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천도교는 한국의 민족종교 중 하나로,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기원으로 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에 한울님이라는 신격이 내재되어 있음을 주장합니다.

※ 천도교 섹션은 마인드아카데미에서 한국의 종교지형을 반영하여 새롭게 작성되었습니다.


경주 출신의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동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무너져가는 나라와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품고 10년간의 방랑과 6년간의 구도 수행 끝에 한울님과 문답이 열리는 결정적 종교체험을 통해 동학을 창도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최제우가 근본적으로 주목한 문제는 바로 사람들의 ‘각자위심(各自爲心)’ 즉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 각박해진 마음이었습니다. 최제우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진 데는 근원으로서의 하늘(天)을 잃어버린 때문이라고 보았고, 동아시아 옛 성인들이 ‘천명(天命)’과 ‘천리(天理)’를 공경하던 삶을 되살리고자 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궁극적 실재인 한울님(하느님)과 문답이 열리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삶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체험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참된 길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핵심은 한울님이 바깥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천도교의 신앙대상은 일차적으로 내 안에 모셔져 있는 거룩한 영으로서의 한울님입니다. ‘한울님’이라는 용어는 현재 천도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神)의 명칭입니다. 언뜻 보면 서양의 유신론적 성격인 것 같지만, 천도교에서는 이 한울님을 우주 자연을 초월해서 있는 절대자로 보지 않고 지극한 기운(至氣)과 거룩한 영(神靈)으로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영적 실재라고 봅니다. 모든 만물은 이 지기(至氣)의 영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이 지기의 영이 다시 만물과 인간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동학의 한울님은 우주적인 영기(靈氣)로서 천지에 가득차 있으며, 동시에 내 안에도 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도교의 신관은 ‘범재신론’(凡在神論, panentheis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도교는 ‘한울님’이 우리 민족이 고대로 신앙해 온 ‘하늘님’과 다른 존재가 아니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도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천도교의 한울님은 본래 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하나의 기운으로서 지기(至氣)이자 우주생명, 우주정신, 우주적 영(靈)입니다. 이 하나의 영이 만물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 전통에서 말하는 ‘도(道)’, ‘브라만’ ‘하느님’, ‘무(無)’, ‘공(空)’, ‘무극(無極)’, ‘태극(太極)’, ‘이기(理氣)’ 그것이 인간에 내재했을 때는 ‘성심(性心)’, ‘아트만’, ‘여래장’, ‘불성’, ‘신성’, ‘신성한 지혜’, ‘내면의 빛’, ‘내면의 목소리’, ‘참나’, ‘본래면목’ 등은 모두 이 한울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천도교에는 내세 관념이 없습니다. 천도교는 우리가 태어나는 것이 한울님, 즉 우주적 영기(靈氣)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며, 죽는 것은 이 영기(靈氣)가 내 몸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개별성을 상실하고, 다시 우주적 자아와 융합 귀일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환원(還元, 근원으로 돌아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천도교의 관점에서 ‘본래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무형의 한울에서 유형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무형의 한울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운 최제우의 핵심적인 깨달음은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 안에 거룩한 한울님이 모셔져 있으며, 이 우주도 단지 물리적인 자연이 아니라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최제우는 바깥으로는 그 우주적 기운에 연결되고, 안으로는 신령한 한울님을 발견함으로써 누구나 한울의 인격으로 거듭나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최제우는 이 시천주를 깨달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들이며, 따라서 사람은 신분과 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나아가 모두를 한울님으로 높여 섬겨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따라서 동학은 바깥에 있는 한울님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한울님을 받들어 공경하는 삶을 제시합니였다. 이것이 참된 경천(敬天)이며, 참된 인간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고대 성인의 ‘경천순천(敬天順天)’의 삶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평가됩니다.


반면 인내천(人乃天)은 해월 최시형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가, 이후 의암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 종지(宗旨)로 정립되었습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이 가르침은, 사람이 한울만큼 존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당시의 온갖 차별을 철폐하라는 일차적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인내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이후 심화되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한울의 본질적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손병희는 한울님을 모든 존재의 본질(性)이자 우주의 근원적 영(性靈)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사람을 비롯한 모든 만물은, 그 우주적 영이 세상에 표현된 것(性靈出世)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무형한 한울의 영이 형상 있는 한울님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람의 본질이 곧 한울의 성령(性靈)이므로, ‘인내천’이라는 것입니다.


동학에서 시천주와 인내천은 상호 보완적인 교리입니다. 인내천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한울님에 대한 모심의 신앙도 필요 없고, 심지어 한울님이라는 존재마저 부정하여, 인내천을 무신론, 또는 철학적 신론으로 간주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시천주만 있고 인내천의 차원을 말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학은 한울님과 나를 구분하면서 공경하는 차원도 있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자아관념, 에고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마음으로 확장되고 깊어진 인격으로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시천주와 인내천은 천도교의 역사 속에서 서로 길항하면서 천도교의 교리와 사상을 심화시켜 왔습니다.


시천주와 더불어 ‘개벽’은 동학·천도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입니다. 개벽사상은 본래 최제우가 『용담유사』에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라고 하며 ‘다시개벽’이란 용어를 쓴 데서 유래합니다. 수운은 ‘개벽’의 용어 앞에 ‘다시’를 붙임으로써 처음 천지가 열렸던 때와 같은 거대한 변화가 다시 한 번 올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이때 개벽은 우주적 순환원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할 새로운 세상과 그것에 수반하는 물질적․정신적 대변혁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문명적 차원의 대전환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학·천도교의 개벽의 특징은, 인간의 정신적 개벽을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거룩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는 주체의 변화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벽의 사상은 자신의 내면에서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그것을 모든 존재에게서 발견하고 존중하는 삶, 모두를 한울님으로 공경하는 삶이 앞으로 문명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천도교는 인간의 내적 혁명을 통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꿈꾸는 ‘개벽’적 사유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한 민중혁명은 물론 이후 증산교와 원불교 등 한국 신종교의 발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천도교의 신앙은 내 안에 모셔져 있는 한울님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또한 천지를 단지 물리적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생명의 근원으로서, 부모님처럼 공경할 것(天地父母)을 강조합니다. 천도교에서의 경천(敬天)은 곧 마음을 공경하는 것을 의미하며, 천도교에서의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체의 존재를 한울님처럼 공경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변의 모든 물건들조차 공경하는 경물(敬物)을 강조합니다.


천도교는 수행을 중시하는 종교이기도 한데, 그 수행법을 ‘수심정기(守心正氣)’라고 합니다. 여기서 수심(守心), 즉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내 안에 모셔져 있는 하늘의 마음을 발견하여 합치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고, 정기(正氣), 즉 기운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끊어져 있던 하늘 기운과 연결되어 그 기운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심정기는 마치 철새가 기류에 올라타는 것과 같은 이치로, 한울의 마음과 기운에 합치되고자 하는 실천입니다.


하늘에 기류가 있듯이, 더 큰 우주적 차원의 흐름이 바로 ‘천도(天道)’입니다. 따라서 수심정기는 이 천도와 합치되는 몸과 마음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천도의 우주적 리듬을 타게 되면 애씀 없이 저절로 하늘의 질서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을 최제우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마음의 고삐를 잘 잡아 운용하되, 하늘 마음과 합치되고 하늘의 기운과 연결됨으로써 하늘의 힘과 지혜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창조적 주체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합니다.


종교의례는 일요일마다 시일(侍日)이라고 해서 각 교구별로 오전 11시에 의식을 진행하며, 개신교의 주일예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따로 성직자가 없기 때문에 대체로 선출된 교구 임원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며, 가끔 평교인이 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열려 있긴 하지만, 전문적인 교화나 체계적인 교인 관리가 안 된다는 점은 천도교 쇠퇴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시일식을 포함해서 천도교인들이 일상에서 꼭 지켜야 다섯가지 정성을 오관(五款)이라고 하는데, 시일, 주문, 성미, 기도, 청수의 다섯가지입니다.‘주문’은 삽칠자의 시천주 주문을 읽으며 수련을 하는 것을 뜻하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일년에 한 두 차례 전국에 있는 수도원에서 주문 수련을 합니다. ‘청수’는 매일 하오 9시에 모시는 기도식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일정한 기간과 목적을 정해놓고 드리는 특별 정성을 말합니다. ‘성미’는 매일 밥을 지을 때 한식구당 한 숟갈씩 떠놓은 쌀을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교구에 헌납하는 것인데, 최근엔 돈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한국 근대 민중운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3.1 운동, 나아가 통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천도교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1. 해월 최시형과 동학농민운동

수운 최제우가 1864년 순도(殉道)한 후 제2대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을 보다 쉬운 서민의 언어로 표현하였으며 일상의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천주를 ‘사인여천(事人如天,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으로 가르쳤고, 천지를 부모님처럼 공경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당시 핍박받던 민중, 여성과 어린이까지도 하늘님으로 공경하라고 가르쳤고, 사람만이 하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만물이 다 하늘님을 모셨다는 것을 통찰하며 만물까지도 공경하라(敬物)는 가르침을 폈습니다. 한편 ‘한울로서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먹는 행위의 신성함은 물론, 생명의 순환 원리와 상호의존성을 설파하기도 하였고,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파격적인 제사법을 통해 저쪽이 아닌 지금 여기 나와 내 주변을 먼저 살피라는 가르침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최시형은 1880년 스승의 가르침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면서 동학 사상을 체계화시켰고, 이후 동학의 교세가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1892년 동학도들이 모여 공주와 삼례에서 스승의 억울한 죄를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펴기 시작했으며, 1893년 2월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교조신원과 동학 공인을 위해 상소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복합상소는 별 성과 없이 끝났지만 이를 계기로 서울이 완전히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잠식당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고, 1893년 봄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내걸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라도 고부에서 수많은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햇불을 들어올렸으니, 이것이 1894년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입니다.


1894년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와 지방수령들의 학정,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수탈에 대응해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떨쳐 일어난 19세기 조선 최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라고 하는 명확한 사상적 기반과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라는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전라도만이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등 전국적인 규모로 당시 인구의 20% 이상이 참가하여 1년 이상 전개되었으며, 약 30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비록 혁명은 좌절되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조선말기 사회의 대내외적 모순에 의한 민중의 분노를 확인할 수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또한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현실의 모순과 불평등을 개혁하자는 자발적 정치운동이자 모든 사람들이 한울님으로 존중받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 민중적 개벽운동이었다고 평가 받습니다.



2. 의암 손병희와 3.1운동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동학의 3대 교조(敎祖) 의암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했으며,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교정일치를 강조하며 독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전국에 800여개의 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쓰고 보성전문, 동덕여대 등을 인수하며 인재 양성에 주력했습니다. 또한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지어 7회에 걸쳐 전국의 대두목 483명에게 49일간 수련을 지도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3.1운동 당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대교당 신축을 구실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하였고, 여기서 모은 1백만원 중 대교당과 중앙총부 건축에 사용된 27만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금을 상해 등 해외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손병희와 천도교는 3.1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준비와 초기 단계에서 각계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하나로 결집하고 운동의 원칙을 마련했고, 전국적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했으며, 독립선언서 작성과 인쇄 등에서도 활약했습니다. 특히 천도교는 각 지방교구 조직망을 통해 독립시위운동을 빠르게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3.1운동 직후 손병희와 박인호를 비롯한 교회 간부들 대부분이 투옥되었고, 전국 각 지방에서 체포된 교인들은 수천 명에 달하게 됩니다. 교회재산도 거의 압수당했으며 자유로운 교회활동조차 제한받게 됩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는 6월 28일 일제의 방화로 전소되었습니다. 또한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현 고려대 전신)과 동덕여학교도 결국 재정난으로 1923년 경영권을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암성사가 거주하던 상춘원을 비롯한 천도교 재산의 상당부분이 넘어갔습니다. 손병희 또한 극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결국 1922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3. 일제 치하 해방운동

3․1운동 후 천도교 지도자들이 대거 투옥되자 이돈화, 김기전, 박래홍, 박달성, 정도준 등 청년 지도층은 1920년 3월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하여 『개벽』 잡지를 중심으로 사회를 개벽하기 위한 운동을 선도해 나갔습니다. 19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켜 방정환과 김기전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어린이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이후 천도교청년회는 이념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천도교청년당’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 농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천도교청년당의 활동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의식개혁과 문화적 각성의 문화운동이었습니다. 이는 정의인도, 평등 자유를 이상으로 하는 정신개벽, ‘도덕’과 인격에 바탕한 영적 코뮤니즘의 근본적 전환을 추구한 개벽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35년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오심당(吾心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었고, 1938년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倭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4. 해방 공간에서의 통일운동

해방 후 천도교는 임시정부 영수들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은 남북한의 통일과 완전한 민족 자주 정권을 수립코자 노력하였으며, 좌우를 넘어 절대 다수인 민중을 기초로 한 여러 집단과 양심 있는 개인들의 연결로 민족적 대동단결을 도모하였습니다.


북쪽의 천도교와 청우당(천도교청년당의 후신)은 1948년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남북 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통일운동을 벌이다가(일명 3.1재현운동) 사전에 발각되어 북한 전 지역에서 1만7천여명이 체포되고, 한국전쟁 중 700여명이 총살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영우회가 발각되어 핵심간부 165명이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남쪽의 천도교와 청우당은 1948년 5월에는 이승만의 남한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 참여, 남한의 단독 선거와 미군정에 반대하고 김구와 김규식 등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 요인 회담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같은 해방정국에서 미군정 정책의 비판과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 등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계기가 되어 결국 청우당은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8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해방정국에서의 단독정부수립 저지운동은 양쪽 정부에게 모두 탄압받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천도교가 쇠퇴일로를 걷게 되는 요인이 됩니다.


오늘날 천도교의 미래는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1910년대 당시 삼백만 교도를 거느리고 있었던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무렵 약 100만 정도의 교인수를 유지했지만, 북한의 교인수가 8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분단이 되면서 남쪽의 천도교는 2~30만명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한국전쟁기에 북한의 천도교인들이 대거 월남하여 숫자는 두배로 늘었지만, 반공정서를 지닌 교인들이 주로 월남을 했기 때문에 천도교는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었고, 이후 한국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쇠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현재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천도교 인구는 약 5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반면 ‘동학’은 학문적으로나 사회운동적 측면에서나 시민사회에서 갈수록 더 많은 관심과 조명을 받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특히 해월 최시형의 사상이 장일순, 김지하 등으로부터 생명사상으로 재해석되고, 김용옥으로부터 K-사상으로 재조명되면서 동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동학에 기반한 다양한 활동단체의 설립은 특히 두드러집니다. ‘한살림’을 비롯해 많은 생명운동 단체들이 동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탄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동학실천시민행동’과 같은 단체들이 동학에 기반한 사회적 실천을 진행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학공부모임’이 결성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자연스럽게 동학을 천도교와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해서 보려고 하는 입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천도교 입장에서는 동학의 대중적 관심이 반갑지만, 동학 천도교를 분리해서 보려는 입장에 대해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근대사와 사상사에서  천도교가 가지는 가치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김용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재 당면한 수많은 난제가 있긴 하지만, 대대적인 혁신과 전면적 개혁을 통해 생태적 위기와 정신적 어려움이 심화되는 이 시대에 문명 전환의 햇불이 될 수 있다면, 특히 분단극복을 위한 노력에 매진해서 이념적 갈등을 해소하고 본래 동학의 개벽적 성향을 회복할 수 있다면, 갈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는 개벽종교로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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