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근본주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의 대화는 이슬람, 그리스도교, 유대교에서 근본주의가 가지는 매력을 경험해 본 내부자의 관점으로 탐구합니다. 한때 종교적 극단주의자였던 세 명의 성공한 남성들이 근본주의의 영적, 문화적 측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또한, 이들은 근본주의적 세계관에 반하는 종교적 충동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Pierre-Yves Babelon 사진/Gerry Images, ©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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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종교적 근본주의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입니다. 근본주의는 각 종교 전통마다 다른 역사와 표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전은 근본주의를 "근본 원칙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운동 또는 태도"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러한 세계관이 지니는 힘이나 그것이 사람들을 동원하고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왜 어떤 사람들이 근본주의자가 되었는지, 무엇이 그들을 근본주의에서 벗어나게 했는지,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근본주의의 충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세 명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이들은 무슬림, 그리스도교인, 유대인으로 각각 변호사, 신학교 총장, 언론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의 기초를 정의하며 깊이 종교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근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 자신의 가족, 어린 시절 친구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그것을 극복했지만,
우리의 아이들 대부분은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시간조차 갖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은 비극적으로 짧고, 비극적으로 환상적입니다.
칼레드 아부 엘 파들
칼레드 아부 엘 파들이 말하는 '아이들'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합니다. 그는 근근이 그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그는 이슬람 법학과 인권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권위자이며,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UCLA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쿠웨이트와 이집트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중학교 7학년 때 이미 무슬림 근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칼레드는 전 세계적으로 무슬림 근본주의 단체에 가입하는 젊은이들을 갱단에 가입하는 미국의 청소년들과 비교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슬람의 맥락에서는 문명적 요소가 추가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LA의 특정 지역에서 갱단에 가입하는 아이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가 어떤 단체에 가입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과거의 위대함에 대한 수많은 신화를 안고 자랍니다.
그리고 현재를 보면, 많은 측면에서 끔찍히 비참합니다.
칼레드 아부 엘 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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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어떻게 당신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다가왔는지 말해주세요.
이집트인으로서, 당신이 속한 정체성이 군사적 패배에 계속 직면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 현실이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이집트 여권을 가지고 전 세계를 여행하려 하면, 단순히 아랍 정체성에 속했다는 이유로 열등한 범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한때 서구화된 "쿨한" 길을 시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대신 효과가 있었던 것은, "당신은 미국인보다, 영국인보다, 다른 아랍인보다, 교회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우리의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10대였던 제가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매우 강력한 어떤 것에 속해 있었고, 세상을 흑백으로, 선악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의 편에, 아니, 단순히 선의 편에 있는 것을 넘어서, 선을 이루고자 하는 누구든 나를 통과해야 한다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권력이죠. 그것이 바로 도취감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젊은이들은 그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칼레드 아부 엘 파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모든 버전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빠르게 언급합니다. 일부는 다른 신념을 비난할 수 있지만, 심판은 신에게 맡깁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속했던, 우리가 현재 알카에다와 연관 짓는 사우디 아라비아 와하비파 이슬람을 '우월주의적' 혹은 '청교도적'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이집트 태생으로, 종종 이슬람 테러리즘의 신학을 분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는 1980년대 이후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이 많은 이슬람 세계의 젊은이들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극단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와하비즘의 영향에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경고합니다.
이 신학에서는 진리가 명확하게 식별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진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진리에 도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신의 완전함에 도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논의, 담론, 철학, 역사는 모두 일탈이거나 궤변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저는 철학이 악마의 학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악마는 사람들을 길을 잃게 하기 위해 철학을 발명했다는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언자와 그의 동료들의 시대를 제외한 역사는 본질적으로 일탈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그 명확히 식별 가능한 진리는 꾸란의 문자적 해석에서 찾을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렇다고 배웁니다. 물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거나, 설령 높다고 해도 주로 과학 분야에서 교육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때, 제가 배운 모든 것이 완전히 환상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증언의 일환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당시 이러한 관점을 공유했던 젊은이들 대부분이 스스로 꾸란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선생님이 꾸란을 직접 읽는 것은 죄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악마가 당신의 지성을 장난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따라서 반드시 선생님을 통해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가 꾸란에 대해 조금 알고 읽어본 내용으로 보면, 그리스도교 성경에도 동일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이나 더 깊은 뉘앙스가 많아, 텍스트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면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사실, 저를 심각하게 회의하게 만들었던 것 중 하나는, 지적 능력의 말살과 파괴의 효과가 일어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당시의 저에게, "너 이런 것을 시작한 이후로 어휘력조차 퇴보한 것 같지 않니?"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입을 열면 항상 모스크에서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반복하는 어떤 종류의 클리셰를 내뱉고 있었습니다.
서구에서는 테러리즘의 근원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빈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묘사하는 삶에서 당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빈곤보다는 정신적 삶과 그것의 억압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빈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긴 하지만, 적어도 제 경험과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주된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혼란과 지적인 삶의 부재였습니다. 매일 읽는 신문, 정부가 후원하는 신문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TV를 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직하고 솔직한 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정부의 훌륭함을 찬양하거나,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을 유혹하는 미국 영화뿐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기억하는 가장 뚜렷한 감정은 답답함이었습니다. 제가 이 사람들의 수업을 듣기 시작하기 전, 매일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며 부모님께 늘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라고 묻곤 했습니다.
15세 때, 칼레드 아부 엘 파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이슬람 율법학(Islamic jurisprudence)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마음과 정신을 열어주었습니다. 고대에 뿌리를 둔 이 전통은 꾸란이 어떻게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합니다. 이는 유대교의 탈무드와 유사합니다. 율법학은 칼레드 아부 엘 파들에게 근본주의에 대한 인생을 바꾸는 대안을 제공했으며, 그는 오늘날 이슬람의 희망이자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단순화된 논리에 대한 균형추라고 믿습니다.
제가 이슬람 율법학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그 겸손함에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법학자들은 결코 "신의 법은 이렇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제 견해로는 신의 법이 이렇습니다. 하지만 신만이 더 잘 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겸손은 최근 몇 달 동안 우리가 본 공포스러운 이슬람 이미지와는 전혀 연관되지 않는 용어죠.
그렇습니다. 9.11 이후 빈 라덴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약간의 외상 후 트라우마 반응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비디오 테이프를 보셨을 때요?
네, 알자지라 채널에서요. 저는 물론 아랍어로 들었는데, 그 자신만만함, 오만함, 타인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 신체적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제가 그들의 수업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겠다고, 대신 진정한 법학자들의 수업에 참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집트에서 10대 시절의 이야기군요.
네, 아마 15살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저는 심하게 맞았고, 그전까지의 우정은 하룻밤 사이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빈 라덴의 자신만만함과 오만함을 보는 순간, 그 끔찍한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 그 구타—그리고 이후의 몇 차례 더 있었던 구타—는 오히려 제 안의 저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제가 매우 아름답고 인간적인 전통이라고 여기는 이슬람 전통과 그것을 모독하는 행위에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습니다.
유대인 작가이자 기자인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과 함께 성지에서 예배를 드리는 여정을 다룬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슬람이 두려움이 없는 용맹함이라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썼어요. 어두운 면으로는 자살 폭탄 테러범들이 있지만, 동시에 큰 힘도 있다고 보았죠. 그리고 저는 그런 용맹함의 특질이 당신의 목소리와 이야기에서도 들린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두려움 없는 용맹함의 신학적 뿌리는 무엇인가요?
음,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지하드(Jihad) 신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하드는 '투쟁하다'를 의미합니다. 성전(聖戰)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싸우고 친구들과 함께하며,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이 신에게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지하드라고 믿습니다.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 저는 이것이 지하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로 인해 저를 죽이려 한다면, 저는 순교자로서 죽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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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화요일에 본 일은,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계속 장막을 거두셔서
미국의 적들로 하여금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도록 허락하신다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
이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이후 이틀 만에, 22,000명 규모의 근본주의 침례교회 목사이자 미국의 가장 목소리가 큰 보수적 그리스도교인 중 한 명인 제리 폴웰이 전국 방송에서 했던 논란의 발언입니다.
저는 이교도들, 낙태 옹호자들, 페미니스트들, 게이들, 레즈비언들, 그것을 대안적 라이프스타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나,
ACLU(미국시민자유연합), 미국의 길을 위한 사람들 같은 단체들 — 미국을 세속화하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합니다.
‘당신들이 이것을 일으켰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
제리 팔웰은 나중에 사과했지만, 리처드 마우 같은 사람들이 볼 때 그의 발언은 현대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의 최악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리처드 마우는 세계 최고의 복음주의 학문 기관 중 하나인 풀러 신학교의 총장입니다. 그는 근본주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제 아버지는 어느 날 밤 공연 요청을 받았을 때 깊은 종교적 회심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컨트리 밴드 음악가였고, 거리에서 설교하며 구호 사역을 하셨죠. 나중에는 네덜란드 개혁 교단에서 목사가 되셨지만, 초기의 근본주의적 관점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는 항상 개신교 자유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적대감을 품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반가톨릭적인 맥락에서 자랐어요. 교황을 적그리스도가 아니더라도 적그리스도의 친구 정도로 생각했죠.
리처드 마우는 현대 근본주의의 기원이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같은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정하려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근본 교리’를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음의 목록이 '근본 교리'로 인정받았습니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보는 높은 성경관을 갖는 것이죠.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인간 교사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그의 십자가 죽음이 대속적 속죄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믿음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 즉 세상은 아직 예수님의 마지막을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예언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문자적(literal)’이라는 단어와 ‘문자주의자(literalist)’라는 단어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잘못 적용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상징들을 많이 가지고 놉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 같은 것들을 보고 ‘그것이 누구를 나타내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암호화된 형태의 계시로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자라는 동안 가장 생생하게 남은 기억은 무엇인가요?
우선,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진 기관들과 조직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역 교회가 있었지만, 여름 성경 캠프, Youth for Christ나 Young Life 같은 청소년 조직, 그리고 나중에는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과 Campus Crusade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이 매우 유명하게 만든 복음주의 집회들이 있었죠. 또한 도시를 오가는 많은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바쁜 일이었습니다. 많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왜요? 그것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 있나요?
근본주의자들은 회심(conversion)에 매우 신경 썼고,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 데 매우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고, 놀랍도록 복잡한 조직 네트워크를 만들어냈죠. 그들은 라디오 방송도 했습니다. 제가 이끄는 신학교는 찰스 풀러(Charles E. Fuller)가 설립했는데, 그는 1930~50년대에 종교 방송을 개척한 라디오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매주 라디오 프로그램을 했고 그의 아내가 편지를 읽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제게 와서 말하곤 합니다. ‘Mrs. Fuller가 라디오에서 편지를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들은 복음 성가를 부르는 훌륭한 합창단과 중창단을 구성했습니다.
리처드 마우는 근본주의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현재는 그리스도교 철학자입니다. 리처드 마우는 1960년대의 정치 운동에 휩쓸리면서 자신의 근본주의적 성장 배경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민권운동의 열렬한 지지자, 베트남 전쟁 반대자였으며 대학원생 시절 급진적 좌익단체 SDS에서 조직 활동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근본주의적 충동이 인간 본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또 그것이 미국 문화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많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이 통찰력을 1960년대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가운데 약간의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반전 운동과 민권운동, 60년대에 중요했던 두 가지 운동에 매우 헌신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없이 계속되는 참여 민주주의와 반전 시위 토론 그룹에 앉아 있을 때 젊은 급진주의자들의 열정이 근본주의의 열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가 근본주의를 떠나게 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근본주의는 매우 반지성적이었는데, 학문적 삶과 지적 탐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그것은 지나치게 '현세초월적'이었으며, 사회 정의나 평화, 또는 더 넓은 세계 정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셋째, 근본주의는 매우 배타적이었고, 사소한 교리적 차이에도 다른 그리스도교인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민권운동에서는 찬송가가 그 운동의 정신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We Shall Overcome' 같은 곡들이요?
그렇죠. 예를 들어, 제가 징병 영장을 받을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될지 고민하던 20대의 시절에는 전쟁이 불의하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고, 감옥에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가족과 더 넓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네트워크에서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외로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모든 민권운동과 반전운동 속에서 저를 버티게 한 것은 바로 그 찬송가들이었습니다.
당시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여기지 않던 시절에도요?
네, 부흥회에서 불렀던 찬송가들은 사실 매우 급진적인 내용과 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모든 것 바치네(I Surrender All)'1이나 '이것이 희생 제단에 네가 바친 전부인가?(Is Your All on the Altar of Sacrifice Laid?)'2 같은 곡들요. 그러나 그 급진성은 매우 좁은 범위에 집중되어 있었죠. 주로 성생활이나 돈 사용 방식 같은 것들 말이에요. 하지만 1960년대에 저와 제 친구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은 인종차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굴복시킬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복음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것이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반하더라도?' 이런 질문들이 저에게 매우 중요했고, 찬송가의 가사를 그 가르침을 전달했던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의 정의에서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그 감정적인 열정이라고 보시나요?
네, 제가 최근에 '전-근본주의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제가 이런 말을 해서 그들을 조금 불편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근본주의 시절 이후로 저는 다양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흐름을 탐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네딕토회, 프란체스코회, 사막 교부와 교모 같은 훌륭한 전통들이요. 저는 그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부흥회에서 설교자가 '모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당신의 마음을 보세요. 정말로 예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던 그 순간들은 제 인생에서 가장 성스러운 순간 중 일부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때 느꼈던 초월적 경험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에 관해 논의하면서 근본주의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좀 더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의 뿌리와 원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긍정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이 사람들을 근본주의적 종교 경험으로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떤 매력을 주는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는 진리, 가치, 도덕성, 의미와 같은 질문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할지에 대해 정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제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색채가 짙은 교회들에 나가보면, 그런 곳에 참여하는 많은 부모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단지 자녀들에게 의미 있는 삶, 확고한 가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좋은 약속을 줄 수 있는 어떤 곳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그곳에 온 사람들이죠. 근본주의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모습일 때, 사람들에게 의지할 만한 어떤 것을 제공합니다. 몇 가지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죠. 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열등한 충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의 삶이 그 예인데요, 근본주의는 시작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끝나는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제 초기 시절에 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이 있다’고 가르쳐주셨던 분들에게 저는 항상 감사할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것을 더 세밀하게 다듬었고, 저에게는 훨씬 더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시각은 여전히 제가 간절히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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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저자이자 The New Republic의 기고 편집자로, 자신을 전 유대인 극단주의자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1960년대 초 브루클린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우리 가족 생활의 배경이자 전경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매우 따뜻하고 사랑이 넘쳤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도전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에 맞서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 생존자였고, 전쟁 중 숲 속의 구덩이에 숨어 생존했습니다. 그 사건은, 제가 자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었고, 유대인들이 포위당하고, 추격당하고, 미움받는 민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은 다른 인류와 함께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생각이었죠.
10대 시절,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유대인 방어 연맹(Jewish Defense League)의 준테러적 활동에 참여했고, 소비에트 유대인을 위한 학생 투쟁(Student Struggle for Soviet Jewry)이라는 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1982년, 20대 후반에 그는 자신의 영적 고향이라 묘사하는 이스라엘로 이주했습니다. 현재 그는 The New Republic의 이스라엘 특파원이자, Los Angeles Times의 이스라엘 문제 해설자입니다. 그는 헌신적인 시온주의자, 신앙심 깊은 유대인이며, 동시에 영적인 탐구자이자 정치적으로 온건한 이스라엘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택에서 종교적 근본주의의 힘에 대해 그가 배운 것들을 저와 나눴습니다.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몰입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한(Holy, 발음은 '홀리')’가 아니라, 그 반대의 의미로 ‘완전히(Wholly, 이것도 발음이 '홀리')’요.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학, 고통, 드라마, 당신 자신만의 역사적·신학적 드라마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어떤 드라마도 완전히 배제한 채 말이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제가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활기찬 청소년기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선택된 민족의 일부이고, 영적 엘리트의 일부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된다는 것보다 더 짜릿한 것은 없습니다.
'강렬함(intensity)'이라는 단어가 당신의 회고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단어가 특히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저는 갈릴리 나사렛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모영보 대성당(Basilica of the Annunciation)을 압도하려는 의도로 모스크를 지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더 큰 종교적 구조물을 지어 다른 신앙을 압도하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행동이죠.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나요?
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서 이 젊은이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쾌활함이 인상적이었고, 그것은 저를 10대 시절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들의 자신감, 경멸, 그리고 그들끼리의 사적인 농담들까지 말이죠. 근본주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경험입니다. 외부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근본주의자들끼리 앉아서 세상을 비웃는 것보다 더 웃긴 일은 없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유머는 대부분 자기들 밖에 있는 모든 ‘멍청이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서클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멍청이입니다.
그 점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세요. 당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방, 혹은 방어한다고 느끼는 상대방의 인간성에 대한 당신의 인식이 근본주의적 사고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거나 왜곡되는지에 대해요. 그들도 인간으로 보이나요?
보세요, 지금 저는 전쟁 지역에서 당신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있고, 우리 집 바로 아래 도로에서 구급차 소리가 정기적으로 들립니다. 저는 예루살렘의 가장자리에 살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유대 사막과 서안지구(West Bank)가 시작되는 지점의 마지막 주택 행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리적으로 국경 바로 위에 앉아 있는 셈이죠.
전쟁이 끊임없이 제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무슬림 근본주의에 대한 제 관계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공감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제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제 아이들이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전선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 16살 딸이 며칠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버스를 탈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맨 뒤에 앉는 것이라고요. 자살폭탄범들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버스 중앙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변 승객들을 훑어보며 자살폭탄범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핍니다. 그리고 모두 괜찮아 보이면 그제야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고 하더군요.
버스 한가운데서 폭탄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이 의롭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 주세요.
자살폭탄범에게 희생자들은 추상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실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그가 주인공인 종말론적 드라마의 도구일 뿐입니다. 모든 역사와 인류는 그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 자신의 민족, 그리고 자신의 종교에 가해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이 행위는 단순히 신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 경험의 궁극적 순간으로 계획한 것이며,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결정적 순간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악을 추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테러리스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감정을 매우 잘 압니다. 10대 시절, 저는 직접적으로 테러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소련 대사관에 폭탄을 설치해 유대인 해방을 요구하려 했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죠. 제가 유대인의 적을 파괴하려는 환상을 가졌던 순간들은 단순히 순간적 흥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황홀경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종교적 순간과 이런 파괴적인 종교적 순간을 구분 짓는 것이 동기의 초점일까요?
맞습니다.
당신의 작업을 읽으면서 제가 깨달은 점 중 하나는, 근본주의자가 걷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입니다. 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스스로 악이 될 위험을 초래한다는 점, 그리고 적에 대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자신을 적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정말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우주론 중심에 어둠, 악, 부정의를 놓으면, 그 어둠에 흡수될 위험이 생깁니다. 저는 유대인의 고통, 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집착이 제 삶과 영적 삶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유대 극단주의자였던 요시 클라인 할레비. 오늘 우리는 근본주의가 현대 세계에 미치는 힘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20대에 근본주의를 버린 후, 홀로코스트나 소련 강제수용소와 같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을 연구한 학문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들이 살아남아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자신의 가장 깊은 영적 토대를 끌어냈기 때문임을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2001년에 At the Entrance to the Garden of Eden: A Jew’s Search for God with Christians and Muslims in the Holy Land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로 자신을 이해할 때만 근본주의가 해소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생존자가 피해자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그에게 물었습니다.
생존자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끔찍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세계, 그리고 제 생각엔 영혼이 정말로 속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생존자는 자신이 겪은 경험으로부터 분노가 아니라 관대함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쉬운 해답을 갈망합니다. 생존자는 이 세상에 쉬운 해답이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신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가까워질수록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이는 계속해서 공감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세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더 나은 시기에는 적어도 팔레스타인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공감을 개발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는 더 쉬웠습니다.
맞아요. 그리고 당신이 묘사한 다른 종교들과의 여정에서 제가 주목한 점은, 근본주의적 경험에서 상실되는 바로 그 ‘인간성’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한 무슬림 수피 셰이크에 대해 이렇게 썼죠. ‘갑자기 위협적으로 보였던 가면이 온화한 얼굴로 바뀌었다.’
맞습니다. 제가 두 종교로 들어갔던 여정은 과거의 나를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주의자는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근본주의에서 다원주의로의 전환이 완전하려면 근본주의적 활력을 끌어내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시켜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단순히 무슬림과 그리스도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그게 우리가 항상 가는 방향이죠,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대화로 나아갑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가 근본주의자들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믿음을 궁극적 순간까지 완전히 몰입시켜야 하고, 자신의 모든 두려움과 직면해야 합니다. 믿어주세요, 제가 가자(Gaza) 난민 캠프의 모스크에서 유대인 키파를 쓰고 앉아 있을 때,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두려워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작은 실험에서 배운 것은, 다른 신앙을 경외와 사랑으로 접근할 때, 우리를 갈라놓는 정치적, 신학적, 심리적 장벽들이 어떻게든 우회된다는 것입니다. 대화에만 국한되어 있는 담론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정치적 해결책이나 정치적 어휘에 국한될 때와는 다르죠.
그렇습니다. 저는 이 갈등에 정치적 해결책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분노와 오해가 축적되어 있어 정치적 돌파구가 가능하다는 것에 개인적으로 절망합니다. 저는 우리가 영적 돌파구에 가까워졌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아요. 정치적 변화와 달리, 영적 과정은 대중의 참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종교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몇몇 별난 사람들, 몇몇 집착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전의 본보기로 삼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적 존재가 인류와 상호작용하고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입점이 됩니다. 따라서 근본주의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분노와 증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길 것입니다. 당신은 근본주의자보다 더 증오할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에 맞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최고의 신앙에서 본받도록 부름받은 신성한 자질, 즉 열린 마음, 공감, 평화의 자질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1 한글 찬송가에서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이라고 번역되었다.
2 한글 찬송가에서는 "주님 주실 화평"이라고 번역되었다. 두 찬송가 모두 영문 가사를 직역해보면, 한글 번역본보다 훨씬 더 표현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
* * *
이 대화는 "The Power of Fundamentalism", On Being with Krista Tipett의 대화를 편집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https://onbeing.org/programs/khaled-abou-el-fadl-richard-j-mouw-and-yossi-klein-halevi-the-power-of-fundamentalism/

칼레드 아부 엘 파들(Khaled Abu El Fadl)
UCLA의 법학과 교수이며 관용적인 이슬람(Tolerant Islam)의 저자.

요시 클라인 할레비(Yossi Klein Halevi)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의 특파원이자 예루살렘 샬렘 센터의 선임 연구원이며 『에덴 동산의 입구에서: 무슬림, 그리스도교인과 함께 거룩한 땅에서 신을 찾는 유대인의 여정』의 저자.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풀러 신학교의 총장이며, 그리스도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 Uncommon Decency의 저자.
종교적 근본주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켰습니다. 오늘의 대화는 이슬람, 그리스도교, 유대교에서 근본주의가 가지는 매력을 경험해 본 내부자의 관점으로 탐구합니다. 한때 종교적 극단주의자였던 세 명의 성공한 남성들이 근본주의의 영적, 문화적 측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또한, 이들은 근본주의적 세계관에 반하는 종교적 충동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Pierre-Yves Babelon 사진/Gerry Images, ©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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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종교적 근본주의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입니다. 근본주의는 각 종교 전통마다 다른 역사와 표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전은 근본주의를 "근본 원칙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운동 또는 태도"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러한 세계관이 지니는 힘이나 그것이 사람들을 동원하고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왜 어떤 사람들이 근본주의자가 되었는지, 무엇이 그들을 근본주의에서 벗어나게 했는지,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근본주의의 충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세 명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이들은 무슬림, 그리스도교인, 유대인으로 각각 변호사, 신학교 총장, 언론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의 기초를 정의하며 깊이 종교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근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 자신의 가족, 어린 시절 친구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그것을 극복했지만,
우리의 아이들 대부분은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시간조차 갖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은 비극적으로 짧고, 비극적으로 환상적입니다.
칼레드 아부 엘 파들
칼레드 아부 엘 파들이 말하는 '아이들'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합니다. 그는 근근이 그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그는 이슬람 법학과 인권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권위자이며,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UCLA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쿠웨이트와 이집트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중학교 7학년 때 이미 무슬림 근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칼레드는 전 세계적으로 무슬림 근본주의 단체에 가입하는 젊은이들을 갱단에 가입하는 미국의 청소년들과 비교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슬람의 맥락에서는 문명적 요소가 추가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LA의 특정 지역에서 갱단에 가입하는 아이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가 어떤 단체에 가입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과거의 위대함에 대한 수많은 신화를 안고 자랍니다.
그리고 현재를 보면, 많은 측면에서 끔찍히 비참합니다.
칼레드 아부 엘 파들
* * *
그것이 어떻게 당신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다가왔는지 말해주세요.
이집트인으로서, 당신이 속한 정체성이 군사적 패배에 계속 직면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 현실이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이집트 여권을 가지고 전 세계를 여행하려 하면, 단순히 아랍 정체성에 속했다는 이유로 열등한 범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한때 서구화된 "쿨한" 길을 시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대신 효과가 있었던 것은, "당신은 미국인보다, 영국인보다, 다른 아랍인보다, 교회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우리의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10대였던 제가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매우 강력한 어떤 것에 속해 있었고, 세상을 흑백으로, 선악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의 편에, 아니, 단순히 선의 편에 있는 것을 넘어서, 선을 이루고자 하는 누구든 나를 통과해야 한다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권력이죠. 그것이 바로 도취감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젊은이들은 그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칼레드 아부 엘 파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모든 버전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빠르게 언급합니다. 일부는 다른 신념을 비난할 수 있지만, 심판은 신에게 맡깁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속했던, 우리가 현재 알카에다와 연관 짓는 사우디 아라비아 와하비파 이슬람을 '우월주의적' 혹은 '청교도적'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이집트 태생으로, 종종 이슬람 테러리즘의 신학을 분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는 1980년대 이후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이 많은 이슬람 세계의 젊은이들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극단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와하비즘의 영향에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경고합니다.
이 신학에서는 진리가 명확하게 식별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진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진리에 도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신의 완전함에 도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논의, 담론, 철학, 역사는 모두 일탈이거나 궤변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저는 철학이 악마의 학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악마는 사람들을 길을 잃게 하기 위해 철학을 발명했다는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언자와 그의 동료들의 시대를 제외한 역사는 본질적으로 일탈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그 명확히 식별 가능한 진리는 꾸란의 문자적 해석에서 찾을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렇다고 배웁니다. 물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거나, 설령 높다고 해도 주로 과학 분야에서 교육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때, 제가 배운 모든 것이 완전히 환상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증언의 일환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당시 이러한 관점을 공유했던 젊은이들 대부분이 스스로 꾸란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선생님이 꾸란을 직접 읽는 것은 죄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악마가 당신의 지성을 장난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따라서 반드시 선생님을 통해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가 꾸란에 대해 조금 알고 읽어본 내용으로 보면, 그리스도교 성경에도 동일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이나 더 깊은 뉘앙스가 많아, 텍스트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면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사실, 저를 심각하게 회의하게 만들었던 것 중 하나는, 지적 능력의 말살과 파괴의 효과가 일어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당시의 저에게, "너 이런 것을 시작한 이후로 어휘력조차 퇴보한 것 같지 않니?"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입을 열면 항상 모스크에서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반복하는 어떤 종류의 클리셰를 내뱉고 있었습니다.
서구에서는 테러리즘의 근원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빈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묘사하는 삶에서 당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빈곤보다는 정신적 삶과 그것의 억압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빈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긴 하지만, 적어도 제 경험과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주된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혼란과 지적인 삶의 부재였습니다. 매일 읽는 신문, 정부가 후원하는 신문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TV를 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직하고 솔직한 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정부의 훌륭함을 찬양하거나,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을 유혹하는 미국 영화뿐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기억하는 가장 뚜렷한 감정은 답답함이었습니다. 제가 이 사람들의 수업을 듣기 시작하기 전, 매일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며 부모님께 늘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라고 묻곤 했습니다.
15세 때, 칼레드 아부 엘 파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이슬람 율법학(Islamic jurisprudence)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마음과 정신을 열어주었습니다. 고대에 뿌리를 둔 이 전통은 꾸란이 어떻게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합니다. 이는 유대교의 탈무드와 유사합니다. 율법학은 칼레드 아부 엘 파들에게 근본주의에 대한 인생을 바꾸는 대안을 제공했으며, 그는 오늘날 이슬람의 희망이자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단순화된 논리에 대한 균형추라고 믿습니다.
제가 이슬람 율법학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그 겸손함에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법학자들은 결코 "신의 법은 이렇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제 견해로는 신의 법이 이렇습니다. 하지만 신만이 더 잘 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겸손은 최근 몇 달 동안 우리가 본 공포스러운 이슬람 이미지와는 전혀 연관되지 않는 용어죠.
그렇습니다. 9.11 이후 빈 라덴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약간의 외상 후 트라우마 반응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비디오 테이프를 보셨을 때요?
네, 알자지라 채널에서요. 저는 물론 아랍어로 들었는데, 그 자신만만함, 오만함, 타인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 신체적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제가 그들의 수업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겠다고, 대신 진정한 법학자들의 수업에 참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집트에서 10대 시절의 이야기군요.
네, 아마 15살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저는 심하게 맞았고, 그전까지의 우정은 하룻밤 사이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빈 라덴의 자신만만함과 오만함을 보는 순간, 그 끔찍한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 그 구타—그리고 이후의 몇 차례 더 있었던 구타—는 오히려 제 안의 저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제가 매우 아름답고 인간적인 전통이라고 여기는 이슬람 전통과 그것을 모독하는 행위에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습니다.
유대인 작가이자 기자인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과 함께 성지에서 예배를 드리는 여정을 다룬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슬람이 두려움이 없는 용맹함이라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썼어요. 어두운 면으로는 자살 폭탄 테러범들이 있지만, 동시에 큰 힘도 있다고 보았죠. 그리고 저는 그런 용맹함의 특질이 당신의 목소리와 이야기에서도 들린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두려움 없는 용맹함의 신학적 뿌리는 무엇인가요?
음,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지하드(Jihad) 신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하드는 '투쟁하다'를 의미합니다. 성전(聖戰)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싸우고 친구들과 함께하며,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이 신에게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지하드라고 믿습니다.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 저는 이것이 지하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로 인해 저를 죽이려 한다면, 저는 순교자로서 죽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 * *
우리가 화요일에 본 일은,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계속 장막을 거두셔서
미국의 적들로 하여금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도록 허락하신다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
이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이후 이틀 만에, 22,000명 규모의 근본주의 침례교회 목사이자 미국의 가장 목소리가 큰 보수적 그리스도교인 중 한 명인 제리 폴웰이 전국 방송에서 했던 논란의 발언입니다.
저는 이교도들, 낙태 옹호자들, 페미니스트들, 게이들, 레즈비언들, 그것을 대안적 라이프스타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나,
ACLU(미국시민자유연합), 미국의 길을 위한 사람들 같은 단체들 — 미국을 세속화하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합니다.
‘당신들이 이것을 일으켰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
제리 팔웰은 나중에 사과했지만, 리처드 마우 같은 사람들이 볼 때 그의 발언은 현대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의 최악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리처드 마우는 세계 최고의 복음주의 학문 기관 중 하나인 풀러 신학교의 총장입니다. 그는 근본주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제 아버지는 어느 날 밤 공연 요청을 받았을 때 깊은 종교적 회심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컨트리 밴드 음악가였고, 거리에서 설교하며 구호 사역을 하셨죠. 나중에는 네덜란드 개혁 교단에서 목사가 되셨지만, 초기의 근본주의적 관점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는 항상 개신교 자유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적대감을 품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반가톨릭적인 맥락에서 자랐어요. 교황을 적그리스도가 아니더라도 적그리스도의 친구 정도로 생각했죠.
리처드 마우는 현대 근본주의의 기원이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같은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정하려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근본 교리’를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음의 목록이 '근본 교리'로 인정받았습니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보는 높은 성경관을 갖는 것이죠.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인간 교사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그의 십자가 죽음이 대속적 속죄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믿음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 즉 세상은 아직 예수님의 마지막을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예언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문자적(literal)’이라는 단어와 ‘문자주의자(literalist)’라는 단어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잘못 적용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상징들을 많이 가지고 놉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 같은 것들을 보고 ‘그것이 누구를 나타내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암호화된 형태의 계시로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자라는 동안 가장 생생하게 남은 기억은 무엇인가요?
우선,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진 기관들과 조직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역 교회가 있었지만, 여름 성경 캠프, Youth for Christ나 Young Life 같은 청소년 조직, 그리고 나중에는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과 Campus Crusade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이 매우 유명하게 만든 복음주의 집회들이 있었죠. 또한 도시를 오가는 많은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바쁜 일이었습니다. 많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왜요? 그것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 있나요?
근본주의자들은 회심(conversion)에 매우 신경 썼고,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 데 매우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고, 놀랍도록 복잡한 조직 네트워크를 만들어냈죠. 그들은 라디오 방송도 했습니다. 제가 이끄는 신학교는 찰스 풀러(Charles E. Fuller)가 설립했는데, 그는 1930~50년대에 종교 방송을 개척한 라디오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매주 라디오 프로그램을 했고 그의 아내가 편지를 읽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제게 와서 말하곤 합니다. ‘Mrs. Fuller가 라디오에서 편지를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들은 복음 성가를 부르는 훌륭한 합창단과 중창단을 구성했습니다.
리처드 마우는 근본주의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현재는 그리스도교 철학자입니다. 리처드 마우는 1960년대의 정치 운동에 휩쓸리면서 자신의 근본주의적 성장 배경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민권운동의 열렬한 지지자, 베트남 전쟁 반대자였으며 대학원생 시절 급진적 좌익단체 SDS에서 조직 활동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근본주의적 충동이 인간 본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또 그것이 미국 문화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많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이 통찰력을 1960년대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가운데 약간의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반전 운동과 민권운동, 60년대에 중요했던 두 가지 운동에 매우 헌신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없이 계속되는 참여 민주주의와 반전 시위 토론 그룹에 앉아 있을 때 젊은 급진주의자들의 열정이 근본주의의 열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가 근본주의를 떠나게 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근본주의는 매우 반지성적이었는데, 학문적 삶과 지적 탐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그것은 지나치게 '현세초월적'이었으며, 사회 정의나 평화, 또는 더 넓은 세계 정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셋째, 근본주의는 매우 배타적이었고, 사소한 교리적 차이에도 다른 그리스도교인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민권운동에서는 찬송가가 그 운동의 정신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We Shall Overcome' 같은 곡들이요?
그렇죠. 예를 들어, 제가 징병 영장을 받을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될지 고민하던 20대의 시절에는 전쟁이 불의하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고, 감옥에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가족과 더 넓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네트워크에서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외로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모든 민권운동과 반전운동 속에서 저를 버티게 한 것은 바로 그 찬송가들이었습니다.
당시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여기지 않던 시절에도요?
네, 부흥회에서 불렀던 찬송가들은 사실 매우 급진적인 내용과 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모든 것 바치네(I Surrender All)'1이나 '이것이 희생 제단에 네가 바친 전부인가?(Is Your All on the Altar of Sacrifice Laid?)'2 같은 곡들요. 그러나 그 급진성은 매우 좁은 범위에 집중되어 있었죠. 주로 성생활이나 돈 사용 방식 같은 것들 말이에요. 하지만 1960년대에 저와 제 친구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은 인종차별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굴복시킬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복음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것이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반하더라도?' 이런 질문들이 저에게 매우 중요했고, 찬송가의 가사를 그 가르침을 전달했던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의 정의에서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그 감정적인 열정이라고 보시나요?
네, 제가 최근에 '전-근본주의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제가 이런 말을 해서 그들을 조금 불편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근본주의 시절 이후로 저는 다양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흐름을 탐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네딕토회, 프란체스코회, 사막 교부와 교모 같은 훌륭한 전통들이요. 저는 그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부흥회에서 설교자가 '모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당신의 마음을 보세요. 정말로 예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던 그 순간들은 제 인생에서 가장 성스러운 순간 중 일부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때 느꼈던 초월적 경험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에 관해 논의하면서 근본주의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좀 더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의 뿌리와 원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긍정적으로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이 사람들을 근본주의적 종교 경험으로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떤 매력을 주는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는 진리, 가치, 도덕성, 의미와 같은 질문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할지에 대해 정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제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색채가 짙은 교회들에 나가보면, 그런 곳에 참여하는 많은 부모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단지 자녀들에게 의미 있는 삶, 확고한 가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좋은 약속을 줄 수 있는 어떤 곳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그곳에 온 사람들이죠. 근본주의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모습일 때, 사람들에게 의지할 만한 어떤 것을 제공합니다. 몇 가지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죠. 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열등한 충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의 삶이 그 예인데요, 근본주의는 시작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끝나는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제 초기 시절에 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이 있다’고 가르쳐주셨던 분들에게 저는 항상 감사할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것을 더 세밀하게 다듬었고, 저에게는 훨씬 더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시각은 여전히 제가 간절히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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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저자이자 The New Republic의 기고 편집자로, 자신을 전 유대인 극단주의자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1960년대 초 브루클린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우리 가족 생활의 배경이자 전경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매우 따뜻하고 사랑이 넘쳤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도전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에 맞서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 생존자였고, 전쟁 중 숲 속의 구덩이에 숨어 생존했습니다. 그 사건은, 제가 자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었고, 유대인들이 포위당하고, 추격당하고, 미움받는 민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은 다른 인류와 함께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생각이었죠.
10대 시절,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유대인 방어 연맹(Jewish Defense League)의 준테러적 활동에 참여했고, 소비에트 유대인을 위한 학생 투쟁(Student Struggle for Soviet Jewry)이라는 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1982년, 20대 후반에 그는 자신의 영적 고향이라 묘사하는 이스라엘로 이주했습니다. 현재 그는 The New Republic의 이스라엘 특파원이자, Los Angeles Times의 이스라엘 문제 해설자입니다. 그는 헌신적인 시온주의자, 신앙심 깊은 유대인이며, 동시에 영적인 탐구자이자 정치적으로 온건한 이스라엘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택에서 종교적 근본주의의 힘에 대해 그가 배운 것들을 저와 나눴습니다.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몰입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한(Holy, 발음은 '홀리')’가 아니라, 그 반대의 의미로 ‘완전히(Wholly, 이것도 발음이 '홀리')’요.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학, 고통, 드라마, 당신 자신만의 역사적·신학적 드라마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어떤 드라마도 완전히 배제한 채 말이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제가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활기찬 청소년기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선택된 민족의 일부이고, 영적 엘리트의 일부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된다는 것보다 더 짜릿한 것은 없습니다.
'강렬함(intensity)'이라는 단어가 당신의 회고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단어가 특히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저는 갈릴리 나사렛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모영보 대성당(Basilica of the Annunciation)을 압도하려는 의도로 모스크를 지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더 큰 종교적 구조물을 지어 다른 신앙을 압도하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행동이죠.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나요?
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서 이 젊은이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쾌활함이 인상적이었고, 그것은 저를 10대 시절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들의 자신감, 경멸, 그리고 그들끼리의 사적인 농담들까지 말이죠. 근본주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경험입니다. 외부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근본주의자들끼리 앉아서 세상을 비웃는 것보다 더 웃긴 일은 없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유머는 대부분 자기들 밖에 있는 모든 ‘멍청이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서클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멍청이입니다.
그 점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세요. 당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방, 혹은 방어한다고 느끼는 상대방의 인간성에 대한 당신의 인식이 근본주의적 사고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거나 왜곡되는지에 대해요. 그들도 인간으로 보이나요?
보세요, 지금 저는 전쟁 지역에서 당신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있고, 우리 집 바로 아래 도로에서 구급차 소리가 정기적으로 들립니다. 저는 예루살렘의 가장자리에 살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유대 사막과 서안지구(West Bank)가 시작되는 지점의 마지막 주택 행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리적으로 국경 바로 위에 앉아 있는 셈이죠.
전쟁이 끊임없이 제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무슬림 근본주의에 대한 제 관계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공감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제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제 아이들이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전선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 16살 딸이 며칠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버스를 탈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맨 뒤에 앉는 것이라고요. 자살폭탄범들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버스 중앙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변 승객들을 훑어보며 자살폭탄범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핍니다. 그리고 모두 괜찮아 보이면 그제야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고 하더군요.
버스 한가운데서 폭탄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이 의롭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 주세요.
자살폭탄범에게 희생자들은 추상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실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그가 주인공인 종말론적 드라마의 도구일 뿐입니다. 모든 역사와 인류는 그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 자신의 민족, 그리고 자신의 종교에 가해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이 행위는 단순히 신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 경험의 궁극적 순간으로 계획한 것이며,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결정적 순간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악을 추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테러리스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감정을 매우 잘 압니다. 10대 시절, 저는 직접적으로 테러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소련 대사관에 폭탄을 설치해 유대인 해방을 요구하려 했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죠. 제가 유대인의 적을 파괴하려는 환상을 가졌던 순간들은 단순히 순간적 흥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황홀경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종교적 순간과 이런 파괴적인 종교적 순간을 구분 짓는 것이 동기의 초점일까요?
맞습니다.
당신의 작업을 읽으면서 제가 깨달은 점 중 하나는, 근본주의자가 걷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입니다. 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스스로 악이 될 위험을 초래한다는 점, 그리고 적에 대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자신을 적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정말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우주론 중심에 어둠, 악, 부정의를 놓으면, 그 어둠에 흡수될 위험이 생깁니다. 저는 유대인의 고통, 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집착이 제 삶과 영적 삶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유대 극단주의자였던 요시 클라인 할레비. 오늘 우리는 근본주의가 현대 세계에 미치는 힘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20대에 근본주의를 버린 후, 홀로코스트나 소련 강제수용소와 같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을 연구한 학문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들이 살아남아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자신의 가장 깊은 영적 토대를 끌어냈기 때문임을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2001년에 At the Entrance to the Garden of Eden: A Jew’s Search for God with Christians and Muslims in the Holy Land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로 자신을 이해할 때만 근본주의가 해소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생존자가 피해자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그에게 물었습니다.
생존자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끔찍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세계, 그리고 제 생각엔 영혼이 정말로 속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생존자는 자신이 겪은 경험으로부터 분노가 아니라 관대함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쉬운 해답을 갈망합니다. 생존자는 이 세상에 쉬운 해답이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신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가까워질수록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이는 계속해서 공감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세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더 나은 시기에는 적어도 팔레스타인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공감을 개발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는 더 쉬웠습니다.
맞아요. 그리고 당신이 묘사한 다른 종교들과의 여정에서 제가 주목한 점은, 근본주의적 경험에서 상실되는 바로 그 ‘인간성’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한 무슬림 수피 셰이크에 대해 이렇게 썼죠. ‘갑자기 위협적으로 보였던 가면이 온화한 얼굴로 바뀌었다.’
맞습니다. 제가 두 종교로 들어갔던 여정은 과거의 나를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주의자는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근본주의에서 다원주의로의 전환이 완전하려면 근본주의적 활력을 끌어내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시켜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단순히 무슬림과 그리스도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그게 우리가 항상 가는 방향이죠,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대화로 나아갑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가 근본주의자들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믿음을 궁극적 순간까지 완전히 몰입시켜야 하고, 자신의 모든 두려움과 직면해야 합니다. 믿어주세요, 제가 가자(Gaza) 난민 캠프의 모스크에서 유대인 키파를 쓰고 앉아 있을 때,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두려워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작은 실험에서 배운 것은, 다른 신앙을 경외와 사랑으로 접근할 때, 우리를 갈라놓는 정치적, 신학적, 심리적 장벽들이 어떻게든 우회된다는 것입니다. 대화에만 국한되어 있는 담론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정치적 해결책이나 정치적 어휘에 국한될 때와는 다르죠.
그렇습니다. 저는 이 갈등에 정치적 해결책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분노와 오해가 축적되어 있어 정치적 돌파구가 가능하다는 것에 개인적으로 절망합니다. 저는 우리가 영적 돌파구에 가까워졌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아요. 정치적 변화와 달리, 영적 과정은 대중의 참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종교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몇몇 별난 사람들, 몇몇 집착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전의 본보기로 삼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적 존재가 인류와 상호작용하고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입점이 됩니다. 따라서 근본주의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분노와 증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길 것입니다. 당신은 근본주의자보다 더 증오할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에 맞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최고의 신앙에서 본받도록 부름받은 신성한 자질, 즉 열린 마음, 공감, 평화의 자질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1 한글 찬송가에서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이라고 번역되었다.
2 한글 찬송가에서는 "주님 주실 화평"이라고 번역되었다. 두 찬송가 모두 영문 가사를 직역해보면, 한글 번역본보다 훨씬 더 표현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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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는 "The Power of Fundamentalism", On Being with Krista Tipett의 대화를 편집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https://onbeing.org/programs/khaled-abou-el-fadl-richard-j-mouw-and-yossi-klein-halevi-the-power-of-fundamentalism/
칼레드 아부 엘 파들(Khaled Abu El Fadl)
UCLA의 법학과 교수이며 관용적인 이슬람(Tolerant Islam)의 저자.
요시 클라인 할레비(Yossi Klein Halevi)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의 특파원이자 예루살렘 샬렘 센터의 선임 연구원이며 『에덴 동산의 입구에서: 무슬림, 그리스도교인과 함께 거룩한 땅에서 신을 찾는 유대인의 여정』의 저자.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풀러 신학교의 총장이며, 그리스도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 Uncommon Decency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