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절의 가면극, 월터 크레인, 1905-1909. 캔버스에 유화. Hessisches Landesmuseum Darmstadt, Germany. Wikimedia Commons. Source: Daderot
시간은 다양한 목소리와 이미지, 소리로 이야기한다. 스톤헨지를 건축한 신석기인들은 하지와 동지가 성스러운 시간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지는 오후 3시 50분경에 한겨울의 태양이 남서쪽으로 지면, 그 빛이 스톤헨지의 중심을 지나 돌제단에 떨어지던 때를 가리킨다. 수천 년이 지나, 중세의 농부에게 시간은 계절의 변화와 성인들의 축일을 의미했다. 이것은 수도원의 종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져서, 수도사에게 조과에서 만과라는, 일상 속의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우리는 약 1억 년에 단 1초의 오차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원자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성스러운 시간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주기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빠르게 흐르는 날들에 쫓기듯 살며, 여러 순간과 사건들은 끊임없이 지나가고 흘러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땅의 계절이나 심지어 우리 인생의 계절—셰익스피어가 '인생의 일곱 시기'라고 묘사한,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사는 사람이 겪는 유아 시기부터 노년기1—과 거의 무관하게 산다. 고대인들에게 행성은 '크로노크라토르(chronocrators),' 또는 '시간의 표지markers of time'라고 불렸다. 서로 다른 삶의 주기는 서로 다른 행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비너스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나이를 지배하는데, 이는 15세에서 22세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리고 70세 이상의 인생 마지막 시기는 토성이 차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간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펼쳐지지 않으며, 땅과 우주, 또는 우리 삶의 주기와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만들었지만 마치 감독관처럼 우리를 압박하는 트레드밀이 되어 점점 빠르게 돌아간다.
우리는 시간과 이런 식의 관계에 계속 붙들려 있어야 할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자연 세계 및 더 큰 우주와 다시 연결되는 감각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시간이 성스럽다는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현대인의 표층 의식 아래에는, 급하게 흘러가는 날들과 점점 짧아지는 시간의 조각들로 가득한 세계가 있다. 이곳은 신화의 영역으로 알려졌던 집단 무의식의 세계이다. 여기서 시간은 고대의 리듬에 따라 더 느리게 흐른다. 이곳은 태초의 시간의 신 크로노스Kronos의 고향이다. 그의 리듬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움직임과 같고, 우주의 원초적인 리듬은 은하의 탄생과 죽음을 포함한다. 이 신의 현존 안에 모든 피조물이 있으며, 각각의 피조물은 저마다의 시간을 가지면서도 살아있는 전체의 일부분이다—하루살이에서부터 생멸하는 별까지. 이곳에서 해바라기는 매일 태양을 따라 흔들리고, 우리의 조상들은 시간이 분절되는 지점들을 기념하며 예배했다.
* * *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라는 고대의 신을 가두어버렸다. 우리 발 밑에 있는 땅과의 우리 자신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처럼. 합리적 의식은 이러한 리듬과 그것의 성스러운 의미를 우리의 일상에서 몰아냈다. “아버지 시간Father Time”은 더 이상 시간의 주기와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는 지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씨앗의 생애 주기와 계절이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는지, 봄에는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가을에는 잎이 떨어지는 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일상적 활동이 하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거대한 통합의 일부라는 것 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의 현인 노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2
오늘날 우리의 망원경은 별들을 더 선명하게 보지만, 그 별들은 더 이상 우리의 일상에 가깝지 않으며, 그 정렬은 더 이상 길한 사건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다. 시간 자체도 고립되고, 소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간은 단순히 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세계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인생이라는 책에 기록된 것처럼. 지층 속의 화석들처럼, 지구의 기억은 시간의 기록 보관소, 곧 신지학자Theosophists들이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잊었다. 우리는 지금 이성적 세계의 해변가에 갇혀, 시계와 시간의 흐름만 있을 뿐,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은 단순히 노인만이 아니라, 정원의 이미지에 빗댈 수 있다. 그곳에서 꽃들은 제 자리를 가지고 자신만의 의미를 띈다. 애정어린 돌봄을 받으며. 이것이 시간의 비밀이다: 의미 있는 꽃 피움—알맞은 때, 알맞은 자리에서의 피어나는 것. 전도서의 말처럼, “모든 것에 계절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목적들에는 때가 있다.” 이 정원에서 각각의 순간은 저마다의 목적과 무한한 형태의 일부분을 가지고 있다. 매 순간마다 꽃이 피고, 수많은 기회가 생겨나며,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발생한다. 하지만 이 형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노래가 들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며, 이 내면의 정원을 돌봐야 합니다. 시간이 사랑이라는 마법이나 주의 깊은 태도를 잃어버리면, 의미는 사라지고, 시간은 단지 시계의 똑딱거림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을 사물, 심지어 기계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존재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계를 바라보지만” 시간의 생동감을 깨닫는 일은 드물다. 이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시간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반복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면 세계의 신비는 예전에는 우리의 일상에 속했으며, 의례rituals와 입문의식initiation을 통해 표현되었다. 의례는 우리 인생의 계절을 나타내고, 영혼과 몸을 연결하며, 몸과 마음 사이의 전환을 성스럽게 만들었다. 옥수수를 심고, 의례나 기도를 바치며 수확할 때, 우리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엮어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걸었던 땅으로, 오늘날 세계 각지의 토착민들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지혜와 앎이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순간들을 그 주변의 형태들과 연결할 수 있는 실타래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자연 속에 살때, 창밖을 내다보면 만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가 쉽다. 나의 하루는 물의 상승과 하강에 의해 시작과 끝이 정해진다. 해안가에 도래하는 새들은 무슨 달인지를 알게 하고, 거위들이 “V”자 모양으로 높은 하늘을 날 때는 계절이 구분된다. 나 또한 시간의 압박이 덜해지고, 매일의 요구가 줄어드는 나이에 다다랐다. 나는 느린 리듬과 함께 앉아 여름마다 젊은 사슴들이 풀을 먹는 모습을 기다린다. 그들은 경계하는 어미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다.
예전에 누군가 내게 준 머그잔에는 “신은 특정한 일들을 수행하도록 이 세상에 나를 보내셨다. 바로 지금,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으므로,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성취할 일들의 목록에서 멀어져, 더 깊은 침묵 속에서 다른 차원의 시간과 대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간과 시간아닌 것은 서로 가까워지고, 종종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 두 시간의 측면이 같은 태피스트리의 일부임을 점점 더 많이 느끼고, 형상과 공허가 서로를 비추듯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시간의 급박한 요구는 종종 “현재라는 순간만 존재한다”는 영적 가르침으로 답변된다. 이 단순한 순간의 인식에 진리가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매 순간은 그 자체로 살아 있습니다. 매일 아침 해가 처음 떠오를 때, 시간이 오기 전, 시계와 달력이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그 황금 같은 순간들 말이다. 이것은 또한 신화 속 에덴의 정원으로, 타락 이전의 순수한 세계에 대한 기억이며, 우리가 신과 함께 걷고 모든 것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순간들 속에는 시간의 모든 리듬들. 이 고요한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무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나선의 일부분으로, 나선형은 선사시대 예술에 등장하는 초기의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은하들은 해바라기처럼, 물가의 꽃처럼 나선형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은하수의 작은 나선형 팔인 오리온 팔 Orion arm에 살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전개는 이러한 원형적 패턴을 따르며, 각 순간은 수세기와 공간을 초월해 연결된다. 각 순간은 시간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T.S. 엘리엇이 말했듯이, “역사는 시간에서 벗어난 순간들이 모여 이루는 무늬이다.”
빈곤한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상자에 가두고, 그 상자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우리는 일차원적인 시간만을 경험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아 있으며, 순간 순간의 인식에서부터 자연과 우주의 리듬에 이르기까지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여러 가지 멜로디에 맞춰 춤추며,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우리의 이야기와 기억 속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 그리고 호흡을 관찰할 때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며, 산소가 우리의 몸에 들어오고 다시 흘러 나간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비시간성과 시간의 신비로운 교차점에 더 가까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 처음 알았던 정원, 놀이가 기쁨이었던 때, 우리 인생 이야기의 “태초에”이다. 다만 이제 그 교차점은 느려지는 몸, 허리 통증, 차오르는 숨 등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손짓한다. 우리의 하루 속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 더 많이 생겨나고, 그곳에는 공허함이 있으며, 간단한 것들이 큰 계획보다 더 중요해진다.
우리는 점차 이 물가에 다가가며, 우리의 의식이 다른 지평선에 닿도록 허용한다. 종종 이 해안에는 기억들이 쌓이는데, 때로는 폭풍에서 쓸려온 잔해처럼 보인다. 그러면 시간은 다르게 이야기하며, 어딘가에서 속삭인다. 여정은 항상 계속된다. 그러나 이정표는 낯설어 보이고, 특히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알려진 것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의 문화는 영원한 젊음을 기념하려 하며, 심지어 AI에 의해 약속된 불사의 환상을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시간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잃어버릴 것은 없음을 알게 된다. 한 일본의 절명시Japanese Death Poem에서 바이류Bairyu가 말했듯이:
오 수국—
너는 변하고 또 변해
원래의 색으로 돌아간다.
시간의 리듬과 계절—첫 서리나 봄에 꽃봉오리가 터지는 모습은 우리가 땅에 속해 있음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들은 또한 영혼에게 말하여, 무한한 펼침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알게 한다. 한겨울의 태양이 거대한 석상 사이로 지는 모습을 신석기 농부들이 바라볼 때, 그들은 땅과 우주,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고대의 연결 고리를 이해하는 언어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시계 없이 살았던 중세 농부의 의식조차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를 감각하고 그 표면 아래를 사는 존재의 방식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삶의 방식은 별들에게까지 닿는다. 이처럼 표징과 성스러운 의미로 가득한 더 넓은 세계를 우리는 필요로 한다. 우리 자신을 먹이기 위해, 우리가 자신만의 길을 찾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그러면 시간은 다시 성스러워질 수 있다. 시간은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모든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단지 배우일 뿐이다; 거기에는 출구와 입구가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시간 안에서 여러 역할을 하고, 그의 행동은 일곱 가지 나이로 나뉜다…” 《맘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발췌.
《도덕경》(Tao Te Ching) 25장, 번역: 지아 펑(Gia Feng)과 제인 잉글리시(Jane English).
*스스로 그러함; what is natural - 역자 주.
이 글은 Parabola 2023년 여름호, The Cosmos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parabola.org/2023/05/01/sacred-time/
저자: Llewellyn Vaughan-Lee
Llewellyn Vaughan-Lee 는 Naqshbandiyya-Mujaddidiyya Sufi Order의 수피 지도자이다. 그는 Golden Sufi Center의 설립자이고 여러 책을 저술했다. 가장 최근의 저술로는 지구를 우리의 기도에 포함시키기: 영적 수행의 세계적 차원 Including the Earth in Our Prayers: A Global Dimension to Spiritual Practice이 있다.
사계절의 가면극, 월터 크레인, 1905-1909. 캔버스에 유화. Hessisches Landesmuseum Darmstadt, Germany. Wikimedia Commons. Source: Daderot
시간은 다양한 목소리와 이미지, 소리로 이야기한다. 스톤헨지를 건축한 신석기인들은 하지와 동지가 성스러운 시간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지는 오후 3시 50분경에 한겨울의 태양이 남서쪽으로 지면, 그 빛이 스톤헨지의 중심을 지나 돌제단에 떨어지던 때를 가리킨다. 수천 년이 지나, 중세의 농부에게 시간은 계절의 변화와 성인들의 축일을 의미했다. 이것은 수도원의 종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져서, 수도사에게 조과에서 만과라는, 일상 속의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우리는 약 1억 년에 단 1초의 오차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원자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성스러운 시간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간은 더 이상 주기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빠르게 흐르는 날들에 쫓기듯 살며, 여러 순간과 사건들은 끊임없이 지나가고 흘러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땅의 계절이나 심지어 우리 인생의 계절—셰익스피어가 '인생의 일곱 시기'라고 묘사한,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사는 사람이 겪는 유아 시기부터 노년기1—과 거의 무관하게 산다. 고대인들에게 행성은 '크로노크라토르(chronocrators),' 또는 '시간의 표지markers of time'라고 불렸다. 서로 다른 삶의 주기는 서로 다른 행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비너스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나이를 지배하는데, 이는 15세에서 22세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리고 70세 이상의 인생 마지막 시기는 토성이 차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간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펼쳐지지 않으며, 땅과 우주, 또는 우리 삶의 주기와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만들었지만 마치 감독관처럼 우리를 압박하는 트레드밀이 되어 점점 빠르게 돌아간다.
우리는 시간과 이런 식의 관계에 계속 붙들려 있어야 할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자연 세계 및 더 큰 우주와 다시 연결되는 감각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시간이 성스럽다는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현대인의 표층 의식 아래에는, 급하게 흘러가는 날들과 점점 짧아지는 시간의 조각들로 가득한 세계가 있다. 이곳은 신화의 영역으로 알려졌던 집단 무의식의 세계이다. 여기서 시간은 고대의 리듬에 따라 더 느리게 흐른다. 이곳은 태초의 시간의 신 크로노스Kronos의 고향이다. 그의 리듬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움직임과 같고, 우주의 원초적인 리듬은 은하의 탄생과 죽음을 포함한다. 이 신의 현존 안에 모든 피조물이 있으며, 각각의 피조물은 저마다의 시간을 가지면서도 살아있는 전체의 일부분이다—하루살이에서부터 생멸하는 별까지. 이곳에서 해바라기는 매일 태양을 따라 흔들리고, 우리의 조상들은 시간이 분절되는 지점들을 기념하며 예배했다.
* * *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라는 고대의 신을 가두어버렸다. 우리 발 밑에 있는 땅과의 우리 자신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처럼. 합리적 의식은 이러한 리듬과 그것의 성스러운 의미를 우리의 일상에서 몰아냈다. “아버지 시간Father Time”은 더 이상 시간의 주기와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는 지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씨앗의 생애 주기와 계절이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는지, 봄에는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가을에는 잎이 떨어지는 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일상적 활동이 하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거대한 통합의 일부라는 것 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의 현인 노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오늘날 우리의 망원경은 별들을 더 선명하게 보지만, 그 별들은 더 이상 우리의 일상에 가깝지 않으며, 그 정렬은 더 이상 길한 사건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다. 시간 자체도 고립되고, 소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간은 단순히 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세계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인생이라는 책에 기록된 것처럼. 지층 속의 화석들처럼, 지구의 기억은 시간의 기록 보관소, 곧 신지학자Theosophists들이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잊었다. 우리는 지금 이성적 세계의 해변가에 갇혀, 시계와 시간의 흐름만 있을 뿐,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은 단순히 노인만이 아니라, 정원의 이미지에 빗댈 수 있다. 그곳에서 꽃들은 제 자리를 가지고 자신만의 의미를 띈다. 애정어린 돌봄을 받으며. 이것이 시간의 비밀이다: 의미 있는 꽃 피움—알맞은 때, 알맞은 자리에서의 피어나는 것. 전도서의 말처럼, “모든 것에 계절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목적들에는 때가 있다.” 이 정원에서 각각의 순간은 저마다의 목적과 무한한 형태의 일부분을 가지고 있다. 매 순간마다 꽃이 피고, 수많은 기회가 생겨나며,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에 발생한다. 하지만 이 형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노래가 들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며, 이 내면의 정원을 돌봐야 합니다. 시간이 사랑이라는 마법이나 주의 깊은 태도를 잃어버리면, 의미는 사라지고, 시간은 단지 시계의 똑딱거림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을 사물, 심지어 기계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존재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계를 바라보지만” 시간의 생동감을 깨닫는 일은 드물다. 이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시간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시간의 흐름은 단순히 반복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면 세계의 신비는 예전에는 우리의 일상에 속했으며, 의례rituals와 입문의식initiation을 통해 표현되었다. 의례는 우리 인생의 계절을 나타내고, 영혼과 몸을 연결하며, 몸과 마음 사이의 전환을 성스럽게 만들었다. 옥수수를 심고, 의례나 기도를 바치며 수확할 때, 우리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엮어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걸었던 땅으로, 오늘날 세계 각지의 토착민들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지혜와 앎이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순간들을 그 주변의 형태들과 연결할 수 있는 실타래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자연 속에 살때, 창밖을 내다보면 만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가 쉽다. 나의 하루는 물의 상승과 하강에 의해 시작과 끝이 정해진다. 해안가에 도래하는 새들은 무슨 달인지를 알게 하고, 거위들이 “V”자 모양으로 높은 하늘을 날 때는 계절이 구분된다. 나 또한 시간의 압박이 덜해지고, 매일의 요구가 줄어드는 나이에 다다랐다. 나는 느린 리듬과 함께 앉아 여름마다 젊은 사슴들이 풀을 먹는 모습을 기다린다. 그들은 경계하는 어미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다.
예전에 누군가 내게 준 머그잔에는 “신은 특정한 일들을 수행하도록 이 세상에 나를 보내셨다. 바로 지금,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으므로,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성취할 일들의 목록에서 멀어져, 더 깊은 침묵 속에서 다른 차원의 시간과 대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간과 시간아닌 것은 서로 가까워지고, 종종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 두 시간의 측면이 같은 태피스트리의 일부임을 점점 더 많이 느끼고, 형상과 공허가 서로를 비추듯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시간의 급박한 요구는 종종 “현재라는 순간만 존재한다”는 영적 가르침으로 답변된다. 이 단순한 순간의 인식에 진리가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매 순간은 그 자체로 살아 있습니다. 매일 아침 해가 처음 떠오를 때, 시간이 오기 전, 시계와 달력이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그 황금 같은 순간들 말이다. 이것은 또한 신화 속 에덴의 정원으로, 타락 이전의 순수한 세계에 대한 기억이며, 우리가 신과 함께 걷고 모든 것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순간들 속에는 시간의 모든 리듬들. 이 고요한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무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나선의 일부분으로, 나선형은 선사시대 예술에 등장하는 초기의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은하들은 해바라기처럼, 물가의 꽃처럼 나선형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은하수의 작은 나선형 팔인 오리온 팔 Orion arm에 살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전개는 이러한 원형적 패턴을 따르며, 각 순간은 수세기와 공간을 초월해 연결된다. 각 순간은 시간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T.S. 엘리엇이 말했듯이, “역사는 시간에서 벗어난 순간들이 모여 이루는 무늬이다.”
빈곤한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상자에 가두고, 그 상자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우리는 일차원적인 시간만을 경험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아 있으며, 순간 순간의 인식에서부터 자연과 우주의 리듬에 이르기까지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여러 가지 멜로디에 맞춰 춤추며,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우리의 이야기와 기억 속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 그리고 호흡을 관찰할 때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며, 산소가 우리의 몸에 들어오고 다시 흘러 나간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비시간성과 시간의 신비로운 교차점에 더 가까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 처음 알았던 정원, 놀이가 기쁨이었던 때, 우리 인생 이야기의 “태초에”이다. 다만 이제 그 교차점은 느려지는 몸, 허리 통증, 차오르는 숨 등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손짓한다. 우리의 하루 속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 더 많이 생겨나고, 그곳에는 공허함이 있으며, 간단한 것들이 큰 계획보다 더 중요해진다.
우리는 점차 이 물가에 다가가며, 우리의 의식이 다른 지평선에 닿도록 허용한다. 종종 이 해안에는 기억들이 쌓이는데, 때로는 폭풍에서 쓸려온 잔해처럼 보인다. 그러면 시간은 다르게 이야기하며, 어딘가에서 속삭인다. 여정은 항상 계속된다. 그러나 이정표는 낯설어 보이고, 특히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알려진 것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의 문화는 영원한 젊음을 기념하려 하며, 심지어 AI에 의해 약속된 불사의 환상을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시간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잃어버릴 것은 없음을 알게 된다. 한 일본의 절명시Japanese Death Poem에서 바이류Bairyu가 말했듯이:
시간의 리듬과 계절—첫 서리나 봄에 꽃봉오리가 터지는 모습은 우리가 땅에 속해 있음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들은 또한 영혼에게 말하여, 무한한 펼침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알게 한다. 한겨울의 태양이 거대한 석상 사이로 지는 모습을 신석기 농부들이 바라볼 때, 그들은 땅과 우주,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고대의 연결 고리를 이해하는 언어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시계 없이 살았던 중세 농부의 의식조차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를 감각하고 그 표면 아래를 사는 존재의 방식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삶의 방식은 별들에게까지 닿는다. 이처럼 표징과 성스러운 의미로 가득한 더 넓은 세계를 우리는 필요로 한다. 우리 자신을 먹이기 위해, 우리가 자신만의 길을 찾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그러면 시간은 다시 성스러워질 수 있다. 시간은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모든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단지 배우일 뿐이다; 거기에는 출구와 입구가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시간 안에서 여러 역할을 하고, 그의 행동은 일곱 가지 나이로 나뉜다…” 《맘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발췌.
《도덕경》(Tao Te Ching) 25장, 번역: 지아 펑(Gia Feng)과 제인 잉글리시(Jane English).
*스스로 그러함; what is natural - 역자 주.
이 글은 Parabola 2023년 여름호, The Cosmos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parabola.org/2023/05/01/sacred-time/
저자: Llewellyn Vaughan-Lee
Llewellyn Vaughan-Lee 는 Naqshbandiyya-Mujaddidiyya Sufi Order의 수피 지도자이다. 그는 Golden Sufi Center의 설립자이고 여러 책을 저술했다. 가장 최근의 저술로는 지구를 우리의 기도에 포함시키기: 영적 수행의 세계적 차원 Including the Earth in Our Prayers: A Global Dimension to Spiritual Practice이 있다.