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 타일러 :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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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 성육신과 경계 가로지르기


Tippett: 신부님께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신학적 개념 중 하나는 바로 성육신(incarnation), 즉 몸에 깃든 영성(spirituality)과 신학이라는 개념입니다. 신부님의 책 <세상의 제단(An Altar in the World)>에서 성육신에 대한 단락의 제목은 "피부를 입는 연습(The Practice of Wearing Skin)"입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은 육신의 언어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채 내 몸 안에 존재하는 ‘성육신’의 일상적 연습"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Taylor: 다양한 믿음을 가진, 또는 아무런 믿음도 없는 학생들과 함께 대학 강의실에 있게 되니 신학의 언어는 그들에게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춤과 음악, 몸의 장식, 만다라 등 다양한 실천으로 가득했던 세계 종교 강의를 하다가 기독교 신학 개론 강의로 넘어갔을 때, 마치 축제를 즐기다가 공동묘지로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몸’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죠. 

그저 기독교의 존재론(ontology)이 종말론(eschatology)과 일관되는지, 찬송(doxologies)이 적절한지 파악하려는 머리만의 작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언어를 쓰는 것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언어에 살과 피를 입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그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저는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몸의 언어를 쓰는 것을 지지하는 편인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직관에 반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이 거룩한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배웠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Tippett: 맞습니다. 당신은 기독교가 몸에 대해 가지는 경외심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웃의 몸, 나병 환자의 몸, 고아의 몸, 그리스도의 몸, 즉 성육신한 영혼을 돌보라는 분명한 사명“

Taylor: 그리고 요즘에는 나무의 몸, 산의 몸, 강의 몸에 대해서도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구의 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지구는 더 이상 우리의 터전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Tippett: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부르던 것, 그리고 우리가 '감정'과 '영혼'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사실은 완전히 얽혀 있죠. 불과 20년 전만 해도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제 이 사실을 압니다. 

Taylor: 네 맞아요.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Lady Gaga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노래하죠.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경외심이었는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순간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온전히 구현하는 모습에 대한 경이였습니다. 


Tippett: 좋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 문장도 정말 좋아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이 놀라운 짐가방에 숨겨둔 채 앉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적 수행이 몸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무감각한 상태로 말이죠. 세상이 우리의 몸에 대한 관점을 형성했듯이, 우리의 몸 역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형성해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이제는 과학이 증명하고 있죠?


Taylor: 감사합니다. 마치 제가 시대를 앞서간 것처럼 느껴지네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한참 뒤처져 있다고 느꼈죠. 오래 살다 보면 반드시 한 바퀴 돌아오게 되어있죠. 

신학적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저는 20대 중반에 신학을 처음 접했고 주로 신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때 그것은 제가 발견한 가장 멋진 것이었습니다. 마치 일종의 야외 관찰 가이드 같아서, 제가 경험했지만 이름은 몰랐던 것들에 대한 이름을 담은 책을 누군가 준 것만 같았습니다. 언어와, 그 언어를 쓰는 공동체라는 선물을 함께 받았던 것이죠. 그것은 일종의 거룩함에 대한 분류학(taxonomy)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똑같은 언어가 종종 제게는 안전벨트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차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차에서 내려 발을 땅에 딛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언어는 계속해서 "안 돼, 안 돼, 여기가 분류법의 경계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그냥 "저기 봐, 흰 점이 있는 빨간 새야"라고 말하고 싶어요. 더 이상 관찰 가이드를 찾으며 새의 이름이 무엇인지, 날개 길이가 얼마인지,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 이동 경로는 어떤지 알아내려 하지 않고 말이에요. 다른 맥락에서는 제가 느꼈던 이런 변화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야생으로 돌아가는 것(rewilding)'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Tippett: 맞아요. 그럼 ‘야생’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신부님이 선물이라고 느꼈던 그 분류학(즉, 신학 - 역주)에 대해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도 신학을 공부하며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교회에 나갔지만, 마치 숨겨져 있던 풍요로운 보물 같았습니다.

Taylor: 맞아요. 그리고 당신이 앞서 말했듯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일들에 그 언어가 적절하게 들어맞는다는 점도 있죠. 하지만 제가 사는 곳에서는 그 언어는 필수적이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거부됩니다. 지금 제가 속한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언어가 적절하더라도, 과거에 그 언어가 남용된 전적 때문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좋은 언어들조차도 그렇습니다.


Tippett: 신부님께서 성육신과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했던 말 중 하나가 "깊은 고통은 우리 모두를 신학자로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묻는 질문은 우리가 병원에 있을 때 묻는 질문과는 거의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기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썼습니다.

Taylor: 그렇습니다. 저는 병원 봉사직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왜 그곳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은 '공동 기도문(The Book of Common Prayer)'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방 안에 들어섰을 때 그것은 불필요해보였어요.

그리고 제가 조용히 앉아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힘든 시간에 버림받았다고 느낀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종류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마도 제가 받았던 신학적 훈련을 통해 ‘즉흥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창의성을 요구했지만, 대부분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누군가의 발을 문질러주거나, 그냥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제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죠. 


Tippett: 신부님은 기도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썼습니다. <세상의 제단>에 기도에 대한 챕터가 있었는데, 첫 몇 페이지에 쓴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기도에 대한 단락이 이 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쓰기가 두렵습니다" "나는 기도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의 기도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수표 수텁(checkbook stub, 수표에서 떼어낸 나머지 부분으로, 수표 번호, 날짜, 금액, 지급 대상 등 수표와 관련된 지불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한 개인적인 기록 – 역주) 부분을 보여주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다른 데서는 보다 긍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때때로 사람들이 나의 기도 생활에 대해 물으면, 나는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Taylor: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 것은 마치 그 옷들이 기도 깃발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옷들의 주인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빨래를 펄럭이게 하는 바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로렌스 수사처럼 부엌에서, 또는 빗자루질을 하면서 자신의 소명(vocation)을 찾았던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Tippett: 로렌스 수사...<하느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저는 그것이 설거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aylor: 그렇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을 위해 요리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팬케이크를 뒤집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항상 수사였고 평수사(lay Brother) 이상의 직분으로 올라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평범한 일들을 경건함으로, 또는 적어도 경건함이 세상의 가장 평범한 일들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행했던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삽니다. 


Tippett: 그리고 저는 그 언어, 특히 '경건함(reverence)'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성례(sacrament)라는 개념과 연결되기도 하는 이 단어는, 특히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우리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말이자 가치인 것 같습니다.

Taylor: 티펫씨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거룩함(holy)'처럼 매력적인 단어죠. 이 두 단어는 제가 앞서 말한 거부 대상 목록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경건함의 함정은 – 저도 여기에 종종 빠지곤 합니다만 - 우리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임재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경건함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함의 근본적인 정의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더 높은 힘(higher power)'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저는 날씨도 더 높은 힘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우리보다 더 위대한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건함은 특히 아름다운 경외심(awe)을, 아름다운 경건함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방금 이야기했던 병원 방은 당신을 당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의 임재 속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경건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경건함으로 이끌어준 많은 경험들은 저와 제 동료들이 얼마나 작고, 일시적이며,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지를 알게 된 순간들이었습니다. 


Tippett: 그래서 '야생(wilderness)'이라는 개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2019년에 신부님께서 ‘Evolving Faith Conference'에서 한 강연을 봤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 '없다'는 뜻의 'nones'로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이 부적절함을 얘기했습니다. 그들이 ’가지지 않은 것‘으로 그들을 정의하고, 심지어 공허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를 들어, Evolving Faith Conference에는 포스트-복음주의(post-Evangelical) 운동, 전통과 교단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Evolving Faith는 정말 흥미로운 그룹입니다. 저는 1년 전쯤 'On Being'에서 Jeff Chu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Rachel Held Evans도 그 일원이었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성직을 떠난 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성공회 사제로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성공회라는 울타리 안의 것이 매우 의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정해진 경계를 벗어나서, 그 너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주로 젊은 사람들인 포스트-복음주의자들, 또는 여전히 전통에 한 발을 걸치려 노력하는 사람들, 또는 별다른 종교 없이 자랐지만, 신부님이 언급한 "거룩함에 대한 갈망(hunger for holiness)"이라는 표현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들에게 ’야생‘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컨퍼런스와 'Evolving Faith'라는 이름, 그리고 그 맥락에서 ’야생‘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중심적인 의미가 되었는지 다시 되짚어 주시겠어요? 

Taylor: 예전에 컨퍼런스에서 ’야생에서 진화하는 믿음‘이라는 주제를 배정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를 제대로 꿰뚫어본 것이죠. 하지만, 제가 얼마나 여러 번 이사했고, 얼마나 많은 교회를 다녔고, 얼마나 많은 소명을 가졌는지 스스로 제대로 연결했 생각했던 적이 거의 없어요. 

저는 어떤 면에서 ’경계들‘을 찾아왔습니다. 그곳이 항상 ’야생‘은 아니었지만, 저는 경계들을 찾아다녔는데, 아마 제가 교회의 경계에서 온 점도 영향을 미쳤겠죠. 그저는 결코 중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직을 받으면서 중심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제 삶을 되돌아보면, 어떤 일에 능숙해질 때마다 저는 그 일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줄 모르는 일을 하러 갔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능숙함에 대한 압박감이나 기대가 너무 무거웠거나, 아니면 제 뇌가 잠든 채 그저 익숙한 일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초심을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일을 할 때가 된 거였죠.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저는 경계에서 행복했고, 경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중심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흥미를 느꼈습니다. 아니면 제가 경계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중심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얼마나 그 자신이 경계에 서 있는지,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비유적으로는, 이 ’경계‘라는 곳이 저에게 편안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계인이라는 사실은 제가 무엇을 쓰거나 이야기하든,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자신에 대해 패배자처럼 느끼지 않도록 돕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쫓겨나서, 또는 화가 나서, 또는 큰 고통 때문에 ’야생‘으로 내몰리죠. 하지만 저는 제가 맡은 주제에 감사했습니다. 제가 그 문제에 대해 천착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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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는 "On Being with Krista Tippett : Barbara Brown Taylor “This Hunger for Holiness”를 편집한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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