 선교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남을 위한 봉사는 선택이 아닙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에서 예수는 ‘여러분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습니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감옥에 계신 것을 뵈었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미국 애틀랜타 중심부에 있는 클리프턴 쉼터 사역(Clifton Sanctuary Ministries) 회원들은 전에 교회였던 건물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야간 쉼터로 제공하기 위해 일 년 내내 문을 열면서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1979년 노숙자를 위한 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파이프 오르간도, 윤이 나는 의자도, 꽃으로 가득한 제단도 없었습니다. 주일에는 50명 정도의 작은 회중이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본당에 접이식 의자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공간은 매일 저녁 여섯 시에 저녁 식사와 휴식을 위해 찾아오는 30여 명의 노숙자를 위한 간이침대로 채워졌습니다. 전임 목사 캐리 버리스는 “그 공간은 두 가지 면에서 쉼터 역할을 합니다. 손님을 위한 물리적 쉼터이면서 그들과 우리 모두를 위한 영적 쉼터로 말이죠. 우리가 여기서 제공하려는 것은 그들을 친구처럼 환대하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깥 세상은 이들을 쓸모없고 가치없는 쓰레기처럼 대하지만, 여기서는 가치 있는 존재로, 사람으로 대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클리프턴 장로교회는 2003년에 문을 닫았지만, 그 교회가 시작한 주택과 환대 사역은 현재 26개 이상 협력단체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스스로를 ‘선교’ 공동체로 이해하는데, 이는 교회가 세상에 ‘파견된’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인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선교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해왔으며, 빈곤, 폭력, 불의를 일으키고 영속시키는 정치적, 경제적 구조에 도전해 왔습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타인을 섬기는 행동이 될 때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가장 강력해진다고 믿습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4주간의 절기입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크리스마스의 중요성은 크리스마스 캐롤, 산타클로스, 선물 교환 관습의 대중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력은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대림절이라고 알려진 4주간의 준비 기간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탄 전 몇 주는 단순히 크리스마스 명절의 설렘이 고조되는 기간이 아닙니다. 이 깨어있음과 기대의 시간은 2,000년 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가정에서는 이 준비 기간 동안 매주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을 상징하는 대림초를 밝힙니다. 대림절 첫 번째 일요일에 촛불 하나를 켜고, 두 번째 일요일에 두 개, 세 번째 일요일에 세 개를, 그리고 성탄절 직전 대림절 넷째 주일에는 네 개의 초를 모두 켭니다. 초를 키는 것은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절기인 동지에 불을 피우는 고대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4세기부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을 12월 25일로 정했는데, 원래 이날은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에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을 섬기는 로마인들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의 차이로 인해 오늘날 대부분의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은 1월 7일에 성탄절을 축하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초기부터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시기에 밝히는 초와 등불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온 빛을 상징합니다. 한 성탄절 성가는 “오소서, 오 아름다운 천상의 빛이여, 아침을 열어 주소서!”로 시작한다. 오늘날 성탄 트리와 집과 공공 건물을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전등은 빛의 고대적 상징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마스는 여러 전통이 혼합되고 진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해진 성탄 축하 행사가 된 것입니다. 19세기에는 독일 이민자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크리스마스 선물 전통을 가져오면서, 새해 선물을 주던 관습이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1823년 클레멘트 무어의 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키는 한 방식으로 크리스마스 레퍼토리에 추가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럽의 성 니콜라스는 신화와 상업을 통해 유쾌하고 너그러운 독특한 이미지의 ‘미국적’ 산타클로스로 변모했습니다. 19세기에 시작한 크리스마스의 상업화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고, 미국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크리스마스의 미국화는 1868년에 필립 브룩스가 작곡한 “오 베들레헴 작은 골”(O Little Town of Bethlehem)과 같은 인기 있는 캐롤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절기 내내 그리스도의 탄생이 캐롤로 불려지고, 이야기로 말해지고, 극으로 상연됩니다. 예수의 탄생 장면은 가정, 교회, 공원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신자들은 여관에서 방을 구하고 마구간에서 쉴 자리를 찾는 마리아와 요셉 역할을 맡아 크리스마스 연극을 합니다. 아이들을 포함해 회중은 잠시 목자와 천사가 되고, 멀리서 별을 보고 예물을 들고 찾아온 동방박사가 됩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주일까지 40일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은 공부, 기도, 금식, 또는 금욕을 통해 신앙을 굳건히 하는 여러 활동을 합니다. 사순절의 절제와 엄숙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의 기쁨과 대조됩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날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성직자는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이마에 재로 작은 십자가를 새겨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주일까지 40일 동안 지속되며, 일요일은 세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경험한 배반, 십자가 처형, 죽음, 부활 등 성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금식과 기도를 통해 스스로를 준비하는 엄숙한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참회하고 금욕하며 준비하는 교회의 중요한 절기로, 예수가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보낸 40일에 해당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주일에 거행하는 세례 예식 전에 교육과 교리문답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준비시키는 입문 기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순절은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며 그리스도인이 공부와 성찰, 금식과 금욕을 통해 신앙을 굳건히 하는 때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이나 매일 기도할 것을 권장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은 육류, 생선, 유제품을 금하는 것을 포함해 사순절 금식을 엄수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는 성주간(Holy Week) 또는 고난주간(Passion Week)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에 예배자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사건을 단계적으로 재경험합니다. 성주간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내는 종려주일에 시작합니다. 이날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 앞에 종려나무 가지를 펼쳐 놓고 환호했습니다. 전 세계 교회에서는 회중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나누어 주고, 교인들은 승리와 희망을 나타내는 종려나무 가지를 높이 듭니다. 성주간의 ‘성목요일’(Maundy Thursday)에는 많은 교회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을 지킵니다. 일부 전통에서 성목요일은 부활주일 전에 성찬식을 위해 빵과 포도주를 성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또한 가톨릭, 정교회 및 일부 개신교 교회에서는 성목요일에 예수가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사제가 공동체 구성원의 발을 씻깁니다.
성금요일에는 많은 교회에서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세 시간 동안 기도합니다. 이 시간은 그리스도가 죽기 전 십자가에 매달렸던 시간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금요일에 십자가를 경건하게 바라보고, 때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에서 행진을 하기도 합니다. 남미와 중남미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성금요일에 거리에서 ‘십자가의 길’ 순례를 행합니다. 이 순례길에서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지역사회에서 서로를 돕는 활동에 참여하는 곳을 지나면서 잠시 멈춰 기도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성금요일 예배 후 제단을 덮은 천을 벗기고 십자가를 천으로 가립니다. 목요일이나 금요일 밤에 일부 교회는 ‘어둠’을 뜻하는 ‘테네브레’(Tenebrae)라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때 보통 구약성서의 「예레미야의 애가(哀歌)」를 낭독합니다. 촛불이 하나둘 꺼지면, 사람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 교회를 나섭니다. 교회 종은 울리지 않고 부활절 아침까지 침묵을 유지합니다. 부활절 때 슬픔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부활주일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큰 축제입니다. 예수의 죽음 사흘 뒤, 그를 따르던 몇 명의 여성이 그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나 목사는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며, 빈 무덤에서 여성들이 발견한 것을 그대로 되풀이해 외칩니다. 회중은 “그분께서 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라며 응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는 토요일 늦은 밤이나 아직 어두운 부활주일 새벽에 기도회를 엽니다.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전통을 기억하며, 목요일 밤 이후로 초를 밝히지 않은 어두운 교회에 신자들이 모입니다. 사제는 문 앞에서 새로 초에 불을 붙이며 “영광 속에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의 어두움을 몰아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부활절 초를 들고 어두운 성전으로 들어가며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외칩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전 자정에 종을 울립니다. 부활주일 아침 기도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나타내는 어둑한 교회 주변을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윽고 교회 문이 열리고 사제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신자들은 “그분께서 참으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새벽 첫 여명이 밝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북미와 남미에서는 부활절 새벽예배를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야외에서 드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 새벽에 여러 교회가 함께하는 연합예배를 거행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새 날과 새 생명의 여명은 부활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부활주일 아침, 신자들이 교회를 가득 채웁니다. 이들은 감리교의 창시자 중 하나인 찰스 웨슬리가 작곡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를 부릅니다.
부활절은 부활, 거듭남, 생명의 쇄신을 기념합니다. 부활절 예배는 보통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위한 세례와 견진의식을 포함합니다. 부활절의 쇄신이라는 주제 또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활절의 종교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부활절 달걀은 사실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던 초대교회 유산의 일부입니다. 오늘의 부활절에는 그리스도교적 주제와 세속적 표현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을 보면, 여전히 종교적 관심이 부활절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의식은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세례를 모델로 합니다. 세례의식은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표시로 몸을 물에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담그기도 합니다. 어떤 교단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만, 어떤 교단은 세례를 받는 이가 예수를 따를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례는 죽음과 재생의 의례로, 낡은 존재가 죽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해 “거듭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교 전통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이나 바다에서 거행하는 세례식은 세계가 창조되기 전의 형태 없는 깊은 물로 가라앉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세례받는 사람은 물속에 잠겼다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올라옵니다. 세례는 바다, 강, 호수에서, 또는 교회 안에 마련한 수조에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세례는 물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 대신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방식으로 거행됩니다. 물속에 잠기든 물을 뿌리든, 세례식은 요단강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세례받는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태어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입문하는 중요 의식입니다.
교회의 세례는 방식만 다양한 게 아니라 세례를 받는 연령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유아 세례를 행하는데, 이 의식은 공식적으로 아이에게 ‘세례명’을 주는 절차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일부 전통에서는 부모와 대부모(godparents)가 아이가 청소년이 되어 ‘견진성사’를 통해 스스로 신앙을 재확인할 때까지 아이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침례교 교회와 재세례파 전통을 따르는 교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합니다. 침례교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는 세례는 세례받는 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만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회심 체험이 세례의식에 선행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본인 스스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회심의 표시로써 세례를 원하고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세례를 연기합니다. 퀘이커와 같은 소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에 의한 내적 변화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외적 형태의 세례도 거행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태어날 때 받든지 스스로의 결정으로 받든지 간에, 세례 경험은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은 세계의 곳곳의 성지들에서 나타납니다. 미국, 특히 남미의 히스패닉계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가 멕시코의 토착 성모로 현현했다는 과달루페 성모를 특별히 공경합니다. 이 과달루페 성모는 북미와 남미 대륙 모두의 수호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민 등 세계적 이주에 따라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마리아 신앙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다양한 현현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국립 대성당’의 거대한 공간에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일찍이 1846년에 성모 마리아는 미국의 수호자로 선택되었습니다. 40년 간의 공사 끝에 1959년 이 국립 대성당이 봉헌된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교회 행사였습니다. 성당의 중심 성소는 1858년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젊은 여성에게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프랑스 루르드의 동굴을 복제한 것입니다. 측면 제단에는 레바논의 성모,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모, 남인도에서 온 가톨릭 이민자들이 공경하는 바일란카니 성모 등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이 공경하는 성모상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아메리카 대륙에 속하는 성모 마리아의 현현이 있습니다. 바로 과달루페의 성모입니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이 성모는 1531년에 개종한 아즈텍 사람 후안 디에고에게 처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때는 코르테제가 아름다운 호수 도시 테노치틀란을 처음 발견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후안 디에고의 환영에 대한 이야기는 아즈텍 토착언어 나와틀어로 처음 기록되었습니다. 성모는 토난친(Tonantzin)이라는 여신에게 바쳐진 테페약 언덕에서 후안 디에고에게 나타났는데, 디에고는 자기 같은 원주민 소작농의 말을 누가 믿겠냐며 성모에게 징표를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성모는 그에게 제철도 아니었는데 언덕에 핀 장미를 따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장미로 가득한 망토를 주교에게 건넸을 때, 그 망토에 세밀하게 새겨진 성모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 성모는 백인 스페인 성모가 아니라 원주민 성모였습니다. 이 사건 후 400년 동안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1810년 미구엘 이달고 신부는 과달루페 성모의 깃발을 들고 멕시코 독립을 외쳤습니다. 과달루페 성모의 성화가 새겨진 후안 디에고의 망토는 여전히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 제단 위에 영광스럽게 놓여있습니다. 1910년 바티칸은 과달루페 성모를 멕시코만이 아니라 모든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교회’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단일 교회 회중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그리스도인에 이르는)와, 그리스도인이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건물’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교회의 구조와 규모는 하나의 작은 공간으로 되어 있는 성전에서 거대한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교회’는 건물이자 공동체이며 공간이자 정신입니다. 공동체의 정신은 공동체가 모여 함께하는 의례를 통해 생겨나고 표현됩니다. 사제는 밝은 미소로 회중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말합니다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회중은 응답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사제는 손짓을 하며 말합니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그러면 교인들은 따뜻하게 악수하거나 포옹하면서 서로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예배를 위한 모임을 ‘교회’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와 서로에 대한 공유된 헌신의 정신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란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건물을 보면 나라마다 오래된 흙벽돌 교회, 통나무 교회, 상가 건물에 들어선 교회, 고딕 양식의 교회, 현대식 대성당 등 교회 공동체와 지역 문화만큼이나 많은 유형들이 있습니다. 교회 건물에는 성전 이외에도 주방과 친교실, 교실, 도서관 등 여러 시설이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들어 ‘대형교회’가 출현하면서 완전히 새롭고 훨씬 더 포괄적인 교회 ‘캠퍼스’(campus)가 등장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거대한 성전부터 도서관, 유치원, 식당, 카페 같은 부대시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 건축에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도교 공간 장식에 자주 사용되는 십자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이미지는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의 회화적 표현인 이콘인데, 그들은 이콘으로 예배 공간을 장식하고, 이콘을 집에 모시거나 일상 생활 중에 갖고 다니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구원 이야기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 기둥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과 인간의 교차적 존재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대중적인 한 찬송의 가사처럼 “오래된 거친 십자가”의 단순한 모양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하느님과 서로에게 향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사건을 재경험하는 의미의 십자가형 건물에 모여 예배합니다. 어떤 교회에는 아무런 장식 없이 벽에 돌출된 십자가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잠시 멈출 때, 손으로 ‘성호’(sign of the cross)를 그으면서 상징적으로 자신의 몸에 십자가를 새기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갈 때,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 제단으로 나아갈 때, 또는 집에서 식사하기 위해 앉을 때 성호를 긋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될 때 사제는 신자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어 주고, 부모는 잠자리에 누운 아이의 이마에 성호를 그어 줍니다. 성호는 축복이며, 참회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교단의 사제나 목사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거나 세례에 사용할 물을 축성할 때, 그리고 새로 세례 받는 그리스도인의 이마에도 성호를 긋습니다.
개신교 교회의 제단에 있는 십자가는 단순한 나무거나, 윤을 낸 황동이거나, 평범한 모양인 것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는 십자가는 죽음에 갇힐 수 없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전통은 십자가에 못 받힌 그리스도의 형상을 십자고상(十字苦像, crucifix)으로 재현됩니다. 이 십자고상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앙 여정에서 추구해야 할 희생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 십자고상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약속은 고난을 기적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정교회에서는 십자가 외에 이콘이라고 하는 그림이나 모자이크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787년 제7차 공의회 때부터 이런 그림은 십자가와 함께 거룩하고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콘은 그리스도, 삼위일체, 성모 마리아, 또는 성인들을 표현합니다. 영원을 향해 열려 있는 ‘창’(window)으로 이해되는 이콘은 시각적 형태를 통해 사람들의 눈을 신에게 향하게 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콘은 성육신 신비의 완전한 권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복음서 1:14). 이콘의 인간 형상은 이콘을 통해 숭배받는 하느님이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성화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정교회 그리스도인에게 인간 삶의 목표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 즉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일깨워주며, 이것이 바로 ‘신화’(神化, theosis)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정교회에서는 무리지어 행진하며 이콘을 운반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여러 작은 제단에 이콘을 모시기도 합니다. 이콘은 거룩한 이미지를 회중에게 생동감 있게 보여주거나, 사제가 성찬례를 준비할 때 성사적 신비를 가리는 성화벽(聖畵壁, iconostasis)에 그려져 걸립니다. 정교회 신자들의 가정에서도 중요한 곳이나 제단에 이콘을 모십니다.
미디어, 예술, 상업 세계의 이미지가 포화 상태에 이른 오늘날, 인간의 시각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성스러움을 향하게 하는 이콘의 힘은 정교회 교회 바깥에서도 인정받으며 환영받고 있습니다. 비잔틴 전통의 영감을 받았지만 정교회 신자는 아닌 오늘날의 일부 예술가들은 마틴 루서 킹 목사, 도로시 데이, 마하트마 간디 같은 현대 ‘성인’의 이콘도 만듭니다. 전통적 이콘과 현대적 이콘 모두 인간의 눈을 신에게 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으로”(창세기 1:26) 창조된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 의식(儀式)은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는 성찬식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제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실제 몸과 피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성찬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만찬을 상기시켜주는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 의례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가 가족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시켜 줍니다. 식탁에서 유대감을 나누는 것은 예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는 ‘내집단’(in-group)만이 아니라 사회의 죄인, 배제된 사람, 주변화된 사람과 식사로 교제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식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중심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토 10:17)라고 썼습니다.
‘성만찬’(Holy Communion) 또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고 불리는 의식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그리스어로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트’(Eucharist,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 가졌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느님께 감사드린 후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찬례 의식에서는 이때의 이야기를 읊습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고린토 11:23-25).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했던 말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성찬례에서 낭독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따르면,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의 ‘친교’는 교회 공동체의 친교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상징일까요?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하셔서 빵과 포도주가 성별(聖別)되는 것일까요?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현존이 공동체 안에, 그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성찬의 심오한 신비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어떤 이들은 작은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을 먹고 마시지만, 어떤 이들은 완전한 식사 형식으로 주의 만찬을 거행합니다. 대부분의 가톨릭과 정교회 교회는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지만, 19세기 금주령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 중에는 무알콜 대체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찬 해석에 대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든, 성찬식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땅에서 나는 빵이 몸을 튼튼하게 하는 것처럼 “생명의 빵”은 영을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매주일 성찬식을 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또는 교회력으로 정한 특별한 날에 거행합니다. 성공회, 제자교회, 루터교 교회는 거의 매 주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매일 미사의 절정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대부분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인의 필요와 일정에 맞춰 매일 여러 번 미사를 올립니다. 정교회는 ‘성찬예배’라고 부르는 의식을 매일, 매 주일 거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성찬의식을 거행합니다. 가톨릭과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는 청년이 교회 생활에 완전히 참여하는 견진성사 때 성찬 의식을 하고, 혼인성사 때 성찬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와 목사는 성별된 빵과 포도주를 병자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빈도와 방식이 무엇이든, 성찬식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성찬식 안에 그리스도교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드라마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성공회 성찬 예식사에 따르면 성찬례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는 성찬식은 화해와 봉사를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사명으로 끝이 납니다.
성서의 시편은 그리스도교 찬양의 기초가 되는 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성가에 기초한 교회의 음악적 전통은 예배 중에 시편의 시들을 노래합니다.
성서 안에는 ‘시편’이라 불리는 찬양집이 있습니다. 시편은 성서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기도와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찬양집은 1640년 보스턴에서 출판된 『베이 시편집』(Bay Psalm Book)이었습니다. 버지니아의 성공회 신자들은 시편을 읊는 단선율 전통을 지켜왔고,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그들의 고유한 운율의 ‘시편노래’(Psalmody)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성공회 교회 성가대들은 단선율 성가 전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50개의 기도와 노래를 포함한 시편은 다윗 왕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여러 세기에 걸쳐 수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에는 풍성함과 자비로 생명의 복을 주는 하느님께 가슴으로 노래하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또한 참회와 탄식의 시, 버림과 배반의 시, 분노와 정의로운 노여움을 표현하는 시도 있습ㄴ지다. 인간 감정의 폭만큼이나 넓고 다양한 시편의 내용은 시편이 왜 2,500여 년 동안 살아 있는 기도서로 소중히 여겨져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시편은 기쁨의 표현으로 가득하고, 절망의 때에 위안을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과 유대교 전통 모두 시편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시편을 읽거나 소리 내어 낭독하기도 했지만, 쉼표나 멜로디를 표기한 것을 보면 노래로 불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청원과 감사로, 예루살렘 순례의 찬양으로, 축제의 노래로 시편을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시편을 노래했으며, 가끔 현악기 반주도 곁들여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시편은 유대교 기도서와 전례에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편은 초대교회에서도 기도와 노래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000여년 동안 시편은 공동예배와 개인예배에서 기도로 사용되어 왔으며, 교회의 예배에서 교독으로 낭송됩니다. 7세기에 그레고리오 성가의 형태로 시작된 시편 노래는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일상 생활 리듬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수도원은 매일 다섯 번 또는 일곱 번 드리는 기도에 시편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으며, 매주 시편 150편 전체를 노래합니다. 정교회에서도 시편은 그리스 정교회의 비잔틴 성가나 러시아 정교회의 슬라브 성가와 같이 성찬예배를 통해 계속 생동하고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 전통이 영국 성공회 특유의 단선율 성가 또는 영창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편 교송(交誦)은 처음엔 성가대가 불렀는데, 나중엔 회중 예배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마찬가지로 단선율 성가는 반주 없이 불려집니다. 이 성가의 리듬은 고정된 박자가 아니라 시편 자체의 단어가 갖는 운율을 따릅니다. 단선율 시편 노래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와 같이 삼위일체적 찬가로 틀이 잡혀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단선율 성가 음반이 교회를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느리고 단순한 음악은 바쁜 세상에서 불안하게 서두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노래와 명상 사이의 시편 성가는 호흡의 흐름과 시의 리듬을 따릅니다. 베네딕도회 수사 데이비드 스타인들-라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편 성가의 운율적인 고요가 우리의 영혼에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순수하고 고요하면서도 솟구치는 시편 성가의 소리는 시끄럽고 산만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길을 알려줍니다. 그 길은 보이는 것처럼 멀리 있지 않아요.”
방언을 하는 오순절교회 신자로부터 고요한 수도원의 관상까지, 기도는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입니다. 기도는 공동체적일 수도 있고 개인적일 수도 있으며, 주기도문과 같이 확립된 문구, 혹은 즉흥적인 생각으로도 구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자세, 행동, 기도 환경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흑인교회의 기도전통에 대해 설명한 『하느님과의 대화』의 저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학자 제임스 M. 워싱턴은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대화의 인간적 측면은 여러 형식을 취합니다. 기도에는 봉헌 찬양 형식이 있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배에서는 부르심과 응답 형태의 기도 때 “하느님을 찬미하라!”와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는 감사의 언어도 있습니다. 워싱턴은 기도는 “우리 영혼의 별을 헤아리는 것”이고, “감사하나이다”와 같은 말은 영혼의 별인 하느님의 선물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면의 회개와 고백을 통해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원의 말로 그날의 당면한 필요와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집단으로든 개인으로든 기도는 마음의 의향이며, 의례적 행위만큼이나 존재의 방식입니다. 기도는 듣고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감사와 찬양과 회개와 청원의 기도를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교회에서나 일요일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에 언제 어디서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팔을 든 채 서서 기도하거나, 머리를 숙이고 앉아서 기도하는 등 기도에는 여러 자세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기도합니다. 최근 영국 성공회 교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도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아침에 달리기를 할 때, 수영장에서 수영할 때, 해변에서 산책할 때, 사무실에서 쉴 때 기도한다고 답했습니다. 미국 알래스카의 한 학교 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제 방으로 갑니다. 거기서 방문을 잠그고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바람, 구름, 우리가 걷는 땅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기도는 아주 오래되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외우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인 주기도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많은 기도는 성서, 특히 시편에서 직접 유래했습니다. 이 고대의 보고(寶庫)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기도의 말들을 가슴으로 반복합니다. 성공회의 공동기도서에는 ‘본기도’(Collects, 本祈禱)라고 하는 연중 모든 주, 모든 계절, 모든 경우를 위한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기도문들에서 깊은 의미를 찾습니다. 대림절 첫 주일에 성공회 교인은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게 하소서 …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문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그 의미에 깊이 의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슴으로부터 하는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헤지지 않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 특히 개혁교회, 복음주의교회, 오순절교회 전통의 그리스도인은 읽거나 암송하도록 정형화된 기도보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즉흥적 기도를 강조합니다. 이들은 교회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기 위해 자주 모입니다. 소그룹을 만들어 직접 만나 기도하거나, 온라인 기도 모임을 가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이 정치를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거나, 세계 평화를 위한 특별한 목적의 기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오순절교회의 ‘방언’ 체험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오순절 때 체험한 ‘성령 세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언은 황홀경 상태에서 나오는 말로, 그것을 하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체험입니다.
고요하고 말이 없는 기도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기도는 ‘마음의 주의’를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침묵 명상 수행인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를 하기도 합니다. 향심기도는 신성한 단어나 구절을 반복하면서 깊은 고요에 이르는 것인데, 이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전통에서 공통적인 영적 수행의 한 형태입니다.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전통으로, 정교회와 가톨릭 전통의 수도생활을 통해 보존되어 온 것으로, 오늘날에는 평신도 사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토머스 머튼의 글들이 기도의 내적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지침서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머튼은 가톨릭 기도 전통만이 아니라 사막교부들과 정교회의 ‘마음의 기도’(‘예수 기도’)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는 불교 수행자들과도 친분을 갖고 그들의 명상 전통을 접하면서 동양의 영성도 탐구했습니다. 머튼은 그의 책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가 우리에게 명료해지는 내적 침묵”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가스펠 음악은 미국의 흑인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발전했습니다. 노예들의 ‘링 샤우트’(ring-shout)에서 영향을 받은 가스펠 음악은 20세기에 도시 중심으로 옮겨갔고, 점차 종교적, 세속적 맥락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종교 경험은 항상 노래와 함께했으며, 그 노래는 미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음악 전통 중 하나인 가스펠 음악을 탄생시켰습니다. 위대한 영가(spiritual, 靈歌) 및 가스펠 가수 마할리아 잭슨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우리에겐 성가대도 오르간도 없었어요. 드럼, 심벌즈, 탬버린, 트라이앵글을 사용했죠. 우리는 노래하고 박수치고 발을 구르며 온몸으로 노래했어요. 우리에게는 노예 시절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박자감과 리듬감이 있었고, 음악은 아주 강렬하고 표현이 뛰어났어요. 그 음악을 듣다 보면 눈물이 흐르곤 했어요.”
가스펠 음악의 진화는 아프리카 노예의 음악 형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링 샤우트’라고 불리게 된 이 전통은 노래와 춤을 리드미컬한 박자로 결합시켰는데, 훗날 19세기 후반에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에 도입되었습니다. 이 음악은 설교 후의 함성, 박수, 링 댄스와 함께했습니다. 함께 노래하는 중의 ‘부름과 응답’ 양식은 찬양 인도자와 회중 사이의 독특한 교송이 되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를 통해 유행하면서 가스펠 음악의 주된 리듬이 되었습니다.
흑인 가스펠 음악은 신자들이 가슴으로 노래하는 전도 집회와 시골 교회의 영적 강렬함에서 탄생했습니다. 가스펠 음악은 보통 4부 화음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스미소니언 협회 의뢰로 가스펠 음악의 기원을 조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골에서 도시 공동체로 이동함에 따라 독특한 스타일과 레퍼토리가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로 20세기 도시에서 생긴 현상입니다. 도시 환경에서 기회와 고통을 경험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스미소니언 협회가 출간한 We’ll Understand It Better, By and By (머지않아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를 편집한 버니 존슨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도시 공동체에 변화의 꿈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한 과거의 많은 부분도 가져왔다. 그것은 낯설고, 종종 싸늘한 환경에서 뿌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탄탄한 지반을 제공해주는 전통이었다. 미국의 흑인음악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의 새로운 차원은 가스펠이라고 알려지게 된 도시 교회 음악의 발전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도시 교회의 맥락에서 흑인 회중의 강렬하고 즉흥적인 노래 형식은 새로운 음량, 스타일, 악기 사용을 수반하는 것으로 발전했습니다.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새로운 장르에서 부름-응답 형식이 꽃피었습니다. 〈In the Morning, When I Rise〉(아침에 내가 일어날 때)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 리더가 ‘In the morning’을 열정적으로 부르면 회중은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When I Rise’라 응답하며 교회를 뒤흔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쟁쟁한 작곡가들 또한 가스펠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찰스 A. 틴들리는 필라델피아의 감리교 설교자였는데, 그가 작곡한 “Stand By Me”(제 곁에 있어 주세요)와 “I‘ll Overcome Someday”(언젠가는 승리할 거야)와 같은 찬송가는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새로운 흑인 가스펠 음악의 대중적인 산물이 되었습니다. 루시 B. 캠벨은 미국침례교협의회의 고전 레퍼토리가 된 가스펠 노래들을 작곡했습니다. 토머스 A. 도시가 아내와 딸을 잃고 작곡한 “Precious Lord, Take My Hand”(존귀하신 주님, 제 손을 붙잡아 주세요)는 흑인 가스펠 레퍼토리에 블루스 스타일을 도입한 것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시카고가 가스펠 음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면서 ‘시카고 가스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흑인 가스펠 음악의 에너지와 리듬은 교회에서는 물론 순회 가스펠 합창단과 4중주단, 가스펠 스타일의 다양한 대중음악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아레사 프랭클린과 같은 스타들은 연예계에 가스펠의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가스펠 음악 협회는 매년 ‘도브 어워즈’를 개최하고 수상자를 가스펠 음악 명예의 전당에 올립니다. 하지만 가스펠 음악은 여전히 그 심장과 영혼의 중심을 가스펠 음악의 원천인 신앙 공동체, 즉 교회에 두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사회 정의를 위해 행동하라는 부르심으로 이해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선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식량, 주택, 의료 문제와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계로 나아갑니다.
한 그리스도인 자원봉사자는 봉사와 선교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남을 위한 봉사는 선택이 아닙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에서 예수는 ‘여러분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습니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감옥에 계신 것을 뵈었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미국 애틀랜타 중심부에 있는 클리프턴 쉼터 사역(Clifton Sanctuary Ministries) 회원들은 전에 교회였던 건물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야간 쉼터로 제공하기 위해 일 년 내내 문을 열면서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1979년 노숙자를 위한 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파이프 오르간도, 윤이 나는 의자도, 꽃으로 가득한 제단도 없었습니다. 주일에는 50명 정도의 작은 회중이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본당에 접이식 의자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공간은 매일 저녁 여섯 시에 저녁 식사와 휴식을 위해 찾아오는 30여 명의 노숙자를 위한 간이침대로 채워졌습니다. 전임 목사 캐리 버리스는 “그 공간은 두 가지 면에서 쉼터 역할을 합니다. 손님을 위한 물리적 쉼터이면서 그들과 우리 모두를 위한 영적 쉼터로 말이죠. 우리가 여기서 제공하려는 것은 그들을 친구처럼 환대하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깥 세상은 이들을 쓸모없고 가치없는 쓰레기처럼 대하지만, 여기서는 가치 있는 존재로, 사람으로 대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클리프턴 장로교회는 2003년에 문을 닫았지만, 그 교회가 시작한 주택과 환대 사역은 현재 26개 이상 협력단체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스스로를 ‘선교’ 공동체로 이해하는데, 이는 교회가 세상에 ‘파견된’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인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선교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해왔으며, 빈곤, 폭력, 불의를 일으키고 영속시키는 정치적, 경제적 구조에 도전해 왔습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타인을 섬기는 행동이 될 때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가장 강력해진다고 믿습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4주간의 절기입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크리스마스의 중요성은 크리스마스 캐롤, 산타클로스, 선물 교환 관습의 대중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력은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대림절이라고 알려진 4주간의 준비 기간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탄 전 몇 주는 단순히 크리스마스 명절의 설렘이 고조되는 기간이 아닙니다. 이 깨어있음과 기대의 시간은 2,000년 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가정에서는 이 준비 기간 동안 매주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을 상징하는 대림초를 밝힙니다. 대림절 첫 번째 일요일에 촛불 하나를 켜고, 두 번째 일요일에 두 개, 세 번째 일요일에 세 개를, 그리고 성탄절 직전 대림절 넷째 주일에는 네 개의 초를 모두 켭니다. 초를 키는 것은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절기인 동지에 불을 피우는 고대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4세기부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을 12월 25일로 정했는데, 원래 이날은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에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을 섬기는 로마인들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의 차이로 인해 오늘날 대부분의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은 1월 7일에 성탄절을 축하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초기부터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시기에 밝히는 초와 등불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온 빛을 상징합니다. 한 성탄절 성가는 “오소서, 오 아름다운 천상의 빛이여, 아침을 열어 주소서!”로 시작한다. 오늘날 성탄 트리와 집과 공공 건물을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전등은 빛의 고대적 상징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마스는 여러 전통이 혼합되고 진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해진 성탄 축하 행사가 된 것입니다. 19세기에는 독일 이민자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크리스마스 선물 전통을 가져오면서, 새해 선물을 주던 관습이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1823년 클레멘트 무어의 시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키는 한 방식으로 크리스마스 레퍼토리에 추가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럽의 성 니콜라스는 신화와 상업을 통해 유쾌하고 너그러운 독특한 이미지의 ‘미국적’ 산타클로스로 변모했습니다. 19세기에 시작한 크리스마스의 상업화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고, 미국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크리스마스의 미국화는 1868년에 필립 브룩스가 작곡한 “오 베들레헴 작은 골”(O Little Town of Bethlehem)과 같은 인기 있는 캐롤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절기 내내 그리스도의 탄생이 캐롤로 불려지고, 이야기로 말해지고, 극으로 상연됩니다. 예수의 탄생 장면은 가정, 교회, 공원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신자들은 여관에서 방을 구하고 마구간에서 쉴 자리를 찾는 마리아와 요셉 역할을 맡아 크리스마스 연극을 합니다. 아이들을 포함해 회중은 잠시 목자와 천사가 되고, 멀리서 별을 보고 예물을 들고 찾아온 동방박사가 됩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주일까지 40일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은 공부, 기도, 금식, 또는 금욕을 통해 신앙을 굳건히 하는 여러 활동을 합니다. 사순절의 절제와 엄숙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의 기쁨과 대조됩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날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성직자는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이마에 재로 작은 십자가를 새겨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주일까지 40일 동안 지속되며, 일요일은 세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경험한 배반, 십자가 처형, 죽음, 부활 등 성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금식과 기도를 통해 스스로를 준비하는 엄숙한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참회하고 금욕하며 준비하는 교회의 중요한 절기로, 예수가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보낸 40일에 해당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주일에 거행하는 세례 예식 전에 교육과 교리문답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준비시키는 입문 기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순절은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며 그리스도인이 공부와 성찰, 금식과 금욕을 통해 신앙을 굳건히 하는 때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이나 매일 기도할 것을 권장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은 육류, 생선, 유제품을 금하는 것을 포함해 사순절 금식을 엄수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는 성주간(Holy Week) 또는 고난주간(Passion Week)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에 예배자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사건을 단계적으로 재경험합니다. 성주간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내는 종려주일에 시작합니다. 이날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 앞에 종려나무 가지를 펼쳐 놓고 환호했습니다. 전 세계 교회에서는 회중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나누어 주고, 교인들은 승리와 희망을 나타내는 종려나무 가지를 높이 듭니다. 성주간의 ‘성목요일’(Maundy Thursday)에는 많은 교회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을 지킵니다. 일부 전통에서 성목요일은 부활주일 전에 성찬식을 위해 빵과 포도주를 성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또한 가톨릭, 정교회 및 일부 개신교 교회에서는 성목요일에 예수가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사제가 공동체 구성원의 발을 씻깁니다.
성금요일에는 많은 교회에서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세 시간 동안 기도합니다. 이 시간은 그리스도가 죽기 전 십자가에 매달렸던 시간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금요일에 십자가를 경건하게 바라보고, 때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에서 행진을 하기도 합니다. 남미와 중남미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성금요일에 거리에서 ‘십자가의 길’ 순례를 행합니다. 이 순례길에서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지역사회에서 서로를 돕는 활동에 참여하는 곳을 지나면서 잠시 멈춰 기도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성금요일 예배 후 제단을 덮은 천을 벗기고 십자가를 천으로 가립니다. 목요일이나 금요일 밤에 일부 교회는 ‘어둠’을 뜻하는 ‘테네브레’(Tenebrae)라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때 보통 구약성서의 「예레미야의 애가(哀歌)」를 낭독합니다. 촛불이 하나둘 꺼지면, 사람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 교회를 나섭니다. 교회 종은 울리지 않고 부활절 아침까지 침묵을 유지합니다. 부활절 때 슬픔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부활주일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큰 축제입니다. 예수의 죽음 사흘 뒤, 그를 따르던 몇 명의 여성이 그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나 목사는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며, 빈 무덤에서 여성들이 발견한 것을 그대로 되풀이해 외칩니다. 회중은 “그분께서 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라며 응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는 토요일 늦은 밤이나 아직 어두운 부활주일 새벽에 기도회를 엽니다.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전통을 기억하며, 목요일 밤 이후로 초를 밝히지 않은 어두운 교회에 신자들이 모입니다. 사제는 문 앞에서 새로 초에 불을 붙이며 “영광 속에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의 어두움을 몰아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부활절 초를 들고 어두운 성전으로 들어가며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외칩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전 자정에 종을 울립니다. 부활주일 아침 기도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나타내는 어둑한 교회 주변을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윽고 교회 문이 열리고 사제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신자들은 “그분께서 참으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새벽 첫 여명이 밝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북미와 남미에서는 부활절 새벽예배를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야외에서 드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 새벽에 여러 교회가 함께하는 연합예배를 거행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새 날과 새 생명의 여명은 부활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부활주일 아침, 신자들이 교회를 가득 채웁니다. 이들은 감리교의 창시자 중 하나인 찰스 웨슬리가 작곡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를 부릅니다.
부활절은 부활, 거듭남, 생명의 쇄신을 기념합니다. 부활절 예배는 보통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위한 세례와 견진의식을 포함합니다. 부활절의 쇄신이라는 주제 또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활절의 종교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부활절 달걀은 사실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여겼던 초대교회 유산의 일부입니다. 오늘의 부활절에는 그리스도교적 주제와 세속적 표현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을 보면, 여전히 종교적 관심이 부활절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의식은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세례를 모델로 합니다. 세례의식은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표시로 몸을 물에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담그기도 합니다. 어떤 교단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만, 어떤 교단은 세례를 받는 이가 예수를 따를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례는 죽음과 재생의 의례로, 낡은 존재가 죽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해 “거듭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교 전통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이나 바다에서 거행하는 세례식은 세계가 창조되기 전의 형태 없는 깊은 물로 가라앉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세례받는 사람은 물속에 잠겼다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올라옵니다. 세례는 바다, 강, 호수에서, 또는 교회 안에 마련한 수조에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세례는 물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 대신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방식으로 거행됩니다. 물속에 잠기든 물을 뿌리든, 세례식은 요단강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세례받는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태어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입문하는 중요 의식입니다.
교회의 세례는 방식만 다양한 게 아니라 세례를 받는 연령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유아 세례를 행하는데, 이 의식은 공식적으로 아이에게 ‘세례명’을 주는 절차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일부 전통에서는 부모와 대부모(godparents)가 아이가 청소년이 되어 ‘견진성사’를 통해 스스로 신앙을 재확인할 때까지 아이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침례교 교회와 재세례파 전통을 따르는 교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합니다. 침례교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는 세례는 세례받는 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만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회심 체험이 세례의식에 선행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본인 스스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회심의 표시로써 세례를 원하고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세례를 연기합니다. 퀘이커와 같은 소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에 의한 내적 변화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외적 형태의 세례도 거행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태어날 때 받든지 스스로의 결정으로 받든지 간에, 세례 경험은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은 세계의 곳곳의 성지들에서 나타납니다. 미국, 특히 남미의 히스패닉계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가 멕시코의 토착 성모로 현현했다는 과달루페 성모를 특별히 공경합니다. 이 과달루페 성모는 북미와 남미 대륙 모두의 수호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민 등 세계적 이주에 따라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마리아 신앙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다양한 현현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국립 대성당’의 거대한 공간에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일찍이 1846년에 성모 마리아는 미국의 수호자로 선택되었습니다. 40년 간의 공사 끝에 1959년 이 국립 대성당이 봉헌된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교회 행사였습니다. 성당의 중심 성소는 1858년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젊은 여성에게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프랑스 루르드의 동굴을 복제한 것입니다. 측면 제단에는 레바논의 성모,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모, 남인도에서 온 가톨릭 이민자들이 공경하는 바일란카니 성모 등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이 공경하는 성모상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아메리카 대륙에 속하는 성모 마리아의 현현이 있습니다. 바로 과달루페의 성모입니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이 성모는 1531년에 개종한 아즈텍 사람 후안 디에고에게 처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때는 코르테제가 아름다운 호수 도시 테노치틀란을 처음 발견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후안 디에고의 환영에 대한 이야기는 아즈텍 토착언어 나와틀어로 처음 기록되었습니다. 성모는 토난친(Tonantzin)이라는 여신에게 바쳐진 테페약 언덕에서 후안 디에고에게 나타났는데, 디에고는 자기 같은 원주민 소작농의 말을 누가 믿겠냐며 성모에게 징표를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성모는 그에게 제철도 아니었는데 언덕에 핀 장미를 따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장미로 가득한 망토를 주교에게 건넸을 때, 그 망토에 세밀하게 새겨진 성모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 성모는 백인 스페인 성모가 아니라 원주민 성모였습니다. 이 사건 후 400년 동안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1810년 미구엘 이달고 신부는 과달루페 성모의 깃발을 들고 멕시코 독립을 외쳤습니다. 과달루페 성모의 성화가 새겨진 후안 디에고의 망토는 여전히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 제단 위에 영광스럽게 놓여있습니다. 1910년 바티칸은 과달루페 성모를 멕시코만이 아니라 모든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