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을 본받고, 그를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 신앙을 종교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서는 서로 다른 신학적, 정치적 신념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는 근거로 자주 사용됩니다. 성서 해석 문제는 매우 중대한데, 성서를 문자적으로 참되고 영원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특정한 역사적 맥락의 산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또는 비유적으로 읽어야 하는 하는지와 같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벌어지는 많은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구약(히브리성서와 거의 동일한)과 신약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성서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하여 계시록의 묵시적 이미지로까지 뻗어나갑니다. 그러나 성서는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저자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기록한 것을 담은 모음집입니다. 성서는 설화(saga)와 역사, 이야기와 비유, 서정시와 시가, 설교와 편지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합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기록한 사복음서와 같이, 같은 서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성서 자체에도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서는 외경(Apocrypha, 外經)을 포함하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성서는 외경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 자체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주로 근본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성서는 문자적으로 참이라는 ‘성서 무오류설’(inerrancy)을 주장합니다. 1974년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은 이 관점을 확장합니다. “우리는 유일한 하느님의 기록된 말씀인 신구약 성서 전체의 신적 영감, 진실성, 권위를 인정하며, 성서가 확언하는 모든 내용에 오류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표준임을 믿는다.”

 

다른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무오류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성서의 진리는 종교적인 것으로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지만, 반드시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이런 관점의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모든 문장과 구절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읽지 않고, 언약과 용서, 정의와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며 신뢰할 수 있는 믿음과 실천에 대한 지침서이지만. 필연적으로 우리 시대를 포함해 각 시대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재해석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성경의 ‘무오류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성서숭배’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그리스도인의 증언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의 문자에 제한되지 않는 체현된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생각하든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하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석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성서가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많은 그리스도교 해석가들은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문화가 여성과 남성의 역할, 노예제도의 관행, 또는 동성애 같은 문제와 관련해 성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과 지중해 세계의 역사적 맥락에서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서가 기록된 시대를 이해하지 않은 채 성서가 오늘날 교회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까요?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그러한 ‘역사적 비평’은 경전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전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말씀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통찰력을 키워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문화를 초월하고 시간을 넘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본래의 메시지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전달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형태의 성서 연구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서의 다양한 판본을 확인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서에 포함된 책이 기록된 시대의 문학과 수사학 관련된 문학 형식과 장르를 연구합니다. 더 최근에 일부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성서 본문의 의미가 그것이 기록된 맥락은 물론 그것이 읽히는 맥락에 따라서도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의 추정, 경험, 정체성, 정치적 견해가 그들이 성서 본문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은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복음을 인식한다는 식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성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도전을 주지 않고, 그저 기존의 특정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보여주게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논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에 대한 믿을 만한 근거로 성서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은 그 자체로 제대로 된 성서 연구와 해석 문제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개신교 많은 교단의 여성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성직자의 권위를 얻기 위해 싸웠고, 서서히 그들의 지위를 확보해왔습니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여성의 사제 서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 당국의 반대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에서 앙투아네트 브라운 블랙웰 목사는 “여성이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인 것과 같은 이유로 여성이 강단에 서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블랙웰 목사는 1853년 뉴욕 사우스 버틀러의 회중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은, 미국 기성 교단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안수를 받은 목사입니다. 그는 당시의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등 사회 경제적 개혁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데 열정적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퀘이커 설교자 루크레티아 모트와 보편주의(Universalist) 설교자 올림피아 브라운,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의 열정 넘치는 제레나 리 목사도 그들의 교회 사역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들 이전에는 자신들의 확고한 소명의식 외에는 달리 자격을 증명할 것이 별로 없었던 여러 세대의 여성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안수 문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개신교 교회들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교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흐름 중 가장 논란이 되고 눈에 띄는 차이 중 하나는 여성의 안수사역 참여 여부입니다. 일부 성결교 및 오순절교회 교단은 20세기 초부터 성령은 하느님이 선택한 누구에게나 권능을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처음으로 여성 안수를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장로교와 감리교도 안수받은 여성의 지위를 완전히 인정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는 루터교 교회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성공회는 수십 년간의 토론 끝에, 1974년에 이 문제를 붙들고 나선 세 명의 주교가 11명의 여성에게 ‘이례적인’ 사제 서품을 하면서 여성 안수 문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성공회는 여성에 대한 사제서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은 다양한 개신교 종파에서 안수받은 성직자와 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 성직자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도 여전히 많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의 큰 두 교파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침례교가 포함됩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여성 안수 논의가 큰 논란 없이 아직도 닫혀 있습니다. 19세기 부흥운동, 개혁, 평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여성이 안수를 받은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형태의 교회에서 여성은 교육, 상담, 교목, 행정, 예배, 청년 사역, 지역사회 봉사 및 목회적 돌봄을 포함하여 여러 형태의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교회에서도 여성은 수도회 구성원으로서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 교회의 여성들은 성찬식을 거행하고, 인생 주기에 따른 주요 성사를 집례하고, 교회와 교구를 이끌고, 교리를 결정하고, 교회에서 더 높은 지위를 맡을 수 없도록 안수와 성사 사역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젠더에 대한 그들의 신학과 남성에 의한 사역과 사제직은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로부터 시작된 불변의 전통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안수 논의도 성서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여성 안수 반대자들은 바오로의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 11절을 인용합니다. “여자는 조용히 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로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바오로가 집사, 사도, 동역자로 봉사하는 여성들에 대해 한 말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3장 27-28절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또한 이들은 부활한 예수가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난 것을 강조하는데, 여성이 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여성 사제서품을 시급한 문제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남성 사제의 극심한 부족으로 인해 이미 많은 본당에서 여성이 사실상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사제로서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일부 로마 가톨릭 수녀들은 계속해서 사제서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여성들은 다른 그리스도교 교단에서 안수 사역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납니다. 많은 가톨릭 페미니스트들도 새로운 유형의 교회에서의 페미니스트 사역, 즉 위계적 사제직 구조가 없는 평등한 제자도를 주장합니다. 〈로마 가톨릭 여성 서품 회의〉와 같은 단체들은 30년 이상 동안 이 복잡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해 왔습니다. 2002년,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에서 온 일곱 명의 여성이 다뉴브 강에 떠 있는 배 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다뉴브 7인’으로 알려진 이들의 서품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회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2003년에 파문했습니다. 이후에도 로마 가톨릭 여성 사제 서품 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21세기 많은 신학교 신학생 중 상당수가 여성이며, 그중 많은 수가 안수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사역할 준비를 하는 여성들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스도교 봉사의 소명을 실천하기 위한 평신도 사역 환경을 요구하고 확장하고 있습니다.





다종교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신앙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교류해야 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전도가 비그리스도인과 관계 맺는 가장 시급한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은 종교를 초월한 공통점을 찾는 열린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까요? 세계의 종교적 풍경이 점점 다종교적이 되어감에 따라 이 문제는 현실과 신학 모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면에서 보면, 다양한 종교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 간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야만 해결할 수 있는 전지구적, 국가적, 지역적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불자와 유대인, 힌두와 인본주의자는 불평등, 폭력, 기후변화 등의 문제를 다양한 경전이나 가르침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점점 더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많은 그리스도인은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종교 간 대화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은 해외 선교에 참여해 왔으며, 선교사들을 세계 여러 곳으로 파견하여 복음을 전파하거나 의료, 교육, 또는 구호 활동을 통해 신앙을 증언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세계의 먼 곳에 있는 상상 속의 이웃이 아니라 같은 도시와 마을에서 살고 있는 이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들 종교적 이웃과 관계 맺는 가장 시급한 길은 전도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대화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신의 신앙과 이웃의 신앙 사이의 진정한 만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슬림 이웃의 기도, 수행,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붓다나 나나크 구루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를 통해 풍성한 삶을 누리는 불자나 시크 신자와 같이 믿음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종교 간 만남에서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신학적 질문입니다.

 

일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특정 구절을 배타주의적으로 읽고 그리스도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서 14: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행전 4:12)와 같은 성구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구절을 개인의 깊은 신앙적 진술로 이해해야 하며 그리스도교 진리에 배타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종종 이방인, 다른 종교 공동체 사람, 예를 들어 로마 백부장, 선한 사마리아인, 시리아-페니키아 여자와 같은 이들을 신앙의 본보기로 이야기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예수는 이웃과 나그네에 대한 환대가 참된 믿음의 핵심이라고 가르쳤다고 강조합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종교 간 대화와 타종교인의 신앙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새로운 긴급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 종교 간 대화 단체가 이에 대응하여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2006년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이슬람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후, 이슬람의 학파들을 대표하는 전 세계 38명의 이슬람 당국자와 학자들이 모여 지적 대화와 교류의 정신을 강조하며 교황에게 전례 없는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2007년에는 138명의 무슬림 학자들이 모여 “우리와 당신들의 공통적인 말씀(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을 발표했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 이후 처음으로 이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공통점을 선언했습니다.

 

세계가 점점 더 다종교화 됨에 따라 종교 간 대화는 시민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모두에서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웃종교에 다가갈 때 그리스도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에 선포된 로마 가톨릭의 〈우리 시대에〉(Nostra Aetate)와 같은 문서를 대화를 위한 영감과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한 몇몇 개신교 교단은 그리스도인이 종교 간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을 개발해 왔습니다.





LGBTQ 시민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 변화로 인해 그리스도교 교회는 동성 결혼을 인정할지, 동성애자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안수할지 여부를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LGBTQ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적·젠더 정체성과 종교적 헌신을 모두 받아들이지만, 젠더에 대한 전통적 그리스도교 이해의 성서적 가치관을 옹호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은 LGBTQ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반대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장 논쟁이 되고 분열을 야기하는 문제 중 하나는 동성애 문제입니다. 성적 지향에 대한 공적 대화가 보다 빈번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짐에 따라 사회·시민·종교 단체는 공공정책, 시민권, 종교적 양심이라는 새로운 문제와 씨름해야 했습니다. 태도와 가치관은 흔히 종교적 헌신에 의해 중요하게 결정되기 때문에, 교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엄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봐야 했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였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한목소리로 동성애 정죄를 말한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레위기의 ‘정결법’,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의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바오로의 정죄를 인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본문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성서 본문과 마찬가지로 그 본문의 역사적 맥락에서 읽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바오로가 묘사하는 비정상적인 관계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욕망과 정욕에 이끌린 음란한 관계라고 해석합니다. 그런 관계는 상호적 사랑의 관계가 아니며,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동성애 문제를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동성애적 생활방식”을 묵인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동성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 그들의 성적 지향을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엑소더스 인터내서널’(Exodus International) 같은 그리스도교 탈동성애 단체들은 이러한 변화를 동성애자에게 교육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엑소더스 인터내셔널은 전환치료가 효과가 없고 해롭다고 인정하며 2013년에 자진 해체하였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적 지향이 단지 또 하나의 삶의 선택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것이며 하느님이 그렇게 창조한 것이지, 끔찍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동성애자에게 동성애 관계는 이성애 관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원칙에 기반을 둔 선택, 신뢰, 사랑의 관계입니다.

 

자기 교회의 동성애자 신자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정죄가 아니라 신성한 사랑과 화해에 관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동성애자에게 손을 내밀어 환영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해 개방적인 많은 지역 교회들이 스스로를 ‘화해하는’, ‘환영하는’ 또는 ‘긍정하는’ 교회로 표명합니다.

 

또 다른 중요 쟁점은 동성애 관계에 대한 종교적 축복입니다. 일부 교단에는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서로 간의 언약의 신성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커플을 종교적으로 축복하는 예식을 집례하는 사제와 목사가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2013년까지 성공회와 그리스도연합교회를 포함한 몇몇 주류 교단에서는 동성 결혼의 정당성을 인정했지만, 다른 교단은 여전히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동성애자의 안수 성직 참여 허용은 그리스도교 교회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 사역에 항상 동성애자가 있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늘날 그들의 존재는 더 공개적이고 더 정직하게 인정되고 있고, 또한 논쟁의 여지도 더 큽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연합교회와 같은 몇몇 교단에서는 목사 후보자의 성적 지향이 안수를 받는 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신의 성적 성향을 공개한 동성애자 목사도 많습니다. 이와 정반대 입장을 취하는 일부 교단은 동성애자 성직자를 거부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주요 교단에서 이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2003년에 진 로빈슨은 성공회에서 동성애자임을 밝힌 비독신자로서 최초로 감독 서품을 받았습니다. 논란이 된 그의 서품은 영국성공회는 물론 세계성공회에서도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2009년부터 미국 북음주의 루터교, 2011년부터 미국 장로교가 동성애자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안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동성애 문제는 거의 모든 주요 그리스도교 교단에서 최우선 의제였지만, 양측 모두 깊이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보입니다.








신교, 정교회, 로마 가톨릭, 몰몬교회 등의 신자들은 모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상당히 다른 신학과 관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와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과 같은 교회일치주의 조직은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의 교회’가 있는 것일까, ‘많은 교회들’이 있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세계적으로 무수한 그리스도교 교파와 교단과 교회가 있습니다. 구글에서 어느 한 지역사회의 교회를 검색해보면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분열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작지만 열정적인 회중이 불도저와 적은 건설인력만으로 새로운 교회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들이 같은 도시 내 다른 교회, 국가 내 다른 교회, 전 세계의 다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지역 교회가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교회들이 서로를 찾고 집단적 일치를 이루도록 애쓰라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을까요? 이것이 교회일치운동이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성 바오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2:4-5).”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개별 그리스도교 신자는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닌, 다양한 구성원을 지닌 세계적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에서만 ‘교회’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일치’(ecumenical)라는 용어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통일된 기관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신념, 관습, 정체성을 지닌 채 다른 장소에 존재하던 공동체들의 집합체였습니다. 초대교회는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일곱 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개최하여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이해 등과 같은 주요 교리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면서 한동안 교회 내 일치를 어느 정도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표면화된 분열과 분리가 새로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정교회와 가톨릭이 분리되었고,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었으며, 교단이 급증하며 분열되었습니다. 21세기의 그리스도인은 ‘에큐메니컬’이라는 용어를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한 세계 교회와 운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치는 구조, 제도, 교단의 일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정신과 신앙의 일치이기도 합니다.

 

교회일치운동의 주요 기구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로, 현재 모든 대륙에 있는 350개 이상의 개신교와 정교회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WCC는 ‘거대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친교’, 즉 복음의 증거와 봉사에서 교회의 공통된 신앙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장이 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WCC를 통해 한 나라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인과 소통, 기도,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WCC 회원은 아니지만,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를 통해, 그리고 WCC와 교황청 간의 오랜 공동사업기구(Joint Working Group)를 통해 적극적으로 WCC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즘의 가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 특히 보수적 그리스도인은 교회일치 시도로 인한 권력의 강화와 신학의 희석화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교 가족의 다양한 구성원 사이의 대화와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복음주의 교회와 개인 신자에게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 강력한 성서적, 도덕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특히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에 대응하여 세계 그리스도인을 대표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그리스도교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곳곳의 도시와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화, 인종, 교단을 초월하여 공동체를 추구하는 그리스도교 교회일치 비전을 구체화하는 것은 이제 세계는 물론 지역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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