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경 언어의 시적 특성 - 신에게 응답하기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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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기도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흥미로웠어요. 언어의 힘과 그 중요성, 그리고 신중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순히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읽는 것과 듣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요. 당신은 우리가 듣지 않고 기도하면, 기도는 맥락을 벗어난 것이 된다고 이야기했죠. 이 점은 말하는 데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듣지 않고 말한다면, 말도 맥락을 벗어나게 되죠. 그리고 지금 공적인 담화의 영역에서는 듣는 과정이 많이 생략되고 있어요.
기도에서 가장 많이 소홀히 되는 부분이 바로 듣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 부분을 가르쳐 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중에서도 최고의 스승이었어요. 그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도는 듣기 위한 것입니다. 듣고 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신은 꽤 다른 관계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응답은 바로 우리의 기도이다.”고 말하죠.
말이 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럼요, 물론 말이 되지요. 이것은 기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인 거죠. 특히 서구 개신교에서는 이 접근이 꽤 오랫동안 생소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목회자로서 가장 좋아했던 일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익숙하게 무언가를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대화를 통해 이런 반전을 경험하도록 돕는 거죠. (기도라는 행위에 있어서) '요청'에서 '듣기'로의 전환은 정말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 목사나 다른 누군가의 코칭이나 격려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 이러한 전환은 엄청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제가 목사였을 때 있었던 한 대화가 기억납니다. 저는 외로이 살고 있는 한 여성을 찾아갔었습니다. 그녀는 종이 또는 천을 고정해 놓고 바느질 작업을 하는, 그런 걸 하고 있었어요. 그것을 뭐라고 부르죠?
아마도 바느질로 하는 자수(needlepoint) 같은 걸 말씀하시건가요?
바느질로 하는 작업이 맞는데, 도구를 잡고서 작업하는 걸 부르는 단어가 있잖아요. 어쨌든 (그걸 하면서) 그녀가 저에게 말했어요. “제 인생이 너무 느슨해요. 뭔가 제 삶을 정의내려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해요. 지금 제가 쥐고 있는 이 바느질 틀처럼 말이죠. 이걸 팽팽하게 당기면, 모든 것이 딱 들어맞기 시작하는 것 말이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그럼 제가 당신께 그걸 가져다드릴게요.” 그리고 몇 일 후에 시편 사본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말씀드린 것이예요. 이 시편 중 하나를 잡고, 당신의 마음을 그 시편에 맞춰 팽팽하게 당겨보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많은 내용을 읽으려 하지 말고, 이 중에서 한두 편만 골라서 해보세요.”
그러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 행위가 일으키는 일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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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읽는 『신개정표준역 성경(New Revised Version)』의 시편 22편은 다윗 왕의 고통스러운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고, 내 신음 소리를 멀리하셨나이까?”
유진 피터슨의 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외딴 곳에 버려두십니까?
고통으로 몸을 웅크린 채
종일토록 하나님께 부르짖건만 응답이 없습니다. 한마디도.
나,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몸을 뒤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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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편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즉 기도를 훈련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는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있는데요,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도 그런 관습이 있나요? 또는 당신의 개인적인 영성 생활에서 시편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나요?
아, 이건 말하기 어려운 주제인데요…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 왜냐하면 여기에 담긴 것이 너무 많아서요.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아침에 첫 시간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다양한 상황을 포괄하는 일곱 개의 시편을 선택해 외웠어요. 꽤 긴 시편들을 골랐기 때문에 암기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일요일에는 안식일 시편인 시편 92편을 암송합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 68편으로 가는데, 이 시편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온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시편이에요. 그러나 이 긴 시편 전체를 읽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요.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 시편이 보여주는 찬양, 분노, 황폐함 등 다양한 감정의 흐름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맞아요.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것들이 하나로 맞아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게 그거예요.
그리고 시편 18편은 은유가 가득한 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저는 그러한 시편 7개를 선택해 암송하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그렇게 해왔죠.
그리고 나서는… 전체 이야기를 듣고 싶으세요?
그다음엔 그냥 침묵합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15분에서 25분 정도는 제 자신을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첫 단계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이 제 상상 속에 스며들기 때문에,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혼란을 비우고 정말 알아야 할 말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저는 기도할 때 특정한 패턴을 제시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보지 않아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저도 스스로 가능한 것을 찾아내서 해본 것뿐입니다. 하지만 목사로 있을 때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에게 맞는 방식을 찾도록 도왔죠.
그들이 자신만의 일곱 시편이나 그와 같은 무언가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거군요.
맞습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정직성”입니다. 당신은 시편이 우리를 “정직한 기도”로 훈련시키고, “삶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거칠고 생생한 흐름 속에 우리를 담가 준다”고 표현하셨죠. 그리고 특히 『하나님께 응답하기(Answering God)』를 포함해서, 당신의 책들은 몇 세대에 걸쳐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의 훈련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당신이 말하시는 것 중 하나는 시편의 정직성, 즉 인간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인데, 심지어 성서 읽기 계획서나 공식적인 기독교 텍스트조차 종종 저주의 시편이나 시편 속에 담긴 저주하는 내용을 편집하거나 빼는 경우가 있죠. 우리가 잘 알고 노래로도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시편에는 “바벨론 강가에 앉아 우리가 울었도다”라는 구절이 있지만, 이 시편에는 “네 어린 것들을 들어 바위에 내리치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런 인간 조건에 대한 정직성이 시편의 핵심이라고 보이죠.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정직성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요? 성경에 있고, 영감을 받은 것이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다루고 실천해온 텍스트에서죠.
제가 두 달 전에 보노(Bono)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우리는 시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죠. “화가 나면 어떻게 하세요?” 정확히 인용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하지 않으면서 욕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리고 저는 시편, 예를 들어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앉아 울었도다” 같은 시편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특정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실제 삶에서는) 잔인하거나 악독해지지는 않는 방식이죠. 저는 그것이 시편이, 아니, 성경 이야기 전체가 늘 해왔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성경 이야기들이요. 그리고 당신도 아시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에 있는 이런 구절들과 이미지들이 세상에서 성경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있죠. 그런데 저는 당신이 이에 대해 더 정교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의미로 작동해야 하는지를요. 당신이 이렇게 쓰셨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찬송을 정직하게 드리는 건 쉽다. 우리의 상처를 가지고 정직하게 드리는 것은 약간 더 어렵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어두운 감정, 우리의 증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그 어두운 감정, 증오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어떻게 구속적이고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인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저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오, 실망, 복수심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쏟아내야 해요. 이런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들은 자주 병들거나 우울해지죠. 두려움, 불편함, 그리고 증오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감정들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해방감을 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덜 위험해진다고 보시나요?
아, 그렇죠. 훨씬 덜 위험하죠.
그건 인간 존재와 세상의 미스터리 같은 것이죠. 우리 안의 신비 말이에요.
맞아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예술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우리가 스스로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감정이나 인식을 끌어낼 수 있어요. 그런데 좋은 예술가라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정직하다면, 그들은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새 회고록 『유진 피터슨』에서 제가 말하는 현상을 언급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의 시편이 가장 인간적인 면까지도 빛으로 끌어내며, 심지어 가장 나쁜 면까지도 끌어내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군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썼죠. “고전적으로 인간은 초월성을 찾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알코올과 약물을 통한 화학적으로 유도된 황홀경, 성적 쾌락을 위한 오락적 성관계, 그리고 군중을 통한 황홀경.”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흔히 약물과 성관계에 대해서는 경고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군중에 대해서는 거의 경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이 말이 매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심리적으로 통찰력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과 작가들 중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 이상으로, 글쓰기를 통해 진리를 전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목사였을 때는, 같은 책을 10권이나 20권, 많게는 30권씩 사서 교회 현관에 놓고 교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현실의 삶, 곧 우리가 스스로의 삶과 세상의 삶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그리스도교적 작가들이 있거든요.
그 책들 중 어떤 작가들이 포함되었나요?
찰스 디킨스가 하나의 예입니다. 저는 그의 책들을 세 번, 네 번씩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를 그리스도교적인 독서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맞아요. 하지만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인 독서가 있을까요?
더 이야기해 주세요.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 나쁜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게 되고, 자신도 그와 같은 일을 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월리스 스테그너(Wallace Stegner)는 가장 건강한 소설가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종종 저녁 시간에 책을 소리 내어 읽곤 하는데, 아마 스테그너의 책을 다섯 번에서 열 번쯤 읽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 뒤편에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알아요.
이런 질문은 아주 큰 주제이긴 하지만, 시작점을 묻고 싶어요. 지금의 삶에서 여전히 당신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대답을 찾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인간의 삶에서 분노, 용서, 슬픔, 그리고 잘못된 것들을 경험하면서 무엇이 당신을 놀라게 했나요?
글쎄요, 저는 지금 83세입니다.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이제 더 이상 질문이 거의 없다는 점이에요. 마치 모든 것이 제가 예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잘 흘러가는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자주 무언가를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잘못된 곳에 둡니다. 과거에는 저 자신에게 화를 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세상의 많은 부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거죠. 열두 번이나 열쇠를 찾아야 한다면, 그냥 즐기세요.
가족이 있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자녀 셋과 손주 아홉이 있는데, 이들 덕분에 많은 것을 감사할 수 있고, 또 걱정할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아름다움을 몰아내지는 않아요. 우리는 그럴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과 영혼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엄청난 신비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특정한 조건들 속에서 이 일을 한다.
… 장소. 하지만 그저 지도에 표시된 장소가 아니라, 지형도에 있는 장소이다.
이름이 붙은 산과 강, 식별 가능한 야생화와 숲, 해발 고도와 연간 강수량으로 정의된 장소.
나는 이 땅 위에서 모든 일을 한다. 나는 공중부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
시간. 그러나 그저 추상적인 시간,
달력에 표시된 기하학적인 격자나 시계에 표시된 숫자로 된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 잉태의 시간,
신의 현존에 대해 깨어 있는 시간이다.
이후에 무엇이 올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유진 피터슨의 회고록, 『유진 피터슨』 중에서
* * *
언젠가 당신이 “사람들은 ‘영적인 삶을 성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고 쓰셨죠. 그리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영적’이라는 단어를 없애는 것이다. 성숙하게 되는 것은 당신의 삶이지, 삶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영적”이라는 단어는 당신이 목회를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더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해 어떻게 들으시고,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단어가 값싸게 느껴집니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영적”이라고 정의하면서, 그걸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시키는 거죠. 사실 세상 전체가 영적입니다.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바람이고, 숨결이에요. 사람들이 어디서나 숨을 쉬고 있잖아요. 모두가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면 각각을 분리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전체'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제가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그겁니다. 사람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죠. “저 사람은 정말 영적이야.” “저 여자는 정말 영적인 사람이야.” 말도 안 돼요. 당신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교회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따로 정의내릴 수 있는 '영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속에 그것이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삶의 전체를 아예 빼앗기게 되는 거죠.
당신은 이른바 영적인 삶과 지적인 삶 — 즉 개념들에 대한 사랑, 텍스트와 가르침의 엄격함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춰오셨죠.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셨나요? 아니면 창의적인 긴장감이 있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이와 같은 부분을 다루는 법이나 그것을 엄격히 다룰 수 있는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저 항상 책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좋은 책, 훌륭한 작가들을 사랑했죠. 어떤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훈련도 아니었어요. 그 자체가 일종의 영성이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하신 말씀을 반박하시네요.
그렇군요.
지금 83세시군요. 방금 전 대화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말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떠오릅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소중하지만요. 제가 궁금한 건 이런 겁니다, 83년 동안 현실의 광대함 그리고 신이 어떤 존재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씨름한 끝에, 다른 단어들, 심지어 '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작아지는 것은 아닌지요?
단어들은 정말로 작아집니다.
지금의 당신에게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너무 작게 느껴지나요?
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매우 신중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Christianity)"라는 단어는 어떠신가요?
아, 그건 더 나빠요.
그렇죠.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단어를 제도적 의미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쉽게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관련된 부정적인 경험, 특정 교회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그 단어를 없애지 않을까요?
그런데 —
물론,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죠. 저 또한 소위 그리스도교의 일부니까요.
맞습니다. 당신의 삶과 글은 교회라는 기획(enterprise), 그리고 교회가 지닌 열망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맞아요. 저와 아내는 작은 교회에 다닙니다. 제가 한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였을 때, 사람들이 떠나면서 “다닐만한 교회를 어떻게 골라야 하나요?”라고 묻곤 했습니다. 보통의 제 대답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이자 가장 작은 교회를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6개월 후에도 그곳이 잘 맞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작은 교회를 가보라고 했죠.
그렇다면, 왜 작은 교회가 더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죠.
저는 장로교인입니다만 지금은 루터교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또래이고, 담임목사님은 젊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목사이지요. 저는 제가 잘 모르는 것에 몰두하기 위해 그곳에 갑니다. 그곳에는 약 80명이 모이는데, 그중 일부는 어릴 때부터 저와 서로 알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지요. 그게 참 신선해요.
당신이 “기도는 기억의 실천으로 성숙해진다”고 쓰신 적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기도는 기억의 실천으로 성숙해진다.” 정말 멋진 문장입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이 말이 당신에게도 진실한가요? 그렇다면 그게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펼쳐지나요? 같은 시편으로 매년 반복해서 기도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기도는 어떻게 변했나요?
아, 그 답은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기도가 제 무의식에 들어간 거죠. 저는 이 말을 “영적”인 것으로 들리게 하고 싶지 않지만 — 그래도 사실이 그렇습니다.
수년간 제 안에서 진행되어 온 어떤 것이 이제 저의 정신(psyche) 속에 완전히 스며들었고, 그 사실이 제게 희망을 줍니다.
정치적으로 지금 우리 나라 상황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지만, 제가 아는 개개인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올바르게 살기를 결심합니다. 저는 이런 일에 동참하는 많은 사람들과 동료가 된 것 같아요. 당신도(이 대화의 호스트인 Krista Tippet을 말한다 — 역자 주) 그중 한 명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리고, 이 대화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끝인가요?
네, 끝인 것 같아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2018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로서 워싱턴 스포캔 근처에서 목회하고 있는 에릭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의 긴 생애 끝까지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제가 아는 가장 거룩한 사람이셨습니다. 죽음에 있어서도,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은혜와 진리의 사람입니다.”
이 대화는 "Answering God", On Being with Krista Tippet의 대화를 편집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https://onbeing.org/programs/eugene-peterson-answering-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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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유진 피터슨은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대표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Answering God)』,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메시지 성경(The Message: The Bible in Contemporary Language)』 등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 뒤인 2021년에, 그의 사순절 설교 시리즈가 다음의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설교: 종말의 세상 끝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다(This Hallelujah Banquet: How the End of What We Were Reveals Who We Can Be)』. 유진 피터슨은 '그리스도우리왕장로교회(Christ Our King Presbyterian Church)'에서 29년간 담임목사로 봉직했습니다. 생애 마지막에는 몬태나 주 레이크사이드의 글래셔 국립공원 바로 바깥, 그의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아내 잰(Jan)과 함께 여생을 보냈습니다. 2016년 유진 피터슨이 크리스타와 이 대화를 나눴던 곳이 바로 그 집이었고, 2년 후 그는 85세의 나이로 소천했습니다.
이 글은 <성경 언어의 시적 특성 - 신에게 응답하기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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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기도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흥미로웠어요. 언어의 힘과 그 중요성, 그리고 신중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순히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읽는 것과 듣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요. 당신은 우리가 듣지 않고 기도하면, 기도는 맥락을 벗어난 것이 된다고 이야기했죠. 이 점은 말하는 데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듣지 않고 말한다면, 말도 맥락을 벗어나게 되죠. 그리고 지금 공적인 담화의 영역에서는 듣는 과정이 많이 생략되고 있어요.
기도에서 가장 많이 소홀히 되는 부분이 바로 듣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 부분을 가르쳐 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중에서도 최고의 스승이었어요. 그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도는 듣기 위한 것입니다. 듣고 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신은 꽤 다른 관계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응답은 바로 우리의 기도이다.”고 말하죠.
말이 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럼요, 물론 말이 되지요. 이것은 기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하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인 거죠. 특히 서구 개신교에서는 이 접근이 꽤 오랫동안 생소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목회자로서 가장 좋아했던 일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익숙하게 무언가를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대화를 통해 이런 반전을 경험하도록 돕는 거죠. (기도라는 행위에 있어서) '요청'에서 '듣기'로의 전환은 정말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 목사나 다른 누군가의 코칭이나 격려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 이러한 전환은 엄청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제가 목사였을 때 있었던 한 대화가 기억납니다. 저는 외로이 살고 있는 한 여성을 찾아갔었습니다. 그녀는 종이 또는 천을 고정해 놓고 바느질 작업을 하는, 그런 걸 하고 있었어요. 그것을 뭐라고 부르죠?
아마도 바느질로 하는 자수(needlepoint) 같은 걸 말씀하시건가요?
바느질로 하는 작업이 맞는데, 도구를 잡고서 작업하는 걸 부르는 단어가 있잖아요. 어쨌든 (그걸 하면서) 그녀가 저에게 말했어요. “제 인생이 너무 느슨해요. 뭔가 제 삶을 정의내려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해요. 지금 제가 쥐고 있는 이 바느질 틀처럼 말이죠. 이걸 팽팽하게 당기면, 모든 것이 딱 들어맞기 시작하는 것 말이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그럼 제가 당신께 그걸 가져다드릴게요.” 그리고 몇 일 후에 시편 사본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말씀드린 것이예요. 이 시편 중 하나를 잡고, 당신의 마음을 그 시편에 맞춰 팽팽하게 당겨보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많은 내용을 읽으려 하지 말고, 이 중에서 한두 편만 골라서 해보세요.”
그러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 행위가 일으키는 일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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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읽는 『신개정표준역 성경(New Revised Version)』의 시편 22편은 다윗 왕의 고통스러운 외침으로 시작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고, 내 신음 소리를 멀리하셨나이까?”
유진 피터슨의 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외딴 곳에 버려두십니까?
고통으로 몸을 웅크린 채
종일토록 하나님께 부르짖건만 응답이 없습니다. 한마디도.
나,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몸을 뒤척입니다.”
* * *
당신은 시편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즉 기도를 훈련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는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있는데요,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도 그런 관습이 있나요? 또는 당신의 개인적인 영성 생활에서 시편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나요?
아, 이건 말하기 어려운 주제인데요…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 왜냐하면 여기에 담긴 것이 너무 많아서요.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아침에 첫 시간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다양한 상황을 포괄하는 일곱 개의 시편을 선택해 외웠어요. 꽤 긴 시편들을 골랐기 때문에 암기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일요일에는 안식일 시편인 시편 92편을 암송합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 68편으로 가는데, 이 시편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온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시편이에요. 그러나 이 긴 시편 전체를 읽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요.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 시편이 보여주는 찬양, 분노, 황폐함 등 다양한 감정의 흐름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맞아요.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것들이 하나로 맞아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게 그거예요.
그리고 시편 18편은 은유가 가득한 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저는 그러한 시편 7개를 선택해 암송하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그렇게 해왔죠.
그리고 나서는… 전체 이야기를 듣고 싶으세요?
그다음엔 그냥 침묵합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15분에서 25분 정도는 제 자신을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첫 단계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이 제 상상 속에 스며들기 때문에,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혼란을 비우고 정말 알아야 할 말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저는 기도할 때 특정한 패턴을 제시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보지 않아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저도 스스로 가능한 것을 찾아내서 해본 것뿐입니다. 하지만 목사로 있을 때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에게 맞는 방식을 찾도록 도왔죠.
그들이 자신만의 일곱 시편이나 그와 같은 무언가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거군요.
맞습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정직성”입니다. 당신은 시편이 우리를 “정직한 기도”로 훈련시키고, “삶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거칠고 생생한 흐름 속에 우리를 담가 준다”고 표현하셨죠. 그리고 특히 『하나님께 응답하기(Answering God)』를 포함해서, 당신의 책들은 몇 세대에 걸쳐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의 훈련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당신이 말하시는 것 중 하나는 시편의 정직성, 즉 인간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인데, 심지어 성서 읽기 계획서나 공식적인 기독교 텍스트조차 종종 저주의 시편이나 시편 속에 담긴 저주하는 내용을 편집하거나 빼는 경우가 있죠. 우리가 잘 알고 노래로도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시편에는 “바벨론 강가에 앉아 우리가 울었도다”라는 구절이 있지만, 이 시편에는 “네 어린 것들을 들어 바위에 내리치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런 인간 조건에 대한 정직성이 시편의 핵심이라고 보이죠.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정직성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요? 성경에 있고, 영감을 받은 것이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다루고 실천해온 텍스트에서죠.
제가 두 달 전에 보노(Bono)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우리는 시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죠. “화가 나면 어떻게 하세요?” 정확히 인용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하지 않으면서 욕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리고 저는 시편, 예를 들어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앉아 울었도다” 같은 시편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특정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실제 삶에서는) 잔인하거나 악독해지지는 않는 방식이죠. 저는 그것이 시편이, 아니, 성경 이야기 전체가 늘 해왔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성경 이야기들이요. 그리고 당신도 아시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에 있는 이런 구절들과 이미지들이 세상에서 성경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있죠. 그런데 저는 당신이 이에 대해 더 정교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의미로 작동해야 하는지를요. 당신이 이렇게 쓰셨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찬송을 정직하게 드리는 건 쉽다. 우리의 상처를 가지고 정직하게 드리는 것은 약간 더 어렵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어두운 감정, 우리의 증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그 어두운 감정, 증오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어떻게 구속적이고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인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저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오, 실망, 복수심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고 그것을 쏟아내야 해요. 이런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들은 자주 병들거나 우울해지죠. 두려움, 불편함, 그리고 증오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감정들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해방감을 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덜 위험해진다고 보시나요?
아, 그렇죠. 훨씬 덜 위험하죠.
그건 인간 존재와 세상의 미스터리 같은 것이죠. 우리 안의 신비 말이에요.
맞아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예술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우리가 스스로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감정이나 인식을 끌어낼 수 있어요. 그런데 좋은 예술가라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정직하다면, 그들은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새 회고록 『유진 피터슨』에서 제가 말하는 현상을 언급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의 시편이 가장 인간적인 면까지도 빛으로 끌어내며, 심지어 가장 나쁜 면까지도 끌어내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군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썼죠. “고전적으로 인간은 초월성을 찾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알코올과 약물을 통한 화학적으로 유도된 황홀경, 성적 쾌락을 위한 오락적 성관계, 그리고 군중을 통한 황홀경.”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흔히 약물과 성관계에 대해서는 경고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군중에 대해서는 거의 경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이 말이 매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심리적으로 통찰력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과 작가들 중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 이상으로, 글쓰기를 통해 진리를 전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목사였을 때는, 같은 책을 10권이나 20권, 많게는 30권씩 사서 교회 현관에 놓고 교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현실의 삶, 곧 우리가 스스로의 삶과 세상의 삶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그리스도교적 작가들이 있거든요.
그 책들 중 어떤 작가들이 포함되었나요?
찰스 디킨스가 하나의 예입니다. 저는 그의 책들을 세 번, 네 번씩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를 그리스도교적인 독서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맞아요. 하지만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인 독서가 있을까요?
더 이야기해 주세요.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 나쁜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게 되고, 자신도 그와 같은 일을 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월리스 스테그너(Wallace Stegner)는 가장 건강한 소설가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종종 저녁 시간에 책을 소리 내어 읽곤 하는데, 아마 스테그너의 책을 다섯 번에서 열 번쯤 읽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 뒤편에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알아요.
이런 질문은 아주 큰 주제이긴 하지만, 시작점을 묻고 싶어요. 지금의 삶에서 여전히 당신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대답을 찾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인간의 삶에서 분노, 용서, 슬픔, 그리고 잘못된 것들을 경험하면서 무엇이 당신을 놀라게 했나요?
글쎄요, 저는 지금 83세입니다.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이제 더 이상 질문이 거의 없다는 점이에요. 마치 모든 것이 제가 예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잘 흘러가는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자주 무언가를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잘못된 곳에 둡니다. 과거에는 저 자신에게 화를 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세상의 많은 부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거죠. 열두 번이나 열쇠를 찾아야 한다면, 그냥 즐기세요.
가족이 있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자녀 셋과 손주 아홉이 있는데, 이들 덕분에 많은 것을 감사할 수 있고, 또 걱정할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아름다움을 몰아내지는 않아요. 우리는 그럴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과 영혼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엄청난 신비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특정한 조건들 속에서 이 일을 한다.
… 장소. 하지만 그저 지도에 표시된 장소가 아니라, 지형도에 있는 장소이다.
이름이 붙은 산과 강, 식별 가능한 야생화와 숲, 해발 고도와 연간 강수량으로 정의된 장소.
나는 이 땅 위에서 모든 일을 한다. 나는 공중부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
시간. 그러나 그저 추상적인 시간,
달력에 표시된 기하학적인 격자나 시계에 표시된 숫자로 된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 잉태의 시간,
신의 현존에 대해 깨어 있는 시간이다.
이후에 무엇이 올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유진 피터슨의 회고록, 『유진 피터슨』 중에서
* * *
언젠가 당신이 “사람들은 ‘영적인 삶을 성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고 쓰셨죠. 그리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영적’이라는 단어를 없애는 것이다. 성숙하게 되는 것은 당신의 삶이지, 삶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영적”이라는 단어는 당신이 목회를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더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해 어떻게 들으시고,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단어가 값싸게 느껴집니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영적”이라고 정의하면서, 그걸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시키는 거죠. 사실 세상 전체가 영적입니다.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바람이고, 숨결이에요. 사람들이 어디서나 숨을 쉬고 있잖아요. 모두가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면 각각을 분리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전체'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제가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그겁니다. 사람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죠. “저 사람은 정말 영적이야.” “저 여자는 정말 영적인 사람이야.” 말도 안 돼요. 당신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교회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따로 정의내릴 수 있는 '영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속에 그것이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삶의 전체를 아예 빼앗기게 되는 거죠.
당신은 이른바 영적인 삶과 지적인 삶 — 즉 개념들에 대한 사랑, 텍스트와 가르침의 엄격함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춰오셨죠.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셨나요? 아니면 창의적인 긴장감이 있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이와 같은 부분을 다루는 법이나 그것을 엄격히 다룰 수 있는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저 항상 책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좋은 책, 훌륭한 작가들을 사랑했죠. 어떤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훈련도 아니었어요. 그 자체가 일종의 영성이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하신 말씀을 반박하시네요.
그렇군요.
지금 83세시군요. 방금 전 대화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말을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떠오릅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소중하지만요. 제가 궁금한 건 이런 겁니다, 83년 동안 현실의 광대함 그리고 신이 어떤 존재일지에 대해 고민하고 씨름한 끝에, 다른 단어들, 심지어 '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작아지는 것은 아닌지요?
단어들은 정말로 작아집니다.
지금의 당신에게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너무 작게 느껴지나요?
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매우 신중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Christianity)"라는 단어는 어떠신가요?
아, 그건 더 나빠요.
그렇죠.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단어를 제도적 의미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쉽게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관련된 부정적인 경험, 특정 교회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그 단어를 없애지 않을까요?
그런데 —
물론,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죠. 저 또한 소위 그리스도교의 일부니까요.
맞습니다. 당신의 삶과 글은 교회라는 기획(enterprise), 그리고 교회가 지닌 열망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맞아요. 저와 아내는 작은 교회에 다닙니다. 제가 한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였을 때, 사람들이 떠나면서 “다닐만한 교회를 어떻게 골라야 하나요?”라고 묻곤 했습니다. 보통의 제 대답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이자 가장 작은 교회를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6개월 후에도 그곳이 잘 맞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작은 교회를 가보라고 했죠.
그렇다면, 왜 작은 교회가 더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죠.
저는 장로교인입니다만 지금은 루터교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또래이고, 담임목사님은 젊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목사이지요. 저는 제가 잘 모르는 것에 몰두하기 위해 그곳에 갑니다. 그곳에는 약 80명이 모이는데, 그중 일부는 어릴 때부터 저와 서로 알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지요. 그게 참 신선해요.
당신이 “기도는 기억의 실천으로 성숙해진다”고 쓰신 적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기도는 기억의 실천으로 성숙해진다.” 정말 멋진 문장입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이 말이 당신에게도 진실한가요? 그렇다면 그게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펼쳐지나요? 같은 시편으로 매년 반복해서 기도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기도는 어떻게 변했나요?
아, 그 답은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기도가 제 무의식에 들어간 거죠. 저는 이 말을 “영적”인 것으로 들리게 하고 싶지 않지만 — 그래도 사실이 그렇습니다.
수년간 제 안에서 진행되어 온 어떤 것이 이제 저의 정신(psyche) 속에 완전히 스며들었고, 그 사실이 제게 희망을 줍니다.
정치적으로 지금 우리 나라 상황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지만, 제가 아는 개개인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올바르게 살기를 결심합니다. 저는 이런 일에 동참하는 많은 사람들과 동료가 된 것 같아요. 당신도(이 대화의 호스트인 Krista Tippet을 말한다 — 역자 주) 그중 한 명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리고, 이 대화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끝인가요?
네, 끝인 것 같아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2018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로서 워싱턴 스포캔 근처에서 목회하고 있는 에릭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의 긴 생애 끝까지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제가 아는 가장 거룩한 사람이셨습니다. 죽음에 있어서도,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은혜와 진리의 사람입니다.”
이 대화는 "Answering God", On Being with Krista Tippet의 대화를 편집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https://onbeing.org/programs/eugene-peterson-answering-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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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유진 피터슨은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대표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Answering God)』,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메시지 성경(The Message: The Bible in Contemporary Language)』 등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 뒤인 2021년에, 그의 사순절 설교 시리즈가 다음의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설교: 종말의 세상 끝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다(This Hallelujah Banquet: How the End of What We Were Reveals Who We Can Be)』. 유진 피터슨은 '그리스도우리왕장로교회(Christ Our King Presbyterian Church)'에서 29년간 담임목사로 봉직했습니다. 생애 마지막에는 몬태나 주 레이크사이드의 글래셔 국립공원 바로 바깥, 그의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아내 잰(Jan)과 함께 여생을 보냈습니다. 2016년 유진 피터슨이 크리스타와 이 대화를 나눴던 곳이 바로 그 집이었고, 2년 후 그는 85세의 나이로 소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