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3편 : 광야와 '지금 여기'
Tippett: 성경에는 거듭해서 광야가 등장합니다. 신부님은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가 홀가분히 나온" 성경 속 인물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종종 사막과 산과 구름이 있죠.
Taylor: 저는 남부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지만, 또한 믿음에 있어 고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대개 그 이야기들은 광야에서, 산에서, 계곡에서, 구름 속에서 미지의 존재로부터 오는 어떤 전율보다는 올바른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Tippett: 그런데 저는 신부님께서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예수에 대해서 말하게 되어 기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예수와 광야, 그리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 사람 얘기 말이에요.
Taylor: 어떤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죠?
Tippett: 신부님이 쓰셨던 글 중에 예수가 광야로부터 그 누구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고 썼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잠들었고, 광야를 없애주기를 바랐습니다.
Taylor: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그가 생각하는 예수의 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가 사람들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을 사랑해요. 그들은 예수에게 몇 가지를 확실히 해달라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갑자기 어떤 이야기를 꺼내거나, 역으로 질문하거나, 또는 "너는 그 답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정말…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짜증 나는 존재였죠. 하지만 그게 제가 사랑하는 예수인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솔직한 대답을 해주지는 않지만, 당신에게 손을 얹고 "하지만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우리가 가서 확인해 보자"라고 말해주는 분이죠.
Tippett: 인간의 조건에 광야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또 광야는 우리 삶에 왜 존재하며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 삶에서 광야를 맞이할 때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위해 광야는 무엇을 하는지요? 신부님은 광야에 대해 무엇을 배우셨나요?
Taylor: 아마 당신의 에고에게 크게 한 방 먹이는 역할일 테죠. 저는 광야가 나라는 인간의 진짜 크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25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던 도시를 떠나 현재 30년 동안 살고 있는 시골로 이사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는 인간적인 게 없어요. 도시의 모든 것은 인간적이었죠. 사람들이 지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건물들과 사람들이 계획한 공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현관 밖으로 인간의 만든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매우 편안한 광야이지만, 저는 그 광야의 크기로 봤을 때 나는 얼마만한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광야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 이유가 질병이든 낯설어서이든 여행을 통해서든지 간에,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배웁니다.
저는 스스로를 고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광야의 황량함은 제가 동반자를, 길을 아는 사람을, 또는 적어도 밤에 이야기할 사람을 정말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이죠.
광야는 또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광야 이야기는, 살아남아야만 좋은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저는 중요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배웠던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과 탈출한 사람들이 같은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몇 세대가 그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Tippett: 심지어 모세도 나오지 못했죠.
Taylor: 맞습니다. 왜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듣지 못하는 걸까요?
Tippett: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죠.
Taylor: 그것은 특히 오늘날과 관련이 깊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변화를 만들고,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광야에서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사람들은 거기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운이 좋거나 유산이 남는다면, 그들은 다음 세대가 어떤 희망이나 자신감, 용기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Tippett: 신부님은 자급자족 영성(subsistence spirituality)이 어떤 양상을 보일지 지에 대한 인식을 논하셨습니다.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광야에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야윈" 영성 말입니다. "야윈 영성", "자급자족 영성"이라는 개념이 흥미롭습니다. 조금 더 얘기해주시겠어요?
Taylor: 만일 당신이 “살찐 영성”을 가지고 광야에 간다면 금방 야윌 겁니다. 그리고 특별한 보호, 특별한 자격, 특별한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생각들도 교정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자급자족 영성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축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게 영적 가난을 더 많이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 ’자급자족 영성‘이라는 생각에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Tippett: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Taylor: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회중이든 간에, 그곳에는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는 영적 뚱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앉아 "나는 너무 부족해. 나는 정말 루저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리고 그들에게 영적으로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도록 모종의 ’빵‘이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그 빵이란 마태복음이었고, 누가복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수가 돈을 지칭하며 그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는 자신이 영적으로 부유하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는 것을 정말 더 좋아해요.
Tippett: 저희가 60년대부터 함께해온 이 삶의 궤적을 신부님께서 이어가시는 면이 흥미롭습니다.
신은 죽었었죠. 그런데 신이 돌아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그 짧은 단어인 ’신‘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의 삶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신이라는 말 없이는 지낼 수 없고 또한 그 안에 많은 가능성을 지닌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봐요.
하지만 이제 화두는 교회의 죽음과 코로나 이후 교회의 공동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없는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했던 본회퍼가 생각납니다. 교회 자체가 본질적인 악에 포섭되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라는 기관이 사라지더라도 그 본질적인 충동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부어진 교회(poured church)’라는 성경적 언어를 사용하여 이 현상과 씨름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Taylor: 방금 하신 모든 말, 정말 좋군요. 사람들은 믿음의 상실, 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그것이 교회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시행되기 훨씬 전부터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얼마 전 신학을 다시 보면서, 적어도 신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신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쏟아붓고, 스스로를 세상에 비우셨다는 것은 기독교 언어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비워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흥미를 느껴요.
Tippett: 그리고 저는 신부님이 성직 안에서, 성직 밖에서, 당신의 삶 속에서 이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었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다음은 2007년에 "쏟아부은 교회"라는 글에서 신부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세상은, 신에 대한 나의 개념이 파괴되고 개조되며 징벌받고 구원받은 곳이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이따금 기여를 했던 곳이기도, 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입힌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교회가 나에게 보는 눈과 말할 언어를 주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을 그 안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공동체를 나에게 주었다."
신부님의 말은 교회와 살아 있는 삶 사이의 관계, 즉 공생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며 상호 도전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Taylor: 저는 성공회 신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저에게는 성례전적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몸, 우리의 손, 기름과 물, 빵과 포도주, 모든 평범한 것들이 성스러움으로 승화되는 어떤 방식입니다. 또는 그 안에 있는 성스러움이 보이고, 보존되고, 전달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어납니다. 가장 슬프고, 가장 낡은 작은 교회들에서 일어나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누군가를 장례 지내거나, 결혼시키거나, 성찬을 받거나, 안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시도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성례전, 그러니까 의식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즘 나오고 있는 "세속적인" 책들 중 일부는 이 의식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ippett: 그렇군요. 요즘 신부님의 영적인 순례는 신부님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나요?
Taylor: 이제 막 알아가는 중입니다. 한동안 집에 있겠죠? 지난 몇 년(인터뷰는 2023년에 이뤄졌다. 따라서 맥락상 코로나 시기를 말한다 – 역주)은 멋진 몇 년이었습니다. 끔찍하고, 멋지고, 끔찍하고, 멋진 몇 년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기에 성스러움을 경험했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슬퍼해야 할 사실 뿐 아니라, 그러한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이제 내게 관심 좀 주는거야?"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매일 밤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고, 저는 늘 밖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막 그것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즉, 저는 ‘작은’ 순례를 시작했고, 그것에 중독되지 않게끔 합니다. 너무 과했어요. 저는 이제 그 '과함'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흰 머리와 제 나이가 "이제 더 이상 그럴 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해주죠.
Tippett: 좋습니다. 저의 마지막 질문은 신부님께서 처음 들었다고 묘사한 바 있는 질문입니다. 지금 신부님의 삶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Taylor: 저는 그 질문에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러니까 나는 이제 막 70대에 접어들었고, 남편은 다음 달이면 86세가 됩니다. 우리는 세례식보다는 장례식에 더 많이 참석하고 있고, 우리가 함께 한 모든 대화 속에는 슬퍼할 것들만 가득했는데도 말이죠. 매일 큰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장소는 '지금'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에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고, 내 주변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 관련된 삶을 향상시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삶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제가 말해온 이 '국소성(locality)'입니다.
저는 이 순간, 스스로 평가하기에 제가 이제껏 되어본 적 없는 최고의 할머니이자 이모이자 누이이자 배우자입니다. 이전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옛 격언대로 최선을 다해 '현재에 머무는’ 것이며, 매일 펼쳐지는 삶이 제가 여기저기 서둘러 다니며 보는 풍경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손님을 위해 침대를 정리하고 무엇을 먹을지 기대하는 것이든, 도서관에서 무엇을 할지 계획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형편없는 봉사자입니다. 충분히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매일, 매일의 일상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부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한 시간 반 동안 티펫 씨와 함께 한 것도 마찬가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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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는 "On Being with Krista Tippett : Barbara Brown Taylor “This Hunger for Holiness”를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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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 광야와 '지금 여기'
Tippett: 성경에는 거듭해서 광야가 등장합니다. 신부님은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가 홀가분히 나온" 성경 속 인물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종종 사막과 산과 구름이 있죠.
Taylor: 저는 남부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지만, 또한 믿음에 있어 고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대개 그 이야기들은 광야에서, 산에서, 계곡에서, 구름 속에서 미지의 존재로부터 오는 어떤 전율보다는 올바른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Tippett: 그런데 저는 신부님께서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예수에 대해서 말하게 되어 기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예수와 광야, 그리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 사람 얘기 말이에요.
Taylor: 어떤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죠?
Tippett: 신부님이 쓰셨던 글 중에 예수가 광야로부터 그 누구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고 썼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잠들었고, 광야를 없애주기를 바랐습니다.
Taylor: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그가 생각하는 예수의 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가 사람들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을 사랑해요. 그들은 예수에게 몇 가지를 확실히 해달라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갑자기 어떤 이야기를 꺼내거나, 역으로 질문하거나, 또는 "너는 그 답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정말…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짜증 나는 존재였죠. 하지만 그게 제가 사랑하는 예수인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솔직한 대답을 해주지는 않지만, 당신에게 손을 얹고 "하지만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우리가 가서 확인해 보자"라고 말해주는 분이죠.
Tippett: 인간의 조건에 광야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또 광야는 우리 삶에 왜 존재하며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 삶에서 광야를 맞이할 때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위해 광야는 무엇을 하는지요? 신부님은 광야에 대해 무엇을 배우셨나요?
Taylor: 아마 당신의 에고에게 크게 한 방 먹이는 역할일 테죠. 저는 광야가 나라는 인간의 진짜 크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25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던 도시를 떠나 현재 30년 동안 살고 있는 시골로 이사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는 인간적인 게 없어요. 도시의 모든 것은 인간적이었죠. 사람들이 지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건물들과 사람들이 계획한 공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현관 밖으로 인간의 만든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매우 편안한 광야이지만, 저는 그 광야의 크기로 봤을 때 나는 얼마만한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광야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 이유가 질병이든 낯설어서이든 여행을 통해서든지 간에,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배웁니다.
저는 스스로를 고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광야의 황량함은 제가 동반자를, 길을 아는 사람을, 또는 적어도 밤에 이야기할 사람을 정말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순간이죠.
광야는 또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광야 이야기는, 살아남아야만 좋은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저는 중요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배웠던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과 탈출한 사람들이 같은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몇 세대가 그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Tippett: 심지어 모세도 나오지 못했죠.
Taylor: 맞습니다. 왜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듣지 못하는 걸까요?
Tippett: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죠.
Taylor: 그것은 특히 오늘날과 관련이 깊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변화를 만들고,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광야에서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사람들은 거기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운이 좋거나 유산이 남는다면, 그들은 다음 세대가 어떤 희망이나 자신감, 용기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Tippett: 신부님은 자급자족 영성(subsistence spirituality)이 어떤 양상을 보일지 지에 대한 인식을 논하셨습니다.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광야에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야윈" 영성 말입니다. "야윈 영성", "자급자족 영성"이라는 개념이 흥미롭습니다. 조금 더 얘기해주시겠어요?
Taylor: 만일 당신이 “살찐 영성”을 가지고 광야에 간다면 금방 야윌 겁니다. 그리고 특별한 보호, 특별한 자격, 특별한 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생각들도 교정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자급자족 영성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축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게 영적 가난을 더 많이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 ’자급자족 영성‘이라는 생각에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Tippett: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Taylor: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회중이든 간에, 그곳에는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는 영적 뚱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앉아 "나는 너무 부족해. 나는 정말 루저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리고 그들에게 영적으로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도록 모종의 ’빵‘이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그 빵이란 마태복음이었고, 누가복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수가 돈을 지칭하며 그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는 자신이 영적으로 부유하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는 것을 정말 더 좋아해요.
Tippett: 저희가 60년대부터 함께해온 이 삶의 궤적을 신부님께서 이어가시는 면이 흥미롭습니다.
신은 죽었었죠. 그런데 신이 돌아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그 짧은 단어인 ’신‘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의 삶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신이라는 말 없이는 지낼 수 없고 또한 그 안에 많은 가능성을 지닌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봐요.
하지만 이제 화두는 교회의 죽음과 코로나 이후 교회의 공동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없는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했던 본회퍼가 생각납니다. 교회 자체가 본질적인 악에 포섭되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라는 기관이 사라지더라도 그 본질적인 충동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부어진 교회(poured church)’라는 성경적 언어를 사용하여 이 현상과 씨름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Taylor: 방금 하신 모든 말, 정말 좋군요. 사람들은 믿음의 상실, 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그것이 교회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시행되기 훨씬 전부터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얼마 전 신학을 다시 보면서, 적어도 신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신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쏟아붓고, 스스로를 세상에 비우셨다는 것은 기독교 언어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비워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흥미를 느껴요.
Tippett: 그리고 저는 신부님이 성직 안에서, 성직 밖에서, 당신의 삶 속에서 이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었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다음은 2007년에 "쏟아부은 교회"라는 글에서 신부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세상은, 신에 대한 나의 개념이 파괴되고 개조되며 징벌받고 구원받은 곳이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이따금 기여를 했던 곳이기도, 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입힌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교회가 나에게 보는 눈과 말할 언어를 주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을 그 안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공동체를 나에게 주었다."
신부님의 말은 교회와 살아 있는 삶 사이의 관계, 즉 공생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며 상호 도전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Taylor: 저는 성공회 신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저에게는 성례전적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몸, 우리의 손, 기름과 물, 빵과 포도주, 모든 평범한 것들이 성스러움으로 승화되는 어떤 방식입니다. 또는 그 안에 있는 성스러움이 보이고, 보존되고, 전달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어납니다. 가장 슬프고, 가장 낡은 작은 교회들에서 일어나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누군가를 장례 지내거나, 결혼시키거나, 성찬을 받거나, 안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시도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성례전, 그러니까 의식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즘 나오고 있는 "세속적인" 책들 중 일부는 이 의식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ippett: 그렇군요. 요즘 신부님의 영적인 순례는 신부님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나요?
Taylor: 이제 막 알아가는 중입니다. 한동안 집에 있겠죠? 지난 몇 년(인터뷰는 2023년에 이뤄졌다. 따라서 맥락상 코로나 시기를 말한다 – 역주)은 멋진 몇 년이었습니다. 끔찍하고, 멋지고, 끔찍하고, 멋진 몇 년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기에 성스러움을 경험했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슬퍼해야 할 사실 뿐 아니라, 그러한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이제 내게 관심 좀 주는거야?"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매일 밤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고, 저는 늘 밖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막 그것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즉, 저는 ‘작은’ 순례를 시작했고, 그것에 중독되지 않게끔 합니다. 너무 과했어요. 저는 이제 그 '과함'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흰 머리와 제 나이가 "이제 더 이상 그럴 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해주죠.
Tippett: 좋습니다. 저의 마지막 질문은 신부님께서 처음 들었다고 묘사한 바 있는 질문입니다. 지금 신부님의 삶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Taylor: 저는 그 질문에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러니까 나는 이제 막 70대에 접어들었고, 남편은 다음 달이면 86세가 됩니다. 우리는 세례식보다는 장례식에 더 많이 참석하고 있고, 우리가 함께 한 모든 대화 속에는 슬퍼할 것들만 가득했는데도 말이죠. 매일 큰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장소는 '지금'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에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고, 내 주변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 관련된 삶을 향상시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삶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제가 말해온 이 '국소성(locality)'입니다.
저는 이 순간, 스스로 평가하기에 제가 이제껏 되어본 적 없는 최고의 할머니이자 이모이자 누이이자 배우자입니다. 이전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옛 격언대로 최선을 다해 '현재에 머무는’ 것이며, 매일 펼쳐지는 삶이 제가 여기저기 서둘러 다니며 보는 풍경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손님을 위해 침대를 정리하고 무엇을 먹을지 기대하는 것이든, 도서관에서 무엇을 할지 계획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형편없는 봉사자입니다. 충분히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매일, 매일의 일상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부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한 시간 반 동안 티펫 씨와 함께 한 것도 마찬가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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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는 "On Being with Krista Tippett : Barbara Brown Taylor “This Hunger for Holiness”를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