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유교(儒敎)는 기원전 5세기경 공자(孔子)가 선도했던 제자백가의 한 분파로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체계화된 중국의 주류 사상이자 종교입니다.






19세기 유럽 학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신조어 “Confucianism”으로 묘사된 이 전통은 공자(孔子, Confucius)로 대표되는 “유교(儒敎)”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 전통이 가족과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마음의 정화를 강조하는 인문주의적 윤리 체계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도덕적 수양의 완성이 그 사람을 우주적이고 영적인 초월로 이끈다고 설해진다는 점에서, 유교야말로 인문주의적 종교 전통이라고 주장합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록들은 공자의 종교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서양인들이 “공자주의(Confucianism)”라 이름붙인 것을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일반적으로 “유교(儒敎, 학문적 전통)”라 부릅니다. 20세기가 되어서야 이러한 도덕적 수양에 종사하는 집단의 계승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종교”라는 규격에 맞는지의 여부를 반성적으로 고찰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Confucianism”이라는 신조어를 고안해 낸 유럽의 학자들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유교 형성에 가장 영향력 있는 공헌자는 중국의 위대한 성인인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였습니다. 한결같은 태도로 과거로부터 내려온 예(禮)를 따르고, 이를 통해 인(仁)을 완전히 작동시켜 하늘의 도(道)를 실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립한 것이 바로 공자입니다. 이 과정의 완성은 엄격한 공부와 자기 수양에 대한 평생의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처음 강조한 사람도 바로 그였습니다.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어떻게 감히 내가 성인이라거나 인(仁)을 완성하였다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若聖與仁則吾豈敢)”라며 “아마도 내가 배움에 물려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는 있을 것이다(抑爲之不厭誨人不倦則可謂云爾已矣).”라고 말합니다.

 

후대 유교가 형성되는 데 있어 공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이 전통의 시조로서 그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정 개인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 모든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존재이며 각자의 자기 실현은 공동 번영을 위한 협력적이고 지속적인 탐구에 참여해야만 일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제자 및 통치자들과의 대화집이 소위 사서(四書) 중 두 번째로 꼽히는 맹자(孟子, 기원전 371-289)는 각자가 부모, 형제, 배우자, 친구, 그리고 사회-정치적 지도자들의 복잡한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음을 관찰하였습니다. 이 연결망은 또한 그의 모든 선조들, 그리고 문명화된 삶을 가능하게 한 문화적 영웅들에까지 미쳐 있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관계의 심오한 도덕적 함의를 끊임없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는 내적, 외적 자원의 상호작용이 포함됩니다. 󰡔대학(大學)󰡕에 명시된 것처럼, 자기 수양의 방법은 “자신의 타고난 빛나는 덕(德)이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함에 머무는 데(在明明德在新民在止於至善)” 있습니다. 오직 진실된 뜻으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함양하고, 가정을 조화롭게 만들며, 사회를 다스리고, 인류 전체를 쇄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직 가족, 사회, 그리고 세계가 완전한 평온을 얻는 데 기여해야만 자기자신의 미덕이 지극한 선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교는 인간의 완성이 초월적인 신의 구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 참여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때문에 현대의 많은 해석자들이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인문학적 윤리 체계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유교의 기획이 사실은 궁극적인 관심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행위들은 자기초월의 형태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유학자 투웨이밍(Tu Wei-ming)에게 있어, 이러한 종교적 함의가 분명히 전개되는 것은 사서(四書) 중 마지막인 󰡔중용(中庸)󰡕의 교리에서였습니다. 이 글은 도덕적 함양의 자기 인증 과정이 완성되었을 때, 그 사람의 성취는 모든 인간 사회에 울려 퍼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천지의 변화과 성숙의 과정을 도울 수 있게 되는 심오한 우주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설합니다. 투웨이밍이 보는 바와 같이, 그러한 비전은 자기 안에 내재된 영적 자원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종교적 인문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유교의 가르침과 해석은 사서(四書)라 불리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크게 기초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동아시아 이민자 공동체가 유교적 가르침을 보는 관점은 구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가르침이 과학 사회와 민주적 통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적 전통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서 그 가르침을 지지합니다.



 

유교는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시대 황제의 후원을 받는 강력한 문화력으로 중국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다음 천 년 동안, 유학자들은 공자에 의해 쓰여지거나 편집되었다고 전해지는 일련의 작품, 오경(五經)에 집중했습니다. 오경은  시경(時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주역(周易), 춘추(春秋)입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교리가 이 전통의 중심 문헌이 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에 성리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그것들을 소위 “사서”로 묶었을 때부터입니다. 주희에 따르면, 축약된 문구와 시구를 담고 있는 오경보다 인간의 본성, 덕성, 진실함을 자주 말하는 사서가 자기 수양에 더 유익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주희의 사상은 1313년에 황실이 사서를 중국 임용시험의 기초 문헌으로 지정했을 때 정설의 지위를 획득하였습니다. 향후 6세기 동안,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성리학적인 해석은 중국의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영향력은 14세기 말에는 한국으로, 그리고 그 후 200년 안에 일본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세기 동안 유럽 강대국들의 기술적, 군사적 우위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은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1871년까지, 한국의 왕실은 교육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한국의 대부분의 서원을 폐쇄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6학회 회원들은 또한 유교 교육 시스템을 보다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학문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중국에서, 관료와 산업 인프라를 현대화하려는 일련의 실패한 시도는 1905년 전통적인 시험 시스템의 전면적인 해체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10년 후, 천두수, 루쉰, 그리고 다른 지식인들은 유교 교리에 대한 충성의 포기를 요구했습니다. "공자와 아들들"은 "민주주의 선생님"과 "과학 선생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러한 우상화 미사여구는 동아시아 전역, 특히 중국 본토에서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난 세기 동안, 매우 적은 수의 현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또는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을 유교인이라고 확인했습니다. 이 추세는 최근에야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유교가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관점은 오랫동안 미국으로 건너온 동아시아 이민자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미국에 넘어온 대다수의 동아시아인은 조국의 문학과 정치계에 참여할 희망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교의 고전을 공부하는 것보다 불교나 도교의 신상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쉬웠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고전 중국어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공식적인 유교 교육에 대한 훨씬 덜 노출되었습니다. 1965년 이후 도착한 동아시아 이민자들도 미국 환경에 유교적 가치가 적용되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엇갈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자와 아들들”이 이 나라의 “미스터 과학”과 “미스터 민주주의”에 헌신할 부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동아시아 혈통이 유교를 적절치 않은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있는 공자 센터나 캘리포니아 주 스톡턴에 있는 공자 교회의 일원들 같은 일부 사람들에게, 학문적 가치와 상징은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중국의 설날 및 기타 명절을 위한 축하 행사를 여는 것 외에도, 두 협회 모두 사서의 발췌문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고전 중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이 가까운 선조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도록 연 2회의 야유회가 열리는 공동묘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교 전통에서,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는 자신의 삶과 업적을 가능하게 만든 누적된 노력에 대한 감사의 논리적 표현입니다. 묘지를 유지하고, 제물을 바치고, 묘지 앞에서 절하는 것은 문명화된 삶을 선물해 준 선조들에게 보답하기 위한 하나의 작은 제스처에 불과합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관행을 계속하는 것은 한 사람의 동아시아 문화 혈통이 시간 뿐만 아니라 지리적 경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보장합니다.






미국에서 유교적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명시적인 의례 활동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는 이면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많은 동아시아 이민자들은 종종 교육, 가족 결속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억눌러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유교적 가치를 표현합니다.


 1996년 3월 7일, 중국인 이민자이자 식당 종업원인 지안 탕은 메사추세츠 주 복권에서 1,800만 달러에 당첨된 후 마지못해 기자회견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즉시 나서지도 않았고 친척, 친구, 직장동료에게 그의 행운을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주목도, 갑작스럽게 유입된 재산이 불러올 삶의 변화도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안 탕은 그 혹은 그의 부인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심지어 어떤 차를 운전하는지도 말하기를 거부했지만, 돈의 일부가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서는 기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가족이 당첨금을 교육에 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둘 다 학위를 마치기 위해 대학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들은 딸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그와 그의 가족은 병든 장모를 방문하기 위해 두달 동안 중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안 탕은 아마도 자신을 유교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서 주목을 받기를 꺼리는 그의 모습, 교육에 큰 가치를 두는 모습, 그리고 단결된 단위로서 대가족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은 모두 핵심적인 유교적 가치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탕은 유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뚜렷한 유교적 종교적 정체성을 주장하지 않는 동아시아 이민자들을 대표합니다. 미국에서 표현된 유교적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명시적인 의례 활동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는 이면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공식적인 유교 행사에 참여하는 동아시아인은 거의 없으며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의 형태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태에 생명을 불어넣는 정신만은 일상 생활에서 단절 없이 나타납니다.

 

교육에 대한 태도는 이러한 정신의 좋은 예입니다. 주희가 설계한 유학의 교과 과정은 학생들이 사서를 외우고 암송하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일단 여기에서 발견된 지혜가 완전히 내면화되면, 제자들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세련된 이해를 얻기 위해 오경 및 여러 주석서로 눈을 돌려야 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동아시아인들은 이 성리학적 교육과정에 대해 기껏해야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교육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배움은 여전히 도덕적 인격을 형성하는 평생의 과정으로 간주되며, 이를 통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유교는 미국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제도적 인프라가 없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는 주로 비공식적인 가정 교육을 통해 길러집니다. 나아가 많은 동아시아인 구성원을 거느린 기독교와 불교 단체들은 종종 유교적 덕목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기독교인들이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교회 장로들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경향은 분명히 유교적 감성의 미묘한 영속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일부 한국계 미국인 기독교인들의 해석에는 유교적인 어조가 쉽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독교와 유교의 상호 침투는 더 무의식적으로 존재합니다.

 

유교적 가치들은 기독교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존중되어 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Buddha’s Universal Church는 특히 유교적인 각인이 강합니다. 이들은 자신, 가족,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가치를 함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다른 중국 불교 단체들과 달리, 부처님 세계 교회의 예배에는 향이나 염불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훙 박사는 예배에 필요한 유일한 향기는 진심 어린 동기에서 비롯된 순수한 마음과 생각이기 때문에 향을 피우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보호를 구하는 염불은 도덕적인 발전을 통한 자기 수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회원들은 매일 두 번 명상을 하도록 권고받지만, 그러한 실천의 방법과 목표는 선불교의 명상 수행보다 주희의 “정좌(靜坐)” 개념과 훨씬 더 유사합니다. 훙 박사에 따르면 명상은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고 그릇된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여 진정한 인간의 본성과 가치가 발현할 수 있게 하는 시간입니다.







20세기 후반에는 미국 등 해외에서 유교를 장려하는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 중국 정부는 중국 언어, 문화, 그리고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많은 기관들과 제휴한 공자학원(孔子學院)을 열었습니다. 미국에서, 보스턴의 유교는 성장하고 있는 지식인 운동입니다. 이들은 누구나 유교 전통에 참여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용된 수사와는 반대로, 중국 정부는 현재 유교를 더 나은 사회와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 문화적 보물로 적극 홍보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정치적 지원의 결과 중 하나는 2004년 공자학원의 설립이었습니다. 베이징에 본사를 둔 이 단체의 목표는 공자 학원을 전 세계에 설립하여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홍보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처음 7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256개의 공자학원이 설립되었고, 그중 60개가 미국 내에 세워졌습니다. 2019년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에 530개, 미국에는 88개의 공자학원이 생겨났습니다. 20세기의 동아시아인들은 유교를 골칫거리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21세기에는 유교 전통이 자랑스러운 유산으로서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이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은 또한 ‘Boston Confucianism’이라고 알려진 미국 현지의 유교가 부상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Boston Confucians”는 1980년대 후반 유교-기독교 대화 회의에서 보스턴 지역의 대표들을 지칭하기 위해 농담처럼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농담은 “Boston Confucianism”을 설립하려는 실질적인 지식 운동을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지만 성장하는 지식인 집단은 유교가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교를 홍보하는 한편, 유교가 동아시아라는 근거지에서 독립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로버트 커밍스 네빌(Robert Cummings Neville)은 중국어를 할 줄 모르지만, 자신을 자신을 유교도이자 기독교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Boston Confucian들은 유교의 철학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에 조합시키기 위해 동아시아인이 되거나, 고전 중국어를 읽거나, 다른 종교적 소속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유교가 어떤 식으로 계속 발전할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유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 전통으로서 동아시아 이민자 문화의 일부로 남을까요? 미국의 공자학원이 유교 전통의 연구와 실행에 진정한 부흥을 일으킬까요? 보스턴 유교는 규모가 커지고 상대적으로 작은 지식계층을 넘어 점점 더 대중화될까요?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독특한 미국식 유교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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